2008년 4월호

“야,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 입력2008-04-03 2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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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야,너 왜 그 안내문 버리는 거야?”

    갑작스러운 내 질책에 술에 취한 동창 녀석은 찔끔해서 군색한 변명을 늘어놨다.

    “다, 다 알았다고….”

    “알긴 뭘 알아? 통장번호랑 거기에 다 있는데.”

    지난해 말 송년 반창회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교에 장학금을 모아 전달하자는 취지를 담은 안내문을 한 녀석이 구겨버리는 것을 보고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내 수고가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가까워온다. 나는 3학년 때 반창회를 이끌고 있다. ‘이끈다’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주소록과 회비 통장을 관리할 뿐이다. 물론 송년회 등 만날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는 것도 내 일이다.

    대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폐쇄적이어서 이런 모임에 소극적이다. 나오라고 해도 잘 안 나갈뿐더러 연락조차 닿지 않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성격이 그렇지 못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연락해서 작당하는 일이 좋으니 어쩔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어야 어느 모임이든 운영되는 법이라고들 말하긴 한다. 반창회는 현재 25명 정도가 연락이 되어 서로 소식을 묻고 산다. 자녀가 이미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인데, 고3 반창회의 맥을 아직도 잇고 있으니 참 특이하고 어찌 보면 징글맞기도 하다.

    반창회가 처음부터 이렇게 활성화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뛰어들면서 각자 소그룹으로 모이거나 만나고 있었을 뿐이다.

    신혼 초 살림집을 얻기 위해 홍은동 부근 부동산소개소 앞을 아내와 함께 얼쩡거리고 있을 때였다. 앞을 지나쳐간 승용차 한 대가 저만치에서 갑자기 후진을 했다. 그러더니 차에서 내린 사내가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바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이미 결혼을 해 그 동네에서 살림을 차리고 있던 녀석의 집에 가 내외간 인사를 나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녀석이 같은 반 아이 서넛과 가까이 지낸다고 했다. 나도 그런 친구 서넛이 있어 자연스럽게 두 모임이 합쳐졌다. 물방울이 모여 몸집을 불리듯 우리의 반창회 모임은 커져갔다.

    모임이 커지는 것과 활성화는 분명 다른 문제다. 만남이 즐겁고, 자꾸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모임이 활성화된다. 다행히 우리 모임을 주도하는 나는 이미 대학과 사회생활에서 이런 모임 이끄는 비법을 터득했다. 우선 나처럼 사람 좋아하고 인맥관리를 즐겨 하는 사람이 연락책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즐거운 마음으로 전화기 버튼을 눌러 모임을 주선할 수 있다. 바쁜 사람에게 맡기면 십중팔구 그 조직은 와해된다. 연락이 없다 보면 결속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임을 너무 자주 가지면 안 된다. 어떤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하고 모인다고 한다. 물론 동호회 성격의 모임이라면 자주 모일수록 좋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공감대도 없는 그야말로 반창회일 뿐이다. 까까머리 시절 같은 반에서 옹기종기 1년을 보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결속 인자가 없다. 그러니 너무 자주 모이도록 강제하면 그리움의 농도가 옅어지고 쉬 식상하게 마련이다.

    셋째는 회비 문제다. 어떤 모임은 정기적으로 돈을 모아 부부동반 여행을 간다고 한다. 이미 회원이 폐쇄된 ‘멤버스 온리’ 모임이다. 열린 반창회에서는 자칫하면 그런 회비가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생전 안 오던 동창생이 여행 간다니까 회비 몇 번 내고 따라나서도 곤란한 일이다. 꾸준히 회비 낸 사람과 차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회비를 성실히 낸 사람이 여행에 못 가도 곤란하다. 회비를 돌려줄 수도 없고 안 돌려줄 수도 없는 일이다. 본의 아니게 돈이 모든 문제의 화근이라는 점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회비를 걷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도 섭섭한 몇몇 친구가 통장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긴 했다. 간간이 생각나면 보내는 친구도 있고, 이문동에서 치과를 하는 친구는 몇 년간 매달 1만 원씩 빠뜨리지 않고 넣는 바람에 우리들 사이에서 “역시 공부 잘하는 녀석은 다르다”는 칭찬을 들었다.

    넷째는 모임을 가졌을 때의 식비다. 졸업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동창 가운데는 내로라하는 기업의 임원이 된 녀석도 있고, 벤처기업을 차리거나 장사를 해서 성공한 친구도 있다. 밥을 먹으면 당연히 한 번쯤 내도 될 형편인 친구가 여럿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과용하는 것을 극구 막았다. 그 역시 모임을 와해하는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인이 전체의 밥값을 내는 것은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한번 그런 식으로 얻어먹고 나면 다음번에 누군가가 또 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다 보면 가장 편해야 할 반창회가 오히려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만다.

    고심 끝에 내가 만든 방식은 바로 더치페이. 그날 자신들이 먹은 만큼 돈을 나눠 내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방식이다. 우리 모임의 구성원 가운데에는 형편이 어렵거나 사업을 하다 망한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라도 회비는 각자 먹은 걸 내게 하는 것이 좋은 방식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음식값 낼 돈만 있으면 부담 없이 모임에 나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연락이 끊기는 친구도 생긴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가버린 뒤 수년간 접촉을 끊으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런 친구를 ‘돌아온 탕자’라고 부른다. 탕자들을 위해 우리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기수가 10기이고 13반 모임이라서 매년 10월13일 저녁 7시에 교문 앞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요일불문, 일기불문, 연락불문이 원칙이다. 한마디로,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날은 교문 앞에 가면 동기생을 만날 수 있게 해놓았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친구들이 그리우면 그날 그 시간에 교문 앞에서 보고픈 얼굴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세심히 정성껏 키워온 반창회에서 지난해에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저 만나 얼굴이나 보고 웃고 떠들 게 아니라 뭔가 좋은 일 좀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모교의 교장선생님께 문의한 결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이 1만원씩만 매달 모아 200만원의 장학금을 만들어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다. 그 금액이 요즘 고등학생 한 명의 1년치 등록금이란다.

    그 정도라면 20여 명이 모이는 우리 반창회가 부담 없이 만들 수 있겠다 싶어 모금이 시작됐다. 통장번호를 알려주고, 기한을 정해 형편껏 돈을 보내라고 모두에게 통지해놓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을 수가 없는가보다. 지난 송년회 때 이런 취지를 알려주며 통장번호 적은 종이를 배포했는데 그 가운데 한 녀석이 내 눈 앞에서 그 종이를 구겨버린 거였다. 친구들의 만류로 상황을 잘 넘겼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이런 꼴을 당한다는 회의가 들었다.

    “야,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고정욱

    196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문학)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 ‘선험’으로 등단

    평화방송 ‘함께 가는 길’ 진행, KBS 라디오 ‘고정욱의 책 읽어주는 남자’ 진행, 성균관대 국문과 강사

    現 소설가, 동화작가

    저서 : 소설 ‘내 마음 속의 인민군 장교’ ‘그대 고운 두 발’, 창작동화 ‘은비네 시골일기’ ‘괜찮아’ 등


    아무튼 그리하여 장학금을 모았는데 조용히 소리 없이 전달하자는 여론에 따라 모교 통장으로 입금하고 말았다. 물론 교장선생님께서 친히 모금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치하하시는 통에 보람도 느꼈다.

    얼마 전 자연산만 취급한다는 횟집으로 한 동창생이 나를 초대했다. 안내문을 구긴 녀석에게 아직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나에게 녀석은 이런 말을 했다.

    “야야, 그 녀석 너무 미워하지 마라. 우리가 늙으면 그런 녀석도 불러다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그렇다. 그 말이 내게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친구는 그저 늙어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때 최소한 함께 놀 수 있는 존재면 되지 않는가. 뭘 더 바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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