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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

“1호 동지를 사수하라”

김정일 서울답방 2박3일 총력 경호작전

  • 이정훈 hoon@donga.com

“1호 동지를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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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16일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주도한 군사혁명은 경찰 경호를 마감시켰다. 전권을 장악한 박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의장에 취임하자, 박종규(朴鐘圭) 소령을 중심으로 한 ‘군 경호대’가 창설돼 박소장을 경호했다. 1961년 6월1일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군 경호대를 흡수했다. 그후 중앙정보부는 ‘경호대 설치령’을 제정해, 행정·사전기획·경호·정보·기동경호의 5개 과, 37명으로 편제된 경호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독립된 대통령 경호실은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탄생했다. 그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박의장이 5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사흘 전인 1963년 12월14일 ‘대통령경호실법’이 공포되었다. 이틀 후 ‘대통령경호실법시행령’이 공포되고 다음날(12월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대통령 경호실이 발족했다. 미국에서는 재무부 산하 비밀수사국(Secret Service·약칭 SS)이 대통령 경호를 맡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본따서, SS 앞에 ‘대통령’을 뜻하는 P(Presidential)을 붙여 대통령 경호실의 영어 약칭을 PSS로 정했다.

이후 경호실은 네 차례 엄청난 사건을 겪는데, 1968년의 1·21사태와 74년의 문세광 사건, 79년의 10·26사태, 83년의 아웅산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피비린내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사건을 겪기 전 경호실은 왕조시대의 호위무사들처럼 단순하게 대통령을 경호했으나, 이 사건을 겪으며 자유민주체제에 맞는 경호기관으로 거듭났다.

2선에서 걸린 北 특공대

세계 주요 국가들은 대개 3중으로 경호하는 ‘3선(線) 경호’를 펼친다. 청와대를 예로 들면, 대통령 관저 경호가 1선이고, 청와대 담장을 지키는 것이 2선, 청와대 담장 밖에서 침입자를 막는 것이 3선 경호다. 예외적인 경우가 북한이다. 김정일이 집권하면서 북한은 4선 경호를 채택했다.



1·21사태는 2선까지 뚫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청와대 공격 임무를 부여받은 북한군 정찰국(한국군에 빗대면 국군정보사쯤에 해당) 소속 특공대 31명이 일으켰다. 이들은 ‘청와대를 폭파하면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는 세뇌 교육을 받았다. 개성을 출발해 휴전선을 넘은 이들은 산속을 행군하다 어린 나무꾼 형제와 마주쳤다. 여기서 특공대는 이들을 ‘죽이자’ ‘죽이지 말자’로 논쟁하다,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이들을 죽이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체를 파묻어야 하는데, 한겨울이라 꽝꽝 언 땅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것이 큰 실수였다. 나무꾼 형제가 북한군 출현 사실을 신고한 것이다.

한국 군·경은 즉각 방어망을 구축했지만 북한 특공대는 서울 세검정까지 침투했다. 세검정부터는 도시가 시작되므로 그들은 도로를 따라 청와대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비상으로 출동한 한국군 특수부대로 위장한 것이다. 대오를 형성한 이들이 자하문까지 접근해왔을 때 검문중이던 종로 경찰서 수사2계 박태안(朴泰安)·정종수(鄭鍾壽) 형사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소속이 어디냐”고 물으며 따라 붙었다.

특공대는 이들을 따돌릴 생각으로 “육군 방첩대(국군정보사의 전신)다. 작전이 걸려 출동했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두 형사는 청와대 부근에서 작전한다는 것이 수상해 계속 같이 걸으며 말을 걸었다. 이때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崔圭植) (후에 총경으로 추증)이 지프를 타고 와 가로막았다. 특공대는 ‘육군 방첩대’라고 우겼지만, 최경감이 “내가 모르는 방첩대가 어디 있느냐”며 막는 바람에 옥신각신 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최총경에게 총을 난사하며 특공대원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일부는 청와대 쪽으로 뛰었는데 이들은 청와대 담장(2선)을 넘다가 총소리를 듣고 경비를 강화한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차례차례 제압되고, 2명만 살아 남았다. 그중 한 명은 한국군에게 생포(金新朝)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북한으로 돌아가 영웅이 되었다. 1·21사건은 침입자를 3선에서 발견해 2선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낸 사건이다. 이때의 경호실장은 박종규였는데, 청와대 침입을 막아냈기에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74년 8월15일 제 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암살자(文世光)와 경호원(朴鐘圭)이 총을 마주 겨누는, 한국 경호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문세광(당시 22세)은 민단(民團)계 집안에서 태어난 재일동포였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박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펼치는 것을 보고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이때 그가 만난 사람이 일본 조총련 오사카(大阪)부 이쿠노(生野)구 서(西)지부 정치부장인 김호룡(金浩龍)이었다. 김호룡은 문세광에게 “박정희를 죽여야 한국의 민주화가 달성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고, 문은 여기에 세뇌되었다.

문세광은 암살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자칼의 날’을 탐독하며 박정희 암살을 꿈꾸기 시작했다.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 들어가 권총을 훔친 그는 한국으로 날아와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한국 신문을 통해 광복절 행사에 박대통령이 참석한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VIP로 위장하기 위해 대형인 포드 20M 승용차를 빌려 타고 국립극장을 향했다. 3선 경호를 담당한 경찰은 ‘승차입장’이라는 비표가 없는데도 대형차에 위축돼, 이 차를 통과시켰다. 문세광은 정장을 입고 중절모까지 쓴 중후한 차림으로 차에서 내려 국립극장으로 들어갔다.

국립극장 안에는 비표를 단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극장 입구를 지키던 경찰관은 일본어를 쓰는 문을 초청받은 외국인 VIP로 판단하고, 비표가 없는데도 들어가게 했다. 이는 경호원이 외국어를 전혀 못할 때 외국인에게 얼마나 약한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우다.

극장 로비에서 문은 우연히 마주친 경호실 경호계장과 일본말로 주고 받는 수작을 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비표가 없는 것을 본 경찰관이 출입을 제지하자, 문은 경호계장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들어가라고 했다”며, 경찰관을 따돌리고 객석 안으로 들어갔다. 암살자는 경호계장을 아는 척하는 수작을 벌임으로써 간단히 방어망(2선)을 돌파한 것이다.

객석에 들어온 문은 백모 순경의 안내를 받아가며 뒷줄 좌석에 앉았다. 10여 분 후 박대통령이 연설하고 있을 때 문은 왼쪽 허리춤에 감춘 권총을 뽑으며 일어나다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자기 왼쪽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혔다. 그런데도 그는 총을 뽑아 들고 중앙 복도로 빠져나갔다. 이때 문세광이 앉았던 좌석줄에는 김모 순경이 있었다. 그는 문세광이 오발한 총성을 들었을 텐데, 또 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는 일반인이 중앙복도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중앙복도로 나온 문세광이 절뚝거리며 돌진하자, 권총을 본 사람들이 “우-우” 소리를 질렀다. 중앙복도 좌우 좌석에는 여러 명의 경찰관이 앉아 있었으나 그 누구도 문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때 몸을 움직인 이는 연단에 앉아 있던 박종규 실장이었다. 연단은 조명을 받아 훤하지만, 객석은 어두웠다. 박실장을 고개를 빼고 중앙복도로 나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는 듯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종이에 싼 권총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권총을 들고 나오려다 떨어뜨렸다. 박실장이 권총을 주워 올리는 순간 문세광이 제2탄을 발사했다. 첫발 오발로부터는 6초가 지난 시점이었는데, 이 총알은 20.9m 떨어진 곳에서 연설문을 읽던 박대통령의 연설대에 맞고 튕겨나갔다.

對敵자세만 취한 朴鐘圭

연설대는 철판이 들어 있어 권총알 정도는 튕겨낸다. 이어 문은 세 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는데, 불발이었다. 이것이 박대통령을 살렸다. 두 번째 총알이 연설대에 맞고 튕겨나가자 놀란 박대통령은 반사적으로 연설대 아래로 몸을 숙이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연설대에 가려 문세광은 넘어진 박대통령을 볼 수 없었다. 이때쯤 총을 주워든 박실장이 연단 앞으로 나와 문을 향해 권총을 겨누는 ‘대적(對敵)자세’를 취했다. 건맨과 건맨이 맞서는 아주 강렬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연단에 있던 요인들은 잽싸게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육여사만은 제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박실장이 총알처럼 튀어나가 대적자세를 취한데 대해, 많은 사람은 “역시 피스톨 박이다. 용감하다”고 칭찬했지만,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는 ‘빵점’이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기자는 ‘연설대뿐만 아니라 육여사 앞에 있던 탁자에도 쇠판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냈다. 박실장은 대적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이 탁자판을 객석을 향해 세우고, 그 뒤로 육여사를 ‘내리 누르는’ 육탄방어를 했어야 한다.

박대통령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세광은 육여사를 향해 네 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육여사의 목이 꺾였다(絶命). 1탄이 발사되고 7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경호 수칙 중 둘째는 ‘암살자를 육탄으로 덥쳐라’다. 그러나 중앙복도 좌우에 앉아 있던 경찰관은 문세광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다만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온 이대산씨가 총을 든 채 앞으로 걸어가는 문세광의 발을 걸었다. 문은 비틀하며 5탄을 발사했는데 이 총알은 연단 뒤에 있던 태극기를 맞혔다. 그리고 문은 연단과 객석 사이에 있던 오케스트라단의 칸막이를 잡고 몸을 세우더니, 칸막이에 권총을 쥔 오른 손을 올린 채 연단을 겨냥했다. 문의 총은 6발 리벌버인만큼 마지막 사격을 위한 조준이었다. 이 순간이 마침 현장에 있던 뉴스위크 동경 특파원의 카메라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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