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홍길씨가 닭찜을 만드는 내내 딸 지은(5)은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칼질하는 데 위험하다고 떼어놓는데도 막무가내다.
-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을 뿐 엄홍길은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엄홍길씨는 왼손잡이다. 장난감 식칼을 든 어린 딸도 왼손잡이다.
- 딸의 재롱에 젖어서 지내는 꿈 같은 휴식.
- 그러나 그는 딸을 도시에 남겨놓고 산으로 떠날 것이다. 산은 그의 인생이고 운명이다.
산악인 엄홍길이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르던 순간이다. 살아서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무엇을 찾았을까? 배가 고파서 무언가 먹었을 것이다. 그 엄혹한 상황에서 무슨 재료를 어떻게 조리해서 먹었을까? 닭찜이란다. 거창한 음식을 기대한 사람들은 “애걔 별것 아니잖아” 하고 실망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닭고기는 눈보라 치는 히말라야 설원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특급 단백질 공급원이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닭을 많이 키운다. 파키스탄은 회교국이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네팔은 힌두교도가 많아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닭고기를 먹는데, 집집마다, 동네마다 닭을 키운다. 그곳의 닭은 야생닭으로 덩치가 크고, 살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하다. 히말라야를 찾는 외국 등반대들은 등반 도중 어디서든 닭을 구할 수 있다. 히말라야 등반대들은 보통 한달 정도 머무는 동안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텐트 안에서 쉬면서 긴장과 피로를 푼다. 이때 한국 산악인들은 소주나 위스키 파티를 여는데, 등장하는 요리가 닭찜, 닭백숙이다. 물론 조리 방법이 평지와는 다르다. 히말라야는 고산지대라 기압이 낮아 모든 요리를 압력솥으로 한다. 밥도 라면도 닭찜도 압력솥으로 해야 익는다. 해발 5000m 정도에 설치하는 베이스캠프에서도 압력솥으로 조리한다. 또 이곳에서는 재료를 굽지 못한다. 등반중에는 음식을 굽거나 태워서는 안 된다. 자연의 신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면 동행하는 현지인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돌아가 버린다. 덕분에 마른 오징어도 굽지 못하고 볶아 먹어야 한다.
K2봉에서 돌아온 엄홍길씨는 현재 집에서 6개월째 쉬고 있다. 14좌 등반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온 지난 15년. 모처럼 얻은 휴식이다. 집에 머문 시간보다, 히말라야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아 서먹서먹하던 딸 지은(5)과 아들 현식(3)도 이제 집에 있는 아빠가 조금은 익숙해졌다.
휴식중인 엄홍길씨가 정월 대보름날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했다. 메뉴는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에서 해먹는 닭찜. 말하자면 히말라야식 닭찜이다. 산사나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요리를 할 줄 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곳이 산이다. 산악회에 들어가면 후배 시절에 요리만 2년 정도 계속 한다. 이들은 설악산에 가더라도 20∼30일씩 훈련을 하는데, 이때 요리는 모두 후배 차지다. 산악회의 규율은 군대 이상으로 엄하다. 밧줄 하나에 목숨을 거는 상황이 계속되기 때문에, 한 팀에서 선배 말은 절대 복종해야 하는 성역이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엄홍길의 히말라야식 닭찜은 보통 집에서 해먹는 닭찜과 조리방법이 조금 다르다. 특이한 점은 물을 많이 부어, 건더기를 건져먹고 그 국물에 수제비를 삶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히말라야 텐트 안에서 있는 재료 가지고, 음식을 해먹다 보니 이런 방법이 나온 것 같다. 이 닭찜에 들어가는 재료는 닭, 감자, 파, 양파, 당근, 고추, 생강, 마늘, 버섯 등이다. 이 재료는 모두 히말라야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닭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재료인 감자는 고산지대인 히말라야에서 주식으로 삼을 정도로 흔하다. 히말라야 지방의 감자는 한국의 밤고구마같이 맛있다고 한다. 특히 히말라야의 고추는 한국의 청양 고추 이상으로 맵다. 고산지대에 올라가면 밥맛이 떨어지는데 이때 한국 등반대의 입맛을 돋우는 것이 매운 히말라야 고추다. 한국에서는 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대원조차도 히말라야 등반시에는 그렇게 매운 음식을 찾는다. 한국 등반대들은 라면을 끓일 때도 매운 히말라야 고추를 넣는다고 한다.
외국 등반대는 빵과 비스킷 같은 간단한 음식을 먹고도 버티는데 한국 등반대는 이렇게 품이 많이 들고 맵고 자극적인 한국 음식을 먹어야 힘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 원정대에 견주어 식량 부피도 커지고 연료도 두 배나 많이 든다. 메뉴를 바꾸어보려고 해도 안된단다. 타고난 입맛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요리 방법은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먼저 닭을 가로세로 4∼5cm로 토막내고 큰 냄비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중불에 익히기 시작한다. 집에서 할 경우 슈퍼마켓에서 적당한 크기로 손질되어 있는 닭찜용 닭고기를 사면 된다. 닭을 처음 익힐 때 재료에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물을 따로 넣을 필요는 없다. 그 다음에 감자, 고추, 마늘, 생강, 버섯, 당근, 양파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는다. 감자는 닭토막 크기로 자르면 좋다. 닭이 적당하게 익으면 준비한 다른 재료와 물, 고춧가루를 넣고 푹 끓이면 된다. 이때 파는 끓고 난 뒤 넣으면 좋다.
사실 그가 하는 닭찜은 맛으로 따지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다. 있는 재료를 닥치는 대로 넣어 잡탕식으로 끓인다. 일종의 군대식이다. 엄혹한 자연환경에서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당히 끓으면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감자를 찔러보아 익었으면, 요리는 끝났다고 보면 된다. 다음은 수제비. 재료를 건진 뒤, 미리 만들어 둔 밀가루 반죽을 조금씩 뜯어 남은 국물에 넣어 익힌다. 이른바 닭찜 수제비다.
엄홍길씨가 닭찜을 만드는 내내 딸 지은은 잠시라도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닭찜을 따라 배우겠단다. 아빠가 칼질하는 데 위험하다고 떼어놓는데도 막무가내다. 딸의 고집을 엄홍길씨는 꺾지 못한다. 하회탈 같은 선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엄홍길씨는 왼손잡이다. 기를 쓰고 아빠 곁에서 닭날개를 잡고 있는 어린 딸도 왼손에 장난감 식칼을 들었다. 딸 지은의 재롱에 젖어서 지내는 꿈 같은 휴식. 하지만 그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엄홍길씨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산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부터 이어지는 휴식에 좀이 쑤신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아들을 도시에 남겨 놓고 엄홍길씨는 산으로 떠날 것이다. 아빠가 산에 가고 없을 때,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 극성스러운 딸은 무엇을 생각할까? 아마 아빠 머리 속에도 딸의 모습이 어른거릴 것이다. 그래도 그는 새봄이면 집을 떠날 것이다. 산은 그의 인생이고 운명인 것 같다. 산에서도 무언가를 먹어야 하니, 딸과 함께 만들던 닭찜이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