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자가 한국에 오기까지 겪어야 하는 고초는 어느 정도일까. 내 집을 갖고 따뜻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한국인들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 필자 유지성씨는 북한을 탈출했다가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혀 북한에 끌려갔다. 또 탈출을 감행한 그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세 번 탈출했다 실패하고 마침내 제3국을 통해 ‘脫北’하는 데 성공했다.
- 유씨는 그 과정에 사랑을 지켰고 친구와 우정도 지켰다. 그리고 이 글을 쓴 후, 그동안 중국을 유랑하다 한국으로 온 그의 어머니와 극적으로 해후하는 기쁨을 누렸다.
-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탈북자의 大로망을 펼쳐본다.
눈물의 두만강을 넘어
북으로 가는 평양-청진행 열차는 가쁜 숨을 내쉬며 양덕고개를 오르는 듯싶더니 다시 정전(停電)이 되며 허허벌판에 멈춰서버렸다. 벌써 이틀째 열차는 거듭되는 정전과 낮은 전압 사정으로 몇 정거장 가지 못하고 정지하곤 했다. 열차 안은 땀내, 담뱃내, 음식내, 썩은 내… 등 갖가지 냄새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주위에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얼마 없고 식량 구입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초췌한 사람들이 통로를 가득 메워 화장실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열차가 멈춰서자 열차 안은 순식간에 사람의 욕질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싸우는 소리로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얼마 후 열차가 다시 힘겨운 기적을 울리며 출발해서야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유리마저 깨져 비닐로 대충 가린 열차 창문 쪽에서는 한겨울의 찬 바람이 우-우 소리를 내며 언 몸을 자꾸만 파고들었다. 그러나 한겨울 추위보다 내 가슴을 더욱 얼어들게 하는 것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와 형제에 대한 근심과 닥쳐올 앞날에 대한 말 못할 두려움이었다. 이번 길은 여행도 출장도 아닌 5, 6년 전부터 계획한 탈북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넘는 김 부자의 독제체제에 속아 살면서도 그래도 남한보다는 북한이 우월하다는 북한당국의 선전을 아직도 믿고 계시는 어머니였다. 내가 탈북을 생각한 것은 93년경부터였으나 이때껏 탈북의 발길을 잡아온 것은 외아들인 나만 믿고 험한 인생살이를 견뎌 나가는 어머니였다.
누가 자신이 태어나고 친구들과의 우정이 깃들인, 더욱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가 있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으랴마는, 나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암담한 북한사회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오래 전부터 친구로 지내오던 수연에게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어렵고 험난한 길이라도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연, 우리 탈출하자…. 여기는 더는 살 곳이 못돼. 우리 조금이라도 더 젊을때 자유세상으로 가는 거야….”
느닷없이 나의 탈북결심을 들은 수연은 깜짝 놀라며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수연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믿었고 세상 어디라도 함께 갈 수 있는 여성이었다.
우리는 “늦어도 21세기 첫 설날 아침은 자유세상에서 맞이하자”고 굳게 약속했고 수많은 나날을 함께 지내며 탈북 계획을 무르익혔다. 10여 년 전부터 들어오던 ‘KBS 사회교육 방송’과 ‘희망의 메아리’ 방송 등을 통해 남한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탈북경로와 중국의 정세를 점검하며 나름대로 탈북 라인을 그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KBS 사회교육방송의 ‘통일열차’ 프로그램에서 탈북자를 전원 수용하는 것이 한국정부의 방침이라는 내용과 중국정부도 북한인의 대량 탈북에 대비해 수용소건물을 세우는 것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은 나와 수연의 탈북 결심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은 발전한 남한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실리 정책을 추구하여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때문에 중국은 ‘중국 내 탈북자를 강제송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우리는 중국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어 잠시 머물 수 있고 미국에 계시는 친척들의 경제적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잘만 되면 그분들 덕에 미국이나 남한으로 직접 인도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우리의 탈북계획은 성공확률이 높아 보였다. 관건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국경지역에서 북한 국경경비대의 단속에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갈탄 도시’ 청진
탈북 기회는 빨리도 찾아왔다. 97년 겨울, 우리는 평양에서는 마련하기 힘든 국경통행증을 지방 ‘ㅍ’시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긴 기적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보니 열차는 드디어 종착역인 청진에 들어서고 있었다. 정상적인 운행이라면 하루가 걸릴 길을 꼬박 나흘이 다 돼서야 당도한 것이다. 온 도시가 갈탄을 주 원료로 사용해 ‘갈탄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청진역사에 열차가 도착한 것은 자정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열차는 힘겹게 기적을 울리며 지칠 대로 지친, 남루한 차림의 사람을 갈탄에 찌든 컴컴한 역사로 토해내고 있었다. 역사 곳곳에는 ‘꽃제비’라 불리는 거지애들이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보였고 구석에는 굶주림에 지쳐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96년경부터는 북한의 어느 지역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역사 앞 도로는 집에서 만든 빵과 사탕 따위를 팔려는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 도로 한쪽에는 젊은 처녀들이 줄줄이 서 있었는데 옆사람의 말에 따르면 여행객에게 몸을 파는 여인들이라 한다.
청진에서 떠나는 국경행 열차는 아침에 있기에 나와 수연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하고 여관을 찾았다. 이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며 잘 곳을 찾으면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했다. 흔히 ‘대기여관’이라 부르는 민박집 아주머니였다. 따라가보니 잠자리는 자기 집 윗방을 비워놓고 남루한 이불 몇 채 가져다 놓은 것이 전부였다.
자리에 들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오만가지 상념과 두려움에 우리는 아침까지 뒤척이다 역사로 나갔다. 우리는 열차표(티켓) 파는 사람들에게 웃돈을 얹어주고서야 표를 구해 국경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열차에는 늘어나는 탈북자 때문인지 승무안전원(경찰)의 국경통행증 검열과 증명서 단속이 매우 심했다. 아슬아슬한 단속을 몇 번 피하고 국경도시 ‘ㅎ’시에 당도한 것은 저녁이었다.
‘ㅎ’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길림성과 맞닿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도시였다. 국경지역이라 행인단속이 심해 우리는 어슬렁거리지 않고 약속한 집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그 집에서 일주일을 숨어 지내던 중 중국을 드나들며 밀수하는 사람과 선이 닿았다.
북한에서 마지막 밤
나는 그들에게 “미국 친척들을 만나 돈을 방조(원조)받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탈북하려 한다는 본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개중엔 북한 보위부의 앞잡이질을 하는 자가 있고 설사 마음이 바로 박힌 사람일지라도 후환이 두려워 탈북자를 도와주려고 나서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지만 수연은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자기들이 아무리 길을 잘 안다지만 국경은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고 또 얼마 전에는 국경을 넘다 총에 맞은 사람도 있으며, 근래에는 국경경비가 몇 배로 증강돼 초소를 에돌아 산으로 강행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친척을 만나 돈을 받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면 수연은 이 집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주장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계속 수연과 함께 가겠다고 주장하다가는 탈북하려는 것으로 의심받을 것 같아 일단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 방법은 내가 그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면서 국경지형을 상세히 기억했다가 친척들을 만나고 다시 북한에 돌아와 수연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저녁. 나와 수연은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들 수가 없었다. 내일은 과연 나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수연과는 언제 재회할는지? 이런저런 생각에 헤매다가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아, 넌 날 믿지? 어떻게든 성공해서 다시 널 데리러 올 거야…. 언제까지든 어떤 일이 있든 꼭 나를 믿고 기다려 줘….”
수연도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약속대로 국경 안내자들이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동구 밖까지 따라나오는 수연의 배웅을 받으며 국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국경초소를 피해 안내자들이 정한 두만강가로 가느라 산과 산을 넘는 행군을 계속했다. 행군 도중 우리는 가져간 주먹밥으로 점심식사를 하려고 인적 없는 산속에 둘러앉았다. 그때 국경안내자들의 배낭에서는 뜻밖에도 낳은 지 얼마 안 된 강아지 두 마리가 나왔다. 이유를 물으니 식량이 떨어져 중국 농가에 가 식량과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아지 두 마리로 식량을 바꿔오려고 위험한 국경행을 감행한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또다시 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은 산골에 단련되어서인지 하루종일 산길을 걷고도 별로 힘들어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에서만 자란 나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나에게 그들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며 산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두만강이라고 일러주었다. 다시 힘을 내 산봉우리에 올라서니 드디어 어둠이 내려 깔리는 산 아래쪽으로 흰 눈이 쌓여 희끄무레한 두만강이 아찔히 내려다보였다.
우리 일행은 담배 한 개비씩 피워 물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두만강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어찌나 급한지 모두 미끄러지고 뒹굴며 겨우겨우 내려갈 수 있었다. 두만강가에 이르니 강폭이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다르게 퍽 넓어보였다.
우리는 두껍게 얼어붙은 두만강을 조심스레 건너기 시작했다. 두만강 중간쯤에 이르러 조금은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뒤쪽에서 “섯, 누구야? 쏜다”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총기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두만강가를 가르며 들려왔다. ‘국경경비대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자 나는 온몸의 힘이 발 밑으로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반사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중국 쪽 강둑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얼어붙은 두만강은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세 번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젖 먹던 힘을 다해 중국 쪽 강둑에 붙었다. 뒤에서는 일행 중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와 국경경비대원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있는 힘을 다해 첫째 강둑을 넘었으나 두려움과 긴장에 맥이 풀려 도무지 달릴 수가 없을 듯싶었다.
다시 마지막 힘을 다해 엎어지면 기고 기다가는 일어서 달리기를 반복하면서 강둑을 세 개쯤 넘어서고는 또다시 넘어졌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두만강을 뒤로 하고 갈대밭 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는 맥을 놓고 쓰러져버렸다. 체포된다 할지라도 더는 움직일 힘이 없었다.
조금 후 정신을 차려보니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달아난 쪽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주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긁어모아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체포될지라도 후회는 없게끔 최선은 다하고 싶었다. 한참을 주변의 눈을 긁어모으니 두 눈만 빼고 몸 전체를 덮을 수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일행 중 누군가 붙잡혔는지 욕설과 함께 구타하는 소리, 비명소리가 공포에 질린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는 손전등으로 주변을 훑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국경경비대가 수색을 하는 것이었다. 숨소리마저 죽이려 애썼으나 심장이 쾅쾅 울리는 소리가 그처럼 요란하게 들려본 적은 내 일생에 한번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숨소리를 죽여가며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두만강가로 멀어져 가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발견될까 두려워 두 시간 가량을 눈속에 누워 있었다. 긴장이 풀리고 땀이 식자 이번에는 뼛속까지 파고 드는 1월의 강추위가 매섭게 온몸을 얼려왔다.
나는 얼어든 몸을 일으켜 인가를 찾아 중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이 나간 사람마냥 비칠거리며 중국쪽 강가에 있는 자그마한 둔덕을 넘었다. 한참을 걸으니 멀리서 중국 농촌의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원래 국경 안내자들이 알고 지내는 국경지역 농가에 들러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연길시까지는 중국사람에게 안내받기로 했던 계획이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깨져버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붙잡혀간 북한 안내자들이 중국마을의 촌장을 알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언뜻 떠올리고는 촌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긴장으로 타드는 목을 눈으로 축이며 중국 마을로 접근했다. 한참을 걸어가니 멀리 자동차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의구심과 추위로 온몸을 떨며 첫 마을에 들어섰다.
북한은 전기 사정이 나빠 마을이 어두웠으나 눈에 들어오는 중국 마을은 형광등 불빛으로 환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심산으로 처음 당도한 중국 농촌집 문가에 귀를 기울이니 TV에서 흘러나오는 중국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북한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집을 택해 촌장집이 어딘지 물어볼 양으로 몇 집을 지나가는데, 길가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애들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접하는 사람이라 그들도 두려웠다. 나는 서툰 함경도 사투리로 “이 마을 촌장집이 어디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어디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요녕성 심양 사람인데 촌장과 친척간이라고 둘러댔다. 그들은 그제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풀며 다음 마을에 촌장집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시계를 보니 중국시간으로 밤 10시가 넘은지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갈증이 점점 심해졌다. 아무리 눈을 먹어도 배만 아파올 뿐이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어느 집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잠시 후 온 사람은 70세가 넘은 듯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물을 청하는 나에게 우선은 추울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북한에서는 사라져가는 우리 농촌의 소박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분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할머니의 물음에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이런 할머니는 절대 중국 공안에 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배가 고프고 추울 테니 식사부터 하라며 방으로 이끌었다.
방에는 할아버지와 40대로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아궁이에 나무를 더 넣어 구들을 데웠고 술과 음식을 권했다.
조금 있으니 얼어든 몸이 녹고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방바닥 아래로 꺼지는 듯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술만 몇 잔 들이켰을 뿐 밥은 한 술도 넘길 수 없었다.
그들은 내 사연을 다 듣더니 “김정일이 빨리 죽어야 해. 그래야 북조선 사람도 사람답게 살 수 있어…” 하며 이구동성으로 김정일을 욕하였다.
할머니는 젊은 부부를 가리키며 이들은 버스운전기사 부부인데 운좋게도 내일 이들의 차가 연길까지 직행하는 날이니 촌장집에 갈 필요도 없이 그곳에서 자고 내일 함께 연길로 가라고 했다.
궁지에 몰린 나에게 그들은 너무나 고마운 은인이었다.
농촌 치고는 꽤 큰 집이었고 풍성한 쌀독에서 나오는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이부자리를 깔아준 조용한 방에 혼자 누워 잠을 청하려니 북한에 두고온 어머니와 수연에 대한 근심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잠을 쫓았다.
안내자들이 붙잡혔으니 북한당국은 나의 탈북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을까? 그리고 수연은 어떻게 될까? 자꾸만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다. 나 때문에 부모 형제와 수연이 죽음보다 못한 정치범수용소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원래 계획은 북한당국이 우리를 행방불명으로 처리하도록 아무도 모르게 탈북하려 했는데 탄로났으니 가족과 수연을 위해 북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친척을 만나 돈을 가지고 내 발로 북한으로 돌아가 탈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나 때문에 가족과 수연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비극은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잠들었는가 싶은데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에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버스 운전기사 부부도 어느새 일어나 차를 정비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 내외는 입고 가라며 중국 솜옷도 한 벌 주셨고 담배까지 한 곽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낯선 땅에서 보낸 하룻밤이지만 나는 할머니 내외의 따뜻한 인정으로 지난밤에 겪은 추위를 잊고 연길로 떠날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면 까닭없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중국으로 넘어서는 순간부터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던 나는 버스에 오르는 군복차림의 사람만 봐도 심장이 떨렸다. 애써 태연한 척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중국신문을 읽는 시늉을 하며 군복입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창 밖으로 스쳐가는 이국 풍경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북한의 자연과는 달리 중국의 산은 갖가지 나무로 울창했다. 화룡(和龍)과 룡정(龍井)을 지나면서는 개혁과 개방 이후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룡정에서는 교회당이 높이 서 있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떠난 버스는 오후 2시경이 되어서야 연길(延吉)에 도착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지인 연길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30년 넘게 북한에 살다 온 나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TV에서나 보던 남한식 글씨체로 쓰인 커다란 광고판과 거리에 즐비한 노래방, 호텔, 음식점 등이 먹을 것을 걱정하던 시대는 옛말이 되어버린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었고 한겨울인데도 온갖 과일과 먹을거리가 즐비한 거리는 말 그대로 진풍경이었다.
미국 고모부와 통화
운전기사의 안내로 1시간 여를 헤맨 끝에 목적지인 Y대 교수 집에 당도했다. 나는 교수 부부에게 신분을 밝혔다. 그분들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묻더니 내가 분명히 자신들이 연계해준 미국 친척의 조카임을 확인하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준 고마운 운전기사 부부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교수 내외는 내가 중국에 온 사연을 듣더니 미국 친척들과 만날 수 있게 방조하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기 집에 머물라고 했다. 교수는 지금은 미국이 한밤중이므로 친척과는 저녁에 통화하자고 했다.
‘그 동안 친척들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는지?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한 북한의 조카를 어떻게 대해줄는지?’
나는 가지가지 걱정 속에 통화가 이루어질 저녁시간을 기다렸다. 교수 집에서 차려준 저녁식사를 마칠 무렵 미국의 친척과 전화가 연결되었으니 빨리 전화를 받으라는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넘겨 받았다. 전화는 미국의 큰고모부와 연결되었다. 나는 내가 중국에 오게 된 경위와 지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고모부께 말씀드렸다.
고모부는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조카 지성이 분명하구나. 정말 반갑다. 나도 북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잘 탈북해 왔다…. 그리고 잘 들어라. 너를 남한이나 미국으로 오게 할 수 있는 라인이 있다. 그러니 일단은 마음을 진정하고 그곳에 안전하게 있기를 바란다. 부모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미국서 친척이 갈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기 바란다…. 여기 미국에는 네 삼촌 고모가 5명이나 고 있는데 모두 성공해 잘산다.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나는 네가 여기 와서 살면 좋겠다”라고 말하셨다.
나는 반가움과 서러움이 북받쳐 울먹이며 고모부께 말씀드렸다.
“고모부, 제가 탈북한 것이 북한에 알려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온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갈지도 몰라요. 고모부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당장 남한이나 미국에 갈 수는 없어요.”
고모부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사내란 그릇이 커야 하는 거야. 어렵게 죽음을 넘어 왔는데 왜 다시 불행을 자초하려 하니…. 아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유씨 집안의 장손이야. 아무 소리 말고 여기서 누구든 중국에 갈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길 바란다”고 하셨다.
그렇게 전화는 저녁내 10여 차례나 걸려 왔다. 교수께도 미국에서 친척이 나갈 때까지 내 안전을 지켜줄 것을 거듭 부탁했다. 그날의 전화를 통해 나는 미국에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방조를 기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연길에 도착한 지 5일째 되던 날, 미국에서 큰삼촌이 연길에 오신다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교수는 집에서만 지내는 나에게 “내일은 친척분들도 만나게 되니 오늘밤은 연길시의 밤거리나 둘러보자”고 하셨다.
깊어가는 연길의 밤거리는 낮보다 더욱 활기 차 보였다.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상가의 불빛, 얼음을 쪼아 만든 조각, 거리에 넘쳐나는 인파로 활기가 넘쳤다. 적어도 북한 촌놈인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다음날 저녁, 큰삼촌이 공항에 마중나갔던 교수 내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들어서는 큰삼촌을 보니 흡사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뵙는 듯했다. 크지 않는 체격에 인자한 얼굴, 아무도 소개하지 않아도 분명히 내 혈육임을 절감하며 나는 삼촌 품에 안겼다.
삼촌도 감격하여 말했다.
“그래, 어디 보자. 내 조카 지성이 옳구나. … 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밤 깊도록 우리는 반세기 동안 쌓인 그리움과 사연을 나눴다. 크리스천인 삼촌은 나와 교수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보는 나는 삼촌의 진지한 기도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삼촌께 탈북경위와 지금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듣던 삼촌은, “네 맘은 잘 알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봐라. 네가 이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너부터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될 거야.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북한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겠니. 미국에 있는 가족은 너를 이번 기회에 남한이나 미국으로 오게 할 생각이다. 그래서 미국의 형제들과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에는 네 큰고모부 친구분이 있다. 그 집 자녀가 미국에 유학하면서 두 집 간에 두터운 교분을 쌓았거든. 그래 이번 일로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니 절강성에서 홍콩까지 밀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거야. 그분이 중국 법 기관에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어”라고 했다.
교수 내외도 옆에서 거들었다. 연길의 친척집을 몰래 다녀간 청진 사는 북한 대학생이 북한 경비대에 붙잡혀 3년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얘기며, 또 중국에서 잡힌 탈북자들이 북한 보위부에 잡혀가 총살당한 사실도 알고 있다며 내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미국에서 연길로 날아온 삼촌
득(得)은 상실을 동반한다지만 내 선택은 너무도 모진 것이었다. 자유가 눈앞에 놓여 있지만 가족과 수연을 불행에 빠지게 하는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탈북이 북한에 알려진 상황에는 가족과 수연의 운명을 외면하고 나만 홍콩으로 갈 수 없다고 삼촌께 간곡히 말씀드렸다.
삼촌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만 그 위험한 국경을 어렵게 넘어왔는데 이제 와서 뒷걸음질할 수는 없지 않으냐. 내가 돈도 가져오고 또 모자라면 차후에 송금할테니 너는 다시 북한에 들어갈 생각은 말고 이번 기회에 북한의 가족도 탈북시킬 길을 찾아보자. 미국의 친척들은 너를 적극 도울 거야. 여기서 우선 중국사람을 시켜 그곳 실정을 알아보고 기회가 닿으면 가족을 탈출시키도록 하자.”
삼촌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아직까지는 기회가 있는 듯도 싶었다. 머릿속에는 언뜻 중국으로 올 당시 국경안내자들이 “우리가 넘는 지역의 국경 경비대 중대장을 잘 아니까 혹시 잡히는 경우에도 뇌물만 찔러주면 빠져나올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들의 말처럼 잡혀도 경비대 취조만으로 마무리됐다면 아직까지 내 행적이 보위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을 가져도 돼지 않을까…. 어차피 나도 북한에 가면 감방에 갈 수밖에 없고 또 알고 있는 유일한 국경통로에는 매복이 있었으니.
다음날도 나와 삼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간 북한에서의 생활과 형제들의 이야기, 그리고 미국의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의 사회보장정책에 따라 실버타운에서 90세가 넘도록 장수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며 미국 사회에서 당당히 성공하신 고모 삼촌들 얘기. 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각계에서 활약하는 사촌형제들 이야기도 들었다. 사촌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타국으로 도망쳐 다녀야 하는 내 형편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젊고 지금이라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면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치고는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삼촌은 계속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인터넷의 발달로 컴퓨터를 통해 세계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현실과 양과 원숭이까지 복제해낸 과학의 신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셨다. 그러면서 삼촌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정보화의 물결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지금도 짬이 나면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다.
다음날, 삼촌은 나를 데리고 연길 시내 백화점에 가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을 사주셨다. 나는 연길 백화점에 넘쳐나는 남한제품을 보았고 북한에서는 자본주의 상징이라며 금기시하는 남한제 청바지도 사서 입었다.
쇼핑을 마친 우리는 북한의 가족과 수연의 탈북을 돕겠다고 나선 교수의 친척인 중국 청년과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청년은 북한의 가족을 탈출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삼촌과 나를 안심시켰다.
연길에서 3일간, 삼촌과의 만남은 그렇게 꿈같이 흘렀다. 삼촌은 바쁜 비즈니스 관계로 중국 체류를 마치고 떠나면서 나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미국의 친척은 너와 가족의 남한행을 어떻게든 돕겠으니 지나친 근심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여기 연길시는 국경지역이어서 위험하니 북한의 가족 소식을 받게 되면 우리가 지정해주는 중국 내륙지대로 옮기길 바란다.”
그러면서 삼촌은 미국의 친척과 실시간으로 연계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전화 번호와 팩스번호를 알려주었고 하나님을 믿으라며 가지고 다니던 미니 성경책도 주셨다. 나는 그 후 중국 청년에게 삼촌이 주고 가신 돈을 주며 북한의 가족과 수연을 데려올 구체적인 방도에 대해 의논했다. 그러나 때마침 보름 동안이나 계속되는 중국의 음력설 기간인데다 황장엽 망명사건이 터지면서 국경지역의 정세가 민감해져 북한의 가족을 탈출시키려는 시도는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더욱 조바심을 느꼈고 안정을 찾으려고 삼촌이 놓고간 성경책도 뒤적여 보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난해한 표현에 곧 흥미를 잃었다. 그보다는 세상의 일상이 더 흥미로웠다. 낮에는 남한의 대학과 자매결연을 한 Y 대학의 도서실에서 남한의 신문잡지 등을 읽으며 가슴을 죄어오는 조바심을 달랬다. 저녁에는 삼촌이 사준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청취했다.
시간은 흘러 여권을 마련한 중국 청년이 북한에 들어갔다. 나는 더욱 긴장하여 그에게서 좋은 소식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에 만약을 생각해 피난처를 한 곳 더 마련하기로 작정하고 북한에서 편지 연락하며 지내던 또 한 명의 조선족 집을 찾으려고 연길시를 헤매고 다녔다.
어렵게 그 집을 찾았으나 내가 찾는 사람은 1년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망한 마음으로 다시 교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를 응시하는 낯모를 사복차림의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급히 뒤로 돌아서는 순간, 출입문을 막으며 달려드는 두 청년에게 두 팔을 뒤로 꺾인 채 족쇄에 결박되고 말았다.
그들은 길림성 연길 변방부대 사람들이었다. 연길에 온 지 두 달 가량 됐을 무렵이었다.
중국 변방부대 사람들에게 끌려간 곳은 연길 변방부대 청사였다. 그들은 밤늦도록 심문했다. 3명의 변방부대 청년 중 한 명은 중국 조선족이었다. 나는 같은 민족으로서 갖고 있을 동정심에 호소했다.
“나는 당신과 같이 조선사람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 있다면 생지옥 같은 북한에서는 더는 살 수 없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뛰쳐나온 것뿐이다. 중국에서도 ‘문화 대혁명’시기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개혁 개방 정책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당신들도 알다시피 오늘의 북한은 문화 대혁명시기의 중국보다 몇백 배 참혹한, 철창 없는 감옥이다. 그보다도 당신은 나와 같은 민족이다. 죽을 사람 살려준다고 생각하고 나를 북한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
그는 자기는 책임자가 아니니 확답은 못하겠으나 북한에 송환되지 않도록 노력은 하겠다고 했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져보며 나는 연길 변방부대에서의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조선족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족쇄가 채워진 채 중국 한족 변방부대 요원들에게 끌려 어디론가 갔다. 그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기에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탈북자만 모아 강제송환 직전까지 감금하는 화룡 변방부대 감방이었다. 감방은 5개 정도가 있었고 각 방에 CCTV가 설치돼 있었다. 감방 네 벽면에는 탈북자들이 쓴 낙서가 원래 색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열되어 있었다. 낙서의 내용은 “개혁 개방만이 살 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다” “나는 조선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 만약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또다시 탈북하겠다” “중국사람의 말에 속지 말라. 그들은 끝내 우리를 모두 강제송환한다” 등등 여기를 거쳐 북한에 송환된 탈북자의 피의 절규였다.
조금 있으려니 화룡 변방부대 요원이 심문을 하려고 나를 끌어냈다. 나를 마주한 사람은 화룡 변방부대 책임자였는데 조선족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제발 북한에만은 보내지 말아달라고 청원했다. 그 역시 “북한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듣기 좋은 말만 했다.
나는 “중국 사람들의 말에 속지 말라”는 낙서를 본 후였으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말에 한가닥 기대를 가져보았다. 밤이 깊었다. 옆 감방에서는 “엄마”를 부르며 우는 북한 여성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잠들 수 없는 그 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북한에 보내지 않겠다는 중국사람의 말을 믿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가에 가 쇠창살도 흔들어보고 출입문도 건드려보았으나 어디에도 탈출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언뜻 이물질을 삼키고 복통을 호소하면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감방에 갇혀 있는 이상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무작정 입고 있던 가죽점퍼를 벗어 지퍼며 감방 안의 깨어져 나간 콘크리트 덩어리 등을 삼켰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복통을 호소하며 중국측 간수들의 관심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온 것은 병원으로 데려가는 호의가 아니라 자해할 수 있는 일체의 물건의 회수와 철저한 감시뿐이었다.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고 절망으로 미칠 것만 같던 화룡감방의 낮과 밤은 그렇게 흘렀다. 체포된 지 4일째 되던 날, 탈북 수감자 전원은 족쇄에 묶인 채 차에 실려 북한으로 강제송환되었다. 한치 앞날도 예견할 수 없는 ‘중범죄자’의 처지로 북한에 넘겨진다는 현실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송환된 날부터 탈북자는 보위부 요원으로부터 더는 인간이 아닌 짐승 취급을 당해야 했다. 송환절차를 거치는 동안에도 탈북자 모두를 무릎 꿇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게 했으며 조금만 움직여도 총으로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송환 절차를 마치고 우리가 끌려간 곳은 ㅎ시 안전부 감방이었다(‘ㅎ’시에는 보위부 감방이 따로 없어 안전부와 감방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감방에 들어서자마자 계호원(간수)들은 우리를 발가벗기더니 사정없이 구타했다. 피를 말리는 구타는 수감자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억수로 매를 맞았지만 아픈 것도 몰랐다. 그보다는 닥쳐올 앞날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ㅎ시 감방은 간수가 가운데서 한눈에 모든 감방을 감시할 수 있는 반원형이었다. 감방 수는 10개였는데 탈북자가 어찌나 많은지 5개 감방에는 전적으로 탈북자만 수감하고 있었다. 감방 하나가 3평 남짓한 크기였는데 그 좁은 공간에 20명 정도가 갇혀 있었다. 잠잘 때는 제대로 누울 수도 없어 사람 위에 사람이 겹쳐 자야 했다.
3월 초순이었지만 북쪽 지역의 밤 날씨는 너무도 차가웠다. 모포도 없었고 난방도 전혀 되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체온만으로 감방의 기나긴 밤을 견뎌내야만 했다. 간수는 수감자 중 한 명이라도 움직이면 모든 수감자를 무릎 꿇게 하고 몇 시간씩 체벌을 가했다. 또 끓는 물을 뿌리고 구타를 하는 등 악행을 자행하였다. 내가 수감되었던 감방은 정면으로 여자 수감자의 감방이 보였는데 그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야 이 개년들아. 굶어죽어도 장군님 품에서 죽으란 말이야”라고 욕을 해대며 뭇매를 가했다.
후에 들어보니 그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중국 친척집에 쌀을 얻으러 갔다가 붙잡혀 온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다음날부터 보위부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을 받으며, 내가 보낸 중국 사람이 보위부의 매복에 걸려 체포되었고 그가 내 위치를 불어버리는 바람에 중국 변방부대가 나를 체포할 수 있었음을 알았다. 또 수연은 붙잡힌 국경 안내자들이 불어버리는 바람에 보위부에서 예심을 마친 후 ㅍ시 보위부 감방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보위부의 집요한 심문
보위부의 심문 내용은 기본적으로 월경목적과 중국 내에서 남한사람과 접촉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몇 시간에 걸쳐 심문을 받으며 나는 살아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중국 변방부대에서는 내가 미국 친척의 도움을 받아 홍콩을 경유하여 남한으로 가려 했다는 자료를 넘겨주지 않았고, 북한 보위부와도 정보의 공유가 없었으며, 둘째는, 수연도 보위부의 간교한 심문을 용케 피해갔다는 것이다. 셋째는, 내가 보낸 중국청년도 더 이상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간 것은 미국 친척을 만나 돈을 방조받으려는 것이었지 탈북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강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중요한 것은 중국 청년이 언제까지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였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보위부의 집요한 심문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내게서 미국이나 한국으로 탈북하려 했다는 대답을 듣는 것이 의무이기라도 한지 내 말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유치한 질문까지 해대며 ‘중범죄자’로 몰아댔다. 그러나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끝까지 탈북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다시 북한에 돌아오려 했다고 주장하는 길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중국청년이 마지막까지 내 비밀을 지켜주고 그가 빨리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동안 탈북 준비를 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수연과 말맞추기를 확고히 해놓았고 또 수연도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기에 중국청년만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마음 편하게 보위부의 심문에 응할 수 있었다.
그 후 나의 바람대로 중국청년은 중국 변방부대의 항의에 따라 중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10일간의 ㅎ시 감방생활을 끝내고 평양 보위부 감방으로 이송되었다.
평양 보위부 감방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에는 예심중인 수감자가, 2층에는 예심을 마치고 재판을 기다리는 수감자들이 갇혀 있었다. 1층에는 보위부 자체 재판소도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예심을 마친 수감자들이 변호사나 참관인도 없이 보위부 재판관에 의해 형기가 결정돼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
1층 감방은 10여 개인데 각 방이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다. 감방은 3평 정도로 비좁았고 춥기는 ㅎ시 감방과 다를 바 없었다. 수감자의 ‘죄목’도 다양했다. 반체제 조직인 ‘독서회’ 가입자와 러시아에서 탈북했다가 붙잡혀온 벌목공, 그리고 중국 베이징까지 갔다가 ‘안기부’라 자칭하는 북한 체포조에 잡혀온 청년도 있었다. 또 여자 친구에게 외국으로 탈출하자고 말했다가 밀고되는 바람에 붙잡혀온 젊은이도 있었다. 대학교수도 2명이나 있었는데 죄목은 북한체제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감방 생활에도 봄은 찾아왔다. 철창 너머 조그마한 창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 등이 피어 감방 안에도 봄 냄새를 실어다주었다.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께 진심어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이시여. 불신자였던 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다시 자유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십시오. 손이 있어도 발이 있어도 이 무서운 보위부 감방을 벗어날 힘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부디 이 보위부 감방에서 벗어나 희망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악명 높은 보위부 감방의 수감자라는 최악의 사태는 불교도였던 나를 하나님과 기도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감방생활의 긴장이 조금 풀리자 이번에는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감방에서 주는 음식이래야 멀건 소금국에다 공기에 얹어주는 통강냉이가 전부였다. 그것만 몇 달간 먹다 보니 대부분의 수감자는 영양실조와 병에 시달렸다. 그러다 쓰러져 자리에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갔다.
보위부 간수의 구타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해졌다. 개중에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바늘과 젓가락 등을 삼키고 복통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치료도 허용되지 않았다. 밤에는 2층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절망에 찬 울음소리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석방, 그리고 수연과 재회
드디어 나는 다시는 못 나올 것만 같던 보위부감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보위부 예심원은 탈북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또 미국에서 성공한 친척을 통해 다량의 식량을 국내에 들여올 수 있다는 내 거짓말을 믿었던 것이다.
석방 후 나는 다시는 밟아볼 수 없을 것만 같던 푸른 들을 걸으며 하늘을 우러러 재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석방된 후 수연을 다시 만났고 고난과 시련의 고비를 이겨낸 수많은 사연을 서로 나누며 재회의 기쁨 속에 ㅍ시의 여름밤을 하얗게 새웠다.
그러나 위험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더 큰 위험이 앞에 놓여 있었다. 보위부의 사슬을 벗어나려고 꾸며댄 내 거짓말이 언제까지나 유용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우리는 하루빨리 재탈북 기회를 잡으려 했으나 당시에는 감옥생활 후유증으로 나와 수연 모두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고 아파 바깥출입이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가 다시 재탈북의 길에 나선 것은 98년 겨울이었다. 우리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통일된 그날 재회하리라 기약하며 또다시 국경으로 떠났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국경도시 ㅎ시에 당도했으나 우리는 안내자에게서 1차 탈북 때와 같이 한 사람만 넘겨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도 탈북에 실패하고 또다시 국경경비대에 체포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더욱이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수연은 다른 안내자를 통해 각각 국경을 넘기로 했다. 우리는 중국에서 만날 장소와 시각을 정하고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눈물로 약속하며 어두운 ㅎ시의 작은 집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중국 길림성의 작은 도시 요원에서였다. 우리는 철도역 옆의 작은 음식점에서 술잔을 마주하고 만남의 기쁨과 탈북 성공을 자축했다. 지나간 고통이나 어려움은 훗날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게 인간인가 싶다. 나와 수연은 두만강 얼음물에 빠지며 경비대의 단속을 피해 나온 일을 무용담인 양 서로 나누며 밤깊도록 한국에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당시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여서 1차 탈북 때 미국 친척들이 물색한 홍콩을 경유한 한국행은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 동안 미국의 작은삼촌이 중국을 다녀갔고 돈도 많이 보내주었기에 중국에서 지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중국 조선족 신분증을 취득한 뒤 친척방문 형태로 한국에 갈 수 있는 길도 빨리 열리는 듯싶었다. 요원시는 연길시에서도 많이 벗어난 곳이고 또 조선족도 많이 살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우리에게는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수연을 요원시 조선족 식당에서 숙식만 제공받는 조건으로 일하게 한 후 한편으로는 추진중인 한국행이 순조롭지 않을 때를 대비해 한국사람들을 만나 차선책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 노력 끝에 중국 요녕성 심양시에서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홍콩이 반환된 후 탈북자 대부분이 밀항하여 한국에 가고 있으며 베트남을 경유하여 한국에 간 케이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남아 있었다. 또다시 중국 국가안전위원회 사람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나는 체포되는 귀신이라도 붙었단 말인가…’ 너무나 원통했다. 후에 알고 보니 미국의 친척들과 잦은 전화 연락이 심양에 기지를 둔 중국 안전위원회에 도청되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또다시 족쇄를 차야만 했다.
체포된 후 그 동안의 부주의를 가슴치며 통탄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일 따름이었다. 북한으로 강제송환된 경험이 있는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 나는 심문에는 응하지 않고 “북한으로 보내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들은 “심문에 협조적이면 북한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연길에서 변방부대에 속은 경험이 있으니만큼 믿을 수가 없었다.
심문은 밤새워 진행되었다. 다음날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아볼 때까지는 구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애를 말리는 수감생활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매일 안전위원회 요원 두 명을 나에게 붙여 감시하였으나 나를 대하는 태도는 연길 변방부대와는 달리 호의적이었다.
그들 중에는 장춘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안전위원회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도 있었는데 하루는 나에게 다가와 손바닥에 ‘自由 OK’라고 쓰고는 안심하라는 듯 생긋 웃었다. 극도의 불안에 떨던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수감 한 달이 지날 무렵 하루는 안전위원회 요원 3명이 오더니 나를 밖으로 끌어내 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갔다. 나는 차창 밖을 스쳐가는 도로표지판을 보고 차가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다 나를 태운 차가 그처럼 우려하던 연길 쪽으로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나는 버스의 벽면에 머리를 박으며 결사적으로 자해를 시도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안전위원회 요원은 차를 세우더니 나를 달래며 이런 말을 하였다.
“떠나기 전에 말해주려 했지만 당신이 연길 쪽으로 가는 것을 알면 죽기로 반항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 국경 쪽으로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나이로서 약속하건대 절대 조선에 송환은 않겠다. 다만 상부의 지시가 있기 때문에 당신을 두만강까지 보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곳에서 사진만 찍고는 자유롭게 놓아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당신이 어디로 가든 우린 상관 않겠다.”
그의 말이 너무나 진지하게 들려 일단 믿기로 하였다. 나를 태우고 아침에 떠난 차는 저녁 어스름이 산야에 내릴 무렵 두만강가에 도착했다.
그들은 나를 내리게 하고는 중국세관사무소, 국경푯말, 두만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족쇄를 풀더니 정말로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며 어디에 가서도 자기들이 놓아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고 길림성을 벗어나 멀리 내륙으로 숨으라고 당부했다.
그들은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며 유일하게 압수되지 않은 100달러를 중국 돈으로 바꿔주는 호의도 베풀었다. 결국 나는 미국의 친척들이 보내준 돈도 모두 잃고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도 접어둔 채 두만강가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통나무를 싣고 시내로 가는 차를 세워서 얻어 타고 그날 밤 다시 연길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길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내가 안전위원회에 붙잡혔다가 놓여 나왔다는 것을 알고는 훗날 자기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빨리 떠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쳤지만 다음날 아침 수연이 있는 요원으로 가는 열차시간이 될 때까지 연길역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연길역에서 조선족신문을 뒤적이던 중 우연히 한 기사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것은 10여 년간 뱀만 연구한 조선족에 대한 기사였는데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뱀 연구를 위해 베트남과 태국 등지를 비밀리에 드나들며 연구했다는 대목이었다. 친척이 보내준 돈도 모두 잃고 중국땅에는 자기들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절실히 알게 된 상황에 내 선택은 밀항이나 혹은 베트남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가는 길뿐이었다.
나는 출발을 연기하고 연길의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기사 주인공인 뱀 연구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여주며 국경초소는 많으나 중국말만 자유자재로 한다면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가는 구체적인 루트는 사무실에 다른 사람들도 있어 물어볼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수연과 함께 베트남을 경유한 한국행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와 헤어져 그날밤으로 열차를 탔고 다음날 아침 수연이 있는 요원시 조선족 식당에 당도하였다. 내가 체포된 후 걱정과 불안으로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던 수연은 나를 붙잡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수연에게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 힘으로 한국에 가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베트남을 경유하여 한국에 가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언제나 그랬듯 수연은 나를 믿고 따라 나서겠다고 했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가려면 안내자도 없이 드넓은 중국땅 끝까지 우리 힘으로 가야 했으므로 어느 정도의 중국말은 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심양으로 갔고 그곳에서 한 달간 숨어 지내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여관에 투숙할 때 쓰는 말과 중국 공안(경찰)을 만났을 때 필요한 말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한 달 후 우리는 열차편으로 심양을 떠나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계획은 북경에 도착하면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베트남으로 가는 안전한 라인을 조언받을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해 북경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중국 고위관리가 조선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북경의 조선족들이 사는 지역에 중국 공안의 불시 단속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위험한 북경은 피하고 대신 상해 한국영사관에 들르기로 마음을 고쳐 먹고 북경에 도착한 다음날 밤 상해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일반열차 내부는 7월의 뙤약볕에 뜨겁게 달아올라 상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온몸이 땀으로 미역을 감은 듯 젖어버렸다. 다행히도 우리는 열차에서 조선족 여성을 알게 되었고 상해에 도착한 첫날은 길거리를 헤매지 않고 그녀의 하숙집에서 신세질 수 있었다.
냉랭한 상해의 한국영사관
중국의 개혁 개방과 더불어 조선족 동포사회에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가는 사람도 많지만 북경, 상해, 광주 등지의 대도시로 가는 사람도 엄청 많았다. 그 조선족 여성도 고향은 연변이지만 돈을 벌려고 상해에 온 지 3년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그녀의 방조를 받아 한국영사관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한국에 갈 수 있는 방도를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너무도 냉정했다.
“우리가 도움 줄 일은 없습니다. 베트남은 글쎄 가고 싶다면 가보시든지….”
온몸에서 맥이 쫙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전화를 걸지 않은 것만 못했음을 통감하는, 한편으로 공중전화를 사용했으니 중국 당국의 도청을 우려해 그렇게밖에 대답을 못할 수도 있겠다고 애써 이해했다.
한국영사관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라인을 전해들을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방향을 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가지고 있던 돈이 다 떨어져 상해에 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 미국 친척들로부터 송금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방도를 생각하던 내 머리에 탈북 전 KBS 방송에서 듣던 탈북자를 진심으로 도와준 한국인 목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상해에 있는 그 목사를 만나 그분의 은행계좌로 미국 친척의 돈을 받을 수 있도록 부탁해보기로 했다. 다음날 목사만은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교회가 열리는 장소로 찾아갔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는 나는 진실과 양심을 토로하는 목사의 열변과 교인들의 진지한 기도소리 모두가 신기하였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 그가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의외였다.
“여기도 형제와 같은 탈북자가 많이 왔어요. 내가 도움 줄 길은 없어요. 은행계좌를 빌려주니 뭐니 하면서 여러분을 상대하면 우리도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한국으로 추방될 수 있어요. 이렇게 교회에 찾아다니면 안 좋으니 찾아오지 마세요. 일단 왔으니 교회에서 식사나 하고 가세요.”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냉정한 세상, 허무한 세상이라던 한국 노래의 가사를 떠올리며 나는 무너지는 마음을 안고 교회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2000만에 달한다는 상해는 넓기도 했다. 우리는 그 넓은 상해에서 조선족 식당 등을 찾아가 방조를 요청하려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상해의 여름은 이글이글 끓는 듯했다. 지친 몸을 끌다시피 하며 이곳 저곳을 다니던 우리는 끝내 조선족 식당과 한국식당이 밀집돼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몇 군데 식당에서 외면당한 우리가 어느 한국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그곳에서도 안 되겠다 싶어 식당을 나와 걸어가는데 그 식당에서 일하던 젊은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와 북한에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의 유다른 관심이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말하는 표정을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자 진수(가명)였다.
진수는 우리가 베트남을 경유하여 한국에 가려 한다는 말을 듣더니 자기도 베트남을 통해 한국에 가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나 혼자서 떠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어왔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고향에서 천만리나 떨어진 상해의 한쪽 끝에서 만난 고향사람이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날 밤 진수가 숙박하는 조그마한 방에서 술잔을 마주하고 서로 사연을 나누며 한국 갈 꿈에 젖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진수는 북한의 해군저격부대(해군특전단)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친구였는데 북한을 비난하는 말을 한 것이 보위부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탈북한 지 2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 동안 북경에도 있었고 그곳에서 같은 탈북자를 만나 한국에 갈 목적으로 홍콩 국경을 넘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고, 나처럼 두만강까지 끌려가 사진을 찍은 후 간신히 풀려나온 후 상해에 온 지 벌써 1년이 되었다고 했다. 상해에 와서는 다행히 고마운 한국인 사장을 만나 안전하게 지내고 있지만 고향에 두고 온 부모 처자에 대한 근심과 막막한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술에 푹 젖어 있었다.
탈북자 진수와의 만남
우리는 그날 밤 돈만 마련되면 즉시 한국으로 떠나기로 단단히 약속했다. 다음날 나와 수연은 진수가 알고 지내던 조선족 식당의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물론 돈을 받는 것은 아니고 숙식만 보장해준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상해의 골목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식당에 필요한 음식거리를 사들이고 설거지, 청소 등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국 친척들과 연락하여 진수가 일하는 식당의 조선족 아주머니 은행계좌로 돈이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미국 친척들에게서 돈을 받게 되었다. 돈이 마련되었으니 또다시 출발이다. 상해를 떠나기 하루 전날, 우리 일행은 진수가 일하던 한국식당 사장이 차려주는 송별음식을 마주하고 오래간만에 마음을 풀어놓고 마음껏 노래도 부르고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베트남을 넘는 최종 루트는 우선 중국의 남쪽 끝에 위치한 광서장족자치구의 남녕(南寧)까지 가서 그곳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한국회사를 찾아가 그분들의 조언을 받아 결정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식당에 자주 오던 한국분이 알려준 남녕의 한국회사명이 고작이었다.
진수는 중국에 오래 있었으나 조선족만 상대했기에 중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또 내가 심양에서 한 달간 공부한 중국어도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북한에 있을 당시 일본어를 조금 공부한 적이 있어 기차역명이나 간판 등에 쓰인 한자의 뜻을 대강은 알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북한과 멀어져서인지 우리가 말을 못 하면 중국 내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지 누구도 우리를 불법 입국자로 생각지 않았다. 호기심이 적은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성격도 우리가 숨어 가는 데 유리할 듯싶었다.
이틀간의 지루한 열차여행을 마무리하며 기차가 남녕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무렵이었다. 국경과 가까운 곳이라 역사나 거리에는 순찰하는 중국 공안 요원이 자주 눈에 띄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여관 투숙을 포기하고 가로등 하나 없는 수풀 속 공원 벤치에 앉아 모기에 뜯기며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 새벽이 되자 아침운동 나온 남녕시 사람들로 주변이 소란해졌다. 모기가 사라질 새벽이 돼서야 잠깐 새우잠이 들었던 우리는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려고 재빨리 일어나 거리로 나섰다.
우선 여관을 잡아 수연은 조금 쉬게 하고, 나와 진수는 거리에서 남녕시 정밀지도를 사서 한국회사를 찾기로 하였다. 2개의 지도를 사서 면밀히 살폈으나 한국회사명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 포기하려던 중 세 번째로 산 지도에서 우리는 중한(中韓) 합자 전기통신 유한공사라는 회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쌓인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짐을 느끼며 여관에 있던 수연과 함께 한국회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회사 수위는 한국인 사장이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나오지 않고 다음주 월요일에 나온다고 했다. 이틀밤을 남녕에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여관을 찾아가 쉬기로 하였다. 중국 공안의 불시단속을 우려해 시 교외에 위치한 한적한 여관을 택했다. 중국 여관에 투숙하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데 우리는 신분증을 분실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 아침 일찍 한국회사를 찾아갔다. 다행히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사장은 30대 중반의 젊은 분이었는데, “탈북자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정말로 만나보기는 처음”이라며 반갑게 대해주었다. 그는 우리 이야기를 다 듣더니 여기 남녕의 회사에 파견되어 온 지 1년이 됐지만 자기도 남녕을 떠나 국경 인접지구에는 가본 적이 없다며 회사에서 일하는 유일한 조선족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그 조선족에게서도 국경지역 정세를 알지 못한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낙심천만해서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남녕에 또 한 명의 조선족이 김치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점심께 남녕의 한 식당에서, 김치장사를 하는 조선족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중국돈 500원을 주면서 국경도시까지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중국 길림성 출신이었는데 장사를 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남녕까지 와서 숨어 살고 있었으나 심성은 착해 보였다. 그의 안내로 그날 오후에 베트남과 인접한 국경도시 해구(海口)로 떠나게 되었다. 가는 길에 두 번의 검문이 있었지만 조선족의 도움으로 그날 저녁 안전하게 해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구는 중국 남해의 소도시였지만 그곳까지도 개혁 개방의 물결은 밀려와 중심가는 꽤 번화했다. 도착한 날 밤을 여관에서 보낸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국경지역에 나가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지역을 탐색했다. 국경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폭도 넓지 않고 외관상 경비도 별로 심하지 않아 보였다.
안내자인 조선족은 베트남 쪽 몽카이시는 관광지구라 불법 관광여권거래가 성행하는데 돈만 주면 1일 관광여권을 구입할 수 있으니 여권을 구입해 안전하게 국경을 넘으라고 권했다. 다음날 우리는 여권을 파는 사람들을 만나 여권을 사기로 하고 오전에 즉석 여권사진도 찍으면서 분주히 움직인 끝에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국경 넘을 준비를 끝냈다.
점심을 마친 후 조선족 안내자와 헤어진 우리는 오후 첫시간에 중국인 관광 가이드와 함께 베트남 국경을 안전하게 넘었다. 가이드는 베트남의 명승지를 가리키며 중국말로 열성껏 설명했지만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또 알아들었다 해도 그 말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베트남에 들어서자 택시는 없고 거리는 온통 오토바이 천지였다. ‘어떻게 하면 가이드를 따돌릴 것인가?’ 우선은 그를 설복해보기로 하고 식당으로 청했다. 베트남의 하노이에 친척이 있는데 친척에게서 돈을 얻어오려고 하니 우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당신들과 중국으로 다시 넘어가지 않으면 내가 처벌받는다”며 “당장 중국으로 돌아가자. 그러지 않으면 베트남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했다. 혹을 떼려다가 덧붙인 꼴이 된 우리는 할 수 없이 관광을 하겠다고 하고는 거리에서 그를 따돌리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우리를 의심한 가이드는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진수와 나는 먼저 수연을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서 빠지게 하고, 가이드가 방심한 틈을 타 동시에 달아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달리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가이드가 우리 뒤를 바짝 추격해오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그에게서 도망쳤다. 긴박한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나와 진수는 헤어졌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갔다. 수연은 와 있었지만 진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진수가 베트남 경찰에 붙잡혔다고 생각한 나와 수연은 택시 대용인 오토바이를 타고 그곳을 벗어났다. 거리 곳곳에 경찰모 같은 베트남 특유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누비고 있어 누가 경찰이고 민간인인지 가려내기 어려웠다.
오토바이를 타고 한참을 벗어났던 우리는 다시 약속한 장소로 가보았으나 진수는 끝내 볼 수 없었다. 진수가 베트남 경찰에 붙잡혔다면 베트남으로 가자고 한 나를 얼마나 원망하랴 싶었다.
나와 수연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로 돌렸다.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에게 손짓 발짓을 통해 돈을 주겠으니 하노이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하노이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앞쪽에 경찰초소가 있어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가진 여권은 관광도시인 몽카이시에 한정된 것이고 국경경찰 초소도 몽카이에서 하노이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노이로 가는 길에 있는 국경초소의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려 했으나 언어소통이 되지 않았고 농촌지역이어서 영어를 아는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국경초소가 나타날 때까지 걷기로 하였다.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단속되는 경우에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되도록 걸어가면서 육안으로 국경초소를 확인한 후 대책을 세우기로 하였다.
게다가 우리는 그 동안 노정에서 돈을 소비했고 또 관광여권을 구입하면서 대부분의 돈을 들여, 주머니에 남은 돈은 50달러에 불과하였다.
아무리 가도 국경초소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열대지대의 찌는 듯한 더위는 우리를 지치게 하였다. 베트남사람은 중국사람과 달리 호기심이 무척 많은 듯싶었다. 거리를 가다가도 누구에게 길을 물어보려고 하면 온마을 사람이 모두 몰려와 우리를 둘러싸고 호기심과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또 집 출입문이 거리 쪽으로 나 있고 날씨가 더워 모두 문을 열어놓고 있어 그들의 관심을 피해 길을 가기는 불가능하였다.
베트남 국경경비원과의 조우
저녁노을이 서켠을 물들일 무렵, 우리는 마냥 그렇게 걸을 수만은 없어 인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밭 가운데 외따로 있는 작은 집이었다. 말이 집이지 창문도 하나 없는 창고 같은 건물이었다. 방 안에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에게 손짓 몸짓을 다해가며 우리는 중국사람인데 친척을 만나러 하노이로 간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그 집 아들이 베트남 국경경비대에 근무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험을 느낀 우리가 급히 그 자리를 뜨려는 순간 건장한 체격의 군복 입은 청년이 집으로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밭 가운데에 위치한 집이라 그의 눈을 피해 도망치기도 어려워 별 수 없이 그를 집에서 맞는 꼴이 되었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다짜고짜 체포하려고 했다. 애타게 사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골라골라 들어간 집이 국경경비대원의 집이라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우리는 도망치자고 단단히 마음먹고 그의 요구에 응하는 양 먼저 길을 걷다가 어둠을 이용해 산등성이 쪽으로 달아났다. 얼마를 달렸는지…. 수연이 웅덩이에 빠져 쓰러지며 더는 달릴 수 없다고 말해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 보았다. 그가 따라 오는 기미는 없었다.
어둠에 싸인 낯선 베트남의 산천초목은 우리에게 괴물처럼 다가왔다. 두려움에 떨며 산속에서 다시 인가 쪽으로 내려오던 우리는 어느 집 근처에서 인기척에 놀라 또다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잠시 후 집 안에서는 라이트와 몽둥이, 칼 등을 든 젊은이 수십명이 우리가 숨은 수풀 속으로 달려들며 다짜고짜 몽둥이를 휘둘렀다. 우리가 그들에게 떼밀려 끌려간 곳은 사무실 같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곡식더미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를 곡식을 훔치려 온 도둑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사무실에 끌고 가서는 밀회를 즐기려던 중국 관광객쯤으로 고쳐 생각했는지 차까지 권하며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서툰 중국어로 우리는 중국관광객인데 애인 사이라고 설명했다. 한참 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길을 가르쳐주며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다시 거리에 나섰으나 밤중이라 방향감각을 잃어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또다시 방조를 요청하려고 어느 집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잠시 후 출입문에 나타난 사람은 30대 중반의 젊은이였는데 그는 우리의 손짓을 한참 음미하더니 들어오라고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가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주인이 나를 깨우더니 잠시 보자고 했다. 그를 따라가 보니 네댓 명의 건장한 젊은이가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 몸을 수색하더니 1만 달러를 주지 않으면 베트남 경찰에 넘기겠다고 했다. 도둑을 피해 달아나다 강도를 만난 격이었다.
그들은 하노이의 친척에게 돈을 얻으러 간다는 내 말을 믿는지 수연은 여기에 있게 하고 하노이에 가서 돈을 가지고 다시 오라고 강박하였다. 그래야만 수연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갈수록 험산이라더니 이제는 또 어찌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오기가 생기면서 나는 그들의 요구에 침묵으로 응대했다. 밤이 깊도록 우리를 재우지 않고 몰아세우던 그들은 저희끼리 뭐라고 토론하고 다투는 듯싶더니 한 사람이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고는 빨리 사라지라고 했다. 돈을 쉽게 얻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베트남의 첫날을 꼬박 밝히고 주위가 푸름푸름해질 무렵 도로 쪽으로 내려오다 또 한 명의 베트남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50달러를 쥐어주면서 하노이 못미처에 있는 항구도시 하이퐁까지라도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50달러를 받더니 데려다주겠다고 허락했다.
우선 그의 집으로 가서 중국에서 입고 온 옷을 모두 벗고 허름한 베트남 농촌 옷으로 갈아 입었고 신발도 베트남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그 다음 그의 오토바이 뒤에 수연과 함께 타고 삼엄한 국경 경비 초소를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하이퐁도 아니고 마을도 아닌, 인적이 드문 산속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마을이 나타난다고 손짓하고는 자기 길을 가버렸다. 이제는 돈도 없고 주변에는 인가도 없어 우리는 지친 몸을 끌다시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발가락에 끼우는 베트남 슬리퍼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나중엔 맨발로 걸어야 했다. 수연은 더는 걷지 못하겠다고 자꾸만 길가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100리 가량을 걸은 듯한데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마음이 다급해져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멀리 조그마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베트남에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도시의 이곳저곳을 헤매며 건물에 한국 회사 간판이 있는지를 우선 살폈다. 그러나 한국 회사 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인과 적(敵)
그러다 어느 골목에서 ‘오뚜기 식품’이라는 우리 글을 새겨놓은 냉동차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와 수연은 너무 기뻐 “만세”를 외치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우리는 그 차가 세워져 있는 집 앞에 다가가 “운전기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을 걸었다. 그 집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더니 중국말로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우리 정체를 알아내려 애썼다. 이어, 운전기사가 나타났으나 그는 이 차가 한국회사의 차가 아니고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자동차회사에서 차를 생산해 내보낼 때 여러 한국회사명을 자동차에 부착하여 내보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우리가 하노이에 간다는 것을 알고는 가는 길목에 경찰초소가 많으니 길을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를 베트남 공안(경찰)에 고발하겠다면서 달려갔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그 집을 뛰쳐나왔다.
수연과 나는 하룻밤 신세질 집을 찾으려고 도시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사람들은 거지차림의 이방인을 의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볼 뿐 우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게 거리 이곳저곳을 다섯 번 정도는 왔다 갔다 했다.
개중에는 우리를 보자마자 경찰에 고발하러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고 거리의 끝자락에 위치한 어느 집에 갔을 때에는 몇 명이 달려들며 다짜고짜 잡으려고까지 했다. 이 도시는 모두가 경찰인가 싶을 정도였다.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버렸다 싶었는데 수연이 처음 들렀던 집에 다시 가보자고 했다. 수연의 말대로 가보니 다행히 그 집에서는 정말 우리를 내쫓지 않고 식사도 대접해주었고 조용한 방을 따로 내 잠자리도 깔아주었다. 극심한 피로와 긴장에 지쳐 실신할 듯했던 우리는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그 집 모녀에게 인사를 하고 또다시 하이퐁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웬 사람이 우리를 불러 세우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다 해진 옷을 입고 어딘가를 향해 정신없이 걸어가는 우리가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그는 친척을 만나러 하노이로 간다는 우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 집에 들러서 쉬고 하이퐁까지는 다음날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는 객지에서 또 한 명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의 따뜻한 방조로 이틀 후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한국사람을 만날 때까지 자기 친척 집에 있도록 조처해주고서야 자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타지에서도 죽지 않고 길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각박해 보이는 이 세상에도 아직은 좋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친척들은 우리를 따뜻이 대해주며 우리를 위해 한국회사를 찾느라 각방으로 노력해주었다.
노자도 다 떨어지고 하노이의 한국대사관 위치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우선 하이퐁에서 누구든지 한국사람을 만나 한국대사관에 연락도 취하고 조금 방조를 받고 떠나는 것이 절실했다.
그 집에는 홍콩에서 살다 온 젊은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내 영어는 가난한 수준이었지만 잘 알아듣지 못하면 종이에 써내려가며 우리가 하노이에 가려고 하는 목적과 하이퐁에서 한국사람을 만날 필요성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다음날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당도한 곳은 ‘Korea Pipe Company’라는 명판을 단 한국회사였다. 회사 정문의 국기게양대에는 베트남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푸른 창공에 펄럭이고 있었다. 누가 주변에 없다면 정말 소리내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다시 돌아와야 했다. 회사 수위는 한국 직원이 하노이에 갔으며 닷새 후에나 볼 수 있다고 했다. 저녁에 우리가 묵고 있는 집의 베트남 친구는 나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자기 여자 친구가 또 다른 한국회사의 일본어 통역사인데 그를 통해 한국 사람을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그날밤 그녀와 만났고 다음날 한국사람과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게 되었다. 수연과 나는 오랜만에 온갖 시름을 잊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베트남 친구의 옷으로 관광객인 양 꾸미고 일본어 통역사를 따라 한국회사로 찾아갔다. 화려하게 꾸민 건물 앞에는 ‘Sun Flower Village’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얼핏 보니 베트남에 가족단위로 오는 한국사람과 외국인이 체류하는 곳인 듯했다. 건물 앞 정문에 앉아 있던 경비병도 내가 외국인이라 생각했는지 단속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베트남 아가씨들이 줄줄이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코리아에서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나의 말에 반가움을 표하며 “코리아”를 따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South Korea’라는 말은 베트남에서는 대단한 힘이 있어 보였다. 지난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했으므로 베트남 사람에게는 한국에 대한 일종의 배타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베트남 국경지역에서 하이퐁시에 오는 동안 만난 사람 중에 한국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건물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었다. 건물 내에는 골프장, 수영장, 볼링장, 헬스장 등 현대적인 문화 후생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베트남 아가씨에게 한국인 매니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나타난 한국인 매니저는 30대 중반의 키가 훤칠하고 미남형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우선 그가 너무도 반가웠고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우리말이 그토록 마음을 설레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탈북자이며 하노이의 한국대사관을 찾아간다고 밝히고 한국대사관과 연계할 방도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자 한동안 긴장하는 눈치더니 이내 한국대사관 전화번호와 미화 50달러에 해당하는 베트남돈을 손에 쥐어주었다.
곤경에 빠져 있던 나에게 그의 방조는 너무도 고마운 것이었다. 그는 “꼭 한국에 가길 바란다”며 정문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나는 즐거움에 들떠 한달음에 수연에게 달려갔다. 수연도 아주 기뻐하며 빨리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런 수연에게 “조금 있으면 더 기쁜 소식을 전해줄게”라는 말을 남기고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거리로 뛰어나갔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는 전화를 받은 대사관 직원에게 한국에 가려는 우리의 희망과 우리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관 직원의 대답은 무정하다 못해 싸늘한 냉기까지 풍겼다. 그는 내 이야기를 도중에서 자르며, “알겠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 와도 한국에는 갈 수 없습니다. 올 필요가 없으니 다시 돌아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무너지는 마음을 허겁지겁 쥐어잡으며 그에게 다시 한 번 간절히 부탁했다.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갈 돈도 없고 국경경비가 너무 심해 돌아가래도 돌아갈 길도 없습니다. 중국에서 들으니 베트남에서 안 될 경우에는 캄보디아에 보내서라도 한국에 꼭 보내준다던데 캄보디아에라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대사관 직원은 “캄보디아에 간다고 되겠어요? 정 가시려면 스스로 알아서 왔으니, 스스로 알아서 가보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전화기를 놓았으나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허탈감에 쓰러지듯 길가에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탈북자 100%를 한국으로 수용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던 KBS 방송의 뉴스 내용은 무엇인가. 북한청년에게 용기를 내 탈북하라고 선동하던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더욱이 나에게 베트남으로 가면 된다고 이야기한 책임자 직위에 있는 한국분의 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수연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수연은 나를 기다리다 못해 집 앞까지 나와 있었다. “우리 이제는 한국 가는 거지?” 하고 묻는 수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나는 그녀의 눈물에 대답해줘야만 했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끝까지 한국대사관에 가는 거야. 내가 죽든지, 한국에 보내준다는 대답을 듣든지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겠지.”
다음날 우리는 열차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출발했다. 그래도 몽카이에서 하이퐁까지 올 때에는 온갖 고생을 했을지라도 한국에 간다는 희망은 있었다. 그러나 하이퐁에서 하노이로 가는 길은 우리를 절망으로 지치게 하는 길이었다.
대사관 직원의 싸늘한 대답이 자꾸만 뇌리를 파고들었다. 탈북자가 아무리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남한을 희망으로 생각해도 결코 우리를 같은 한국인이 아닌 나라 없는 국가의 고아쯤으로 생각한다는 고까운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한 나라의 수도건만 하노이 역사는 초라했다. 우리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하이퐁에서 TV로 본 대우호텔로 갔다. 그곳에 가면 한국인을 만날 수 있고 대사관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대우호텔은 2, 3층짜리 낡은 건물이 가득한 하노이에서는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나는 호텔 로비에서 한국인 호텔매니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나타난 한국사람은 탈북자라고 밝히는 우리를 매우 경계하는 눈치더니 한국대사관이 그리 멀지 않으니 자기가 가서 물어보고 오겠다며 그 자리를 떴다.
한참 후에 나타난 그가 전해준 말은 대사관에서 우리를 받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이미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왔으나 달랑 그 말 한 마디만 되돌려보낸 한국대사관 측의 태도가 너무도 야속했다. 그가 대사관의 위치를 끝내 알려주지 않아 우리는 할 수 없이 다시 하노이 시가로 나왔다.
상해에서처럼 한국식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작정하고 거리를 누볐다. 한국대사관에는 베트남측 경비원이 있을 테니 누구든지 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는 한국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였다. 한참을 헤맨 끝에 한국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식당에서는 젊은 한국인 사장이 우리를 맞았다. 그는 우리가 탈북자임을 알고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우리가 갔던 대우호텔에 한국대사관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우리는 한국대사관 코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꼴이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대사관에 다시 갈 수도 없어 하룻밤만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위층에 모텔을 같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대답은 “안 된다”였다. 할 수 없이 그 식당을 나와 또다시 하이퐁 시가를 헤맸다.
여러 군데 한국식당에 들렀으나 대답은 똑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식당에 들렀을 때는 “당신들과 같은 탈북자가 얼마 전에 하노이 한국대사관에 왔다가 거부되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동남아의 한 끝까지 왔다 거절당하고 다시 돌아간 케이스가 처음이 아닌 듯싶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한국대사관에서 끝내 거절한다면 한국 대통령께 편지를 써보고 유엔인권위원회에 편지를 보내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볼 때까지는 하노이를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속다짐했다.
탈북 전 북한에서 부르던 가요가 문득 생각났다.
‘소란한 거리의 인파 속에서/ 내 마음은 홀로 고독에 울고 있네/ 어디를 둘러봐도 낯선 얼굴 낯선 말들뿐/ 텅 빈 마음을 비쳐주는 밤하늘에도 내가 아는 별은 하나도 없네.’
날이 밝고 거리가 조용해질 무렵 우리는 다시 한국사람을 만나려고 하노이 시가를 헤매고 다녔다. 또다시 찾아간 한국식당 사장도 우리의 방조 요청을 거절했다. 다만 한 가지, 하노이 한인교회의 목사가 좋은 분이니 찾아가 보라는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다.
진수와의 극적인 해후
상해에서도 목사를 찾아가 보았으나 실망만 하고 돌아온 경험이 있기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나 교회에 가면 한인동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가보기로 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예배가 끝났는지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한국사람들이 출입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서며 “목사님을 만나러 온 탈북자들인가?”고 묻고는 우리를 교회당으로 안내하였다. 우선 문전박대를 안 당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교회당에 들어서니 키가 크고 인자하게 생긴 목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분은 교회의 담임인 K목사였다. K목사의 말씀과 행동은 오랫동안 공포와 냉대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는 친부모처럼 느껴졌다. 목사의 사랑 가득한 말씀만이 조용히 들려오는 교회당 안은 탈북한 후로 우리가 처음으로 앉아보는 가장 따뜻한 장소였다. K목사는 한국대사를 꼭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우리 손에 300달러를 쥐어주며 허기져서는 한국에 가기 전에 쓰러지니 배를 든든히 채우라고도 하셨다.
미국의 친척에게서 몇천 달러씩 계속 방조받으며 이곳까지 올 때는 그리 커보이지 않던 300달러라는 돈이 거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우리에게는 그토록 큰돈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든든해진 우리는 거리에 나가 허기진 배부터 채웠다.
앞으로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음식은 제일 싼 것으로 먹기로 하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잠자리를 구하려고 다시 한국인이 경영하는 모텔 등을 찾아다녔다. 목사가 주신 돈을 내밀며 돈을 내겠다고 했으나 어느 모텔에서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그마한 베트남 음식점에 앉아 술 한 병을 마주하고 기나긴 타국의 밤을 또 하루 지새웠다.
다음날, 우리는 약속한 시각에 한국대사관이 있는 대우호텔 앞에서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호텔 앞 인도를 지나치는 사람이 국경지역 몽카이시에서 헤어진 진수와 아주 비슷하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나치는 그를 불렀다. 틀림없는 진수였다.
우리는 뜻밖의 상봉에 서로를 붙잡고 한동안 “야-야-” 하는 탄성만 지를 뿐이었다. 진수에게서 우리는 국경지역에서 체포되어 베트남 경찰에 끌려갔다 극적으로 탈출해온 경위와 그동안 고통과 시련의 고비를 넘긴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대사관에서까지 거부당하면 베트남 남쪽 최대 도시인 호지명시로 가서 한국으로 밀항할 생각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국대사관의 대답을 들으려고 왔다는 것이다. 이어, 약속장소에 오신 목사는 진수도 반겨 맞아주시며 점심식사도 하고 새옷도 한 벌씩 마련하자면서 우리를 자신의 승용차로 이끌었다. 우리는 목사가 인도하는 한국식당에서 오래간만에 우리 음식과 김치를 맛볼 수 있었다. 그때 맛본 김치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누덕누덕 해진 베트남옷을 벗어버리고 목사가 사준 한국옷으로 갈아입은 후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연락을 받은 모양인지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처럼 쌀쌀맞게 전화를 받던 대사관 사람들이었으나 우리가 K목사와 함께 나타나서인지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냉정하지도 않은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들은 목사에게 잘 처리하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보시라고 했다. 친부모와 같은 보호자였던 목사가 떠나자 우리는 또다시 불안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우리에게 용지를 나눠주며 한국정부에 우선 보고해야 하니 탈북 경위와 경로를 작성하라고 했다. 말미에 우리는 이렇게 썼다.
‘만약 한국정부가 우리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참 후에 나타난 대사관 직원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우리에게 한국정부의 지시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니 그때까지 자신들이 정해주는 호텔에 가 휴식하라고 했다. 대사관 직원은 택시를 직접 잡아주며 택시기사에게 XX호텔에 내려줄 것을 부탁하는 호의도 베풀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하노이 교외에 자리잡은 작은 한국인 호텔이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러 하노이 시가로 다시 나왔다. 하루 전만 해도 지옥같이 느껴지던 하노이 시가 마치 우리 세상처럼 자유롭게 느껴졌다. 한국대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가슴속에 멍울져 있던 온갖 두려움과 걱정을 순식간에 몰아내버렸다.
우리 일행은 오래간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다리를 쭉 펴고 잠에 빠졌다. 다음날 저녁, 대사관 직원에게서 결과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겠다는 전화연락이 왔다. 우리는 다시 초조함 속에 대사관 직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이 우리에게 준 대답은 다시 중국을 경유하여 제3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1인당 160달러 정도씩을 나눠주며 베트남에서는 한국행이 불가능하니 3국으로 가는 것이 최선임을 수차 강조했다. 한국으로 가게 될 때까지는 결코 하노이를 뜨지 않으리라 속다짐하고 있었지만 한국정부의 대답이 그렇게 나왔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3국은 동남아에서 북한과 수교가 없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그곳으로만 간다면 반드시 한국행이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도 생겼다. K목사가 준 돈과 대사관측에서 준 돈을 합하면 500달러가 넘으니 그 돈이면 또 한 번 모험을 해볼 만도 하였다. 그는 아예 우리가 타고 갈 중국 국경지역 열차표까지 사가지고 왔다. 더 이상 한국에 보내달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돼 우리는 두말없이 대사관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국경행 열차에 올랐다.
또 다시 중국으로
열차는 어둠에 싸인 베트남의 산야를 밤새 달렸다. 침대칸이라 외국인 관광객도 꽤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중국과 3국의 노정을 마음속으로 되짚어보며 긴장하여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베트남 경찰이 차표와 증명서를 검열하는 것이 보였다. 애써 태연한 척 차표 검열에 응하는데 경찰들은 우리에게 다가서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영어로 물었다. 코리안이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차표값을 두 배로 물어야 한다며 우리 차표를 회수했다.
알고 보니 베트남에서는 외국인 차표를 두 배로 올려 받고 있었다. 목사가 사준 새옷 덕에 행색은 관광객 같아 보였는지 증명서를 보자는 소리는 없었다. 벌금만 물고 멀어져가는 베트남 경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언뜻 잠에서 깨어보니 어느새 새날이 밝았고 우리의 목적지인 국경역으로 기차는 속도를 늦추며 들어섰다.
열차에서 내린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중국 쪽 국경지역으로 무작정 달렸다. 중국 쪽 국경세관 건물과 여권 검사하는 중국 경찰이 눈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서둘러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양국 국경을 경계로 자그마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을 넘기로 작정하고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국경을 옆에 끼고 한참을 달렸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우리 일행이 강가에 접근하려는데 어느 오두막 근처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 여럿이 불쑥 나타났다. 우리는 깜짝 놀라 그들에게 “당신들은 경찰인가?”고 중국어로 물었다. 그들은 경찰이라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를 잡아가겠다고 했다.
우리가 50달러 정도를 내밀자 머리를 가로 저으며 우리 몸을 수색하려고 했다. 여기서 붙잡힌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 갈 길도 천리 만리인데 돈을 빼앗길 수도 없다. 우리가 수색에 응하지 않고 완강하게 반항하니 자기들끼리 무엇이라고 의논하더니 50달러라도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라도 받는 것이 상수라고 결론내린 듯했다.
우리가 내미는 돈을 주머니에 쑤셔넣더니 강가에 감춰둔 쪽배에 우리를 태워 중국 쪽으로 넘겨주었다. 다행히 불법행위로 돈을 버는 베트남 경찰을 만나는 바람에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중국 쪽에는 기찻길이 국경을 따라 길게 놓여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드디어 중국 국경 도시가 나타났다. 한달 만에 대하는 중국 도시가 제법 정답게 느껴졌다. 그날은 수연의 생일이라 어느 식당에서 소박한 음식을 차려놓고 나와 진수는 수연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앞으로의 계획도 면밀히 토론하였다.
그날 저녁 다시 열차를 타고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으로 떠났다. 운남성은 50여 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서도 가장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를 태운 열차는 다음날 곤명시에 도착하였다. 곤명시는 북한에서도 사시사철 봄날씨만 계속되는 곳이라고 소개한 책자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곤명에 도착하여 역사를 나오자마자 우리는 싸늘한 초봄날씨에 떨어야 했다. 우리처럼 얇은 여름 옷을 입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봐도 외지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곤명 세계 꽃박람회를 잘 준비하자는 구호가 나붙어 있었고 관광도시인지라 외국 관광객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로 가려고 버스터미널을 찾아갔다. 터미널에서 버스 배차표를 몇 번이고 훑어봐도 우리가 정한 제3국 국경도시까지 직행하는 버스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중간지점에 위치한 ‘대리(大理)’라는 도시까지 가기로 했다.
곤명에서 대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우리는 잇달아 펼쳐지는 장엄한 자연경관에 탈북자라는 것도 잊고 연이어 탄성을 질렀다. 관광객이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탈북자가 아닌 관광객으로 운남성을 찾았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싶었다.
대리시에 버스가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우리는 다행히 신분증 없이도 묶을 수 있는 여관을 찾아 그날밤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국경지역인 류리시로 떠나려고 버스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중국 변방부대의 신분증 검열이 시작됐다. 나는 신분증을 보자는 변방부대 성원에게 심양에서 공부한 대로 “소수민족인데 증명서는 잃어버렸다”고 말해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탄 버스가 지나가는 산속의 나무에는 아편 밀매자를 경고하는 각종 표어가 자주 보여 우리는 또다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아편 밀매자가 많다면 국경경비가 심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일은 현실로 다가왔다. 버스가 강에 놓여 있는 다리를 건너려고 어느 마을에 들어설 무렵 살벌하게 완전무장을 하고 검문하는 변방부대 성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극도로 긴장한 우리는 제발 기적이 일어나 무사히 검문초소를 통과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기적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변방부대 성원은 우리가 탄 차를 세우더니 버스에 탄 일행의 신분증과 짐을 샅샅이 수색했다. 신분증이 없는 우리 일행은 영락없이 초소로 끌려갔다.
우리를 의자에 앉히더니 심문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길림성 연변 사람들인데 오는 도중에 돈과 증명서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류리시에 뱀장사를 하려고 간다며 꾸며댔다. 그러자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뱀장사를 하러 가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러는 그들에게 내 삼촌이 뱀장사를 하고 있는데 돈을 가지고 곧 뒤따라온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우리 몸을 수색하고 또 수배자 명부를 가져와 일일이 대조하던 그들은 신분증과 국경통과증이 없으면 갈 수 없다며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북한과 천리 만리 떨어진 곳에 탈북자가 오리라는 것을 짐작도 할 수 없었을 테고 또 우리 행색이 아편 밀매자 같아 보이지 않았는지 생각보다 쉽게 우리 일행을 돌려보내 주었다.
다시 대리시에 돌아온 우리는 국경지역 정밀지도를 사서 우리가 빠져나갈 길을 면밀히 따져보았다. 국경지역인 류리시로 가는 곳에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강을 사이에 두고는 항상 경비초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산속에 초소가 있다면 에돌아 갈 수도 있겠지만 다리에 배치한 초소를 통과하려면 강을 건너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을 듯싶었다.
버스를 타고 가 초소 직전에 내려 그곳 사람들처럼 걸어서 빠져나갈 방도도 생각해 보았으나 마을이 워낙 작아 마을사람은 모두 변방부대에서 알아볼 것 같아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수영으로 강을 건너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시작하였다. 변방부대 단속시 강을 눈여겨보니 물살은 굉장히 빨랐으나 강폭은 평양의 대동강보다 좁았다. 한때는 나도 대동강에서 꽤 수영을 한 경험도 있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수연이었다. 우리는 철물점에서 오토바이 튜브와 펌프, 그리고 짐에 물이 안 들어가게 하는 비닐 봉지와 끈 등을 준비하고 오후 첫 시간에 국경행 버스에 다시 올랐다.
버스 앞좌석에 앉아 있던 진수에게서 국경초소가 가까워온다는 신호가 오자 우리는 버스기사에게 도중에 내려달라고 사정했다. 그는 우리를 의심쩍은 눈으로 보면서도 버스 문을 열어주었다. 강가에는 바나나 밭이 넓게 전개돼 있었다. 길가에서 멀리 떨어진 바나나밭 한가운데 이르자 우리는 바나나 잎을 뜯어 땅에 깔고 앉아 해가 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저녁 8시경이 되자 어슬어슬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옷과 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몇 겹으로 묶고 오토바이 튜브에 공기를 채운 후 강가로 접근했다. 강가에 이르자 강의 전모가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다르게 강은 엄청 컸다. 게다가 지난밤에 내린 비로 강물도 불어 있었다. 나는 겁이 더럭 났으나 이제 와서 물러서자고 할 수도 없었다. 진수는 수연이 타고 갈 오토바이 튜브와 짐을 꾸린 비닐봉지를 자신의 몸에 몇 겹으로 연결하더니 “이 정도 강에 겁을 먹으면 내가 해군이 아니었지”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힘을 북돋워주었다.
8시30분이 되자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우리는 십자를 긋고 일제히 물에 들어섰다.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던가. 그 강은 티벳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된다고 하는데, 얼음이 녹으며 흐르는 강이었다. 물살도 전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때 여기까지 진격한 일본군이 이 강을 건너 중국군을 협공하려 했으나 강물에 발목이 잡혀 끝내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강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훈훈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순식간에 온 몸의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진수는 제일 앞에서 수영을 하며 나와 수연을 리드하였다. 추위 속에서도 한동안은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진수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지금 떠내려가고 있어.” 순간 앞을 보니 왼쪽에서 보이던 마을 불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쪽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람처럼 시야에서 사라지는 불빛으로 미루어 우리가 얼마나 빨리 떠내려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가 죽을 힘을 다해 강물과 싸웠으나 앞쪽 강기슭이 눈에 잡히는 듯 가까워졌다가도 또다시 강 복판으로 떠밀렸다. 다행히 우리 모두 하나의 끈으로 동여맸기에 제각기 떠내려가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진수가 물을 먹는지 머리가 자꾸 잠기는 것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를 이끌고 있는 진수마저 힘이 빠져 맥을 놓으면 우리는 모두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성급하게 강을 도하하자고 찬성해버린 나의 선택을 뼈아프게 후회하였다.
온몸으로 스며드는 寒氣
그렇게 끝도 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몸은 자꾸만 얼어들었고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을 무렵 앞쪽에서 “물살이 조금 약해진 것 같아”라는 진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마지막 힘을 다해 강기슭으로 나가려 애썼다.
마지막 힘도 다 소모했다 싶었는데 우리 곁으로 지난 밤 내린 비에 쓰러진 나무가 보였다. 나는 절반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나무를 붙잡았다. 간신히 나무에 기어올라 한참 후 정신이 들 즈음에야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역시 진수는 해군 출신이라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짐까지 모두 챙기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옷가지 등을 비닐봉지로 여러 겹 쌌으나 어디서 터졌는지 온통 물이 들어가 입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체온만으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몰아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고 있었다. 결국 5시간 넘게 물 속에 떠 있는 셈이었다. 불안함 속에서도 지친 탓인지 자꾸만 눈꺼풀이 아래로 처졌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나뭇가지에서 강물로 굴러 떨어질 수 있기에 서로 졸지 못하게 다독이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동켠이 조금 푸름해지자 우리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강을 마저 건널 심산으로 서둘러 다시 강물에 들어섰다. 진수가 먼저 끈으로 연결한 수연이 탄 오토바이 튜브를 끌고 앞서자 나는 그 뒤를 따라 다시 물살을 헤치고 강기슭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헤엄쳐 겨우 우리가 땅이라고 생각한 곳으로 갔으나 땅이 아니라 사람키를 훨씬 넘는 사탕수수가 물에 잠겨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땅을 찾느라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을 이리저리 헤맸다. 사탕수수의 간격이 너무 좁아 수영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너무 힘들어 사탕수수 잎새에 조금 발을 올려 놓으려 하면 금방 잎새가 꺾이며 물에 빠지고 갑절로 힘을 앗아갔다. 힘은 빠지고 물을 먹으며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육지가 보이니?” 하고 소리쳤다. 돌아온 것은 “아직 육지가 안 보여”라는 절망의 대답뿐이었다.
나는 입 속으로 “조금만 더, 조그만 더”를 되뇌며 몸부림쳤으나 이미 온몸의 힘은 빠질대로 빠져버려 도무지 팔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겁없이 강물에 들어선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자꾸만 정신이 가물거리는 것을 애써 깨우며 나는 마지막 힘을 모아 “진수야, 나 죽어” 하고 소리쳤다. 잠시 후, 진수가 내 앞으로 왔으나 파랗게 질려버린 그의 얼굴을 보면서 진수도 나를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자 나는 맥을 놓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침수된 또 다른 나무 위에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 살아난 것이 기적처럼 여겨진다. 내가 죽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수연은 수영도 전혀 못하는 처지도 잊고 바나나 잎을 발판 삼아 견디기로 하고 나에게 하나뿐인 오토바이 튜브를 선뜻 넘겼고 진수가 나를 끌어다 나무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정신이 든 후 진수에게 수연의 행방을 물어보니 다시 튜브에 의지해 마을사람을 데려오려 혼자 강물 속을 헤엄쳐 갔다는 것이다.
진수도 힘을 다 쓴 탓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여기저기 물뱀들이 헤엄쳐 다니는 것이 보였다. 한참 후, 완전히 제 정신이 돌아왔을 무렵 강기슭 쪽에서 트랙터 튜브를 가지고 우리를 구하러 오는 수연과 마을사람들이 보였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야 본심을 안다고 했던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팬티바람의 수연, 평상시라면 미친 여성으로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수연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수연과 진수의 자기희생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땅을 밟은 후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결국 강물에 들어선 지 16시간 만에야 우리는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마을사람은 우리를 구하려고 달려와주기는 했으나 어느 집에서도 우리를 받기를 꺼렸다. 멀쩡한 콘크리트 다리를 놔두고 헤엄처 강을 건넌다는 것은 우리가 아편 밀매자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흙탕물을 너무 많이 삼킨 탓에 목은 불덩이처럼 타들어만 갔다. 진수와 내가 상점에서 음료와 주스를 사들고 병째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수연은 쉬지 않고 흙으로 매닥질한 듯한 우리 옷을 우물가에서 빨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나약해 보이던 수연이 어디서 그런 힘이 샘솟는가 싶었다.
우리는 마을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중국돈 400원을 주고는 공안에 밀고당하는 최악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을 조금 벗어난 우리는 휴식을 취하려고 조그마한 둔덕에 올라서서는 모두가 땅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파아란 하늘가에는 흰 뭉게구름이 평온하게 떠가고 있었다. 그처럼 한가로운 자연속에 누워 있노라니 지난밤 우리가 겪은 삶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 마냥 꿈같이 생각되었다. 조금 여유를 찾은 후, 서로의 몸을 살펴보니 세 명 모두 날카로운 사탕수수 잎새에 긁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맥을 놓고 있으면 그냥 쓰러져 잠들어버릴 것 같아 우리는 다시 일어나 길을 재촉했다. 한참을 걷는데 자동차 하나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운전기사에게 돈을 주고 국경행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하였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국경으로 갈라지는 길가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다리에서는 변방부대 성원에 지나가는 차량을 단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경비초소를 에돌아 안전하게 국경행 버스에 올라탈 수가 있었다. 모두가 탈진상태인지라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버스는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에야 목적지인 국경도시에 도착하였다.
국경지역 여관은 단속이 심했다. 신분증이 없으면 대부분의 여관에서 숙박을 거절하였다. 거리의 골목을 온통 헤맨 후에야 우리는 숙박을 허락하는 작은 여관을 찾아 그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3국 국경을 넘을 장소를 물색한 후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국경을 넘었다.
방랑의 끝은 어디에…
국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무사히 국경을 넘은 후 인적이 드문 논밭을 가로질러 3국의 거리로 나섰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어쩔 방도가 나서지 않았다. 얼굴색이 거무스레한 사람들은 남자도 치마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등 우리와는 옷차림부터가 기름과 물 같은 차이를 보여 도무지 그들 속에 숨어들 수가 없어 보였다. 또 그 도시는 다른 도시와 큰 산맥으로 가로 막혀 밤이 되니 차도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아침이 되기 전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건설중인 아파트에 몰래 숨어들었다. 작업장에는 사방에 시멘트와 모래 등이 널려 있었으나 대충 치우고 맨바닥에 누워서 아침을 기다렸다.
모두 낯선 환경에서 맞는 첫밤이라 긴장하여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젊은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들었다. 깜짝 놀란 우리가 긴장해 그를 주시하는데 그는 중국말로 “나는 건설현장의 경비인데 당신들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친척을 만나러 당신 나라 수도까지 가는 사람들인데 돈을 줄 테니 여기서라도 좀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우리가 내미는 돈을 받더니 아무말 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새벽녘에 다시 나타난 그는 우리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고 길을 알려줄 테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 그와 함께 산을 넘어갔다. 한참을 가니 3국의 첫 경비초소가 나타났다. 국경경비대원으로 보이는 꾀죄죄한 차림의 젊은이가 아침 음식을 만드느라 초소막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저 정도 경비라면 얼마든지 쉽게 통과하여 한국대사관이 있는 수도에 당도할 듯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어설픈 계산이었다. 3국은 태국 등과 함께 아시아의 3대 아편 밀재배지여서 갈수록 경비의 삼엄함을 피부로 느꼈다. 또 그 나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중앙정부를 반대하는 지방 할거세력이 각 곳에 세력권을 가지고 있어 중앙정부의 통제가 국경 지역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즉 우리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어떤 처벌을 받는다 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우리는 건설현장 경비원의 도움으로 첫 경비초소를 안전하게 통과한 후 그와 헤어져 계속 걸었다. 새벽녘이라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도로 양옆에는 열대의 산림이 무성했는데 대나무가 어찌나 굵고 큰지 무서울 정도였다. 한참을 걸어가니 산 속에 조그마한 집이 나왔다. 지나가는 차량들에 휘발유와 간식 등을 파는 곳이었다. 음료를 사서 마시며 갈증을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도로 쪽에서 경적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바삐 도로에 나가 그 차를 세웠다.
운전기사는 온몸에 문신을 한,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사람이었으나 보기와는 달리 순순히 우리를 다음 경비초소까지 태워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초소 앞에서 우리는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두 번째 경비초소의 분위기는 첫 경비초소와 달리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차량이 길가에 세워지고 승객과 물건에 대한 검문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참을 주저하며 방법을 궁리하던 우리는 그 나라 사람처럼 수건을 머리에 감고 셔츠를 벗고 속옷만 걸치고 초소를 통과하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우리는 그 초소를 무사히 넘어설 수 있었다.
그 경비초소를 넘자마자 영어를 할 줄 아는 운전기사의 차를 얻어탈 수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연이어 4개의 경비초소를 안전하게 넘었다. 행운은 계속되는 듯했다.
이런 생각도 한순간, 우리를 태우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기우뚱하더니 언덕 아래로 굴러내렸다. 또다시 죽음의 공포에 아찔해지는 순간, 굴러내리던 차는 천만다행으로 비탈에 외롭게 자라던 나무를 받으며 가까스로 멈춰섰다. 또 한 번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비켜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차를 끌어올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승합차에 타고 있던 인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잠깐 동안에 길을 가던 30여 명의 운전기사들이 내려 힘을 보태고 하여서야 차를 도로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차체가 찌그러진 것말고는 별다른 고장은 없었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운전기사가 나에게 다가와 “조금 있으면 수도까지 가는 도중에서 가장 큰 검문소가 있는데 경비가 삼엄해서 그 초소만은 차에 태워 통과시켜 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30달러만 주면 초소를 에돌 수 있도록 안내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잠시 후 차는 정지하고 우리는 마을청년 한 명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끝내 벌어졌다. 그 청년을 따라 검문소를 조심조심 에돌던 우리 일행이 불행하게도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들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모든 일이 우리의 바람대로만 움직일 수는 없는 법. 경찰은 우리를 총으로 위협하며 검문소 쪽으로 끌고 갔다. 검문소에는 이중삼중의 경비초소가 진을 치듯 설치되어 있었고 지나가는 차량과 인원에 대한 엄격한 단속이 벌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국경초소를 지키는 부대 책임자가 있는 곳이었다. 50세가 넘어 보이는 부대 책임자는 영어로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한국사람이며 국경지역에 관광하러 나왔다가 돈과 여권 등을 모두 잃고 다시 한국대사관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과는 구체적인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가둘 수밖에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나에게는 탈북과정에서 세 번째 체포였다.
우리가 끌려간 감방은 20평 정도로 넓었고 예심중인 죄수가 30명 정도였다. 대부분이 아편 밀매자와 아편 복용자였다. 옆 감방은 여자 수감자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들도 대부분은 아편밀매를 하다 잡혀온 여성들이라 한다. 심지어 잡혀 와서도 화장실에서 대마초를 피우는 죄수까지 있었다. 죄수들은 코리아에서 왔다는 우리를 깍듯이 대해주었다. 다음날 3국 예심원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완강히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인임을 마지막까지 주장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느 비행장에서 내렸는가, 비행기에서 내려 어느 호텔에 묵었는가 등 대답하기 불가능한 질문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향을 바꿔 그 이상의 영어는 모른다고 입을 봉하고 한국대사관에 연락해줄 것만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답은 한국대사관에는 연락할 수 없다는 것과 S시에 한국사람이 한 명 있으니 그를 데려와 통역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사람이라면 한국기업 종사자나 장사하는 사람일 테니 그에게 우리가 탈북자임을 밝히고 한국대사관으로 연락해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다음날 3국 경찰은 우리를 차에 태우더니 철조망을 친 한 건물로 끌고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3국 경찰이 한국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한 사람은 뜻밖에도 죄수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도 우리와 같은 탈북자 철수(가명)였다. 철수도 중국에서 갖은 고생을 겪다가 3국의 한국대사관으로 가던 중 이곳 검문소에서 붙잡혀 감옥생활을 한 지 5개월이 된다고 했다. 그는 자기말고도 또 한 명의 탈북자가 갇혀 있으며 자기들이 오기 전에도 탈북자 부부가 여기서 감옥생활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나라 법에 따라 여기서 6개월 정도 감옥생활을 마치면 한국대사관에 연계해 한국에 보내준다고 장담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예심원에게 솔직히 탈북자임을 밝혔다.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6개월 정도 감옥생활을 이겨내고 한국에 가는 것이 유리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감방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나라의 감방은 북한에 비해 굉장히 자유로웠다. 눕고 싶으면 눕고,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하고, 심지어 돈만 있으면 여러 가지 음식도 시켜먹을 수 있었다.
식사는 이 나라 습관에 따라 하루 두 번만 급식했다.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 나라인지라 음식은 영국식이 많이 가미되었다고 하는데 입에도 맞았다. 그곳 사람 대부분은 음식을 맨손으로 집어 먹었다. 왜 그렇게 먹는가 물으니 손으로 먹어야 순수한 음식맛이 난단다. 참, 문화의 차이란….
어느날 식사를 하던 나는 우연히 감방 마룻바닥에 새겨진 우리 글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날짜를 계산하느라 달력을 그려놓은 우리 글이었는데 여러 사람의 글씨체였다. 감방 안의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 감방에도 북한사람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고 한다.
심문과정에 만난 탈북자 철수에게서도 그곳에 여러 명의 탈북자가 거쳐 갔다는 말을 들은 바 있지만 감방에 새긴 각기 다른 필체의 우리 글을 보고 다시 한 번 그 말을 확인한 셈이었다.
감방생활 한 달이 되어갈 무렵 우리는 3국 경찰당국의 조처에 따라 다시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훗날 들으니 한국으로 갈 희망만으로 낯선 타국의 감옥생활을 잘 견뎌내던 철수도 감옥생활을 마친 후 결국은 중국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그 나라 경찰에 속은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탈북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6개월의 감옥생활을 다 채우지 않고 추방된 것이었다. 또한 그 나라 사법당국도 중국 공안당국에 넘기면 북한에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호소를 참작해 자유롭게 중국으로 다시 가도록 조처해주었다.
우리가 추방된 도시는 중국 운남성 류리시였다. 산업시설은 거의 없고 관광업과 3국의 합자로 설립한 카지노 영업으로만 살아가는 도시였다.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그 도시를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도시는 활기가 없어 보였다.
낙심한 우리 눈에 더욱 그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용한 여관을 찾아 들어간 우리는 밤새도록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궁리했다. ‘1라운드만 우리가 졌을 뿐이야. 게임은 계속되어야…’ 우리가 돌아설 길은 없었다. 뒤에는 죽음을 위협했던 강물이 가로막혀 있고 앞에는 3국의 삼엄한 경비진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끝까지 3국 한국대사관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다만 떠나기 전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음날 한국대사관에 전화는 연결되었으나 대사관 직원에게서 그곳까지 가면 반드시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대사관 직원의 언조가 상해영사관이나 베트남대사관과는 달리 호의적이어서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두 번째 3국행도 국경 초입에서 좌절되었고, 세 번째도 역시 체포되었다. 마지막으로 체포될 때 3국 국경경비대 대장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불법입국하면 법대로 10년의 감옥생활을 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세 번째로 중국 류리시로 쫓겨난 우리는 방법을 달리해보기로 했다. 일행이 함께 움직이다보면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고, 또 돈도 거의 떨어졌기에 행동이 빠른 진수가 혼자서라도 한국대사관에 가 방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다음날 진수에게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몰아주고 다시 만날 장소를 약속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진수는 꼭 성공하여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류리시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밤이 깊어지자 3국 국경을 넘었다. 진수와 헤어진 후, 나와 수연은 하루도 빠짐없이 진수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나가보았으나 약속한 날이 훨씬 지나도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훗날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진수는 10여 개의 초소를 무사히 통과하여 3국 수도까지 용케 갔으나 그곳에서 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였다 한다.
류리시에 남아 있던 나와 수연은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돈도 한푼 남지 않았고 잠잘 곳도 없었다. 일자리라도 얻어보려 했지만 중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방인을 받아주겠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제각기 호텔 등을 찾아가 한국사람이나 조선족이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3전4기 그리고 마침내 勝利
며칠간을 그렇게 호텔 등을 전전하던 우리는 어느날 그 도시에 사는 유일한 조선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중국땅 한쪽 끝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다 그렇듯 그도 거기서 살 수밖에 없는 말 못할 사정을 안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사정하여 그 집 창고에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집도 가난했기에 끼니는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안되었다.
그래 그에게서 중국돈 30원을 꿔서 수연은 뜨개질로 하루종일 여성용 백을 만들고 나는 시장에 나가 팔아 마련한 돈으로 그날 그날을 연명해나갔다.
그렇게 류리시에서 두 달 동안의 고통스러운 나날이 흘렀다. 류리시 체류중 중국경찰에 두 번이나 체포될 뻔했고 배고픈 고생, 방랑자의 아픔도 뼈아프게 느꼈다. 지쳐 가면서도 끝내 우리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한국에 가고야 말겠다는 굳은 집념 때문이었다.
모든 일은 끝이 있게 마련, 류리시에 머물며 사방에 3국의 수도까지 데려다줄 안내자를 물색하던 우리는 끝내는 고마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도움으로 10여 개의 3국 검문소를 안전하게 통과해 한국대사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두 달 후 태국을 거쳐 대한항공 여객기에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다.
흰 구름 위를 날던 대한항공 여객기는 드디어 고도를 낮추며 김포공항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엷은 운무 속 비행기 창가 아래로는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아름다운 서울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며 다가왔다. 드디어 우리의 탈출은 마무리되었다. 1999년 1월 7일은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 나의 두 번째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날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기 1주일 전 진수도 감옥에서 석방돼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쓴 후 어머니도 중국을 유랑하다가 마침내 한국에 들어오셨다. 우리는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