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미 시카고대 교수는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 학자다. 1981년에 첫 출간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전 2권) 제1권에서 그는 6·25전쟁이 기본적으로 혁명적 시민전쟁(Civil War)의 성격을 가진 전쟁이었다고 규정하면서 미·소간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남북한이 제각기 발전시켜온 정치·경제 구조를 치밀하게 분석, 해외의 한국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커밍스 교수는 또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 Monthly) 1997년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남북한 평화체제 전환을 전제로 한 주한미군 철수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1945년 광복 이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분단을 초래했고, 그 후 줄곧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경쟁을 벌여온 과정에서 한반도의 국민국가 건설에 심각한 장애를 발생시켰다는 비판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른바 그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시각과는 일정 거리를 두면서 나름의 ‘재야적’ 시각을 견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급변하는 현 시점에 ‘신동아’가 커밍스 교수를 인터뷰한 것은 이런 그의 ‘독립적인’ 목소리를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서 이뤄졌음을 밝혀둔다.
커밍스 교수의 최근 저서로는 ‘한국의 몫: 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1997), ‘시차 : 세기말 미국·동아시아 관계의 이해를 위하여’(視差·Parallax Visions: Making Sense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at the End of the Century, 1999) 등이 있으며, 지난 1월에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학술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커밍스 교수는 한국학 분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국 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우선, 1990년에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 이후 커밍스 교수가 한반도 문제를 보는 시각에 혹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교수의 학문적 작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교수의 한국관(觀)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시지요.
한국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제 기본 시각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30년간 저는 한반도 분단과 한미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관건은 1945∼50년 시기를 올바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시기에 남북한에서는 국가가 형성됐고, 미국이 한국 문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 후 3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이런 변화를 통해서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 나가는지, 그리고 헤겔이 말한 ‘역사의 교묘함’(the cunning of history)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에 존재했던 남한의 제1공화국은 북쪽의 체제보다 훨씬 취약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인 이유는 북쪽의 체제가 그 이전 시기 전세계의 식민지역에서 등장했던 혁명적 민족주의 체제와 유사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만약 남북이 각자 자신의 수단(devices)만으로 경쟁했다면 당시 남한 정권은 결코 북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정도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정을 거쳐 이제 한반도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강력하고 극적인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경제적으로는 중공업이 발전했던 1970∼80년대에, 정치적으로는 첨예한 갈등을 거쳐서 유사(quasi)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등장한 1979∼87년 시기에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재판에 회부하고, 김대중이 노동단체 등 소외됐던 집단을 정치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약속은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략적 상황은 1940년대 후반 이래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돼 있으며, 미국은 40년대 후반 이래로 유지·발전시켜온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거의 4만 명에 달하는 미군을 여전히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일부 전문가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역학 구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말합니다. 커밍스 교수는 남북 정상회담과 그 이후의 진전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을 미·일·중·러 등 주변 강대국이 내심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동북아 지역정치가 매우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영민함은, 이 지역에서 과거 50년간 유지돼왔던 안보구조의 틀 속에서 북한과 화해하려고 노력해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김대통령이 북한과의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부분적이나마 한반도에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미국이 이 지역에서 전략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면서 극적인 긴장완화, 나아가 6·25전쟁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킬 평화협정까지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도 분명 이런 남북간의 화해와 워싱턴·평양 간의 관계개선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실 중국은 1980년대 이래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지역 국가들 중 남북한의 화해와 관련해서 가장 협조적이지 않은 나라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은 북한을 다루는 데 줄곧 냉전적인 수단에 집착했고,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 진전을 거부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은 김대통령에게서 거의 배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김대통령은 사소한 사안들뿐 아니라 심지어 군사적 도발때문에 자신의 햇볕정책이 좌절되는 것을 거부했으니까요.
김정일 상하이 방문의 의미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커밍스 교수는 90년대 중반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북한붕괴론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였지요. 커밍스 교수가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동의하지 않았던 주된 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북한의 90년대 상황을 전반적으로 평가해주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북한이 작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미덕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예측이 옳은지 틀린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1989∼90년 동유럽 정권들이 붕괴한 이래로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붕괴를 점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첫째, 북한은 상당한 물리력의 독립적인 군대를 보유한 나라이고, 1989년 당시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과는 달리 자국 영토 내에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북한은 공산국가이면서 동시에 반식민주의적,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정체(政體)이며, 60년대 이래 정권 내에 토착적인, 혹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강력하게 유지돼왔습니다.
셋째, 동서독과는 달리 남북한은 전쟁을 겪었고, 이 경험은 남북한 관계가 동서독 관계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했으며, 이는 남북간의 갈등 해결을 매우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제 견해가 옳았고, 역사는 다른 모든 사람이 믿고 싶어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 전 정인보 선생이 미국인들에게 자주 설파했듯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의 공산주의는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의 피를 토양으로 삼아 성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과 중국,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아직까지도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래 북한은 생존을 위한 모드(mode)로 전면 개편되었으며, 여기에 맞추어 정치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켜왔습니다. 북한이 서울과 외국에 원조를 요청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기아로 이어졌던 극심한 경제적 곤궁에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겹쳤습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부터 1998년 9월 김정일이 전권을 이양받기까지 왕조의 쇠락과 엄청난 재난이 동시에 북한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김정일은 큰 폭의 정책 변화와 함께 새 천년을 맞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마치 김정일이 “20세기가 아버지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나의 세기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21세기가 김정일의 세기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평양의 이념가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북한은 2000년 1월부터 외교 면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꾀하면서 서울과 화해를 유도하는 한편 상당수 서구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개설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달 중국 상하이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향후 북한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전망이 나왔습니다만, 커밍스 교수는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먼저, 김정일의 상하이 방문은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던 때와 시기가 일치하는데, 이를 통해서 북한이 전하려 했던 시그널은 분명합니다. 즉 북한은 전반적인 개혁을 계속해갈 것이며, 특히 김정일이 중국의 경제개혁을 연구하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김정일은 정보·컴퓨터 혁명과 관련된 신산업에 매료된 듯합니다.
또 이 방문은 북한이 60년대 정책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 신년사에 뒤이은 것인데, 이런 점들로 볼 때 저는 북한이 다시금 고립주의로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매우 중요한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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