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초, 청와대에 ‘통신사업 구조조정정책 건의서’라는 제목의 대외비 문건이 제출됐다. 작성자는 하나로통신 신윤식 사장(64). 하나로통신은 시내전화 및 초고속망 사업을 하는 중견 통신업체다. ‘나는 ADSL’이 대표 브랜드. 전남 고흥 출신인 신사장은 체신부 차관, 데이콤 사장을 거친 통신전문가다. 여권 핵심부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동아’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보고서 원문을 단독 입수했다. 건의서에는 통신업계에 팽배한 위기감과 ‘살 길을 열어 달라’는 간절함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요지는 ‘정부가 나서 포항제철의 동기식 IMT2000 컨소시엄 주도→LG텔레콤·하나로통신 인수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 신사장은 같은 보고서를 들고 이한동 총리와도 독대(獨對)해 장시간 브리핑을 했다. 통신업계 구조조정의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건설·금융 전철 밟고 있다”
SK, LG, 포철, 한국통신, 삼성. 한국 경제의 핵심을 쥐고 있는 대그룹들과 하나로통신, 데이콤, 두루넷, 파워콤, 드림라인 등 IT업계 핵심업체들의 사활이 걸린 한판 승부. 그 중심에 동기식 IMT2000 사업자 선정이라는 핫 이슈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요즘 통신업계는 겉으로 보기에 ‘개점휴업’ 상태에 가깝다. 정통부는 물론 업계 핵심인사들까지 극도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동기식 IMT2000컨소시엄의 ‘간사’ 역을 자임한 하나로통신만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새. 동기식 사업계획서 제출일(2월 26~28일)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떤 업체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참여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회사 및 업계의 미래와 관련해 자신 있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거의 없다.
사내 분위기도 뒤숭숭하긴 마찬가지. LG텔레콤 이모 과장은 “요즘 같아선 정말 일할 맛이 안 난다. 직원들끼리도 만나기만 하면 회사 운명과 관련해 이런저런 정보나 의견을 교환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말한다. 두루넷, 데이콤 등 중견 업체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본의 아니게 통신업계 구조조정의 핵으로 떠오른 포철의 한 임원도 “철(鐵)만 상대하며 우직하게 살아온 우리가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몰렸는지…”하며 근심 아닌 근심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는 폭풍전야의 고요에 불과하다. 성층권에선 이미 격렬한 핵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최고경영진 간의 거듭되는 비밀 회동, 치열한 정보전(情報戰), 사내·외로 수많은 문건이 날아다니고, 경쟁사 사장의 말 한마디에 핵심인력들은 밤샘작업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혼란의 결과는 우선 동기식 컨소시엄의 형태로 구체화될 것이다. 이어질 업계와 시장의 대대적 재편(再編). 어떤 곳은 문 닫고, 어떤 회사는 팔려가며, 두세 업체는 막대한 자금과 조직을 바탕으로 시장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이는 크게 보아 국가신인도에까지 영향을 끼칠 중대 사안이다. 현재 우리나라 통신산업이 총체적 위기에 몰렸다는 것은 정부나 업계 모두 인정하는 사실. 신윤식 사장의 청와대 건의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이다.
‘국내 정보통신사업은 한국통신과 SK텔레콤을 제외한 대부분 통신사업자들의 중복과잉투자, 지속적인 적자, 자금난 등으로 2001년 상반기를 넘기기 어려운 危機 狀態에 직면.
LG텔레콤, 하나로통신, 온세통신, 데이콤, 두루넷, 드림라인 등 통신업계도 建設·金融의 前轍을 밟고 있음.’
일각에서 “구조조정을 적시에, 효율적으로 달성하지 못할 경우 올 하반기쯤에는 공적자금 투입 문제가 전면 대두될 수도 있다”는 진단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업계 구조조정과 관련해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대략 5가지다.
▲동기식 IMT2000 사업권은 어디로 갈까 ▲포철은 무선통신사업에 뛰어들 것인가 ▲LG그룹은 통신사업을 계속할까 ▲LG텔레콤, 파워콤, 하나로통신 등은 새 주인을 만나 기사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통신 민영화는 가능한가.
현재로선 어느 것 하나도 쉽사리 결론을 말할 수 없다. 또 각 사안은 업체 간 지분구조, 역학관계, 모(母)그룹의 상황, 소비자 편익, 장비업체 문제 등이 얽히고 설켜 독립적인 논의가 거의 불가능하다. 통신산업의 특성상 시장논리로만 접근할 수도 없는 일. 결국엔 정통부의 ‘계획’과 중재, 정책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권의 입김도 거세, 이 문제가 이미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동기식 IMT2000 사업권은 어디로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기 전 현재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지난해 12월 15일, 정통부는 IMT2000, 즉 차세대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 발표했다. 결과는 한국통신-IMT와 SK-IMT의 승리. 정통부의 ‘1동2비(동기식 1사, 비동기식 2사) 방침에 따라, 역시 비동기식 사업신청서를 냈던 LG글로콤은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1동’을 겨냥해 기습적으로 동기식 신청서를 냈던 하나로통신의 ‘한국IMT2000’도 과락 점수를 받아 탈락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동기 티켓은 차후 재신청을 받아 처리하기로 결정됐다.
무선통신사업자에게 IMT2000 사업 탈락은 단지 큰 돈 벌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지금의 2세대, 2.5세대 통신 서비스 이후 도래할 3세대 시장 참여를 원천 봉쇄 당한다는 것, 즉 통신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했음을 뜻한다.
IMT2000 탈락으로 인해 LG는 통신 중심 그룹으로 거듭난다는 비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로 인해 ‘LG가 통신 사업에서 철수한다더라, LG텔레콤을 한국통신에 매각한다더라’는 등 각종 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LG는 1월 초 IMT2000 사업 추진단을 80명에서 20명으로 대폭 축소하는 등 ‘동면’에 들어갔다. 같은 달 16일에는 LG텔레콤의 대주주인 LG전자가 ‘텔레콤 매각 검토’를 공시, 통신서비스 사업을 포기할 가능성이 가시화됐다.
‘LG가 비동기식을 포기하고 동기식 사업권에 재도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정통부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각도로 동기식 참여를 권유했으나 LG 측은 “동기식 사업권을 딴다 해도 꼴찌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거듭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일각에선 LG의 이런 행보를 두고 “마지막 남은 티켓마저 비동기식으로 바꾸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동기식 사업권자의 윤곽이 불투명해지자 정통부는 시간 벌기에 나섰다. ‘동기식 재도전’ 의사를 밝힌 하나로통신 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애초 2월 말로 잡혀 있던 동기식 사업자 선정을 3월 중순으로 연기했다. 이 와중에 하나로통신 신사장과 이한동 총리의 독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