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편집실로부터 30대 중반의 여가수를 만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들어볼 의향이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군말 없이 좋다고 해버렸다. 상대가 가수라는 점(그것도 여자라지 않는가) 그리고 서른 중반이라면 정신 사나운 몸짓에 국적 없는 노랫말을 따발총처럼 내갈겨대는 요즘 젊은 가수들과는 달리 정서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등이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게 했다. 원고 청탁을 했던 기자는 그 여가수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면서 ‘아마 스케줄이 빠듯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스케줄이 빠듯하다는 건 활동이 왕성하다는 얘기일 터. 무명가수거나 뒷전으로 나앉은 한물간 가수가 아니라 요즘도 바쁘게 활동하는 인기가수라는 뜻이니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파업현장으로 오세요’
그런데, 최도은(崔都恩)?
평소 그 방면에 귀를 닫고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자부해온 나였으나 이름이 생소하게 들렸다. 어쨌든 전화를 걸었는데, 건너온 대답이 또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금 현장에서 빠져나갈 형편이 못 되니 만나고 싶으면 현장으로 오십시오.”
현장이라면 방송국의 쇼 프로그램 녹화장이거나 콘서트 등을 하는 공연장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나이’에 연예담당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어깨싸움을 해가면서 그를 만난다? 아무래도 그것은 내 몫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있다는 ‘현장’이란 다름아닌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파업농성 현장이었다.
노래하는 가수가 왜 자동차 공장의 파업농성 현장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지 등은 만나서 물어볼 일이고, 일단 나도 그 현장으로 진입해야겠는데 이 또한 간단치가 않았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대우사태’를 모르는 이는 없으려니와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파업사태가 계속되는 바람에, 회사측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 신문사의 취재기자도 여간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정문출입이 힘들다는 터에, 신분증이라고는 주민등록증밖에 없는 처지에(“나 소설 쓰는 사람이오” 해봤자 창피만 당할 게 뻔하고) 무슨 수로 공장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쯤에서 원고청탁을 되물릴까도 생각했으나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그리고 결국 대우자동차에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친지로부터 정문을 통과할 비책을 입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직원들이 집중적으로 정문을 통과하는 아침 출근시간에 대우자동차 직원용 유니폼(점퍼)을 착용한 채로, 출근 인파에 적당히 묻어 들어가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란 얘기였다.
2월7일 7시40분, 나는 친지로부터 빌린, 턱없이 큰 회색 점퍼를 헐렁하게 걸치고 유유히 정문을 통과했다. 옷만 빌려 입었을 뿐, 신분을 속이거나 직원을 사칭하지는 않았으니 죄가 될 만한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훤칠한 키의 ‘여전사’
얻어 들은 정보에 따르면 회사측에서는 누적된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당분간 휴업에 들어갔고, 그에 맞서서 노조에서는 출근투쟁에 돌입했다고 한다. 하필 날씨마저 이 회사가 처한 상황만큼이나 싸늘해서 귓불이 욱신거릴 지경이었는데 문제는 찬바람을 피할 만한 휴게실이 어디에 있는지 화장실은 또 어딘지를 도통 알 수 없다는 점.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회사 정복을 입고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위장 침투한 간첩으로 볼 게 뻔한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파업현장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한 최도은이라는 가수를 미리 불러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 스타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쉽다더냐.
나는 지나가는 젊은 사원들이 멋모르고 건네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어색한 대꾸를 하면서 한 시간여를 떨며 헤매다가 드디어 노동조합 사무실이 있는 ‘복지회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최도은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 이 옷은 빌려 입고 온 겁니다. 난 대우 사람이 아닙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그렇게 얼버무리자니 ‘이거 정말 스타일 구기는 날이군’이라는 탄식이 절로 새어나왔다. 놀라운 것은 노조 사무실 안팎에 있던 노조원들 사이에서 내가 만나러 갔던 가수 최도은이 ‘도은이 누나’ 혹은 ‘최도은 동지’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누나이자 동지인 최도은이 검은색 바지에 가죽 점퍼를 받쳐 입은 차림새로 내 앞에 나타났다. 170cm가 넘어 뵈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를 한 ‘여전사’였다. 노조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파업을 ‘게릴라식 파업’이라 했다. 나는 마치 밀림 속 요새에 자리한 제3세계 국가의 게릴라 투쟁본부에 잠입하여 여성 혁명투사를 접견하는 것처럼 그를 만났다. 최도은이 회색 점퍼를 입은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이 선배님, 고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엷게 웃었다. 선배라니? 난 그의 ‘이 선배’라는 호칭을 적당히 경계(?)하면서 파업집회가 예정된 조립1공장으로 함께 갔다. 거기서부터는 관리직 중견간부 같아 보이는 나를 향해 노조원들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그가 해결해 줬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짐작했겠지만, 그러니까 최도은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그런 가수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서 그들의 ‘투쟁의지’를 ‘선동’하는 노래 운동가다. 민중을 대상으로 노래하지 않는 가수가 없을진대 어쨌든 사람들은 그를 ‘민중가수’라 부른다.
1980년대, 닫힌 사회를 열어 젖히기 위한 민주화 투쟁 전선에서 ‘노래 운동가들’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노래는 압제체제와 권력자들을 비판, 풍자하는 한편, 거기 맞서 싸우는 민중에게는 든든한 응원가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의 그런 투쟁가가 필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당시 대중의 명성을 얻고 있던 상태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가수들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사랑’과 ‘서정’을 노래하고 있고,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전개됐던 아마추어 노래패들의 열정 역시 그 깃발을 내린 지 오래다. 이런 터에 노동운동의 현장을 제 발로 쫓아다니며 창칼 부딪는 ‘쇳소리’를 드높이고 있는 가수라니!
단숨에 말하는 대우사태
집회가 예정돼 있는 조립1공장으로 향하는 중에도 많은 노조원이 그에게 알은체를 했고, 간간이 멈춰 서서 노조 간부들과 곧 열릴 행사에 대해 뭔지 모를 얘기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멈춰버린 거대한 자동차 조립 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노스’를 조립하는 라인이었다. 우리는 부속이 덜 갖춰진 채로 눈높이에 매달려 있는 승용차 밑을 요리조리 피해 들어가 침침한 간이 휴게실에서 마주앉았다.
―대우사태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습니까?
노래하는 가수에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무턱대고 그런 질문부터 던졌던 것인데, 잠시의 주저도 없이 그 나름의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김우중 전 회장이 불법적으로 조성해서 횡령했던 비자금이 25조원입니다. 노조원 1만 명에게 노나 준다면 1인당 25억이에요. 그 돈이면 대우자동차 같은 회사를 30개나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대우사태는 노동자들의 땀과 국민의 혈세가 잘못된 자본가들의 놀음에 휘둘린 결과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생긴 부실을 정리해고와 외국자본에 헐값으로 팔아 넘기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죠. 기아 자동차에서도 1만 명을 해고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본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순전히 자본논리에 의해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백수가 돼버리는 게 현실입니다.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아십니까.”
그가 언급한 내용의 근거와 정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이쯤 되면 그는 노조 집행부의 홍보부장쯤은 되는 사람이지 파업현장에서 노래나 몇 곡 불러주고 떠나는 가수가 아니다.
―대우자동차 노조의 전속가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그렇게 이 회사의 상황을 잘 아십니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곳 노조와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노조 안에 ‘참소리’라는 노래모임이 있었는데 88년 그 모임의 지도 강사를 맡아 스물세 살 풋풋하던 나이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1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는 여기 와도 외부의 방문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얘기한 13년은 다만 대우자동차 노조와 관계해온 기간만이 아니라, 노래를 무기로 노동현장들을 누벼온 ‘가수’로서의 활동기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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