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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의 시대’를 사는 법|공공부문

私益을 키워야 公益이 살찐다

  • 권삼윤 tumida@hanmail.net

私益을 키워야 公益이 살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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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이 눈에 보이는 시설물에 한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도에서도 당연하게 나타나는데,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하다.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국가의 기본 틀이라 할 삼권분립 제도에서도 그런 현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가.

삼권분립 제도의 목적은 잘 알려진 대로 국가의 기능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누고 이들간에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게 해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하는 데 있다. 겉으로는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이 제도를 우리는 광복과 더불어 서구식 헌법을 베껴다 국가의 틀을 짜는 과정에 도입했다. 우리가 피와 땀을 흘려가며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거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그 운용과정에선 늘 문제가 생겼다. 제도와 의식 사이의 괴리,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그것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공짜’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헌법 운용의 역사가 어언 50년을 헤아리건만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가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에는 이러한 공공시설물과 민주주의 제도가 태어난 서구의 역사를 살펴보자. 그러면 개체와 공공, 사익과 공익의 관계, 나아가서는 제도와 의식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왔던 공공시설물은 광장이었다.

광장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 그 원형은 신전이 들어선 아테네의 성소(聖所)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평지에 자리잡았던 아고라(Agora)였다. 아고라는 그저 사람들이 모이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상품들이 그 효용성과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 교환되고 거래되는 시장이었을 뿐 아니라, 철인 소크라테스가 매일 오후면 찾아와 청년들을 상대로 문답법을 벌여 진리를 깨우쳐주려 했던 교육공간이기도 했다.



정치가들은 폴리스(Polis·도시국가)가 당면한 문제들을 들고 나와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토로했고, 시민들은 그것에 대해 반론을 폈다. 표현욕구가 강했던 시인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 연극배우들도 아고라를 찾아와 자신의 작품을 여러 사람에게 선보이고 평가를 받았다. 상품이 교환되고 거래되는 공간답게 대화와 토론과 비판 역시 자유롭게 오갔던 것이다.

기원전 507년 클레이스테네스가 민회(民會)의 구성을 평민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개편함으로써 비로소 열렸다는 ‘민주주의(demokratia·인민에 의한 지배)’도 아고라와 같은 열린 공간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니 아고라야말로 민주주의의 산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광장이 필요했던 까닭

그런 그리스를 정복해 유럽문명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던 로마제국은 아고라를 본따 ‘포로(Foro·영어의 ‘Forum’은 여기에서 나왔다)’라는 것을 만들어 도시 한가운데에 뒀다. 포로는 로마식의 아고라로서 그리스와 같이 시장이면서 동시에 정치와 예술 마당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로마가 시작됐다는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지금도 남아 있는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그때의 유적으로, 지금은 늘 여행객들로 뒤덮일 만큼 관광의 명소가 됐다.

그러나 포로는 아고라와는 사뭇 달랐다. 로마와 속주(屬州)의 각지를 연결하고자 대대적으로 길을 닦았던 ‘길의 제국’답게 로마는 포로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에게만 아고라 출입을 허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데는 포로의 개방성, 포용성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포로를 통해 공화제(res publicus)라는 또 하나의 민주정을 탄생시켜 민주주의 발전 도정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던 로마가 사라진 후에도 유럽의 모든 도시는 그 중심에다 플라자(plaza), 즉 광장을 뒀다. 그리하여 광장은 서구사회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광장은 그렇듯 만남의 공간이었다. 거기에는 대화와 토론이 있었다. 그들이 남들과 어울려 대화와 토론의 문화를 갖게 된 데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성과 옥외에서 지내기에 안성맞춤인 기후조건이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던 절실한 삶의 문제가 있었다.

건조지대인 지중해 연안에서는 나무보다는 흙이나 돌로 집을 짓는다. 따라서 벽은 두껍고 문이나 창은 작게 내게 마련이라 집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다. 그 덕분에 한낮의 찌는 더위와 밤의 냉기,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막을 수 있었으니 개인의 안전과 프라이버시 보호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서로 힘을 모으다 보면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있는 게 아니던가. 그들은 더 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터놓고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했고, 그런 목적에서 도시 한가운데에 아고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다뤄지는 문제가 바로 공익이었으니 그들의 공익 역사는 그만큼 유구한 것이다.

그들이 다뤘던 공익 아이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수호와 같은 방위문제였다. 서구사회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 전까지는 대체로 용병제를 채택했기에 방위비 부담은 늘 중요한 문제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페르시아제국의 공격을 받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공동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맺었던 델로스 동맹이었다. 그들은 말로만 돕자고 한 게 아니라 재원까지 갹출했는데, 전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그렇게 모은 돈을 다 쓰지 못했다. 그러자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남은 돈을 모두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단합을 상징하는 데 쓰자며 파르테논 신전을 축조했으니 그리스 역사에선 토론과 합의, 방위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가 없다.

空이었던 公

그들의 처지에서 공동체란 거대한 보험조직 같은 것이었다. 즉 하나의 이익공동체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익은 공익과 사익으로 이뤄지되 양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여서 공익의 확보 없이는 사익도 지켜지지 않으며, 사익의 증대 없이는 공익의 충실화가 쉽지 않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게 그들의 공익관이었다.

공익에 대한 논의는 시민사회의 성숙과 함께 근대에 들어와선 광장이 아니라 ‘대화의 집’이라는 의회(Parliament·‘말하다’는 뜻의 프랑스어 ‘parler’에서 나왔다)에서 행해지면서 그들의 공익수호 노력은 한층 정교해졌다. 그들의 광장의 역사, 대화의 문화를 더듬어보면서 감탄해 마지않는 것은 이미 2500년 전에 서구인들은 개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런 개인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개인의 자유와 발전은 공익의 확보에 의해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개체가 사회의 주인이 되어 끌고 가는 지금과 같은 개체의 시대에 왜 공익과 공공성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분명해진다.

그러나 조상 전래의 땅에 붙박이로 살았던 동양의 농경문화권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같은 동류(同類)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서로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의견교환이나 이해조정을 위한 공간이나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서구인들은 공동체를 상호부조를 위한 조직으로 생각해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모았다. 하지만 우리는 혼사나 부모의 상(喪) 같은 집안의 대소사를 가족과 친지, 이웃 등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해결하는 전통을 유지함으로써 이해관계가 다른 개인 혹은 집단에게서 아이디어나 힘을 얻는 데는 무관심했다.

이처럼 혈연과 지연이라는 자연발생적 요소에 매달렸던 탓에 이익지향적이지 못했으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얽어매고 감싸안을 수 있는 열린 공간 또한 마련하지 못했다. 그 시절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적 공간으로는 종묘(宗廟)나 사직단(社稷壇) 같은 것들이 있긴 했으나,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화나 토론을 위한 공간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만약 공익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최고권력자의 것이었을 뿐 일반 백성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니 백성들이 보기에 공(公)은 그야말로 공(空)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허약한 공공의식은 이런 역사·문화적 구조에 뿌리를 둔다.

이는 동아시아에 광장다운 광장이 20세기 중반,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주인으로 한다며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기에 앞서 옛 왕조시대 관청가를 헐고 텐안먼(天安門)광장을 조성함으로써 비로소 등장했다는 사실로도 얼마간 증명된다. 그렇게 태어난 광장도 내용을 보면 시민들의 주체적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화와 참여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권력자가 자신의 힘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 후 평양과 서울에도 그런 광장이 태어났으나 그곳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독재자에 대한 환호는 있었지만 시민문화는 좀처럼 싹트지 않았다. 여의도광장은 그나마 오래 가지 못하고 시민공원으로 바뀌었으니 광장은 아무래도 우리 체질엔 맞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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