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대한민국! 문화재를 파괴하는 나라

  • 주강현

    입력2005-05-03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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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의 고대 앙코르왕국(657∼1432년)이 전성기를 누리던 12세기 초에 세워진 앙코르와트사원. 둘레 6㎞에 달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미국 CNN방송은 지난해 처참하게 잘려나가고 있는 앙코르와트사원의 실상을 방영하여 세계인의 공감을 샀다.

    도굴꾼들은 기계톱을 동원하거나 원시적인 지렛대는 물론이고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사원 벽면과 석상을 잘라냈다. 불상은 머리통이 잘린 채 흉물스러운 잔흔을 남기고 있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이웃 방콕으로 넘어가서 국제시장으로 팔려나간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뜻있는 한국인들도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더 나아가 6·25전쟁 기간을 통하여 이와 같은 도굴과 파괴가 한반도 전역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벌어졌음을 고려할 때 남의 일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을까.

    현재 중국언론에서는 양쯔강 중류에 건설되고 있는 산샤(三峽)댐 건설 속보를 속속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양쯔강에는 불후의 명작‘이소(離騷)’의 작가인 초나라 굴원(屈原)의 옛집과 삼국지의 무대 백제성(百帝城)이 있다. 상류의 펑제(奉節)에서 하류의 이창(宜昌)에 이르는 곳곳에는 명·청조의 누각을 비롯한 수천 점의 중요 문화재가 산재한다. 유구한 양쯔강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이 남긴, 수량으로 알 수 없는 많은 양의 매장문화재가 숨겨진 곳이다. 또한 강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해온 이들의 오랜 취락과 그네들의 삶의 양식이 간직한 문화총량은 도저히 계산 불가능할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보도는 천편일률적이다. 수몰될 8만명의 이주 완료, 세계 최대규모의 댐, 280억달러의 예산, 연간발전량 850억㎾/h 등이 거론될 뿐이다. 세기적 대역사로 중국정부의 21세기 야심작임에 틀림없으나 문화재파괴는 ‘보도통제’되고 있다. ‘현대화 신화’에 몰입한 중국정부의 개발드라이브 정책에서 ‘거추장스러운’ 문화재보존 따위는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이다.



    샨샤댐보다는 작지만 우리에게도 크고작은 댐, 저수지, 간척지, 공장부지, 항구, 도로, 아파트단지 등이 건설되었거나 앞으로도 속속 들어설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정처없이 쫓겨나거나 파손되었다. 이런 우리에게 중국의 샨샤댐으로 인한 문화재 파괴를 무조건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원목을 ‘고급 취미’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면지를 쓰자는 구호만 들릴 뿐 종이낭비 지수도 세계적이어서 나무 소비량이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이 남방으로 진출하여 원시림을 벌목, 일부는 들여오고 일부는 재가공하여 제3국에 수출한다. 벌목으로 인하여 숲은 줄어들고, 수천년간 숲에 의지하여 살아온 소수민족들의 문화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있다. 단순한 문화 차원이 아니라 삶의 근거지 자체가 소멸되고 있다.

    이런 일은 멀리 극동시베리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는 세계의 무형문화 파괴에 한국기업이 일조하고 있는 사례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이처럼 문화유산 보존에 관한 문제는 일국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국제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와 산업화, 현대화 등의 담론으로 무장한 개발론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문화유산의 보존이란 담론과 대척점에서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의 2001년 현주소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의연한 전통, 멈추지 않는 도굴 행렬

    오늘의 문화유산 보존을 가로막는 최대문제의 하나는 역시 절도와 도굴이다.

    2000년 국내 고고학계가 세운 커다란 성과 중 하나는 고려말 박익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면 풍속화 발굴일 것이다. 그런데 서쪽면과 동쪽면에 그려진 인물행렬도를 통하여 고려 후기 남녀 복식과 생활풍속을 확인케 해준 박익의 무덤도 이미 도굴범에게 털린 상태에서 발견되었으며, 도굴범들은 한쪽 벽면을 허물어 풍속화를 망쳐놓은 상태였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무령왕릉과 다호리고분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적인 발굴 야사를 들추어보면, 도굴범들이 한번 휘젓고 지나간 다음에 고고학자들이 뒤늦게 ‘역사적 발견’이란 식으로 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발굴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도굴범의 솜씨가 한 수 위라는 말이다.

    부질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도굴범을 국가공무원 자격을 갖춘 매장문화재발굴단으로 변신시킨다면? 물론 농담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성공 사례도 있다. 광복 직후에 고고학발굴단을 만들면서 한때 도굴세계를 주름잡던 이들을 ‘사상개조’해서 발굴단에 편입시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도둑놈 한 놈을 열 명이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도굴범을 막기 위한 감시원 숫자도 터무니없이 적다.

    가령 경주는 시내뿐 아니라 시 외곽에도 문화유산이 지천이다. 도심에 자리잡은 유산들은 사람 눈에 잘 뜨이는 관계로 그런 대로 보존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도심 외곽의 유산들이다. 인적조차 드문 산길에 자리잡거나 숲속의 호젓한 왕릉을 기십명밖에 안 되는 경주사적관리소감시원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문화재에 대한 제반 규제는 정부에서 행하지만, 관리는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지자체에서 떠맡는 현실 때문이다. 도굴범에게는 천혜의 작업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격. 더욱이 쓸쓸한 산야에 퍼져 있는 민묘(民墓)는 아무런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는 형편이다.

    지난해 11월26일 한나라당 하순봉의원에게 제출된 국감자료에 의하면, 경북지역에서만 1997년 사적 24호 진덕왕릉, 1998년 국보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이 각각 도굴됐다. 이런 식으로 경북에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국보와 보물 등 12건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도난·도굴·화재로 파손되거나 분실되었으며 지방문화재는 무려 33건이 훼손되었다.

    등록이 되어 있고 간판이라도 서 있기 때문에 세인의 주목을 받는 지정문화재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문제는 비지정문화재다.

    불교 조계종은 전국 각지의 산야에 흩어져 있는 사찰의 비지정문화재가 문화재 절도범들의 집중 표적이 되자 비지정 문화재 보호를 위한 법령을 마련해 정부에 입법청원했다. 전국 사찰에서 관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이전 문화재급 유물은 모두 1만5000여 점에 이른다. 문제는 상당수가 비지정이며, 도난의 주공격대상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9월4일 문화재청은 비지정문화재 절도사범에 대해 2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을 정한 문화재보호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다. 비지정문화재 절도사범은 6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나 단순절도범과 큰 차별성이 없어 재범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실 도굴범들에게는 도굴이 하나의 직업일 뿐으로 대부분 비지정문화재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세인들은 지정문화재가 월등히 뛰어나고 비지정문화재는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정문화재가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또는 사료가치상으로 중요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여 비지정문화재가 덜 중요하거나 문화재적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비지정문화재가 빛을 못보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비지정문화재가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개인 소장가를 비롯하여 곳곳에 산재해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것이 많다는 데 있다. 따라서 비지정문화재 보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도굴과 도둑질은 무형문화 쪽에도 예외가 없다. 구체적 사례로 장승절도사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수백년간 우리 곁에서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온 장승들이 사라지고 있다.

    전남 강진 병영을 지켜주던 자그마한 벅수 한쌍, 경남 사천군 축동리의 벅수 한쌍도 사라졌다. 현재 그런 대로 보존되고 있는 다른 장승들도 무형문화정책의 무관심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제주도에서는 동자석이 수난을 겪고 있다. 무덤을 지켜주는 동자석은 자그마한 키에 완상적 취미를 자극하는 미묘한 표정 때문에 오래 전부터 수난을 겪어 왔다. 우선 크기가 작아 훔치기 편하고, 자동차 트렁크에 쉽게 실리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동자석이 놓인 곳은 모두 마을에서 떨어져 한적한 숲속 무덤들이기 때문에 도둑들이 마음놓고 훔쳐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훔쳐낸 동자석이 수만 기를 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제주도에 가도 진짜 동자석은 숫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차제에 도난당한 장승 중 대표적인 것 2기를 지명수배한다.



    도갑사를 지키던 도갑사의 호법장승. 1989년 무렵에 사라졌다. 도갑사 들어가는 길목에 한 쌍이 서 있었다. 조선후기에 호남일대에서 널리 세워졌던 전형적인 돌장승이다



    마을의 안녕을 빌던 장승으로 해마다 장승제를 지내고 소뼈를 목에 매달았다. 역신과 악귀를 쫓는데 효험이 높았다고 한다.

    문화유산 보존의 최대 논란거리는 역시 개발인가 보존인가 하는 해묵은 과제 아닐까. 지자체의 빠듯한 살림 속에서 한푼이라도 더 벌어들이겠다는 경제논리가 문화논리를 앞서면서 문화유산 분야에도 속속 문제가 터지고 있다. 신자유시장의 밀어붙이기는 문화유산에서도 예외가 없다. 몇가지 사례만 살펴보아도 개발의 진통이 무척 심함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용인 난개발이 문제가 되어 신문지상을 뒤덮었다. 그 난개발의 파도는 문화재도 가차없이 폐기시켰다. 가령 구성면 보정리에 있는 예진산(일명 임진산)은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성을 쌓고 왜군의 북진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고 97년 개발 도중 조선시대 현자총통 2정이 발굴되기도 했으나, 깡그리 절토된 뒤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서해안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지인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 패총단지도 무분별한 개발로 크게 훼손되었다. 시화간척지에서 시흥 신도시를 잇는 2㎞의 도로공사가 진행중인데, 학계나 전문가들이 거세게 반대하였지만 도로공사는 강행되었다.

    이곳에서는 흔적이 뚜렷한 선사시대 주거지를 비롯해 빗살무늬 토기 파편과 각종 토기류 1000여 점이 발견됐다. 그러나 지금은 이 도로공사 때문에 주거지가 완전 파괴돼버렸고 처음 유물의 존재를 알려준 패총도 포클레인 바가지에 뭉그러져 버렸다. 물론 오이도 주민들과 시흥지역 시민단체, 시의회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인천직할시에 소속된 사적 ‘녹청자도요지’를 만나려면 골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 제211호 ‘녹청자도요지’가 원형을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로 골프장 필드(잔디 땅)에 반쯤 묻혀 있기 때문.

    인천시 서구 검암동 438 국제컨트리클럽 구내 17번홀과 18번홀 사이에 반지하 상태로 있는 이 ‘녹청자도요지’는 10세기경(고려시대 초기) 토기에서 청자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에 생산되었던 자기를 굽던 곳으로 우리나라 초기 청자연구에 귀중한 도요지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65년 중앙박물관과 인천시립박물관이 합동으로 발굴조사, 70년 6월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211호로 지정된 곳이다.

    지난 68년 국제컨트리클럽측은 이곳에 골프장을 조성했다. 물론 보호막사를 만들고 보호망을 쳐놓긴 했으나 이 일대를 높게 성토하는 바람에 도요지의 위치가 낮아져 물이 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유구(굴뚝부위) 4곳과 요상, 굽받침(도지미) 등은 78년 보호막사 증축공사 과정에서 건축폐자재와 뒤섞여 소실돼 복원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측이 93년 10월 현지 조사에 나서 도요지 부지 5809㎡중 5703㎡가 사실상 골프장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 인천시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제대로 보호되고 있지 않은 실정.

    경기도 고양시에서는 세수증대를 위해 추진하다 주민 반대로 무산됐던 자연휴양림 개명산과, 문화재보호구역인 서삼릉 인근 고종황제 후궁이자 의친왕 생모인 덕수장씨 묘역에 골프장건설을 재추진해 시민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서울컨트리클럽이 추진중인 골프장 편입부지는 전체면적의 73.4%인 31만2500㎡가 개발제한구역내 임야인데, 덕수장씨 묘역이 편입부지에 둘러싸인 채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또 올림픽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는 올림픽스포츠코퍼레이션은 최근 주민 86명의 동의서를 첨부해 벽제동 산2의 1일대 29만8000㎡ 에 9홀 규모의 월드컵골프장을 신설하기로 하고 도시계획변경을 추진중이다. 월드컵 골프장이 들어설 경우 오랜 수목들로 우거진 19만6300㎡의 임야가 사라지기 때문에 자연환경 훼손과 재해발생을 우려한 주민들과 고양시민회 등 시민단체들이 줄곧 반대해왔다.

    보존과 개발 문제에서 정작 보존의 주체가 되어야 할 단체가 도리어 파괴에 나서는 악순환도 계속되고 있다.

    봉정암 헬기장 공사로 인한 계곡 파괴가 대표적 사례. 설악산 한가운데 있으면서 우리나라 사찰과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봉정암은 암자 뒤 계곡에 불법으로 헬기장을 조성하면서 주변의 수목과 바위를 마구 훼손하였다. 국립공원이자 천연기념물인 설악산이 불법 헬기장 조성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사찰측은 93년 요사채를 신축할 때도 허가면적을 어기고 주변을 훼손했으나 원상복구시키지 않았다. 관리당국의 허술한 단속과 ‘솜방망이 처벌’이 설악산 훼손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정작 인제군 당국은 훼손 현장에 대한 원상복구 여부는 상급기관인 문화재청에서 결정할 사안이라며 소극적인 자세인데다, 공사중단 지시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강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 못하고 있는 등 관리능력의 허점도 드러냈다.

    드릴로 구멍뚫는 복원 작업?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논란은 그치지 않는다. 익산미륵사지를 갈 때마다 느끼는 의문점의 하나는 왜 그렇게 ‘두부썰듯’ 반듯하게 돌을 잘라서 복원했는가 하는 점이다. 시간이 걸리고 돈이 들더러라도 손작업을 하여 돌을 챙겼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경기도와 광주군도 남한산성을 복원하면서 기존 화강암석과 막돌 대신 기계로 ‘두부 자르듯’ 자른 화강암석으로 공사를 진행해 문화유적을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식의 문화유적 파괴 행위는 이미 북한산성과 경기도 이천 설봉산성 등의 복원공사에서도 나타났다.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북한산성 줄기에 네모반듯하게 기계로 자른 화강암들이 ‘무식하게’ 옹벽을 들이미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화강암에는 드릴로 구멍을 뚫어 잘라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돌이끼가 끼고 풍화된 화강암석과 막돌로 쌓아올려 고색창연하던 남한산성은 오간 데 없다. 복원이 아니라 새로 신축한 성벽 같다.

    더군다나 성벽 복원에 소중하게 사용됐어야 할 원래의 돌들은 새로 쌓은 성벽 안쪽에 묻히거나 길바닥에 나뒹굴어 복원의 의미를 무색케 했다. 거금을 들인 남한산성 복원의 현주소다.

    사적지로 지정되었다손 치더라도 현실은 명목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변산반도 부안의 진서리 도요지에 가면 고작 표지판 하나 동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다. 붉은 흙을 빼놓고는 어디서고 도요지란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

    연천군 전곡리 일대는 1979년에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구석기 유적지로 잡초만 무성할 뿐 방치된 상태. 임시 컨테이너 박스에 관리인조차 없이 쓸쓸하게 있다.

    사적 제268호인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기원전 50만~30만년 전의 아슐리안계 전기 구석기인 양면 핵석기와 돌찍개, 클리버, 돌긁개, 돌망치 등 2681점의 유물이 발견된 곳으로 대부분의 유물이 서울대박물관과 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특히 아시아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주먹도끼와 찌르개가 함께 발굴돼 기존 서양 중심의 양대문화권 이론을 뒤엎는 등 당시 세계학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1000여평의 유적지는 울타리도 없이 좁다란 진입로에 방진막용 비닐과 짚더미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유적지 발굴지점을 표시하는 현황판조차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다. 심지어 주변 23만평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됐으나 일부 보호구역에 모직공장과 사슴목장이 들어서 주변 구릉지 곳곳이 패고 돌화살촉 등 구석기유물이 파손된 채 널브러져 있다.

    익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절터는 두말할 것 없이 백제문화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곳. 그러나 관광객이 온다 싶으니까 미륵사지 앞 도로는 음식점, 찻집, 심지어 노래방이 마구잡이로 번성하고 있다. 일종의 유원지다.

    거기다가 미륵사지에서 겨우 1km 떨어진 곳에 아파트 업체가 아파트건립을 신청해놓은 상태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아파트가 지어진다면 해발 428m밖에 안되는 미륵사지는 아파트 조경물로 전락할 처지다.

    2001년에는 울주 반구대암각화가 논란의 대상이 될 전망이다. 지자체 쪽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그 중요한 유적지를 그대로 놔둘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반구대 일대를 선사유적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비슷비슷한 음식점과 각종 위락시설이 들어차서 뛰어난 풍광과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암각화 유적의 경관을 망칠 것이 뻔한 일. 관련단체들이 들고일어난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사례는 경북 제2석굴암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석굴암을 발견하고 지정하는 단계에 미리 사유지를 매입해 모두 사적지구로 지정하지 못한 결과, 주변이 온통 음식점으로 들어차서 유적을 보러 왔는지 음식을 먹으러 왔는지 본말이 전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본질을 왜곡시킨 개발이 가져온 병폐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울주반구대의 선사문화공원이 이런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서산 해미읍성을 가면 텅빈 들판 같은 성안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반면에 순천 낙안읍성을 가보면 고즈녁한 풍경 속에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다가온다. 해미읍성은 조선후기 이래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이 된 채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오고 있는 반면에 낙안읍성은 일종의 ‘살아 있는 민속촌’으로 ‘활용’한다.

    낙안읍성 주민들은 실제 성에서 생활을 하면서 현실 속에 역사를 용해시키고 있다. 삶과 문화유산이 하나가 돼 있는 셈. 그런 점에서 낙안읍성이 100점이라면 해미읍성의 보존실태는 50점이다.

    그렇다고 낙안읍성 주민들이 행복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보존은 늘 개발에 대한 거부감과 맞물리기 마련. 낙안읍성 주민들은 가옥개조 등에서 불리한 조건을 감내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서울의 한옥지구에서도 나타났다. 문제는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민들이 얻는 혜택이 과연 충족할 만한가에 있다.

    문화재를 보존하면서도 활용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시가 (주)문화집단 예문관에 위탁관리를 맡긴 운현궁의 훼손이 그 어려움을 보여준다. 전통찻집을 운영하면서 운현궁내 이로당의 마룻바닥과 벽체, 문틀 등에 구멍을 뚫는 등 문화재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논란을 야기한 것이다.

    도심 전체로 문제인식을 확대시켜보면 더 큰 문제로 나타난다. 서울 북촌의 한옥지구에 일정 부분 개축을 허용하자마자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여러 채를 사들인 사람들이 연립주택을 짓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개조, 적극적인 전통문화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벨트로 묶여서 오랫동안 재산권행사에 극도의 제약을 당하면서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주민의 입장도 있다. 이같이 문화유산보존과 삶의 조화는 쉽지가 않다.

    서울시는 문화재보호물 또는 보호구역의 범위와 건축물의 높이를 제한하는 내용의 서울시문화재보호조례개정 조례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조례안에 따르면 4대문 안 국가지정문화재의 보존범위는 외곽경계로부터 100m, 서울시지정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은 40m 이내다. 이 지역 안에서 건축물을 지을 경우, 사전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건축물을 지을 때 보존범위는 숭례문은 19m, 흥인지문은 20m, 우정총국은 6.5m, 정동교회는 12m를 초과할 수 없다. 이 경우에도 문화유산보존과 삶의 조화 문제가 등장할 것이다.

    지난해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하남시장과 문화재청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한 일이 있다. 문화개혁시민연대는 ‘하남시 고대도시유적 보존대책을 위한 기자회견’을 갖고 ‘하남시일대 고대도시유적이 더 이상 훼손 파괴돼선 안된다’고 촉구하였다.

    개발제한구역정책의 완화, 매장문화재에 대한 조사 발굴없이 허가된 6000여 동의 축사건축, 문화재청과 하남시의 책임전가 등을 하남시유적이 파괴되는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하남시 관계자의 말은 문화유산보존과 삶의 조화가 쉽지만은 않은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30년 동안 상수원보호구역으로서 묶여 있던 그린벨트로 인하여 재산권 행사를 못한 지역에 또다시 문화재보호구역이란 이중 굴레를 씌우는 것이 온당하냐는 항변이 그것이다.

    경주시내의 고분들이 집결해 있는 인왕동, 황오동, 노서동 등에는 수백가구의 민가가 있다. 심지어 고분의 정상 부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이렇게 이미 점유하고 있는 민가에 대한 대책마련은 엄청난 보상 비용 때문에 시기를 놓친 감이 짙다.

    ‘예고된 참사’ 풍납토성 훼손 사건

    문화유산보존과 삶의 조화가 문제가 된 최대의 사건은 역시 백제유적 풍납토성 발굴현장 훼손사건이 아닐까. 주민들이 굴착기로 발굴현장 1200여평 가운데 150평의 유적과 대형 수혈유구(구덩이)를 흙으로 덮고 건축자재를 쌓아 일부 파손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마침 유물정리작업을 위해 현장을 찾은 한신대 발굴단 학생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면서 중단됐다.

    파손된 유구는 저장시설과 집터 등 7곳으로 이중 4곳은 단순히 흙으로 덮여 복원이 가능하지만 1곳은 4분의 3정도가 파괴돼 복원이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결국 이번 사건이‘예고된 참사’였으며, 그동안 발굴기관과 주민들한테 떠넘기고 뒷전에서 원론적인 얘기만 되풀이해온 문화재 당국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주민보상책 등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조치를 서둘러 내놓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민 보상에 들어갈 예산을 마련하기에는 문화재청이나 서울시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만큼 정부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발굴조사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면서 생긴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하던 주민들에게 발굴 경비 부담은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었을 것이다. 권오영씨(한신대 국사학과)는 발굴현장의 당사자로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의 누이이고 어머니 같은 이들을 누가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간 것인가. 그러나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발굴단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5월8일 작업은 일시 중지됐고, 마침내 13일 유적훼손 행위가 자행됐다. 맹자는 위정자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행위로 백성을 그물질하는 짓, 즉 망민을 경계했다. 법을 어긴 백성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몰고 간 책임은 위정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문화재를 훼손한 행위는 중대한 범죄행위임이 틀림없고 이러한 사태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발상의 대전환이 없이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유적 훼손사태가 불을 보듯 뻔하고 망민되는 백성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풍납동의 현 사태는 유적보존과 학술연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만명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14년 전인 1987년 여름, 지금은 시화호로 변한 화성군의 음섬과 형도 등지를 수차례 답사한 적이 있다. 그때의 답사노트는 당시의 생생한 민중생활사를 증언해준다. 지금은 사라진 음도 선착장, 시화호에 한가롭게 떠도는 돛배들… 그러한 ‘풍경과 상처’가 빛바랜 사진첩처럼 다가온다.

    음섬에는 임경업장군을 비롯한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등이 모셔진 당집이 하나 있었다. 굿그림도 8점이 걸려 있었다. 물론 지금은 사라졌다.

    형도에는 서해안을 가로지르는 봉수대가 아주 착실하게 쌓아올린 돌담 형태로 남아 있었다. 봉수대 아래는 온통 바위투성이의 동굴도 있었으며 동굴에는 마고할매 신화가 남아 있었다. 물론 시화호 방조제를 막기 위한 채석작업을 거치면서 봉수대는 물론이고 마고신화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봉수대는 ‘비지정 문화재’란 이름 때문에 무참히 파괴되었다.

    지금이야 생태계보존구호가 ‘구국의 함성’처럼 드높지만, 당시만 해도 갯벌문제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다. 시화호를 만든 장본인들의 정당성에 관한 논란은 차치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시화호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 소멸의 길을 걸었다는 데 있다. 민중의 ‘무형문화’에 대한 인식부재가 빚은 초라한 현실이다.

    14년 전의 현지답사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문화유산에서 무형문화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국보, 보물 중심의 문화유산 논쟁은 나름의 가치는 있지만 문화라는 개념은 이들 문화유산을 뛰어넘는, 더 넓은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다.

    같은 중요 문화유산 중에서도 국보 및 보물류는 그런 대로 보존되고 있지만, ‘무자격자’ 대우를 받는 비지정문화재나 무형문화 등은 무참하게 파괴되어도 응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언론보도의 주류적 경향도 ‘호들갑스럽게’ 중요문화재의 파괴에 대해서는 과도한 지면을 할애하지만 무형문화의 파괴나 비지정문화재에 대해서는 지면을 아끼거나 아예 무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식은 국보나 보물급의 훼손은 누구나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비지정문화재나 무형문화의 도굴 파괴 소멸 등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것으로 지나치고 만다.

    옹기문화가 사라지고 플라스틱문화로 대체된 현상, 초가집이 일시에 퇴장하고 슬레이트나 정체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붕들로 대체된 현상 등에 대하여 별다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문화적 불감증이 우리사회를 지배한다. 한마디로 문화재관이 전적으로 잘못된 결과이며, 편향된 교육의 결과가 아닐수 없다.

    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다는 비난과 분노의 목소리는 늘 들려온다. 2000년에는 풍납토성 문제만 가지고도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매스컴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유독 풍납토성만 엉망이 돼버린 것일까.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어떤 사건만 터지만 그제서야 우르르 몰려다니는 냄비근성이 문화유산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튼 ‘문화유산’하면 유형문화만을 지칭하는 문화정책은 근본적인 오류다. 오늘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전환이 요청된다. 근본적인 시각전환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유형에서 무형문화로의 인식전환이다.

    도대체 이 사회는 균형잡힌 문화관이 부재한 사회다. 한 마디로 문화유산 분야에서도 밥그릇 챙기기가 국가정책을 좌우한다. 이래서야 백년대계의 문화정책을 세울 수 없다. 장관이 백번 바뀌어도 문화유산 정책을 주무르는 ‘마피아’들의 손아귀에 머물 뿐이다.

    2000년 여름에 ‘한국역사민속학회’ 심포지엄에서 이필영 교수(한남대박물관장)는 문화재지표조사에서 민속문화의 소외현상을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다. 많은 이들이 이에 호응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개선된 것은 하나도 없다. 국회 문광위원들 중에 유형과 무형문화의 변별성과 정책적 진단을 옳게 해낼 수 있는 의원은 몇명이나 있을까.

    고고학 중심의 문화재 편향

    문화재보호법부터 따져보자. 제1장 총칙 제2조에 의하면, 문화재는 성격에 따라 1) 유형문화재 2) 무형문화재 3)기념물 4)민속자료로 구분된다. 문화재관련 법령을 보면, 유형문화와 기념물은 대체로 고고학 분야가 담당하고, 무형문화재와 민속자료는 민속학분야가 주로 취급하는 문화재로 보인다. 그만큼 민속학 분야가 다루어야 할 문화재 비중이 적지 않음을 일러준다.

    고속도로 건설을 하게 되면 반드시 사전에 ‘지표조사’를 하게 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내조사보고’ 따위의 보고서가 그것. “땅만 파면 유적”이란 말이 나오듯이 수천년, 수만년을 살아온 인구밀집지대인 한반도에서 유적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문제는 그들 보고서의 태반이 ‘고고학보고서’라는데 있다. 일부 대학에서 ‘고고민속’ 식으로 생활사편을 넣는 경우가 간혹 보이지만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속도로 건설로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석곽묘, 도요지, 선사시대 집자리 등 매장문화재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 매장문화재가 아무리 중요해도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몰지구에서 잠기는 것은 매장문화재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잠겨 역사에서 사라져버린다. 각각의 마을은 오랜 역사와 풍습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마을의 민중들이 누려온 삶의 무형적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필영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적어도 문화재보호법에 보이는 문화재지표 조사는 사실상 협의의 매장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말뜻 그대로 문화재를 전반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문화재보호법상의 지표조사 개념은 매우 모호한 것이며, 이에 따라 문화재지표 조사의 대상과 범위도 합리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표조사개념의 모호성은 건설공사의 관련담당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문화재관련 전문가들로 하여금 ‘지표조사=고고학 중심의 매장문화재조사’로 인식하게 하고, 또한 그러한 잘못된 관행으로 한국의 문화행정에 공백과 파행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99년 12월, 문화재청에서 펴낸 ‘개발사업과 문화재보존, 문화재지표조사와 사전협의’라는 소책자에 보면,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일찍이 거론하고 있다.

    “지표조사는 매장문화재의 분포 범위를 확인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러나 매장문화재뿐만 아니라 조사대상 지역 안에 있는 모든 문화재를 확인해야 한다. 유형문화재는 물론 의식주, 풍속 등에 관한 민속자료와 전설, 민담, 민요, 방언, 가족제도 등 유·무형의 자료들, 그리고 천연기념물 등 자연유산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특히 개발 예정지역에 대해서는 그 지역의 전통문화가 개발로 인하여 단절되는 일이 없도록 빠짐없이 자료로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표조사를 위한 연구진에는 고고학전문가를 비롯하여 필요에 따라서 역사학, 민속학, 지질학, 고생물학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할 경우가 있다.”

    문화재청 자체에서 발간한 문건상으로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권장사항일 뿐, 문화재보호법상의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나마 이러한 인식에까지 이른 것만도 매우 고무적인 것이지만 아직도 문화유산지표 조사하면 고고학 분야가 절대적이다. 분명한 편향일 뿐 아니라 정책적 오류다. 어떠한 경우에도 편향은 결코 상서롭지 않은 결과를 빚을 것이다.

    정부의 문화정책은 특정 학문 분야의 세력판도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 민중의 생활사를 기술하지 않으려는 오늘날의 편향된 문화관은 분명한 편향이다.

    엊그제의 삶과 오늘의 삶이 던져주는 전통을 아예 무시하고 오로지 과거로만 복귀하려는 이상열기는 올바른 문화관이 아니다.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있다’는 세간의 걱정은 전적으로 유형문화의 파괴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선사유적이 깨지는 것을 무시하는 태도도 문제지만, 수백년된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현실에 무감각한 우리들의 그릇된 문화유산관이 더 큰 문제다.

    당대의 삶의 전통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어야만 모든 문화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평상심이 길러질 수 있는 법. 오늘의 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거의 것이라고 제대로 지켜낼 리가 없다. 오로지 박물지적 취미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수집거리로서의 물적대상화만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는 문화유산관을 올바르게 심어주는데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한다.

    결론은 분명해진다. 온갖 문화유산에 대한 파괴와 소멸을 걱정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무성하지만 정작 주민의 생활사, 무형의 전통이 소멸되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는 현실이다. 고고학적 토기의 발견은 나름대로 고고문화사적 의의가 분명히 있지만, 일제시대 사라져간 황칠전통의 재발견은 현실적인 문화산업창출이란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유산 중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보관창고인 판전과 더불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이 지정되었고, 종묘가 지정되어 도합 3개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목각에 새겨진 불경 그 자체의 소중함이 돋보이며, 팔만대장경 전산화작업으로 대중이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일본의 신수대장경이 전세계에 널리 퍼져서 국제불교학의 중심서로 기능하고 있음에 반하여, 우리의 팔만대장경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에 지나지 않는다. 전산화에 성공하면서 겨우 보물창고를 벗어났다.

    600년 역사를 지닌 종묘의 뛰어난 건축물도 중요하지만, 종묘가 갖고 있는 국가의례로서의 제사기능과 이에 수반되는 종묘제례악의 무형적 자산이 그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을까.

    2001년은 문화관광부가 정한 ‘지역문화의 해’다. 도대체 지역문화란 어떤 문화를 기반으로 설정해야 할까.

    축제를 예로 살펴보면 도저히 축제라 할 수 없는 기획성 이벤트만 난무하고 있다. ○○아가씨선발대회, 백일장, 경품뽑기 따위의 천편일률적인 행사를 펼쳐놓고 지자체는 자신들의 축제랍시고 홍보에 열중한다. 많은 돈이 탕진되고 있으며, 이를 통제하거나 감시할 기구도 거의 없는 지경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강릉단오제같이 역사적인 축제를 수백년간 이어오는 곳도 있으며, 함평 나비축제같이 새로운 축제지만 발상을 바꾸어서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성공사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축제들이 국적불명, 역사불명의 조잡한 이벤트성 축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동안 지역단위에서 이어져온 무형문화의 토대를 깡그리 무너뜨린 결과다. 문화적 전통의 토대가 무너진 상태에서 어떤 지속적인 지역문화의 창출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역문화의 모범적 사례와 실패사례 몇가지를 점검하며 실체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 본다.

    첫째, 경남 창녕군 영산읍의 모범사례부터 살펴보자. 민족해방의 봉화를 치켜든 3·1절 주간. 영산사람들은 어김없이 싸움판을 벌인다. 작은 읍내는 온통 축제 도가니로 빠져들어 골목들은 부산하게 오가는 인파들로 메워진다. 3·1절 기념행사를 이처럼 거족적으로 거행하는 곳이 또 있던가. 왜병이 그토록 겁냈다는 홍의장군의 주무대이자, 기미년 3월13일 남쪽에서 가장 빨리 3·1운동의 깃발이 올랐던 영산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작은 읍내에도 불구하고 국가지정문화재(25호, 26호)가 2개나 나왔다. 그 하나는 나무로 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승패를 가르는 쇠머리대기로 우전(牛戰), 목우전, 나무쇠싸움 등으로 불린다.

    다른 하나는 성 안팎을 동·서편으로 갈라서 싸우는 영산줄다리기다. 또한 영산에는 단오 때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호장(文戶長) 굿이 벌어져 가위 ‘놀이문화의 메카’로 선언해도 괜찮을 성싶다. 이렇게 큰 행사가 완전히 민간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영산사람들의 조직력은 대단하다. 짜임새 있는 놀이체계와 일사불란한 진행은 어느 판에서도 맛보기 어렵다.

    무형문화가 얼마나 소중한 삶의 장치인가를 영산읍내는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굳이 먼 외국의 사례를 들 것도 없이 이웃 일본에서 지역단위 축제인 마쯔리를 면면히 이어오는 모범사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으로 지역문화가 살아 있는 지역이 몇군데나 될지 자못 의심스럽다. 줄다리기만 해도 과거에는 수천, 수만개 마을에서 행해졌던 보편적인 무형문화였지만 거의 사라졌다.

    금년 대보름에도 전라도 부안 김제 고창 등 일부 줄다리기가 남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줄다리기가 벌어졌을 것이다. 짚을 꼬아서 암줄과 수줄로 나누어 대동적으로 펼치는 이 뛰어난 무형문화는 정부는커녕 지자체의 주목도 받지못한 채 급격히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 바로 우리시대에 중요한 무형문화재들이 소멸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지역문화의 해’에 무형문화의 지역적 정체성을 분명히 따져보지 않고 또 한차례 일과성 행사로 1년을 보낸다면, 또 한번의 낭비성 행사에 불과할 것이다. 도대체 문화관광부는 왜 이렇게나 소중한 무형문화에 대하여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는가.

    신화는 훌륭한 문화관광 상품

    둘째, 분명한 실패사례의 하나로 울산의 처용암을 꼽아본다. 문화와 환경의 절대관계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삼국유사’에서 처용이 바닷가에서 춤을 추었다는 처용암. 황성동 세죽리 앞바다의 처용바위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증하고 있건만 화학단지에서 불어오는 공해로 바다는 찌들고 주민들은 보상받아 떠나고 말았다. 제를 지내던 당집의 나무도 죽어 있어 꼭 처용바위의 처지를 웅변한다. 처용 시비(詩碑)도 세워두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나마 매립되어 처용바위 자체가 사라질 판이다.

    처용암의 현장을 문화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은 금동관을 물려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는 부족하다. 처용암의 현실을 비판하였더니, 혹자는 “한낱 구전으로 전승되는 현장이 무슨 문화재적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반박하였다. 문화재란 것이 그야말로 재산적 가치인 ‘재(財)’라는 물질적 개념만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공주 이야기만 가지고도 훌륭한 문화를 재창조하여 국부에 도움을 주는 외국사례를 들이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구전 역사의 현장, 신화의 현장 따위를 문화관광화시키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오늘의 현실에 알맞은 새로운 문화로 재창출하는 노력없이 21세기 문화창조는 불가능하다. 편향된 문화유산관이 빚어낸 우리시대 문화유산보존실태의 슬픈 자화상이다.

    셋째, 우리가 소홀히 지나치고 있으나 문화사적으로 소중한 사례를 예시해본다. 얼마 전에 충남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서해안 보령지방의 독살을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독살이 문화재로 지정되기는 처음. 독살이란 바닷가에 돌로 웅덩이를 만든 것인데 밀물을 타고 들어온 고기가 독살에 갇히면 썰물 때 잡아내는 전통 어업기술이다.

    독살은 비교문화사적으로 재미있는 흐름을 보여준다. 멀리 오키나와에도 독살이 전해진다. 오키나와의 수많은 섬마다 독살이 있어 지금도 독살로 고기를 잡는다. 독살의 운영 권한을 개인의 재산으로 인정하는 것도 우리와 같다.

    유럽에서도 네덜란드 같이 간석지가 발달한 곳에는 곳곳에 독살이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해류를 따라서 북상하면 제주도가 나오고, 제주도의 곳곳에도 독살이 전해진다. 제주도에서는 특별히 ‘원’이라고 부르는데 마을 공동소유가 많다. 즉 오키나와로부터 제주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서 북쪽까지 하나의 띠를 형성하면서 독살문화가 발달했다. 제주도와 오키나와에 원시형 독살이 많다는 것은 섬 문화에 고형이 존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독살을 통해 해양문화에서의 동아시아적 공통점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서 독살문화는 급격히 퇴장하고 있다. 연근해 어족이 사라지고 개펄이나 모래밭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이란 이같은 생업기술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독살과 가능이 비슷한 죽방렴도 똑같은 경우다. 우리나라에서 죽방렴이 가장 많이 행해지는 곳으로는 남해 선창교 주변의 지족해협과 선창 북쪽인 삼천포, 사천만 세 군데를 꼽는다.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천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 그러나 죽방렴도 거의 사라졌다. 이들 어업기술도 무형문화로 지정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금동관이나 그림 따위에만 눈이 쏠린 잘못된 문화유산관으로 독살, 죽방렴 따위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뉴욕타임스’는 연초에 사라지는 캐러번(낙타 대상)을 집중 보도하였다. 푸른색 옷과 터번을 즐겨 착용하여 ‘사하라의 푸른 영주’로 불려온 사하라사막의 대상들이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특집으로 보도한 것. 낙타를 끌고 사막 이남과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지역을 오가면서 물건은 물론이고 문화를 전파시켰던 중요한 메신저들이 사라졌다. 이제 더이상 사막을 낙타로 이동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대신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많은 민족지학자들은 낙타대상의 소멸로 말미암아 수천년의 전통을 지닌 캐러번문화의 역사와 풍습이 사라지고 오로지 획일적인, 이른바 ‘현대문명’으로 통일되어감에 주목한다. 이들 문화야말로 제3세계 무형문화의 특장이었는데 말이다.

    제3세계는 다양한 무형유산, 가령 춤이나 음악, 종교의식이나 공예, 구전문학 따위의 ‘기록되지 아니한 문화’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유럽의 중요박물관이 ‘약탈박물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지난 몇세기 동안 유형적 재화만을 보물창고식으로 이끌어온 유형중심사고는 제3세계의 문화현실과는 상반된다.

    웅장한 사원, 거대한 피라미드, 장엄한 교회, 오래된 문서, 황금빛 투구, 화려한 방패, 튼튼한 전함 등 유형의 유산은 20세기 사람들이 ‘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사의 놀라운 역정을 드러내는 증거물로 제시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서구를 방문한 수많은 견문록은 오로지 유형의 유산을 예찬하기 바쁠 뿐이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빚어졌던 문화는 멸망한 문명의 쇠락한 조각품에만 증거를 남기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박물관을 채운 대리석조각보다도 신화가 살아 있던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같은 무형문화에서 더욱 생생하게 그리스의 정신이 살아 움직인다. 천천히 걸어가는 시민들, 전장에서 돌아온 전사자와 장례의식, 그네들이 먹던 음식과 즐기던 오락, 성생활과 육아교육, 평민들이 살던 살림집 따위의 무형문화가 오히려 역사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아프리카 민중이 고기잡으면서 부르는 노래, 중국 사람들이 명절날 즐기는 춤, 안데스산맥의 산자락에서 쟁기질과 추수를 감사하는 의례, 폴리네시아 민중이 망자를 천도하는 종교의식, 자연의 변화에 따라 즐기는 다양한 축제들, 흙이나 나무로 만든 그릇들, 짚과 풀로 엮은 소소한 공예품들, 수를 놓아 예쁘게 짠 카펫과 호화찬란한 옷감들, 천연의 재료로 빚은 독한 술….

    제1세계적 관점에서 제3세계적 관점으로 전환하는 논리 속에는 바로 유형적 관점에서 무형적 관점으로의 전환, 거대한 정치권력 중심의 문화에서 평범한 민중의 문화로의 전환이라는 전환시대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영산의 줄다리기, 처용암의 전설, 서해안의 독살 등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은 귀족중심의 문화관에서 민중중심의 문화관으로의 질적인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에 21세기 시민사회의 문화관으로, 미래지향적 문화관으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유럽제국은 바로 그 소중한, 인간중심의 무형문화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미국의 놀이신학자 하비 콕스(H.Cox)가 ‘바보제’에서 말했듯이 ‘진정한 놀이와 제의를 잃어버린 서구제국’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나라들이 유럽중심의 문화관을 따라가고 반복하고 학습해야 하는가. 이제 제3의 눈, 무형중심의 눈으로 세계문화를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50년 전 밀짚모자도 구할 수 없다

    무형문화적 관점에서 새롭게 문화유산관을 정립해나가다 보면, 근대문화유산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눈에 뜨인다.

    어느 박물관에서 벌어졌던 일. 근대풍물전을 기획하면서 곤란한 문제에 빠졌다. 50∼60년대에 쓰던 밀짚모자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밀짚모자는 너무도 흔하여 아무도 보존하지 않은 결과다. 화려한 금동관도 아닌, 50∼60년대 밀짚모자가 없다고 역사를 서술하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불과 수십년 전의 하찮은 물건일지언정 전국에 1개도 없이 사라졌다는데 있지 않을까. ‘싹쓸이전통’을 문화보존에서도 어김없이 적용시키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싸전에서 됫박쌀을 살 때 쓰던 됫박, 국수를 만들던 국수틀, 기름을 짜던 기름틀, 심지어 따비와 쟁기, 써래와 조선호미도 보기 힘들어졌다. 흔하디 흔하던 옹기조차 귀한 것이 되고 말았으며, 짚으로 만든 가마니 둥그미도 사라졌다. 시내 곳곳에서 흔하게 눈에 띄어 깔개로도 쓰던 가마니가 일제히 폴리에스틸렌 자루로 바뀌면서 구경도 하기 어려워졌고, 철물점에서 팔던 새끼 타레도 비닐노끈으로 바뀌었다.

    근대문화유산 속에는 민중의 삶을 규정지었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흔한 것, 혹은 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일을 전담해야 할 국립민속박물관 같은 정부기관들이 제 구실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기능이 여러가지겠지만, 그중 중요한 것은 외적으로 언론의 초점을 받는 행사가 아니라 빠짐없이 모든 유물을 챙겨서 민족생활사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는 일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유물의 총량과 무관하게 유물의 질과 균형잡힌 수집에 나서고 있는가에 대한 진보적 학계의 비판이 거세게 불거지고 있는 단계다. 더 나아가서 국립아카이브 같은 무형문화자료관의 탄생은 요원한 상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해 심포지엄을 통하여 문제를 제기한 바 있으나, 이에 대한 실제적 대안은 나오지 못한 상태다.

    서울역과 남대문을 거쳐 을지로입구까지 오다보면 일본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세워진 그 건물군은 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본점 등에 잔영을 남길 뿐, 대부분 사라졌다. 군산항에 가면 일제시대 건물들이 아직도 도심 곳곳에 여러 곳 숨어 있으나 제대로 된 복원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일제잔재라서 없앴을까.

    식민지를 겪은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 식민지의 흔적을 강하게 풍기는 건물군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면서 보존한다. 그러한 조건 위에서 새로운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신시가지를 형성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싹쓸이’를 즐긴다. 한꺼번에 부수고, 새집을 짓고, 다시 부수는 일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서울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목을 차지하던 일제시대 건물들이 사라진 터전에 조악한 상자 모양의 콘크리트 건물군이 들어섰고, 언젠가 다시 개발되어 새 건물로 채워질 것이다.

    2001년 벽두에 덕수궁 뒤편 옛 배재학당터 고층빌딩 재개발이 논란을 빚고 있다. 국내 최초의 신교육 발상지로 고종황제가 직접 이름붙인 유서깊은 옛 배재학교 자리 3100여평에 배재학당측이 고층 주상복합건물과 업무용 빌딩 등 고밀도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승만대통령, 한글학자 주시경선생 등을 배출한 유서깊은 건물이 재단측의 경제적 이유 때문에 위기에 서 있는 것이다.

    서울시는 뒤늦게 국립극장 신세계백화점 동아일보 구사옥 등 보존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들을 지방문화재로 새로 지정하여 영구 보존할 전망이다. 또 최근 고층·고밀도 재개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서울시 정동 옛 배재학교 건물에 대해서도 보존여부를 위한 본격적인 현장조사가 이뤄진다.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부족과 경제개발 논리로 파괴되고 있는 근대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개항 이후부터 1975년 이전까지 건축된 건물 중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키로 했다고 밝힌 것.

    영국은 ‘종의 기원’을 써서 ‘진화론’의 개조가 된 찰스 다윈이 고작 2년 간 살았던 집에도 현관 문틀 위에 표식을 해두었다. 셰익스피어 출생지에는 ‘셰익스피어가 잠시 쉬던 벤치’ 식으로, 사실은 상상력을 부여하여 새롭게 만들어놓은 곳조차 관광명소가 되어 관광객을 이끈다. 작곡가나 화가가 쓰던 작업실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박물관으로 전용하는 사례는 예를 들지 않아도 잘 알려진 사례들. 그러나 우리의 문화유산관에서는 이와 같은 삶의 흔적들은 소리소문없이 배제된다.

    2000년 연말에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고려대박물관과 역사민속학회가 주관하여 ‘남창 손진태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심포지엄을 했다. 남창선생은 신민족주의사관의 이론가이자 당대 민속학의 개조격이라 할 인물로 1950년에 피랍되었다. 심포지엄 준비과정에 유족들이 50여년간 간직해온 남창의 친필 원고가 쏟아져나왔다. 1947년에 펴낸 을유문화사간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초판 교정본까지 발견되었다.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는 민족, 보존을 제대로 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우리에게 귀감이 될 사례다. 수많은 예술가, 학자들이 지나갔지만 그들의 흔적을 남기는 일에 인색한 우리 문화 풍토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비판받는 문화부와 문화재청

    문화유산보존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부의 확고한 신념과 정책집행일 것이다. 문화유산보존과 관련하여 문화부에 많은 비판이 퍼부어지고 있다.

    예산부터 문제다. 2001년 문화부예산은 1조원을 넘는다. 이를 두고 문화예산 1%를 넘어서 이제 1조원을 넘어 ‘문화대국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확인되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문제는 문화예산의 실체가 ‘건물짓기’나 ‘보여주기’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유산을 제대로 전승하고 재창조하는 데 쓸 돈이 별로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당사자이기도 한 문화재청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왜 이런 비판을 듣게 됐을까. 가장 큰 원인으로는 지난해 비록 청 승격이란 숙원을 이루었으나 실제 조직면에선 문화재관리국 시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몸은 어린아이인데 옷만 성인용을 걸친 격이란 비판이 그것.

    무형문화정책에 대한 차별화, 예산상의 터무니없는 편중 등은 관련 학계를 중심으로 늘 문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시정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년 전에 전통문화정책포럼에서는 인병선관장(짚풀생활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가 나서서 이 문제를 거듭 제기한 바 있다. 무형문화정책에 관한 일정한 개혁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예산을 비롯한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개혁은커녕 오히려 개악돼 앞으로의 사태를 어렵게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현정권의 문화통치 능력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부당국과 문화재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이미 너무 복잡해진 상태다. 현정권 등장 이후에 문화재위원회에 대한 온당한 개혁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김대중정권의 일반적 현상이 문화유산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에 올바른 개혁을 집행하고 정당한 인사들로 채워넣었어야 함에도 시기를 놓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성해야 할 집단은 학계다. 가령 풍납토성 문제로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떠들썩하였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백제유적지를 파괴해버린 시민들의 행동은 만인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고 온갖 매체에 비판적 글을 올린 학계는 스스로 투명한가부터 반성해야 한다.

    국사학계 일각에서 풍납토성을 ‘삼국사기’를 근거로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한갓 흙더미의 사성(蛇城)으로 여긴 나머지 방치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광복 이후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또 다른 초기백제 성인 사성이라고 지목한 세력이 한국고대사학계를 장악함에 따라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1963년 2월에야 성벽 일부만 사적으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렀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학계는 백제왕성터가 시가지로 변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자성해야 한다. 1만9000여세대, 6만여명이 거주하는 도심이 돼버린 풍납토성의 천문학적 보상액은 첫단추가 잘못 끼워지면서 빚은 결과물일 뿐이다. 풍납토성 문제가 불거지자 관련단체들이 나서서 1963년 풍납토성을 사적으로 지정할 때 제외한 토성 내부도 사적으로 지정`보존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바 있다. 문제는 누가 사적에서 제외시켰는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낮은 데 있지 않을까.

    문화재보호법령이 만들어진 1960년대의 상황과 지자체에 의하여 가속도로 개발이 진행되는 2000년대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듯이 문화유산분야에도 전문적이면서도 시민운동 개념으로 무장한 집단의 노력이 요청된다.

    말하자면 문화유산분야의 엔지오가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문화유산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수 참여한 사례는 아직 없으며, 대부분의 문화유산전문가들은 정부 쪽에 가까이 서서 묘한 줄타기를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좀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문화유산 전문가들은 대부분 어떤 상황에도 살아남는 생존력이 강하다. 문학예술과 현실의 분리를 주장하듯이 문화유산과 현실의 분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제발굴을 비롯한 문화유산계에 뿌려지는 예산들이 관급공사적 성향이 짙음을 감안할 때, 문화유산 분야처럼 정부측과 밀착된 채 공동보조를 맞추는 학계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유산과 현실의 분리는 막말로 ‘예산 따먹고 관직 진출하기 위한’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문화유산 지키는 시민들

    전문인력이 투입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시민문화관에 입각한 문화유산보존운동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몇가지 사소한 사례부터 집단적 노력까지 민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례를 살펴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본다.

    조계종은 이영희교수에게 문화재보존 공로 표창을 주었다. 진보적 사회과학자, 언론학자로만 알려졌던 이영희교수에게 웬 문화재표창? 6·25전 당시 신흥사 소실을 막아낸 공로 때문이다. 조계종 총무원은 “1951년 보병 1사단 9연대 중위로 설악산 전투에 참여하면서 설악산 신흥사의 극락보전, 보제루, 경판 등의 문화재가 소실되는 것을 막은 사실을 인정, 신흥사의 표창 상신으로 총무원장 표창장을 수여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교수가 병사들이 추위를 막으려고 문화재를 태워 불쏘시개로 쓰려는 것을 막아낸 내용은 자신의 단행본 ‘동굴속의 독백’중 ‘스핑크스의 코’라는 제목의 글에 자세히 소개된 바 있다. 한 개인의 노력과 판단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많은 양의 문화유산을 지켜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각각의 개인의 자성과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

    모 신문에 ‘자건거를 타고 다니며 고향의 문화유적지를 지키는 소녀’란 미담이 소개되었다. 한국중등교장협의회, 한국청소년자원봉사센터 등이 주최한 ‘제2회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은 이예진양(강원 석정여종고 2년). 156㎝ 작은 키에, 앳된 얼굴이지만 고향 영월의 문화유적지를 꼼꼼히 점검, 영월군청 담당자들이 문화재 관리·보수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달달 볶는’ 당찬 향토 지킴이로 소개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향교에 대한 방학숙제를 하면서 향토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예진양은 그때부터 쭉 애향일기를 써오다가 동강댐 문제로 영월의 문화재 관리가 소홀해지는 걸 보고는 본격적인 실태 조사에 나섰다. 장릉, 청령포, 금강정 등 단종 관련 유적지 10곳을 선정,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자전거로 답사를 다녔다.

    그리하여 ‘관리 소홀로 인해 자규루 지붕 위에 잡초가 무성하다’ ‘새로 보수했다는 문이 페인트칠도 안된 채 방치되어 있다’는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보고서를 작성, 영월군수 앞으로 등기우편을 보냈다. 틈틈이 유적지를 다시 찾아가 지적한 사항이 얼마나 개선됐는지도 점검해 표로 만들어놓는다.

    예진이가 건의한 문제점 40여 가지 중 70% 이상이 시정됐거나 개선중. 예진이의 사례는 청소년층, 나아가서 주부층까지 문화유산보존운동에 이끌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주는 듯하다.

    풍납토성내 경당연립 재건축부지 발굴유적 훼손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이 주체가 된 문화유산 보호운동의 필요성이 새삼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이 문화재 보존과 사유재산권의 충돌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나,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라 주민들이 부담하게 돼 있는 발굴비 문제가 외견상 부각됐다는 사실에서 차제에 일종의 발굴기금이나 문화재기금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유산의 보존에서도 이제 정부가 모든 것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풍납토성의 예에서 보듯 국민의 사유재산 침해가 문제가 되면서 국민과 함께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운동이 절실해진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시민과 민간영역이 커지면서 문화재청과 국립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관 위주의 문화유산 보호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점에서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자연신탁 국민운동)이 한국에서도 활성화할 필요가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이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를 통해 기금을 모아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자원이나 문화·역사유물, 땅을 사 이를 영구보존하는 것. 그동안 한국에서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무등산 공유화 운동을 벌인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의 사례에서 보듯 환경운동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문화유산 보호차원에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추진할 시민단체 창립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문화유산을 지켜내려는 노력은 작은 곳에서 속속 벌어지고 있다. 대구시 청동기 유적공원은 작지만 매우 훌륭한 모범사례다. 대구 달서구청이 사적 제411호인 ‘대구 진천동 입석’ 유적을 복원,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해 완공한 것이 그것이다. 2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완공한 이 공원은 1230평 규모로 입석 1기, 석관묘 5기의 문화재, 문화재 안내판 10개, 모형석관묘 2개, 모형입석 1개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선사유적공원은 고대 향토문화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일깨우고 청소년들과 지역민들에게 청동기 선사문화의 산교육장 구실을 기대하고 있다.

    한편 문화유산도 직접적 이해가 걸려 있는 집단이 주도적으로 싸움을 벌여야만 해결될 수 있음을 불교계의 댐건설 반대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정부가 유서깊은 사찰이 들어선 전국의 경관 좋은 계곡마다 댐을 건설키로 하면서 불교계에 비상이 걸렸던 것. 생태계를 파괴하고 문화재를 죽이는 댐은 지리산 댐 뿐만 아니라는 인식이 불교계에 퍼지면서 지리산 댐 건설반대운동이 총체적인 댐 건설 반대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지리산 살리기 댐백지화추진 범불교 연대’가 그것이다.

    이처럼 범불교계가 댐건설에 반대해 총력 대응에 나선 것은 정부와 한국수자원공사가 준비하고 있는 댐건설 예정지의 불교 문화재 피해가 예상 이상으로 심각하기 때문.

    건설교통부와 한국수자원공사가 96년 마련한 댐 건설 계획안을 토대로 조계종 총무원이 마련한 ‘댐건설 예정지 사찰 및 문화재 피해 예상 현황’에 따르면 정부가 계획중인 25개 댐에 수몰되거나 간접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은 크고 작은 사찰만 258곳이며 절터(寺址·사지)도 283곳에 이른다. 또 국보 7점을 비롯, 보물 127점, 지방문화재 169점, 천연기념물 2점, 사적지 3곳 등으로 지정문화재만 318점이 직·간접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이는 조계종 이외의 사찰과 비지정문화재, 확인되지 않은 절터까지 포함할 경우 피해규모는 이보다 훨씬 늘어날 전망.

    직간접 피해가 예상되는 사찰 가운데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의 백담사(공수천댐)를 비롯,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의 신륵사(여주댐), 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김천댐),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봉암사(유곡댐), 경북 안동시 서후면의 봉정사(길안댐), 경북 영주시 부석사(송리원댐)등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유명 사찰이 수두룩하다.

    빠름의 문화관에서 느림의 문화관으로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문명관은 지난 20세기 동안 서구식으로 교육받고 길들여져온 결과물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선택 없이 문화유산의 올바른 전승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선택이란 빠름의 문화에서 느림의 문화로 전환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의 효율성은 시간의 빠름을 요구하지만, 원래 제3세계의 문화는 느림의 문화이며, 어쩌면 ‘미개’의 문화였다. 그러나 느림과 완만함도 중요하고도 긍정적인 역사의 동력이다.

    사실 속도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전격전’이란 개념이 대변해준다. 속도는 창조력이 될 뿐 아니라 동시에 사회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우리 현대사회에 점점 가속이 붙으면서 세심함, 부드러움, 사려깊음, 생각, 그리고 다른 많은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속도의 문화와 미학은 자본주의에는 걸맞은 논리일지는 모르지만, 사람과 환경에는 지극히 적대적이다. 속도는 타인과 환경에 대한 희생을 전제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즉각, 즉시, 금방, 곧바로, 지체없이, 빨리빨리, 얼른얼른, 좀더 빠르게, 아주 빠르게, 대단히 빠르게, 말할수 없이 빠르게, 숨가쁘도록, 죽기살기로…, 이렇게 근대화를 핑계로 박정희정권은 천년을 이어온 초가집 전통을 수년 만에 ‘싹쓸이’하여버렸다.

    88고속도로는 강압적 사회건설 분위기 속에서 매장문화재에 대한 유적조사도 하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밀어붙임으로써 건설됐다. 그 바람에 수천년간 보존돼온 문화유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남 곳곳이 백제문화의 터전이었으나 강남신도시건설로 아파트숲에 잠겨버렸다.

    학계의 총의로 북한 개성공단 조성에 따른 개성지역 문화유산 파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마구잡이식 개발론에 대한 대안요구이리라.

    우리가 흔히 ‘문명’이라고 예찬해오던 것을 상당부분 포기하고, 조금은 불편한 삶을 살겠다는 용기, ‘야생의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한 세계관의 변환을 추구하는 노력 없이, 오로지 빠름만을 요구하면서 어떻게 저 멀리 천천히 서있는 문화유산을 옳게 보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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