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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탈북 戀人의 파란만장한 역정

死線을 돌파한 사랑의 힘

  • 유지성

死線을 돌파한 사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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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어든 몸을 일으켜 인가를 찾아 중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이 나간 사람마냥 비칠거리며 중국쪽 강가에 있는 자그마한 둔덕을 넘었다. 한참을 걸으니 멀리서 중국 농촌의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원래 국경 안내자들이 알고 지내는 국경지역 농가에 들러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연길시까지는 중국사람에게 안내받기로 했던 계획이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깨져버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붙잡혀간 북한 안내자들이 중국마을의 촌장을 알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언뜻 떠올리고는 촌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긴장으로 타드는 목을 눈으로 축이며 중국 마을로 접근했다. 한참을 걸어가니 멀리 자동차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의구심과 추위로 온몸을 떨며 첫 마을에 들어섰다.

북한은 전기 사정이 나빠 마을이 어두웠으나 눈에 들어오는 중국 마을은 형광등 불빛으로 환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심산으로 처음 당도한 중국 농촌집 문가에 귀를 기울이니 TV에서 흘러나오는 중국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북한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집을 택해 촌장집이 어딘지 물어볼 양으로 몇 집을 지나가는데, 길가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애들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접하는 사람이라 그들도 두려웠다. 나는 서툰 함경도 사투리로 “이 마을 촌장집이 어디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어디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요녕성 심양 사람인데 촌장과 친척간이라고 둘러댔다. 그들은 그제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풀며 다음 마을에 촌장집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시계를 보니 중국시간으로 밤 10시가 넘은지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갈증이 점점 심해졌다. 아무리 눈을 먹어도 배만 아파올 뿐이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어느 집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잠시 후 온 사람은 70세가 넘은 듯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물을 청하는 나에게 우선은 추울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북한에서는 사라져가는 우리 농촌의 소박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분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할머니의 물음에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이런 할머니는 절대 중국 공안에 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배가 고프고 추울 테니 식사부터 하라며 방으로 이끌었다.

방에는 할아버지와 40대로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아궁이에 나무를 더 넣어 구들을 데웠고 술과 음식을 권했다.

조금 있으니 얼어든 몸이 녹고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방바닥 아래로 꺼지는 듯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술만 몇 잔 들이켰을 뿐 밥은 한 술도 넘길 수 없었다.

그들은 내 사연을 다 듣더니 “김정일이 빨리 죽어야 해. 그래야 북조선 사람도 사람답게 살 수 있어…” 하며 이구동성으로 김정일을 욕하였다.

할머니는 젊은 부부를 가리키며 이들은 버스운전기사 부부인데 운좋게도 내일 이들의 차가 연길까지 직행하는 날이니 촌장집에 갈 필요도 없이 그곳에서 자고 내일 함께 연길로 가라고 했다.

궁지에 몰린 나에게 그들은 너무나 고마운 은인이었다.

농촌 치고는 꽤 큰 집이었고 풍성한 쌀독에서 나오는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이부자리를 깔아준 조용한 방에 혼자 누워 잠을 청하려니 북한에 두고온 어머니와 수연에 대한 근심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잠을 쫓았다.

안내자들이 붙잡혔으니 북한당국은 나의 탈북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을까? 그리고 수연은 어떻게 될까? 자꾸만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다. 나 때문에 부모 형제와 수연이 죽음보다 못한 정치범수용소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원래 계획은 북한당국이 우리를 행방불명으로 처리하도록 아무도 모르게 탈북하려 했는데 탄로났으니 가족과 수연을 위해 북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친척을 만나 돈을 가지고 내 발로 북한으로 돌아가 탈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나 때문에 가족과 수연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비극은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잠들었는가 싶은데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에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버스 운전기사 부부도 어느새 일어나 차를 정비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 내외는 입고 가라며 중국 솜옷도 한 벌 주셨고 담배까지 한 곽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낯선 땅에서 보낸 하룻밤이지만 나는 할머니 내외의 따뜻한 인정으로 지난밤에 겪은 추위를 잊고 연길로 떠날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면 까닭없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중국으로 넘어서는 순간부터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던 나는 버스에 오르는 군복차림의 사람만 봐도 심장이 떨렸다. 애써 태연한 척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중국신문을 읽는 시늉을 하며 군복입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창 밖으로 스쳐가는 이국 풍경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북한의 자연과는 달리 중국의 산은 갖가지 나무로 울창했다. 화룡(和龍)과 룡정(龍井)을 지나면서는 개혁과 개방 이후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룡정에서는 교회당이 높이 서 있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떠난 버스는 오후 2시경이 되어서야 연길(延吉)에 도착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지인 연길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30년 넘게 북한에 살다 온 나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TV에서나 보던 남한식 글씨체로 쓰인 커다란 광고판과 거리에 즐비한 노래방, 호텔, 음식점 등이 먹을 것을 걱정하던 시대는 옛말이 되어버린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었고 한겨울인데도 온갖 과일과 먹을거리가 즐비한 거리는 말 그대로 진풍경이었다.

미국 고모부와 통화

운전기사의 안내로 1시간 여를 헤맨 끝에 목적지인 Y대 교수 집에 당도했다. 나는 교수 부부에게 신분을 밝혔다. 그분들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묻더니 내가 분명히 자신들이 연계해준 미국 친척의 조카임을 확인하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준 고마운 운전기사 부부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교수 내외는 내가 중국에 온 사연을 듣더니 미국 친척들과 만날 수 있게 방조하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기 집에 머물라고 했다. 교수는 지금은 미국이 한밤중이므로 친척과는 저녁에 통화하자고 했다.

‘그 동안 친척들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는지?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한 북한의 조카를 어떻게 대해줄는지?’

나는 가지가지 걱정 속에 통화가 이루어질 저녁시간을 기다렸다. 교수 집에서 차려준 저녁식사를 마칠 무렵 미국의 친척과 전화가 연결되었으니 빨리 전화를 받으라는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넘겨 받았다. 전화는 미국의 큰고모부와 연결되었다. 나는 내가 중국에 오게 된 경위와 지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고모부께 말씀드렸다.

고모부는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조카 지성이 분명하구나. 정말 반갑다. 나도 북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잘 탈북해 왔다…. 그리고 잘 들어라. 너를 남한이나 미국으로 오게 할 수 있는 라인이 있다. 그러니 일단은 마음을 진정하고 그곳에 안전하게 있기를 바란다. 부모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미국서 친척이 갈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기 바란다…. 여기 미국에는 네 삼촌 고모가 5명이나 고 있는데 모두 성공해 잘산다.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나는 네가 여기 와서 살면 좋겠다”라고 말하셨다.

나는 반가움과 서러움이 북받쳐 울먹이며 고모부께 말씀드렸다.

“고모부, 제가 탈북한 것이 북한에 알려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온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갈지도 몰라요. 고모부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당장 남한이나 미국에 갈 수는 없어요.”

고모부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사내란 그릇이 커야 하는 거야. 어렵게 죽음을 넘어 왔는데 왜 다시 불행을 자초하려 하니…. 아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유씨 집안의 장손이야. 아무 소리 말고 여기서 누구든 중국에 갈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길 바란다”고 하셨다.

그렇게 전화는 저녁내 10여 차례나 걸려 왔다. 교수께도 미국에서 친척이 나갈 때까지 내 안전을 지켜줄 것을 거듭 부탁했다. 그날의 전화를 통해 나는 미국에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방조를 기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연길에 도착한 지 5일째 되던 날, 미국에서 큰삼촌이 연길에 오신다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교수는 집에서만 지내는 나에게 “내일은 친척분들도 만나게 되니 오늘밤은 연길시의 밤거리나 둘러보자”고 하셨다.

깊어가는 연길의 밤거리는 낮보다 더욱 활기 차 보였다.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상가의 불빛, 얼음을 쪼아 만든 조각, 거리에 넘쳐나는 인파로 활기가 넘쳤다. 적어도 북한 촌놈인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다음날 저녁, 큰삼촌이 공항에 마중나갔던 교수 내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들어서는 큰삼촌을 보니 흡사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뵙는 듯했다. 크지 않는 체격에 인자한 얼굴, 아무도 소개하지 않아도 분명히 내 혈육임을 절감하며 나는 삼촌 품에 안겼다.

삼촌도 감격하여 말했다.

“그래, 어디 보자. 내 조카 지성이 옳구나. … 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밤 깊도록 우리는 반세기 동안 쌓인 그리움과 사연을 나눴다. 크리스천인 삼촌은 나와 교수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보는 나는 삼촌의 진지한 기도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삼촌께 탈북경위와 지금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듣던 삼촌은, “네 맘은 잘 알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봐라. 네가 이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너부터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될 거야.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북한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겠니. 미국에 있는 가족은 너를 이번 기회에 남한이나 미국으로 오게 할 생각이다. 그래서 미국의 형제들과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에는 네 큰고모부 친구분이 있다. 그 집 자녀가 미국에 유학하면서 두 집 간에 두터운 교분을 쌓았거든. 그래 이번 일로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니 절강성에서 홍콩까지 밀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거야. 그분이 중국 법 기관에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어”라고 했다.

교수 내외도 옆에서 거들었다. 연길의 친척집을 몰래 다녀간 청진 사는 북한 대학생이 북한 경비대에 붙잡혀 3년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얘기며, 또 중국에서 잡힌 탈북자들이 북한 보위부에 잡혀가 총살당한 사실도 알고 있다며 내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미국에서 연길로 날아온 삼촌

득(得)은 상실을 동반한다지만 내 선택은 너무도 모진 것이었다. 자유가 눈앞에 놓여 있지만 가족과 수연을 불행에 빠지게 하는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탈북이 북한에 알려진 상황에는 가족과 수연의 운명을 외면하고 나만 홍콩으로 갈 수 없다고 삼촌께 간곡히 말씀드렸다.

삼촌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만 그 위험한 국경을 어렵게 넘어왔는데 이제 와서 뒷걸음질할 수는 없지 않으냐. 내가 돈도 가져오고 또 모자라면 차후에 송금할테니 너는 다시 북한에 들어갈 생각은 말고 이번 기회에 북한의 가족도 탈북시킬 길을 찾아보자. 미국의 친척들은 너를 적극 도울 거야. 여기서 우선 중국사람을 시켜 그곳 실정을 알아보고 기회가 닿으면 가족을 탈출시키도록 하자.”

삼촌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아직까지는 기회가 있는 듯도 싶었다. 머릿속에는 언뜻 중국으로 올 당시 국경안내자들이 “우리가 넘는 지역의 국경 경비대 중대장을 잘 아니까 혹시 잡히는 경우에도 뇌물만 찔러주면 빠져나올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들의 말처럼 잡혀도 경비대 취조만으로 마무리됐다면 아직까지 내 행적이 보위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을 가져도 돼지 않을까…. 어차피 나도 북한에 가면 감방에 갈 수밖에 없고 또 알고 있는 유일한 국경통로에는 매복이 있었으니.

다음날도 나와 삼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간 북한에서의 생활과 형제들의 이야기, 그리고 미국의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의 사회보장정책에 따라 실버타운에서 90세가 넘도록 장수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며 미국 사회에서 당당히 성공하신 고모 삼촌들 얘기. 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각계에서 활약하는 사촌형제들 이야기도 들었다. 사촌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타국으로 도망쳐 다녀야 하는 내 형편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젊고 지금이라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면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치고는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삼촌은 계속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인터넷의 발달로 컴퓨터를 통해 세계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현실과 양과 원숭이까지 복제해낸 과학의 신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셨다. 그러면서 삼촌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정보화의 물결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지금도 짬이 나면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다.

다음날, 삼촌은 나를 데리고 연길 시내 백화점에 가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을 사주셨다. 나는 연길 백화점에 넘쳐나는 남한제품을 보았고 북한에서는 자본주의 상징이라며 금기시하는 남한제 청바지도 사서 입었다.

쇼핑을 마친 우리는 북한의 가족과 수연의 탈북을 돕겠다고 나선 교수의 친척인 중국 청년과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청년은 북한의 가족을 탈출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삼촌과 나를 안심시켰다.

연길에서 3일간, 삼촌과의 만남은 그렇게 꿈같이 흘렀다. 삼촌은 바쁜 비즈니스 관계로 중국 체류를 마치고 떠나면서 나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미국의 친척은 너와 가족의 남한행을 어떻게든 돕겠으니 지나친 근심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여기 연길시는 국경지역이어서 위험하니 북한의 가족 소식을 받게 되면 우리가 지정해주는 중국 내륙지대로 옮기길 바란다.”

그러면서 삼촌은 미국의 친척과 실시간으로 연계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전화 번호와 팩스번호를 알려주었고 하나님을 믿으라며 가지고 다니던 미니 성경책도 주셨다. 나는 그 후 중국 청년에게 삼촌이 주고 가신 돈을 주며 북한의 가족과 수연을 데려올 구체적인 방도에 대해 의논했다. 그러나 때마침 보름 동안이나 계속되는 중국의 음력설 기간인데다 황장엽 망명사건이 터지면서 국경지역의 정세가 민감해져 북한의 가족을 탈출시키려는 시도는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더욱 조바심을 느꼈고 안정을 찾으려고 삼촌이 놓고간 성경책도 뒤적여 보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난해한 표현에 곧 흥미를 잃었다. 그보다는 세상의 일상이 더 흥미로웠다. 낮에는 남한의 대학과 자매결연을 한 Y 대학의 도서실에서 남한의 신문잡지 등을 읽으며 가슴을 죄어오는 조바심을 달랬다. 저녁에는 삼촌이 사준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청취했다.

시간은 흘러 여권을 마련한 중국 청년이 북한에 들어갔다. 나는 더욱 긴장하여 그에게서 좋은 소식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에 만약을 생각해 피난처를 한 곳 더 마련하기로 작정하고 북한에서 편지 연락하며 지내던 또 한 명의 조선족 집을 찾으려고 연길시를 헤매고 다녔다.

어렵게 그 집을 찾았으나 내가 찾는 사람은 1년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망한 마음으로 다시 교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를 응시하는 낯모를 사복차림의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급히 뒤로 돌아서는 순간, 출입문을 막으며 달려드는 두 청년에게 두 팔을 뒤로 꺾인 채 족쇄에 결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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