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정권재창출이요? 3김연합 영남후보가 정답이요!”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입력2005-04-15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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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P연합’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한 김윤환(金潤煥) 민국당 대표가 차기 대선에 관한 구상을 밝혔다. 김대표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자민련·민국당이 공동후보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3김씨가 합의할 수 있는 영남후보라면 승산이 높다”며 자신은 3김씨를 돕는 ‘보조 킹메이커’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2월 8일 오전 10시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30부. 김윤환 민국당 대표가 상기된 표정으로 법정에 섰다. 이날 김대표는 특가법과 정치자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민국당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무죄를 점쳤지만, 김대표가 법정구속될 것이라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때문에 재판은 사뭇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마침내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었다. 징역 5년에 추징금 33억 5000만원. 법대로 하자면 김대표는 구속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대표가 민국당 대표로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으며, 고령이라는 점 등을 들어 이례적으로 “항소심 선고 때까지 법정구속을 유예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실형이 타당하지만 법정구속은 안 한다’는 아리송한 판결문이었다. 어리둥절하기는 김대표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우째 이런 일이….”

    8일 오후 민국당 로비에서 김대표를 만났다. 그는 아직도 흥분한 표정이었다.

    “정치재판 아니가? 이런 판결이 어디 있어? 항소가 예상된다느니, 장기 재판으로 갈 것 같다느니, 항소심까지 형 집행을 유예한다느니. 나 참 기가 막혀서. 검찰의 짜맞추기식 표적수사야. 나는 절대 승복할 수 없어.”



    김대표는 ‘정치재판’과 ‘표적수사’라는 표현을 썼다. 결국 여권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묶어두기 위해 불구속 유죄판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재판 직후 이러한 분석은 정치권에 널리 퍼졌다. 당시 민주당은 원내 과반수 확보에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자민련의 의석수는 135석. 과반수인 137석이 되려면 민국당의 2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허주가 DJP에 보낸 逆제안

    2월13일 오후. 김대표와 1차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김대표는 인터뷰 연기를 요청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큰 그림이 나올 것 같으니 미뤄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재판이 끝난 지 불과 5일. 김대표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 김대표는 ‘구도가 잡히기 전까지 엠바고로 해달라’는 주문과 함께 물밑에서 진행되는 ‘3당 정책연합’ 구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무렵 김대표는 민주당과 자민련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왕이면 당당하게 정책 파트너로 참여하고 싶다’는 일종의 ‘역(逆)제안’을 했던 것이다.

    “뒤로 도와달라고 부탁만 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연립정권을 만들자 이거야. ‘민주당이 큰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는 참여할 용의가 있다’고 했어. 민주당 자민련 민국당이 모여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국민들에게 알리고 시작해야 떳떳하잖아. 과반수가 안 되는 민주당과 자민련만 갖고 언제까지 갈 수 있겠어? 민국당이 소수라고 언제까지나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우리도 2중대 노릇은 못 한다 이거야. 우리 의견을 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어야지. 그게 정당 아니가? ‘그게 안 된다면 나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전했어. 이제 조금 있어봐. 뭔가 터지게 돼 있다니까.”

    ―민국당이 지금까지는 공동여당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원구성과 인사문제였잖아. 정치적인 쟁점은 없었어. 앞으로 국가보안법 같은 사안이 나올 텐데, 그건 얘기가 다르지. 우리 당은 분명히 반대거든. 지금은 바꿀 시기가 아니라는 게 민국당의 당론이야. 북한이 정말 바뀌어야 우리도 개정할 수 있어. 이건 단순히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만일 그런 문제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론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지.”

    3당 정책연합 이후의 정국구상에 대해 묻자 김대표는 “지금은 뭐라 말하기 힘들다. 먼저 큰 그림이 필요하다”며 답변을 피했다. 그는 “지역구 1석, 전국구 1석이 민국당의 엄연한 현실”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뷰를 한 달 뒤로 미루자며 서둘러 자리를 파하려는 김대표에게 닷새 전에 열렸던 재판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손을 내저으며 “그게 무슨 기사가 되느냐”고 반문했다.

    대선 전부터 DJ가 도움 요청

    ―이번 재판을 ‘표적수사’라고 단정지으신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 동안 공동정권에 참여해 달라는 DJ의 제안을 수차례 거절했거든. 대통령선거 전에 김대중 총재가 두 번이나 도와달라고 직접 부탁했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요청이 왔어. 선거 전에는 내가 이회창이 대통령 만들려고 뛰고 있었잖아. 나는 그때 중부권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 선거 끝나고는 김중권(金重權)이가 찾아와서 공동정권에 참여해달라는 DJ의 메시지를 전하더라고.

    하지만 내가 거부했잖아. 왜냐? 영남정서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고. 내가 참여하면 그건 동서화해가 아니라, 영원히 동서분열이 되는 거라고. 그래서 그건 못한다고 말했어. 그저 ‘김대통령이 열심히 해달라. 나는 야당으로서 돕겠다’는 생각을 전했지. 그랬더니 나를 흔들고 표적수사를 시작했어. 그렇게 하면 한나라당이 깨지고 이회창 세력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대가성 여부는 법률적 판단에 맡기더라도 김대표가 돈을 받은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정치를 하다 보면 돈이 필요한 건 어쩔 수 없어. 민정당이나 민자당 때는 선거를 치르면서 내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거야 아마. 내가 정치자금을 받아서 사적으로 썼나? 다 정치발전을 위해 썼어. 어떤 의미에서 나는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기여한 사람 아니가? 3당 합당을 이루고 문민정부를 이룬 사람이 나 아니가? 정치발전에 족적을 남긴 사람 아니가?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든다면 김대중(金大中)이 김종필(金鍾泌)이는 몇 번이라도 구속했게…. DJ나 JP나 40년 정치하면서 무슨 돈으로 했겠어?”

    조금 더 이야기를 구체화시켜보자. 김대표가 법정에 선 이유는 세 가지. 그중에서 15대 총선 직전 전국구 공천을 약속하고 김찬두(金燦斗) 전의원에게 받았다는 30억원이 가장 크다. 이와 관련 김대표는 순수한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30억원을 받은 경위와 사용처에 대해 김대표가 밝힌 내용을 보면, 한국 정치의 어두웠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돈을 가져와서 ‘큰 정치를 하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요긴하게 쓰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3개”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지금까지 정치자금을 많이 받아봤지만, 한번에 몇 십억원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야. 집에 와서 보니까 100만원짜리로 30억원이야. 돈 받을 때 그 사람이 ‘선거 치르려면 100명 정도 꼬붕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 그렇게 계산해도 이건 너무 많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10억은 돌려줄 생각으로 집에 두고 20억은 대구 내려가서 경북도당에 선거자금으로 다 넣었다고. 이거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그때는 그것뿐만이 아니고 여러 군데서 자금 얻어서 지구당에 지원했어. 보스라는 게 그거 하는 거 아니가? 그걸 내가 축재했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사적으로는 한푼도 쓰지 않았어.”

    그렇다면 나머지 10억원은 어떻게 됐을까? 김대표는 돈을 돌려주기 위해 김씨를 만났다고 한다.

    “솔직히 나도 ‘이 사람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더라고. 그런데 그 사람이 나보고 ‘무슨 소리냐? 앞으로 큰 정치를 하려면 이거 가지고 되겠냐? 대권에 나가지 않더라도 다음 정권에 킹메이커는 할 거 아니냐?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이유는 없어’ 하면서 받질 않는 거야. 그래서 그 돈도 나중에 이회창이 후보 만들고 선거하는 데 다 쓴 거 아니가? 내가 그렇게 돈 썼다는 건 신한국당 사람들이 다 알아. 지구당 위원장들한테 몇백만원에서 몇천만원까지 쓰고 그렇게 해서 이회창이 후보 만든 거 아냐? 그런 돈이라고. 알겠어? 그걸 갖고 나를 표적수사해?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 사람이 전국구를 받으려고 했다면, 공천심사가 열릴 때 나한테 전화라도 해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어봐야 될 거 아냐? 그런데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어. 왜? 자기는 그런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때 전국구 공천은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거든. 강총장이 김찬두씨에게 ‘전국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대. 그랬더니 ‘생각이 없다’고 했다는 거야. 만약 김찬두가 ‘뇌물’로 돈을 주었다면 전국구에서 탈락했을 때 나한테 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런 말도 안 했다니까.”

    ―항소심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김찬두가 법정에서 ‘전국구 얘기는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이 재판 그냥 끝나는 거야. 그런데 1심에서는 ‘겸사겸사해서 주었다’고 진술했어. 나 참 기가 막혀서. 나는 다음번엔 김찬두가 진실을 말할 거라고 봐.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2심에서 무죄가 나오는 경우도 많잖아. 김찬두도 양심이 있을 거 아냐?

    내가 지금껏 구조적인 비리사건에 걸린 적이 있나? 없잖아. 검찰이 내 친인척까지 뒤져서 나온 게 고작 이거 아니가? 내가 듣기로 검찰에서도 내 뒤를 캐보고 놀랐다고 해. 정치를 하다 보면 돈이 필요한 건 어쩔 수가 없어. 나는 그 돈을 받아서 여러 사람 도와주었을 뿐이야. 말하자면 정거장 노릇을 한 거지.”

    지난해 연말 한나라당 내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김대표와 이회창 총재의 화해를 시도한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 “이총재가 ‘허주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김대표는 “먼저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16대 총선 공천파동을 거치며 갈라섰던 두 사람이 재결합할 경우 정국은 새롭게 재편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총재 얘기가 나오자 김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김대표가 이총재와 다시 손잡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지금 이회창이와 손잡으면 나는 영남에서 ‘미친 놈’이 되는 거야. 나는 자존심도 없나? 어떻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가?”

    ―이총재가 과거의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이 아니지. 사과를 할 거라면 벌써 했을 거고.”

    ―이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총재로 재추대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후회하지. 후회할 상황을 이회창이가 만든 거지. 내가 한나라당에 남아 있었으면 이회창이는 내년 대선에서 100% 당선되는 거야. 지금 이회창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라고. 양정규(梁正圭), 정창화(鄭昌和), 김기배(金杞培)…. 그 사람들이 낫나? 나나 이기택(李基澤)이가 낫나? 이회창이가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이회창 총재가 차기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오는데.

    “여론조사에는 허수가 많지. 지금 영남 사람들이 이회창이를 좋아해서 지지하는 줄 아나? 이회창이말고 대안이 없기 때문 아니가? 이회창이로 안 되겠다는 여론이 퍼지면 상황은 급속히 달라지게 돼 있어. 그래서 판짜기가 중요하다는 거야. 3김씨와 내가 연합할 수 있는 영남후보가 나오면 영남이 바뀔 거야.”

    김대표 입에서 영남후보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이제 관심은 그가 누구를 마음속에 두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 민주당 김중권 대표는 김윤환 대표에게 “형님께서 영남후보를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 속에 나도 포함시켜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공연하게 영남권 대표주자를 자처하는 김중권 대표, 그에 대한 허주의 의중이 궁금했다.

    “김중권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영남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지. 왜냐? 아직은 ‘영남’의 김중권이가 아니라 ‘민주당’의 김중권이잖아. 먼저 판짜기가 되지 않으면 민주당에서 누구를 내세워도 비슷할 거야. 노무현(盧武鉉)이나 정몽준(鄭夢準)이도 마찬가지지.”

    김중권은 아직까지…

    ―김대표가 구상하시는 판짜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지금은 김영삼(金泳三)씨와 김대중씨가 싸우고 있지만, 두 사람은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두 사람을 잘 알아. 김대중씨는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정권 재창출을 시도할 거야. 지금 상황에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영남후보를 내세우고 호남이 지지하는 방법밖에 없어. 그게 아니면 힘들어. 김영삼씨도 이회창하고 손을 잡느냐, 3김씨와 나까지 포함해 4김이 동의할 수 있는 후보를 내세우느냐 양자 택일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3김이 연합해서 영남후보를 내세우자고 주장하는 거야.”

    ―김영삼 전대통령이 이회창 총재와 손잡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은 있지만, 그리 높지 않을 걸. 이회창이가 상도동 다녀간 다음날 내가 김 전대통령을 찾아갔거든. 그날 김 전대통령이 뭐라 했는지 알아? ‘이회창이는 인간이 안됐다. 나를 찾아오고 어떻게 하루만에 저런 짓을 하나?’면서 배신감을 느끼고 있더라고. 그날 이회창 측근인 김영일(金榮馹) 의원이 ‘강삼재 의원이 했다’는 말을 흘렸거든. 이회창에 대한 불신이 생각보다 깊은 것 같더라고.”

    김대표가 제안한 3당 정책연합은 구체화되기 전에 공개됐다. 2월22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자민련·민국당이 조만간 정책연합을 선언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때부터 민국당은 심각한 내부갈등을 빚었다. 정책연합에 반대하는 비주류 최고위원들은 김대표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자 김대표는 “전당대회를 개최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발표했다. ‘이왕 정책연합을 할 거면 당당하게 하겠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셈이었다.

    3월23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민국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주류와 비주류는 초반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모처럼 연단에 선 이기택 최고위원은 김대표의 사퇴를 촉구했고, 장기표(張琪杓) 최고위원은 “불신임이 통과되지 않으면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던 전당대회는 비주류측이 대리투표자를 발견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비주류측은 전당대회 무효를 주장한 반면, 김대표는 강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 비주류측이 연단을 점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맨 앞줄에 여유있게 앉아 있던 김대표의 얼굴은 어느새 일그러져 있었다. 김대표의 입에서 하소연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다 관두자. 이런 당을 뭐하러 하나. 이것도 당이라고….”

    상황은 좀처럼 수습되지 않았다. 대의원들은 곳곳에서 설전을 벌였다. 연단 앞쪽에서는 흥분한 대의원들이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자 비주류측 김동주(金東周) 최고위원이 허주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더 이상 추하게 만들지 말고, 전당대회를 무효로 하자.”

    김대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대로 가라고.”

    주류와 비주류는 막판까지 협상을 벌였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허주는 개각 전에 신임을 받겠다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민국당 한승수(韓昇洙) 의원은 전당대회 파행과 무관하게 사흘 뒤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순서가 뒤바뀌긴 했지만 김대표는 4월4일 당무회의를 열어 3당 정책연합을 공식화했다. 이어 12일엔 3당 정책위의장 연석회의가 열렸고 다음날 3당 대표와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회동을 갖고 공조를 재확인했다. 이로써 3개월 가까이 끌어온 3당 공조의 기본틀이 짜였다.

    4월13일 오후 2시. 서울시내 모호텔에서 김대표를 만났다. 앞서의 인터뷰가 미진해 한번 더 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하게 1년 전 이날 김대표는 생애 최대의 치욕을 당했다. 16대 총선에서 텃밭이나 다름없는 경북 구미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김대표는 ‘변화의 달인’이라는 별명답게 3당 정책연합의 파트너로 부활했다. 일흔의 나이에 마지막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김대표께서 원하던 그림이 나왔습니다. 다소 원론적인 질문이 될 것 같은데 3당 정책연합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의회정치에서 집권당이 소수면 국정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어. 세계 60여 국에서 소수 정당들이 모여 과반수 정권을 만들었다니까. 국정을 책임지고 일할 수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가? 지나간 일이지만 13대 총선이 끝나고 난 뒤 민정당이 1당인데 과반수가 안 돼서 야당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법 하나도 만들 수 없고 아무것도 안되더라. 그러다 보니까 국민에게 약속한 정치를 구현할 수 없어서 3당 통합을 했잖아.”

    ―김대표께서는 과거 민정당이 집권당이지만 과반수가 안되다 보니까 국정 혼란을 가져왔고, 정책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당을 통합했다, 이런 말씀이신데 정치의 묘미라는 게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설득하는 것 아닙니까? 김대표의 논리대로라면 항상 과반수를 유지하고 야당보다 우위에 서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인데….

    “수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으면 국정을 책임지고 정책을 수립할 수 없지. 모든 것을 야당과 타협해야 된다면 일이 될 수 없어. 예를 들면 여소야대 때 한참 폭력시위가 심각해서 화염병제조방지법을 만들려고 했는데 야당이 협조하지 않아서 화염병제조방지법이 아니라 최루탄제조방지법을 만들게 됐어. 여당은 화염병 만들지 말라, 야당은 최루탄 쏘지 말라면서 싸운 거지. 이래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돼.”

    ―‘우리 정치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이 한쪽이 수의 우위를 갖고 상대방을 설득해야 된다’ 이런 말씀입니까.

    “대화로 정치를 할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정치야. 하지만 그게 안 될 때는 어떻게 하겠어? 과반수를 만들어서 타협안이 나오도록 만들어야지.”

    김대표에 따르면 3당 정책연합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2월 중순이다. 민주당과 자민련의 중진의원이 김대표에게 지원 요청을 했고, 김대표가 정책연합 형태의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권에서는 언제부터 정책연합을 구상했을까? 일단 16대 총선 이후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나라당이 제1당을 차지하면서 민주당은 과반수 확보에 비상이 걸렸던 것. 캐스팅보트에 대한 구애작전도 이때 시작됐다.

    ―3당 정책연합에 대한 그림을 구상한 건 언제부터입니까.

    “16대 총선이 끝난 뒤 김대통령을 만났더니 ‘여소야대 정부를 앞으로 어떻게 운영했으면 좋겠는지 아이디어가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시더라고. 아마 내가 일본정치를 많이 아니까 물으셨던 것 같애. 일본이 소수파 과반수 정권이잖아. 그래서 ‘1당이 한나라당이니까 1,2당이 거국내각 하는 걸 국민은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려울 거다. 그렇다면 자민련과 공조를 복원하고 소수 정당까지 합쳐서 연립 형태로 정국을 운영하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를 했지.”

    ―한승수 의원의 입각은 민국당 전당대회 이전부터 결정돼 있었죠?

    “그렇지. 정책연합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전당대회 추인 절차가 남아 있었잖아. 민국당 때문에 개각도 늦춰진 거야. 전당대회가 엉망이 되고 개각을 못 하는 상황이 오니까 청와대 쪽에서 연락이 왔어. ‘우선 한의원을 입각시킬 테니 당내 문제는 나중에 추인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좋다고 했지 뭐.”

    ―김중권 대표나 김종필 명예총재를 만나서 정책연합에 참여하는 대가로 민국당의 지분을 논의하신 적은 없습니까.

    “정책연합에 무슨 지분이 있나? 내각에 참여하고 3당이 정책을 조율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정책연합이야. 그 과정에 우리가 참여하자는 건데 무슨 지분이 있다고 그래? 그런 식으로 한다면 정치가 아니지.”

    한때 TV에서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가 히트하던 시절 김대표가 말한 ‘3당합당’이 있었다. 3당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거대 여당의 힘을 앞세워 야당을 압박할 수는 있었지만, 집안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는 민감한 사안이 나올 때마다 대립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민주당을 중심으로 짜인 3당 정책연합은 어떨까? 정가에서는 비관적인 전망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DJP공조도 삐걱거린 마당에 3당공조는 더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공동 정부를 만들고 수없이 협상을 했지만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민국당은 또 다른 색깔이 있구요. 결국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오거든요. 예를 들어서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 민국당은 지금 반대하고 민주당은 개정할 수 있다는 기류가 강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공조체제가 이루어질 수 없지. 솔직한 얘기로 3당이 뭐가 그렇게 다르나? 다 비슷한 거 아냐? 모두 보수적인 색깔이 있는 데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정도지. 나는 우리나라 정당이 미묘한 구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 중도보수라고 봐. 국가보안법 얘기를 하는데 그것도 조율할 수 있어. 북한이 좀 더 변하고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우리도 개정할 수 있는 거지 뭐.”

    ―앞으로 3당 정책연합을 추진하는 과정에 민국당의 주장이 혹시라도 잘 반영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의사가 무시된다면 정책연합을 계속할 이유가 없는 거지. 그때는 정책연합에서 탈퇴하면 그만이지.”

    ―그냥 탈퇴하시는 거예요?

    “응.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지. 그런 상황을 만들거라면 이런 어려운 일을 왜 하나? 여당은 더더욱 그런 일을 안 할 걸.”

    김대표는 3당 정책연합을 통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그 반대 논리도 있다. 제1당인 한나라당을 자극해 여야간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은 3당 정책연합이 총선 민의를 거스르는 행위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이야. 한나라당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 측면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 한나라당이 정국을 극한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면, 거국내각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그랬다면 우린 나설 수 있는 아무런 명분이 없는 거지. 그렇지 않나? 물론 한나라당 책임으로만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만, 1,2위 당이 잘 협력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총선 민의를 자꾸 얘기하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해. 만일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었는데도 의원을 빼내서 소수파 과반수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민의를 거스른 행위겠지. 하지만 한나라당은 과반수를 얻지 못했거든. 그렇다면 자기들도 혼자서 정국을 이끌 수 없는 거잖아. 나는 한나라당도 어떤 형태로든 여당과 협의해서 국정을 운영할 책임이 있다고 봐. 그런데 온통 이회창이 대통령 만들기 위한 짓들만 하고 있잖아.”

    ―3당 정책연합은 사실상 한나라당을 포위하기 위한 대선용 판짜기 아닙니까.

    “지금 우리나라 정치 구도라는 것은 어느 정당이 독자적으로 후보를 내가지고는 정권 창출이 불가능해. 왜? 과반수를 점하는 정당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음에는 정치적인 제휴, 혹은 지역연대 이런 걸 해서 공동정권을 만들 수밖에 없어. 특히 한나라당은 이회창이가 대통령 후보 아니가? 다른 후보는 없는 것 아니가? 우리 3당은 독자 후보 내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정책적인 제휴를 해서 공동정권을 만들자는 쪽으로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하자면 한나라당을 포위 안할 수 있나?”

    이쯤에서 한 가지 상식적인 의문이 든다. 김대표는 2월8일 재판이 끝난 직후 “김대중 정권이 내가 협조하지 않으니까 표적수사를 했다”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뒤 김대표는 김대중 정권과 함께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겠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아무리 김대표가 ‘변화의 달인’이라지만 논리적으로는 분명 모순이다.

    ―김대표는 공동정권에 참여해달라는 김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에 표적수사를 당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도 3당 정책연합에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거 보라고. 우리같이 작은 정당이 선택할 길은 두 가지뿐이야. 첫째는 야당을 하거나, 안 그러면 여당에 참여해서 국정을 책임지는 파트너가 되거나. 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 아니냐 이거야. 두 석 가지고 한나라당에 붙어서 뭘 하겠어? 이회창이 혼자 뛰는 ‘사당’에서 뭘 하겠느냐고? 차라리 여당에 참여해서 경제도 살리고 개혁도 추진하고 21세기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다면, 민국당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거야.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하면 정당이 소멸한다니까. 현실적으로 민국당이 이대로 간다면 한승수, 강숙자(姜淑子) 두 의원이 남아있겠나? 그런 절박한 문제도 생각하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가?”

    ―그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표적수사를 한다며 비난하던 정권과 힘을 합치는 것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봐. 내가 정치인으로서 달리 선택할 길이 뭐냐? 없어. 없다니까. 내가 지금 정치적으로 할 일은 이거밖에 없다는 거지. 장기표는 내가 정치적으로 살기 위해서 정책연합을 한다고 말하는데, 그럴 거라면 오래 전에 공동여권에 참여했지. ‘당을 맡든 뭘 맡든 큰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내가 갔지 왜 안 갔겠나? 알겠나? 내가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이렇게 민국당을 만들고, 3당 정책연합까지 하게 된 것 아니가? 누가 봐도 이회창이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거 아니가?”

    ―정치권에서는 아직도 김대표가 3당 정책연합에 참여한 것을 두고 항소심 재판에 대한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건 얘기가 되질 않아. 재판 때문이라면 그냥 붙어서 한 자리 해먹고 말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 이회창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 아니가? 이회창이가 정권 창출을 했다면 지금도 내가 한나라당에 있을 거 아니가? 김윤환이가 혼자 살기 위해서 김대중이한테 붙어먹나? 아이고 이런 참….”

    요즘 정가의 최대 이슈는 개헌론이다. 여야의 중진급 의원들이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개헌론의 이슈는 크게 두가지. 하나는 단임제를 중임제로 바꾸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통령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민국당은 4월18일 정·부통령제 개헌안을 당론으로 확정하는 토론회를 연다.

    ―왜 개헌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내 설명을 들어봐. 내가 바로 5년 단임제 헌법 개정에 참여했던 사람이야. 당시 나는 4년 중임제 또는 단임제로 갈 경우 6년을 제의했는데 3김씨가 5년을 고집해서 5년 단임제가 됐어. 단임제는 중간에 평가를 받지 않으니까 대통령이 독선적인 정책을 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렇나? 그래서 4년 중임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반대하면 불가능하지. 개헌은 반대하는 세력이 있으면 곤란하거든. 그러니까 개헌을 할 생각이라면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뒤부터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중임제가 비록 중간에 한번 평가를 받지만, 임기 전반기에 선심성 정책을 남발할 우려가 있고 그러다 보면 장기집권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5년 단임보다는 낫지 않겠나?”

    ―정·부통령제는 지역갈등을 해소하기보다 지역대결을 부추길 소지가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지역간 권력 나누기가 아니라 국민 화합의 길로 가야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좋은 방법 아니가? 어느 지역이 독점하는 것보다 나눠갖는 것이 화해하는 데 보탬이 되는 거 아니가? 자꾸 그런 식으로만 발상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 아니가?”

    2승 1패. 킹메이커로서 허주가 정치판에서 거둔 성적이다. 87년엔 노태우를, 92년엔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97년엔 이회창 카드를 선택했다가 실패했다. 그런 그가 네 번째 킹메이커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번에는 ‘감독’이 아니라 ‘코치’쯤 되는 것 같다.

    ―킹메이커는 한마디로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치인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하나는 자기가 권력을 잡는 거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잡는 데 역할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킹이 되거나 킹메이커가 되거나 이런 얘기 아니가? 나는 항상 권력을 만드는 역할을 해왔잖아. 그래서 나를 킹메이커라고 하는 거 아니가? 나는 킹메이커가 어떤 의미에서 자랑스럽고 또 어떤 면에서는 쑥스럽기도 해. 신문에 보니까 내년엔 킹메이커가 많을 것 같아. JP도 한다, YS도 한다잖아. 나는 그분들이 킹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을 도와야 하지 않겠나? 말하자면 보조 킹메이커라고 할까.”

    ―킹메이커의 성공조건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국민이 원하는 것을 읽고 방향을 잘 잡아야지. 민의가 어떻게 변해갈 것이냐 하는 것을 잘 포착해야지. 노태우 정권 때는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여서 이겼어. 그걸 우리가 다 했거든. 92년엔 문민정부로 이관하는 것이 최대의 숙제였고. 97년엔 대권을 중부권으로 넘겨야 국민통합이 된다는 생각에서 이회창이를 내세웠잖아. 나는 지금도 그 전략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회창이가 정치력이 부족했다 이거야. 나는 이회창이가 포용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권을 놓쳤다고 본다니까. 이인제가 못 나가게 잡았어야지. 또 YS를 왜 내쫓아?”

    ―보조 킹메이커가 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3김 연합후보를 김대표께서 만들겠다는 생각이시죠.

    “그렇지. 이젠 어느 정당이 독자 후보를 내가지고 정권을 창출할 수 없으니까 공동으로 후보를 만들어서 정권을 만들자는 것 아니가? 동서화합을 이루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3김 연합후보의 탄생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가능성은 충분해. 그렇게 안 하면 정권을 내놓는 거 아니가?”

    이인제도 가능성 있다

    ‘동서화해’와 ‘3김연합’ 그리고 ‘영남후보’. 김대표가 차기 대권주자와 관련해 언급한 세 가지 화두다. 결국 김대표는 이 조건들에 부합하는 후보를 만들겠다는 계산이다. 현시점에서 보면 민주당 김중권 대표가 가장 근접해 있는 듯하다. 하지만 허주는 “김중권이 얘기가 나올까 봐 더욱 말조심을 하고 있다. 아직은 후보를 대입할 시기가 아니다”고 말한다. 공식적으로는 일단 부인한 셈이다.

    ―김대표는 현재 영남후보론을 주장하시죠?

    “영남후보를 가지고 동서화해를 이루는 정권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냐, 그래도 영남 쪽에서 후보가 나왔을 때 본선에서 유리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지. 하지만 결코 영남 정권을 만들자는 건 아니야.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국민통합의 길 아니겠느냐. 그런 뜻이야. 알겠어?”

    ―영남후보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직 구도가 잡히지 않았잖아. 구도가 잡히면 다양한 조합을 대입해보고 그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밀어야지.”

    ―구도는 구체적으로 무얼 말합니까?

    “구도라는 게 뭐 있나? ‘한나라당이 영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까 영남후보를 내세워서 싸우는 게 더 낫다’ 이렇게 가닥이 잡히고 3당이 거기에 공감하는 거지. 그런 합의 없이 민주당에서 후보가 나와버리면 다음 정권은 어디로 가는지 뻔한 거 아니가?”

    ―얘기를 바꿔서 이회창 총재와 맞붙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영남후보뿐이라는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영남후보가 유리하다는 거지. 만일 3당이 이인제(李仁濟)를 밀기로 합의한다면, 그것도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건 뭐냐 하면 이인제가 지난번 대선 때 영남에서 선전했거든.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긴다는 거지. 하지만 영남에서 이인제를 비토하면 이회창이가 되는 거잖아?”

    ―‘이인제 최고위원도 가능성이 있지만, 영남후보보다는 당선 가능성이 떨어진다’ 그렇게 보시는 거죠.

    “영남후보가 아니면 이회창을 꺾을 수 있겠나? 정권 창출이 가능하나? 어렵다고 보는 거지.”

    ―현재 민주당 내에서 영남후보라고 해봐야 김중권 대표와 노무현 상임고문을 들 수 있는데, 두 사람도 구도만 맞춰지면 영남표를 흡수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만일 여권의 단일후보로 영남 출신이 나온다면 영남인들도 다시 생각을 안 하겠나? DJ는 이제 물러나는 사람이고, 지금껏 거품을 물었다 하더라도 ‘저 사람이 대통령 되면 영남 대통령 아니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가?”

    ―노무현 상임고문은 어떻게 보십니까?

    “특정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어려워. 노무현씨는 지금 부산 쪽에서 상당한 인기가 있는데 전체적인 구도를 볼 때 과연 득표가 되겠나. 무조건 젊은 사람으로 바꾸자는 건데, 결국 어떻게 표로 연결시키느냐? 이런 문제가 있다고.”

    김대표는 신중했다. 대선구도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설명하다가도 이름을 거명하면 말을 아꼈다. 그는 “지금 특정인을 거론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결국 김대표는 자신의 가치가 가장 커질 수 있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것은 영남후보다. 김대표가 현실정치에서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영남권뿐이기 때문이다.

    ―김대표께서는 차기 대선의 구도가 언제쯤 짜일 것으로 보십니까.

    “내년 초쯤. 한 6개월은 이대로 갈 거야. 구도를 만드는 데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거든.”

    ―내년 초라면 민주당 전당대회를 의중에 두시는 건가요.

    “전당대회 전에 어느 정도 방향이 설정돼야겠지. 만일 전당대회에서 3당 공동후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3당이 공조를 못하는 거 아니가? 반드시 김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동교동계의 생각은 확인해야지. 만일 3당의 합의없이 전당대회가 치러진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거든. 그렇다면 YS하고 나하고 영남 쪽에서 후보를 낼 수도 있고….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벌써 그런 상황까지 그리고 계신가요?

    “아니, 그건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어. 하지만 대안이라는 건 계속 바뀌는 거 아니가?”

    2개월에 걸친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됐다. 어느덧 일흔살의 노정객이 돼버린 허주. 하지만 현실정치에 개입하려는 의지는 젊은 개혁파 의원 못지 않았다. 어쩌면 김대표에게 내년 대선은 정치인생의 마지막 승부가 될 것이다. 과연 그가 오르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그는 첫 번째 인터뷰 말미에 이런 넋두리를 했다.

    “나는 말이야, 아주 명예롭게 정치판을 떠나고 싶었어. 마무리가 좋지 않은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달라야겠다’는 생각을 무수히 했거든. 나는 이회창이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국회의장이나 한 번 하고 정말 미련없이 정치를 그만둘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런 수모를 당하고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어. 내가 6·29를 건의하고, 수많은 법안을 막후에서 조율하고, 문민정부까지 탄생시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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