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황장엽과 국정원은 거짓말 그만 하라!”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5-04-15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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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원이 북한 노동당 고위간부라고 인정한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 그는 과연 거물급 공작원인가. 아니면 양심적인 반체제인사인가. 숨가쁘게 연결된 서울─ 베를린 직통 전화 2시간30분. 역사의 급류에 몸을 던진 한 지식인의 사상과 삶의 궤적.
    “여보세요, 송교수님이세요?”

    “예, 누구시죠?”

    최종 마감을 며칠 앞둔 4월13일 오후.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송두율 교수(57)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구 저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봄비에 젖은 대지처럼 촉촉하고 가라앉은 목소리. 최근 자신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진 일을 의식해서일까.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긴장감과 경계심이 배 있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33년이 지나도록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따던 해인 1972년, 한국에서 유신이 막을 올리자 그는 해외에서 반독재투쟁을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모든 논란과 시비와 의심의 출발점이었다.

    오후 4시니 베를린 시각으로는 오전 8시쯤 될 터. 그는 인터뷰 취지를 듣고나서 질의 요지를 팩스로 보내라고 했다. 인터뷰 성사를 대비해 작성해둔 질의서가 숨가쁘게 날아갔고, 팩스를 확인한 그는 정중하고 차분한 말투로 “15분 뒤 시작하자”고 말했다.



    베를린… 한국처럼 외세에 의해 분단되는 아픔을 겪었던 나라의 수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광경은 얼마나 장엄하고 감동적이던가. 임수경씨가 북한에 몰래 들어가기 전 거쳐갔고, 5·18에 분노한 황석영씨가 한때 망명생활을 하던 도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씨가 한을 품고 죽은 바로 그곳 베를린에서 그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국정원의 확인

    국정원은 그를 북한의 당 고위간부이자 해외공작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 그를 떠보는 질문이 불가피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당신 북한 공작원 맞소?”라고 묻고 싶지만, 그의 삶의 행적이나 그가 이룬 학문적 성과를 조금이나마 들어 알고 있다면, 우선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베를린 날씨가 어떠냐고.

    “여기는 갑자기 추워졌어요. 오늘부터 부활절인데, 아침에 눈이 왔어요.”

    ―한국은 완연한 봄인데요.

    “부럽구먼.”

    그가 허허 웃었다.

    ―이 좋은 봄날에 뜨거운 이념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시지요?

    “자세히는 몰라도 인터넷을 통해 국회에서 논란이 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한글 프로그램의 인터넷이 고장나 중앙일보와 연합통신의 영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친구들이 신문기사를 팩스로 보내줬어요.”

    그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그의 신분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한겨레에 써온 칼럼의 이적성에 관한 것이다. 첫째 것은 4월10일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국회 대정부 질의 답변과정에 불거졌다.

    박원홍 의원(한나라당):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인물인가.”

    임동원 장관: “우리 정보기관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고 나도 그렇게 믿는다.”

    박의원: “친북성향이라고 믿나.”

    임장관: “그렇다.”

    둘째 논쟁은 4월12일 이한동 총리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 이총리는 국회에서 송교수의 한겨레 칼럼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문에 “이적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받았다”고 답변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송교수의 신분에 관한 논쟁인데, 그 사실조차 불투명하다. 정보기관 못지 않은 권위를 가진 총리가 이렇게 답변했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소송이 진행중이며 수사대상자의 실체 등을 미리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

    명예훼손소송이란 송교수와 황장엽씨 사이에 진행중인 민사소송을 말한다. 송교수는 1998년 8월호 ‘월간조선’에 자신을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목한 황장엽씨의 주장이 실리자 그해 10월 황씨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서울지법에서 진행중인 이 소송은 2년6개월째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

    여기서 잠깐 송교수의 이력을 살펴보자.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고향인 제주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진학했으며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1972년 독일 사회철학의 거드인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한국에서 유신이 시작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베를린대학을 비롯한 독일내 여러대학의 강단에 섰다.

    1974년 재독학자 ·교민들과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를 결성, 초대의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반유신투쟁을 벌여나갔다. 1982년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뮌스터대학 정교수가 됐다. 1991년 5월 그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첫 방북길에 오른 후 이제껏 여러차례 북한을 갔다왔다. 지난해 ‘늦봄통일상‘ 수상을 계기로 귀국하려 했으나 준법서약서가 걸림돌이 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내에서 출판된 저서로는 ‘역사는 끝났는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등 10여 권이 있다.

    한겨레는 올초부터 송교수의 칼럼을 5차례 실었다. 칼럼 제목들을 보면 ‘2001 계몽의 변증법’(1.5) ‘신경제의 허와 실’(1.28) ‘JSA와 희망의 홀씨’(2.16) ‘미국 앞에서 당당해지자’(3.9) ‘교육이민이 사라지려면’(3.30) 등 ‘평범한’ 것들이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색안경을 끼고 들여다볼 만한 것은 없다. 국정원 공보관실도 “정밀 검토한 결과 이적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며 이총리의 답변을 뒷받침했다. 당사자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국내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인데, 다만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내가 해외에 오래 살아 경험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문제라도 국내에서와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거죠.”

    한나라당은 한겨레 칼럼을 문제삼았지만, 송교수와 국내 언론의 관계는 한겨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글은 그동안 한겨레 외 다른 매체에도 실렸거나 지금도 실리고 있다. 동아일보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무렵인 지난해 6월13일 ‘하나된 미래, 관용으로 열자’라는 제목을 단 그의 특별기고문을 실었다. 지난해 7월7일 중앙일보 권영빈 주필(당시 논설주간)은 칼럼을 통해 “그의 저술이나 대화를 통해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나는 믿는다… 송교수는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의 희생자”라며 당국에 그의 귀국조치를 촉구한 바 있다. 지난해 6월8일 남북정상회담을 주제로 삼은 MBC ‘100분토론’에선 사회자 정운영씨와 송교수의 전화대담이 있었다. 송교수는 현재 주간지 ‘시사저널’과 일간 ‘내일신문’에도 칼럼을 쓰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4월10일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국회 발언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에 실린 송교수 글을 보니 임장관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데요.

    “임장관 말이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얼마 전까지 국정원 수장이던 사람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또 임동원씨가 처음부터 개입한 사건도 아니잖아요. 전임자들로부터 이어받은 사건이지요. 황장엽씨는 국정원 안가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주머니돈이 쌈지돈이고 쌈지돈이 주머니돈이라는 말이 이 사건에 딱 맞아요. 황장엽씨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황씨 변호인이 법정에서 내세우는 유일한 증거는 국정원측 주장이에요. 그런데 국정원 주장의 근거는 황씨 주장입니다. 결국 순환논리인데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진실이. 그런 상황에 국정원 수장을 지낸 사람이 그 고리를 스스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순환논리의 연결고리를. 나도 그 위치에 있다면 마찬가지겠죠.”

    ―임장관은 정보기관 판단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민들은 믿지 않을 수 없지요. 전 국정원장이자 현재 통일부장관인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데.

    “기관의 입장은 어차피 수장이 책임질 수밖에 없어요. 실무자들이 아니에요. 법정에 내미는 증거물엔 국정원장 직인이 찍혀요. 아다시피 국정원도 내부 이해관계가 복잡합니다. 손발이 착착 맞는 것도 아니고. 황씨 문제를 떠맡게 된 국정원 책임자들은 골치 아프죠. 수장 된 사람으로선 그들의 처지를 고려하고 지켜줄 수밖에 없죠. 그들이 거짓말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이 문제는 결국 재판이 끝나야 해결될 겁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 때문에 황장엽씨와 국정원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정부 들어 황씨의 효용가치가 떨어졌지요. 그런데도 국정원이 황씨를 편드는 것은 황씨 주장에 근거가 있어서가 아닐까요.

    “나도 그 점을 많이 생각했어요. 왜 그럴까. 분명한 것은 내가 만일 국내에 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점입니다. 황씨는 지금 누구 말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예요. 그 사람이 처음 넘어올 때 황장엽 리스트가 있다고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그런데 그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잖아요. 그나마 얘기되는 것은 내 문제밖에 없어요. 그를 데리고 온 국정원으로선 그 사람 얘기 10개 중 하나쯤은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전부 거짓말이라고 하면 국정원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황씨가 제발로 걸어들어온 것도 아니고 이쪽에서 접촉해 데리고 온 거잖아요. 거기 관련된 사람들이 지금 국정원 중추부에 있을 거라고요.”

    ―국정원의 대국민 신뢰도가 고려된 것이라는 얘기지요?

    “내가 해외에 있으니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다. 내가 (황장엽 리스트 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거지요. 국내에 없으니.”

    ―황씨 말은 북한에 있을 때 김용순 대남담당비서가 말했다는 거죠. 나름대로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닌 듯 싶은데요.

    “98년에 황씨가 그런 주장을 하자 북에서 반박성명이 나왔죠. 김용순이나 황장엽이나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어서 후보위원 명단을 알 처지도 아니고 알아도 당 체제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또 황씨가 그런 얘기를 들었다는 93년경 김용순 비서는 대남담당이 아니고 국제담당이었다는 겁니다.”

    송교수는 당시 북의 반박성명을 ‘킹 소프트’라는 미국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확인했다고 한다. ‘킹 소프트’는 북한 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을 인용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은 상당히 높은 직위인 모양입니다.

    “사회주의국가에선 원래 정치국이 파워센터 아닙니까. 한마디로 모든 핵심적 사안은 거기서 결정한다고 봐야지요. 정치국엔 정위원과 후보위원이 있어요. 정위원은 발언권 투표권이 있지만, 후보위원은 내가 알기론 발언권만 있어요. 정치국은 이렇게 구성됩니다. 먼저 전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죠. 그 다음 중앙위원회에서 다시 정치국원을 선출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핵의 핵의 핵인 거죠. 사회주의국가에선 다 비슷해요. 소련도 중국도. 노동당 정치국이라면 북한사회의 틀을 결정짓는 핵 중에 핵이라 할 수 있죠. 황장엽이나 김용순 같은 사람은 거기 끼지 못해요. 비서직은 업무를 상시적으로 수행하는 책임자지 정책 결정권자는 아니거든요.”

    송교수는 “내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영광이지요”라며 웃었다. 송교수 문제와 관련한 국정원의 공식입장은 “증거는 있지만 안보상 이유로 밝힐 순 없다”는 것이다.

    “재판과정에 가장 핵심적 문제가 제기돼 우리측에서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항상 그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에요. 독일 변호사를 만나 물어봤어요. 그 변호사 말이 ‘그건 다 이긴 싸움 아니냐’는 거예요. 판결은 반드시 증거에 기초해야 하고 판결문에 근거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러이러한 증거로 이렇게 판결한다는. 만약 국가안보상 이유로 증거를 댈 수 없다면 아규먼트(논쟁)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죠. 독일법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소송은 진척이 있습니까.

    “2년 이상 질질 끌고 있어요. 저쪽에서 엉터리 자료를 내밀면 이쪽에서 반박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어요. 재판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이제 황씨는 아예 사라지고 황씨의 증인으로 나선 국정원과 나의 대결만 있어요.”

    ―저쪽에서 내놓은 자료 중 눈에 띌 만한 것이 있습니까.

    “예전에 황씨가 안가에서 재판받은 적이 있잖습니까. 신변안전을 이유로. 99년 9월28일로 기억되는데, 비공개였어요. 당시 나는 미국에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후 북한이 중앙통신을 통해 그 재판을 언급하며 국정원과 황씨를 공격했어요. 국정원은 ‘봐라. 송두율이 변호사에게 재판관련 자료를 받아 북에 넘겨줘 공개된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연합통신 기자가 당시 재판정에 있었어요. 연합통신이 기사화하는 바람에 공개된 겁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입니까. 그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상상력을 발휘해 얘기를 꾸며내고 있어요. 인터넷에 들어가 9월29일자인가 30일자 연합통신을 확인해보니 그 내용이 나와 있더라고요. 그런 따위의 황당한 증거들, 지금까지 수십 가지가 넘어요.”

    ―변호사는 뭐라고 합니까.

    “변호사는 기본 논거와 증거를 다 댔으니 빨리 판결을 독촉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데요. 왜 이렇게 오래 끄는지. 독일에서는 최장 끌 수 있는 기간이 2년이거든요. 정권이 바뀌고 나서나 판결이 내릴지….”

    ―재판부에서 출두하라는 요청은 없었습니까.

    “겁날 게 없으니 피할 이유는 없죠. 황장엽씨가 자기는 신문을 받는데 원고인 내가 받지 않는 건 부당하다고 불평했어요. 그래서 작년 7월4일 ‘늦봄통일상’ 수상을 계기로 국정원측과 귀국협상을 벌일 때 국내에 들어가면 조사를 받을 생각이었어요. 사실 국정원이 나를 신문할 권리는 없죠. 법정에 넘어간 문제니. 그렇지만 국정원이 황씨 주장과 관련해 궁금해하면 호텔 같은 데서 조사에 응할 수 있다고 약속했습니다. 준법서약서는 쓰지 않는 조건으로. 그때 얘기가 다 돼서 비행기 표 끊고 짐까지 다 쌌어요. 그런데 조선일보가 사설로 문제를 삼고 한나라당이 시비를 걸고 나오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어요. 중간에서 조정한 사람이 난처하게 됐지요. 결국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죠.”

    송교수는 황장엽씨를 북한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학자 대 학자로 만난 것이라고 한다. 송교수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요청했다.

    “두 번 만났어요. 그 사람이 북에서 최고 이론가라니 만나고 싶었지요. 그는 50년대에 유학한 사람이고 나는 서방에서 30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선 사람이니 만나면 할 얘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도 철학하고 나도 철학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철학 얘기들이었어요. 정치 얘기는 전혀 없었고. 내가 받은 인상은 (황씨가) 차다는 거예요. 잘 웃지도 않고 농담도 안 하고. 혼자만 얘기하면서 나한테 발언할 시간을 안 주는 거예요. 현대철학을 서양에서 공부하는 사람과 시각이 안 맞을 수밖에 없죠.”

    ―감정이 상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어요. 황씨는 지구가 팽창하면 다시 수축한다고 했어요. 정반의 원칙에 의해 다시 수축한대나. 반면 나는 시초가 있으면 종말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어요. 지구가 팽창하면 다시 사라지지 않겠냐고.”

    송교수나 황장엽씨나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송교수가 철저하게 위장하고 있거나 황씨가 이성을 잃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송교수 말이 맞다면 황씨는 생사람을 잡고 있는 셈이다. 그 경우라면 과거의 어떤 악연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제쳐둘 수 없다. 송교수는 황씨보다는 오히려 그의 제자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북한에서 만나면 술도 같이 마시면서 황씨하고는 달리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송교수로부터 서양철학의 새로운 동향을 알고 싶어했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전문가죠. 그들과는 전문적인 논쟁이 가능했으니까. 가깝게 지낸 사람이 세 명이에요. 한 명은 김일성대학 철학과 강좌장으로 북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에요. 남쪽으로 치면 학과장이지만 저쪽에선 철학의 비중이 큰만큼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또 한 사람은 남쪽에도 많이 알려진 박순덕 주체철학연구소장이고, 나머지 한 명은 이상갑 주체과학원철학연구소장이에요. 그 사람들이 황씨한테 내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들은 나를 통해 과학이나 사회과학, 철학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고 자료도 구하고 싶어했어요. 그들은 러시아어를 잘 해요. 나도 잘하진 못하지만 문헌을 읽는 수준은 되니 학문적 대화가 가능하지요. 일본말도 잘 하는데, 일본 쪽 자료를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황씨 제자들은 나를 신주처럼 모신다고 할까요. 아주 잘 대해줬지요. 만약 황씨가 그런 점을 섭섭하게 여겼다면 옹졸한 거지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황씨가 나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나 하는. 91년 내가 처음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나를 따로 불러 긴 시간 대화를 나눴어요. 또 김일성대학에서 강연도 했는데, 그게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던 모양이에요. 기자를 지낸 외숙모가 내게 귓속말로 ‘반향이 여간 크지 않다’고 전했어요. 당시 ‘역사는 끝났는가’라는 주제로 공개강연을 했는데, 북에서 내로라하는 노장 교수들이 다 참석했지요. 황씨는 스스로 최고이론가로 자처해왔잖아요. 황씨 주장이 하도 어이가 없으니 혹시 그런 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봤어요.”

    북한에 있는 송교수의 외삼촌 부부는 6·25 이후 북에 살게 됐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고향이 강원도 강릉인데, 전쟁 때 왔다갔다하다 외삼촌 부부만 북에 남게 됐다는 것이다. 남쪽에는 어머니와 동생 세 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도청이 우려돼 통화도 자주 못한다고 한다. 송교수는 “요즘 한국에 도청 공포증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나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교수 사건의 열쇠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김철수’가 쥐고 있다. 황장엽씨와 국정원에 따르면 김철수는 송교수의 가명이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의 관계당국이 김철수로 지목한 사람은 네 명이나 된다. 첫째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친북인사 김철수, 둘째는 1989년 서경원 의원 방북 때 서의원 여권에 등장한 김철수. 셋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국 학생 두 명의 방북을 주선한 김철수, 마지막으로 1991년 주사파 대부로 불리던 김영환씨를 북에 데리고 갔던 거물 공작원 김철수다.

    4명의 ‘김철수’중 누구?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서경원 의원 방북 직후인 1989년 9월 주독일대사관이 외무부에 보고한 공식문서에 나타난 김철수 관련기록. 이 문서에 따르면 김철수는 황씨 주장과는 달리 독일에서 활동중인 다른 이름의 북한 공작원이다.

    이 문서에는 “82년 7월 김정일은 측근 인물에게 ‘서독에는 조선노동당 구라파위원회가 있는데 위원장이 김철수다’라고 언동한 사실이 있어 김철수의 신원을 추적, 확인한 결과 김철수는 김성수의 가명으로 밝혀졌다”는 기록이 있다. 문서에 따르면 김성수는 “북한의 직접 지령에 따라 서독을 거점으로 암약하고 있는 재독 북한 공작원”이다. 그러나 송교수에 대해서는 “서독에 체류중인 불순교포”라고만 규정하고 있다. 이는 1998년 8월 한겨레 보도로 밝혀진 바 있다.

    송교수에겐 방북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1991년 첫 방북 이후 지금까지 10회 정도 북한에 갔다왔다. 지난해 12월초에도 일주일 동안 머물다 돌아왔다. 국제학회에 참석할 북한 학자들을 선정하고 그들과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2월말 하와이에서 열린 이 학회에는 남북한 학자를 비롯해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 있는 재외한국인 학자 20명이 참석했다.

    그는 1995년부터 매년 북경에서 열리는 남북한 학술회의를 주도하고 있다. 이 행사는 국내 각 언론사가 돌아가면서 주관해왔다. 한국일보 중앙일보가 각 2회, 동아일보와 한겨레가 1회씩 주관했다. 이 학회에 참석할 북한 학자들을 섭외하는 건 늘 그의 몫이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을 방문하는 듯싶습니다.

    “정식으로 비자 받고 중국을 통해 들어가요. 자유롭다기보다는 내가 독일 국적을 취득한 93년 8월 이후엔 독일 여권을 갖고 다니니 아무래도 남쪽 여권을 갖고 있을 때보다는 편하다고 할 수 있겠죠.”

    ―독일 여권을 가진 93년 이후야 한국 정부가 간섭할 권리가 없지요. 91년 첫 방북 때는 어땠습니까. 국가보안법을 어기지는 않았습니까.

    “당시 나는 독일 영주권을 가진 상태로 한국 여권을 사용했습니다. 북한에 들어갈 때는 사전에 신고해 허가를 받게 돼 있었어요. 그렇지만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사후신고해도 된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북에 갔다온 후 초청장과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주독일대사관을 통해 자세하게 신고했어요. 그래서 불법은 아니에요. 문제는 내가 독일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관련자료를 다 보냈는데 뒷날 안기부가 그런 것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직무유기 아니냐’고 항의도 했어요. 당시 등기로 보냈고 사본도 내게 있는데. 정보기관이 그런 식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국정원은 송교수가 들어오면 조사할 방침입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려면 뭔가 명분이 있어야 할 텐데, 범법사실이라든가….

    “그게 문제죠. 범법사실이 없는데. 이적행위를 했다거나 뭐 그런 게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준법서약서를 요구하는 건 국제관례에도 없는 일이지요. 그래도 지난번에 그것까지는 받아들이려 했어요. 황씨 얘기가 정 그렇게 궁금하면 내가 대답해줄 용의 있다, 단 예우를 갖추는 차원에서 호텔에서 조사해라, 그러나 준법서약서는 쓸 수 없다고 했죠.”

    ―말이 나온 김에 준법서약서 문제를 얘기해보죠. 예전의 사상전향서와는 좀 다른 것 아닌가요?

    “알고 보니 전향서와 서약서는 말만 바뀐 거예요. 사상전향서나 준법서약서나 과거에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을 담는 것이지요. 결국은 하나의 함정이에요. 어떤 정해진 형식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구먼요. 그냥 자유롭게 쓰는 거니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달라요. 일제 때 사상전향서에도 특별한 형식은 없었어요. 차라리 규격화된 준법서약서 양식이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그런 점에서 사상전향서와 같은 겁니다.”

    ―국내에선 박노해씨를 비롯해 그동안 감옥에서 완강하게 버티던 일부 양심수들이 준법서약서를 쓰고 출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준법서약서를 보수세력을 의식한 현 정부의 고육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민주사회에 편입되는 최소한의 통과의례로 생각한 거죠.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속을 차리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런 이야기를, 나를 아끼는 사람으로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거 뭐 종이쪽지 하나에 불과한데 까짓거 써주라고. 그런데 당사자로서는 그게 간단치 않아요. 내가 해외에서 30여 년 살며 이런 일을 겪게 된 근본 원인은 유신 독재입니다. 유신이라는 상황하에서 국내에 들어가 교수직을 구하는 것은 양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해외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것이 뒷날 광주 문제가 터질 때까지 연장된 겁니다.

    내가 과거 정권 때 그런 행동만 하지 않았더라도 북에 들어간 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을 거예요.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 있거든요. 해외에 있으면서 유신 때, 전두환 때 아무 일도 하지 않다 이제 분위기가 좋으니까 남북을 동시에 오가는 사람들. 과거 아무 운동도 하지 않은 그들이 남쪽에 들어가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어요. 공개적으로 투쟁한 사람들만 문제가 되는 거죠. 유신 때부터 정보기관이 만들어 온 자료들이 지금도 유효한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북한에 들어가면 곧바로 남쪽을 등진 사람으로 낙인찍혀요. 바로 그게 문제인데, 북에 가면 남에는 못 가게 된단 말이에요. 북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을 비판한 사람으로, 친북인사로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묘한 논리비약이지요.”

    송교수는 1980년 김대중 당시 야당총재가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곤 곧바로 유엔인권위원회를 찾았다고 한다.

    “해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인권위원회 사람들을 설득해 회의 주제를 바꿨어요. 원래 일정이 있었으니까요. 내가 책상을 밀치고 거기로 달려간 건 순전히 학자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유신이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세력이 집권했는데, 이 정권이 요구하는 준법서약서는 과거의 사상전향서와는 성격이 다르지 않을까요.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차라리 준법서약서 내용을 공개하면 좋겠어요. 문제는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그것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매장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한국 정치문화에선 분명히 이런 말이 나와요. 그 사람도 변절한 거 아니냐, 뭐 한 자리 하려고 들어온 거 아니냐. 그 점이 꺼림칙해요. 내가 도덕적 순결주의나 결벽주의자, 도덕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현재·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묶을 수 있는 족쇄가 되기 때문에 준법서약서에 대해 거부감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최근 많은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는데, 개중엔 송선생이 너무 고집 부린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얘기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하죠. 내 미래의 사상까지 묶어놓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나 하고.”

    ―한마디로 학자적 양심이나 자존심의 문제란 말씀이지요?

    “그거 없다면 학자에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 정신이 없었다면 옛날에 벌써 귀국해 (준법서약서를) 썼을 거예요. 초등학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날 이때까지 학교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요. 원래 학자 집안이고. 내가 무슨 야심을 가지겠습니까.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을 땐 누구라도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내가 그 일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남북한 학자들이 모여 토론한 내용이 6·15남북정상회담에도 반영됐어요. 정상회담 합의사항의 기본정신은 남북한 학술회의에서 다 토론됐던 것이에요.”

    이쯤에서 그의 첫 방북 경위가 궁금해진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북한 사회과학원의 초청이지만 ‘친북’이라는 딱지가 붙을 걸 감수하고 그가 북에 들어간 데는 뭔가 속사정이 있지 않을까.

    “북쪽에서 처음 초청장이 날아온 것은 90년 가을입니다. 그때는 안 갔어요. 해가 바뀌어 일본 교토대와 서울대에서 동시에 초청을 받았어요. 북한도 한 차례 더 초청장을 보냈는데, 저야 당연히 모교 강단에 서고 싶었지요. 서울대에서는 1년 강의를 맡기려 했습니다. 학생들 수강신청을 받고 강의실이 배정되고 강의록까지 나갔어요. 짐도 싸놓고 준비가 다 됐는데 2월15일 서울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느닷없이 한 학기쯤 늦추자는 겁니다. 안기부 압력 탓이었어요. 화가 났죠. 게다가 학기가 시작되자 분신정국이 형성됐어요. 여기저기서 분신자살사건이 터지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북으로 간 겁니다.”

    ―말하자면 분노가 방북 이유였군요.

    “그렇죠. 또 북이 두 번이나 초청장을 보낸 데다 남에선 못 오게 하니. 북에선 동구라파가 무너진 데 대해 나만큼 정확한 정보를 가진 해외한국인 학자가 없으니 관심을 가졌겠죠. 나는 나대로 북을 알고 싶었고요.”

    ―북한의 초청은 어떤 경로로 이뤄졌습니까.

    “사회과학원장 이름으로 초청했어요. 베를린에 있는 북한 외교기관에서 편지를 갖고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둘째 편지엔 ‘작년 초청에 답변이 없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이르면 이를수록 좋겠다’고 썼더군요. 추측건대 북에선 베를린 담이 무너진, 수수께끼 같은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날짜를 잊어먹지도 않아요. 91년 5월8일에 들어가 3주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김주석을 만났지요.”

    송교수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3년 후인 1994년 7월 그는 김주석의 장례식에 초청 받았다.

    “당시 김주석은 동구라파 변화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고 동구에 오래 산 내 판단을 물었어요. 동·서독 통일과정에 대한 서로의 견해도 확인하고. 김주석은 또 자신이 과거 동구를 둘러본 일을 얘기하며 사회주의 퇴조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죠. 그러면서 동구 사회주의국가들과 북한은 다르다고 강조했어요. ‘우리는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은 소련에 너무 의존하더라’고 비판하더군요.”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소련이 감기에 걸리니 다 죽게 된 것 아니냐고 했어요. 91년이면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고르바초프가 거의 쫓겨날 때잖아요. 당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운명에 대해선 ‘수술을 해놓고 나니 환자가 죽었더라’는, 즉 대안 없이 칼을 먼저 대는 바람에 출혈이 심해 죽었다는 분석이 나왔지요.”

    ―당시 김주석은 국가 경영에 자신감을 보이던가요.

    “아, 자신감이 넘쳤어요. ‘우리는 그렇게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세운 나라냐. 소련이 코메콘(COMECON;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협력기구)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안 들어갔다. 그 때문에 경제원조가 끊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덕택에 오늘날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만난 적 없습니까.

    “94년 7월8일 김주석 장례식 때 잠깐 만났어요. 긴 이야기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가 ‘먼길 와줘서 감사하다.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자’고 했는데, 그후 따로 만난 적은 없어요.”

    ‘거물 공작원’ 혐의를 받고 있는 송교수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더욱이 그는 남북한 통일의 모델이 될 만한 독일 통일과정을 현장에서 죽 지켜보지 않았던가.

    ―독일 통일과정에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이 있다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의 과정입니다.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전체적인 사회시스템이 서서히 변화하면서 두 체제가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겁니다. 서로를 내 속에 들어있는 타자로 인식하고, 즉 남은 북이 남 속에, 북은 남이 북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통일은 이처럼 이해의 영역과 공통분모가 커지면서 서서히 이뤄지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하는데 그 일을 언론이 이끌어야 합니다. 언론의 계몽이 절실하지요.

    독일통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마음의 통일은 지금도 진행중이에요. (통일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완전한 통일을 이루려면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야 할 겁니다. 따라서 남북한도 지금부터 그 일을 시작해야 해요. 서로 다른 이력서를 갖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어느 한쪽의 이력서에 맞출 순 없어요. 한쪽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변혁하는 과정이 바로 통일입니다. 그런데 둘이 하나 되는 상황만 설정하니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흡수통합이냐 적화통합이냐, 이런 식의 상상력만 발휘되는 겁니다.”

    ―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문제삼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속도조절론을 폅니다.

    “속도라는 건 상대적인 것 아니겠어요. 지금 한국에서 속도조절론을 주장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바람직한 통일과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대북유화정책이 바뀌기를 바라는 겁니다. 퍼주기만 하면 안 된다, 그만둬야 한다는 얘기지요. 조절이 아니라 중단을 요구하는 겁니다. 자꾸 움직일수록 저쪽에 퍼주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러니 상호주의 해야 한다고. 그래서야 언제 통일이 이뤄지겠습니까.

    또 하나 문제는 미국입니다. 부시행정부가 들어선 후 북미관계가 나빠졌단 말이에요.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속도조절론엔 우리의 통일정책을 미국과 조율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어요. 다시 말해 북미관계 속도에 남북관계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급할 게 뭐 있습니까. 우리가 급하지. 분단 상태에서 서로 얼마나 쓸 데 없는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까.”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서독과 동독의 통일과정엔 상호주의 원칙이 잘 지켜졌다는 평가가 있던데요.

    “그렇지도 않아요. 동독에서 서독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를 서독이 깔아줬어요. 당시 동독에서 서독에 줄 게 뭐가 있었겠어요. 서독사람들은 그 고속도로를 다니며 동독 정부에 통행료까지 냈어요. 통일이 되자 그 도로는 나라 경제에 이바지하는 자산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야, 우리가 너희한테 이만큼 주니까 너희도 그만큼 내놓아라’고 말해선 될 게 없지요. 지금 북한에 해주는 것들, 나중에 다 우리 민족의 자산이 될 겁니다. 저쪽이 이쪽에 줄 것이 없는 상황에 1 대 1 거래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저쪽도 계속 받기만 하겠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관계가 개선되는 거지요. 상호주의를 고집할 경우 저쪽에서 ‘우리는 줄 것 없다’ 하면 모든 게 중단될 수밖에 없어요.”

    송교수는 엄밀한 잣대의 상호주의는 비판했지만 또다른 의미에서의 상호주의를 강조했다. 정치는 정치논리로,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나치게 정치 중심적이다. 과도한 정치논리가 경제 문화 등 나머지 영역에서 남북간 대등한 교류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정치원리로 경제는 경제원리로 접근하면서 순차적으로 교섭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저쪽에 돈이 없으니 이쪽에서 물질을 주면 저쪽에선 정치적으로 양보해야 하는 형편이지요. 그렇다 보니 자꾸 혼동이 빚어져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코드를 무리하게 맞추기 때문이에요. 경제는 합리성이나 이윤이라는 코드에, 정치는 사회안정이나 공존관계 유지 같은 코드에 맞춰야 합니다.

    경제 관계에서 손익이 안 맞더라도 정치는 개입하지 말고 경제논리로 풀어야 해요. 현대 금강산관광이 좋은 예입니다. 적자를 본다고 해서 북을 정치적으로 압박해선 안 돼요.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평안도 출신 사람의 입국을 거부했다는데 그건 잘못된 거죠. 돈 내고 금강산 관광을 신청한 사람이니 단순한 관광객으로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북에선 이를 정치적 시위로 받아들인 모양이에요. 어쨌든 현대가 힘들다고 하니 북쪽에서 비용을 낮췄잖아요. 그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독일 통일과정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독일에서는 정치가 개입하는 영역이 크지 않았어요. 각 분야의 코드가 따로따로 작동했어요. 그러니 정권이 바뀌어도 기본 틀이 바뀌지 않았지요. 그런데 남북은 동·서독에 비해 사이클이 크게 다르고 남남간 사이클이 또 달라요. 따라서 우선 서로의 사이클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해요. 그러려면 자주 만나 이야기해야지요.

    정치는 6·15선언처럼 큰 틀에서만 작동하고, 구체적인 진행과정에는 하위 체제들이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민간채널을 활성화하고 분야별로 든든한 코드를 마련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남북간 교류를 보면 정치적 기능이 지나치게 발휘되는 탓에 민간 영역이 퇴보하고 있어요. 양쪽 다 정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구조에선 정치가 굳으면 나머지 분야도 동시에 굳어질 수밖에 없지요.

    북한의 태도도 문제예요. 북은 유일체제로 정치와 경제가 하나 아닙니까. 경제요구가 정치요구로 환원되다보니 경제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여지가 없어요. 그러면 남쪽이 주는 것에 상응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부응하는 뭔가는 내놓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남쪽 사회를 설득할 수 있잖아요.”

    ―북한 내부의 개혁속도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우리 쪽이 서두르는 양상인데.

    “사회주의는 나름대로 사이클이 길죠. 김일성부터 김정일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이클이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이에 반해 남쪽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굴곡이 심했지요. 그래서 사이클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북쪽은 남쪽의 사이클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만 말고 남쪽에 맞춰주는 노력을 해야 해요. 반면 남쪽은 민족 문제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가져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 틀이 바뀌지 않는 플랜을. 서독에선 집권당이 바뀌어도 통일정책의 틀이 유지됐거든요.”

    ―햇볕정책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요?

    “햇볕정책의 기본 틀엔 동의합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햇볕정책 성공에 관건이 아닐까 싶어요. 미국은 군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예요. 지난 번 이정빈 외교부장관이 물러나면서 국내 언론에 대해 섭섭해했는데 이장관의 문제제기는 적절한 것이었어요. 언론이 자주적 외교정책에 반주를 맞춰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죠. 그러니 외교실수로만 보이고.”

    -황태연 교수 발언 파동을 알고 계시죠? 한국전쟁과 KAL기 폭파사건 등은 사과를 주고받을 사안이 아니라 국제법정에서 다룰 사안이라고 해 물의를 빚었지요. 이에 대해 국제법상 소추는 무리한 발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는데요.

    “일본의 과거청산과는 성격이 다른 사안이에요. 남북한간에 벌어진 일을 국제법에 따라 처리하려고 든다면 아무것도 풀리지 않아요. 그쪽도 들고나올 문제가 많아요. 전쟁 때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것까지 들춰내 사과를 요구한다면 끝이 없을 거예요. 예전에 내가 글도 썼지만, 신미리라고 황해도에 가면 미군이 어린애들까지 방공호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였던 곳이 있어요. 민족이 진정 화해하려면 과거를 잊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 불행한 과거가 있었으니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함께 건설하자는 거지요.”

    -하지만 뭔가 정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백날 떠들어 봐야 의미가 없어요. 남쪽 안에서도 화해가 안 돼 있잖아요. 제주 4·3이나 광주 5·18 등에 대해. 과거 집착보다는 미래를 위한 약속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송교수의 전공은 사회주의다. 1972년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 제목이 ‘헤겔과 막스’였고, 1982년의 교수자격논문은 중국과 소련을 연구한 것이었다. 그는 사회주의국가들을 연구하면서 이른바 ‘내재적 방법론’이란 걸 적용했다.

    “한마디로 사회주의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려면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들이 스스로 설정해놓은 이상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 ‘역사비평’ 봄호에도 썼어요. 제목은 ‘북이 어떻게 변화할 건가’인데, 그 요지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저 선전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들이 내재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가 북한 연구에 ‘내재적 방법론’을 적용한 것은 1980년대 말. 국내 잡지에도 이와 관련된 그의 논문이 8페이지 분량으로 소개됐다. 송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북한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체사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볼 때는 미숙하고 비약도 많아요. 개인의 철학이나 개인의 세계화를 중요시하는 남쪽과 달리 북쪽에선 민족이나 집단의 가치를 으뜸으로 삼아요. 그런 정신을 하나의 철학으로 정립한 게 주체철학이에요. 따라서 이를 자본주의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상당히 어렵죠. 기본이 완전히 다른 사회니까.

    재미있는 측면도 있어요. 주체철학은, 근대가 모든 것을 하나로 규격화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저항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탈근대적인 철학 체계로 볼 수 있어요. 자기 언어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북한의 철학적 정서나 의지는 평가할 만한 것이지요. 자기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인데, 자기를 지키는 동시에 세계정세에 적응할 수 있는 체계는 통일의 모델이 될 수 있어요. 말하자면 주체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거지요. 다시 말해 남쪽의 세계화와 북쪽의 주체화가 서로 보완된다면 세계화하면서 주체가 강화되고 주체화하면서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는 거지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났다. 녹음테이프를 갈아 끼웠다. 전화기를 든 팔이 저리다.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4월13일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는 성명을 내 “한나라당이 색깔 시비를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1999년 8월 결성된 추진위에는 학계 인사가 가장 많고 정치권 언론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 유력인사 170여 명이 참여한 상태다. 추진위는 송교수의 귀국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근까지 관계당국과 협의를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회오리바람 속 꽃 한송이

    ―언제까지 준법서약서 문제로 귀국하지 않으실 겁니까.

    “글쎄, 금명간 이성적으로 풀어야하겠지요. 윤이상 선생님도 그 문제로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잖아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에요. 여기서 윤선생님과 가깝게 지냈고 그분의 임종까지 지켰는데, 그분을 생각하면 그런 것까지 쓰면서 돌아갈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얼마 전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김지하 시인이 전화에 메시지를 남겨 놓았더군요. ‘정말 보고 싶고 같이 살고 싶다’고. 나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정치인은 아니란 말이죠.

    크게 숨도 못 쉬던 유신 체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양심을 지키는 것이었고, 80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이 위기에 처하고 광주에서 학살극이 벌어졌을 때 세계여론에 호소하고, 남북관계가 전혀 풀리지 않고 있을 때 남북 학자들을 북경에 모이게 해 통일 이후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고 점검했어요. 준법서약서를 써야 할 만큼 잘못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가장 큰 문제는 과거 아집과 패러다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에요. 이번 사태도 내 문제가 중심은 아닌 것 같아요. 햇볕정책과 언론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내 문제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죠.”

    그는 “남북한 학술대회를 한번은 평양에서 한번은 서울에서 개최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 이번 일이 터졌다. 내 계획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일종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귀국한다면 제일 먼저 어디를 가보고 싶습니까.

    “우선 제주도지요. 고향이니까. 비행장이 확장되면서 (고향의) 반이 없어졌다고 해요. 그 다음에 유년기를 보낸 광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런 후 만나고 싶던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하고, 젊은 친구들을 만나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내 자식들도 이제 다 컸거든요.”

    그는 연년생인 아들 둘을 두고 있다. 26세인 큰 아들은 ‘막스―프랑크 연구소’의 연구원이고 둘째는 뮌헨대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베를린예술대학 도서관 사서다. 절친한 사이인 김지하 시인이 그에게 보내온 서화 중엔 다음의 글귀가 있다.

    표풍중화일규(飄風中花一揆: 회오리바람 속에 꽃 한송이의 헤아림).

    문득 황석영씨 소설 ‘오래된 정원’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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