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문명자 기자, 이 친서를 김정일에게 전하시오!”

모리·김정일 北日정상회담 불발내막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5-04-15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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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7월15일 모리 일본총리는 문명자씨가 묵고 있는 캐피털 도큐호텔을 찾았다. 문명자씨가 김정일위원장에게 보내는 친서를 써주면 전달하겠다고 하자 모리총리는 자신의 명함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기를 원하며 일본·북한 정상회담을 가지면 두 나라 외교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는 내용을 써주었다.
    “문명자 기자, 이 친서를 김정일에게 전하시오!”
    끊임없이 자질 시비를 겪던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지난 4월6일 공식적으로 사임의사를 밝혔다. 그에 대한 자질 시비는 지난해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 도화선에 불을 댕긴 사건이 바로 모리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을 시도하다 좌절된 ‘친서 파동’이다.

    사건은 2000년 6월 하순에 시작됐다.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에게 모리 총리가 국제전화를 걸어 축하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 통화에서 “모리 총리께서도 평양으로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것이 아시아 평화와 일본·북한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6·15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뒤 서울과 도쿄, 워싱턴 외교가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클린턴 대통령과 모리 총리가 평양을 방문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내용은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2000년 11월 ‘아세안+3(한·중·일)’정상회의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은 11월27일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AS) 주최로 열린 ‘싱가포르 렉처(세계 저명인사 초청 강연회)’에서 연설한 뒤 한 참석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일본 문제는 내가 모리 총리하고 북한 사이에서 약간의 심부름을 했다. … 나는 문제를 풀려면 모든 결정권을 한손에 쥐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대화로 풀라고 권했다. 그래서 모리 총리는 그 후로 김위원장에게 친서도 보내고 식량도 50만t을 보내는 결단을 내렸다. 다만 북·일 사이에는 과거 식민통치 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고,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 인사 생사·안전 문제도 있고 해서 일본 정부가 노력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잘 진행되고 특히 북·미 관계가 잘되면 북·일 관계도 좋은 결과를 향해 잘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클린턴 대통령과 모리 총리가 평양 방문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인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까지 평양을 방문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야당이던 공화당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클린턴 본인은 평양행을 무척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리 총리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려고 했던 것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 전말이 바로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가 중개했던 ‘친서 파동’이다.



    세계최초 김정일 단독 인터뷰

    2000년 6월 말 김대통령과 모리 총리가 전화통화를 하던 그 순간,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는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평양에 들어간 것은 정상회담이 열리기 보름 전인 5월27일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진행된 실무협의 과정에서 난제 중 하나가 취재기자를 80명으로 할 것인가, 40명으로 할 것인가였다. 이것도 한국기자에 국한된 것이었고, 외신기자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 북한의 방침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문명자씨는 외신기자로는 유일하게 정상회담 취재를 허가받았다. 이후 문씨는 6월30일 오전 9시5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6시간 동안 원산초대소에서 김정일위원장을 단독 인터뷰했다. 서방 기자로 김정일위원장을 단독 인터뷰하기는 이것이 세계 최초였다. 그는 이 내용을 월간 ‘말’2000년 8월호에 게재했다.

    북한은 김정일위원장과 문명자씨의 인터뷰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000년7월1일자 ‘로동신문’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재미녀류기자 문명자녀사를 접견하시였다’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6월30일 조국에 체류하고 있는 재미녀류기자 문명자녀사를 접견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용순비서가 여기에 함께 참가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저명한 녀류기자인 문명자녀사를 반가이 맞이하시고 따뜻한 담화를 나누시였다. 석상에서 문명자녀사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현지지도의 그토록 분망한 속에서도 친히 자기를 만나주시고 환대하여 주신데 대하여 가장 뜨거운 감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문명자녀사를 위하여 오찬을 마련하시고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북한에서 발행되는 ‘통일신보’도 문명자씨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관련 기사를 썼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 6월30일 재미녀류기자 문명자녀사를 접견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 서거 후 만나주신 외신기자로서는 문명자녀사가 처음이다. 사실 세계의 이름 있는 언론사들은 한결같이 경애하는 장군님께 회견을 신청하고 있었다. 그이께서 과연 누구와 가장 먼저 회견할 것인가는 전세계 언론계의 최대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여러 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견에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명자녀사가 질문한 북남최고위급회담과 서울방문, 조미관계, 조일관계 등 많은 국내외문제들에 대해 명철한 해답을 주시였으며 그를 위해 오찬을 마련하시고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김정일위원장과 인터뷰를 마친 문씨는 중국으로 나왔다가, 일본으로 날아갔다. 누구의 부탁(?)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문씨에게는 특별 임무가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문명자씨는 자민당 본부 인근의 캐피털 도큐(東急) 호텔에 머물면서 아는 사람을 통해 모리 총리를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이때 문명자씨가 활용한 사람은 모리 총리가 단골로 드나들던 도쿄 긴자의 고급요정 ‘마담’이었다. 현재 30대 중반인 이 여인은 모델 출신으로 상당한 미인이다. 모리 총리는 평의원 시절부터 이 여인과 친했고, 친해진 뒤부터는 아예 따로 살림을 차려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 총리가 요정을 좋아하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요미우리 신문’은 4월5일 지난 1년간 모리 총리의 일정을 조사한 결과 야밤에 요정을 드나든 것이 무려 90일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모리 총리가 자신이 속한 당내 계파 의원들로부터 “요정 출입을 그만둬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 마담의 전갈을 받은 모리 총리는 7월15일 문씨가 묵고 있는 캐피털 도큐호텔을 찾아가 그를 직접 만났다. 이때 문명자씨는 모리 총리에게 김정일 위원장 앞으로 친서를 써주면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일본 언론은 이에 동의한 모리 총리가 자신의 명함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기를 원하며 일본·북한 정상회담을 가지면 두 나라 외교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써서 주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모리 총리는 8월1일 김대중 대통령과 다시 전화통화를 했다. 이와 관련해 2000년 9월30일자 일본 도쿄(東京)신문은 김대중 대통령이 모리 총리에게 “김국방위원장에게 직접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고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모리 총리가 8월말 도쿄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던 문명자씨를 다시 만나 베이징에서의 정상회담을 타진하는 친서를 건넸다고 보도했다.

    이 친서를 받은 북한측은 국제 외교 관례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너무나 파격적인 행동과 내용이어서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총리가 공식 외교경로를 통하지 않고 총리 명함에 친필을 써서 보낸다는 것은 국제 외교 관례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2000년 9월 중순 은밀하게 조총련을 통해 일본 외무성에 모리 총리가 진짜로 명함에 친필로 편지를 써서 북한으로 보냈는지 사실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일본 외무성과 정보기관들은 깜짝 놀랐다. 확인과정에서 눈치를 챈 일본언론은 “모리 총리가 외국 여기자의 말만 듣고 외무성과 의논도 하지 않고 김정일에게 친서를 보낸 것은 국가의 망신이며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처사”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과 언론을 더욱 자극한 것은 그 중간다리 노릇을 한 사람이 일본 기자도 아니고 친북한 로비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계 여기자라는 점이었다.

    사태가 악화돼 ‘모리 총리 사퇴’라는 정치 문제로 비화하자, 일본애국당·일본을 지키는 청년동맹 같은 우익단체 회원들이 매일같이 버스 10여대에 나눠타고 문명자씨가 머무는 호텔 앞에서 “문명자 물러가라!” “북한의 스파이 문명자를 일본에서 축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경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프린스호텔 주변을 경계하는 등 문명자씨가 떠날 때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이 때부터 모리 총리는 자질 문제에 시달렸다. 일본 야당은 내각 사퇴, 국회 해산, 총선거라는 공세를 퍼부었고 자민당은 궁지에 몰렸다.

    요미우리의 폭로

    “문명자 기자, 이 친서를 김정일에게 전하시오!”


    이런 와중에 또다른 불씨가 불거졌다. 1200만부라는 최대 발행 부수를 가지고 있는 ‘요미우리 신문’과 영어판 ‘Daily Yomiuri’신문이 올해 3월3일자 1면 톱기사로 ‘수상 친서를 팩스로 보내다’는 제목 아래 모리 총리와 문명자씨가 관련된 친서 파동의 새로운 사실을 폭로하는 기사를 크게 보도한 것이다. ‘Daily Yomiuri’의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정부 소식통은 요시히로 모리 총리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내는 친필 팩스를 2000년 여름 북경에 있는 북한 로동당 상급 관리에게 보냈다고 말했다. 총리 친필 사인이 들어간 이 팩스는 북한 로동당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북경사무소 황철(黃哲) 상무에게 보내졌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는 일본의 오랜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일반적으로 이런 정도의 문서를 외국 지도자에게 보낼 때는 특사를 통해 직접 전달한다. 정부 관련자들은 친서를 읽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팩스를 보낸 모리의 행동은 얼토당토않은 처사라고 말했으며 시즈오카현(縣)대학의 한국정치담당 하지메 이즈미 교수는 “만약 최근의 폭로가 사실로 판명된다면, 이는 총리가 커다란 실수를 범한 것이다.… 총리가 (김정일에게) 내각의 뜻을 전하려 했다면, 그는 공개된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즈미 교수는 다만 “일본 국민과 타국에까지 알려진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모리 총리는 북한으로부터는 커다란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리는 지난 해 여름 황씨와 연결되어 있는 재미 한국 언론인 문명자씨를 도쿄에서 만났다. 문씨는 계속해서 모리에게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청했다. 이 사건과 밀접히 관련된 소식통에 따르면 모리 총리는 문명자가 보는 앞에서 황씨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팩스를 보냈다. 이 소식통은 또 모리 총리는 자민당이나 외무성 관리에게는 이 사실을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편지에서 모리 총리는 북일 관계 개선을 강력히 희망했다는 것이다. 이 편지에서 모리는 가능한 한 빨리 김정일이 자신과 회담을 갖기를 바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의 소식통은 지난 해 9월, 평양은 모리 총리가 자필로 쓴 팩스가 사실인지 여부를 도쿄에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 정부는 일본 정부에 “그 편지는 적절한 시기에 김정일 총서기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보원들에 따르면 이 팩스는 김정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제보원들은, 아마 편지 내용 정도는 김정일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팩스를 받은 황철은 북한 로동당 비서 김용순의 측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철은 지난해 8월 키사라주현(縣)·시바현(縣)·도쿄 등에서 열린 외교관계 정상화 회담에 참석했다. 황의 지위는 일본 외무성의 과장급에 해당된다고 한 정부 관리는 말했다. 지난해 모리 총리는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회담을 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이 통화 직전에 남한과 북한은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지난 해 9월 유엔에서 열린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차 출국하기 전에 모리는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만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모리 총리가 김영남과 회담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미국측의 까다로운 몸수색을 이유로 갑자기 뉴욕행을 철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에 유력 야당 민슈토(일본 민주당)의 준 이즈미 의원은 팩스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정부에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정부는 “총리는 8월에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모리 총리가 남한의 저널리스트 문명자를 알고 있었고, 그를 2000년에 만났다고 말했다. 모리 내각의 에이치 미야무라 장관은 요미우리 신문 회견에서 “모리 자신이 이미 말했듯이 총리는 결코 친서를 김정일에게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즈미 교수는 만약 그 편지를 황철이 받았다면, 김용순이 이 편지를 김정일에게 전해야 하는지를 가운데서 조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모리의 메시지가 김정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즈미 교수는 “총리는 적절한 채널을 통해 편지를 처리할 수 있는 직위에 있는 북한 관리에게 친서를 지닌 특사를 곧바로 보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정도 일을 꾸민 문명자씨는 누구인가. 그는 1930년 경북 금릉에서 출생해 1950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1955년 일본 명치대 상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만 해도 한일간에 국교가 없어 오갈 수가 없었으나, 그에게는 일본에 이원국이라는 형부가 있던 터라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이원국씨는 일제시대에 일본의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변호 업무보다는 운동에 취미가 있어 일본에서 가라데를 배워, 관련 활동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문씨는 이원국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61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그때부터 그 해 11월까지 여원사(社) 워싱턴 지국장을 지냈고, 1961년 12월부터 1973년 11월까지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 주미 특파원을 역임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신문들은 워싱턴에 특파원을 운영할 만큼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워싱턴 사정에 밝고 현지 돌파 능력이 있는 문씨는 현지 고용 자격으로 국내 언론의 특파원 임무를 수행했다. 또 그는 당시 육영수 여사와 친한 사이였다. 문명자씨는 60년대 중반 ‘여원(女苑)’기자로 육영수 여사를 인터뷰했다. 당시 ‘여원’은 국내 최초로 육여사 인터뷰 기사를 화려한 컬러로 인쇄해 내보냈다. 육여사는 이후 문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때문에 문씨는 국내 메이저 언론사의 워싱턴 특파원을 두루 거칠 수 있었다. MBC 라디오 ‘격동 30년’팀은 문씨와 육여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관계를 방송한 바 있다. 문씨는 1972년 5월에 미국 영주권을 얻었고 1973년 11월8일 문화방송 주미 특파원직에서 해임된 후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1974년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란 통신사를 설립, 미국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미국 이름은 줄리 문(Julie Moon)이다.

    문명자씨는 김대중 대통령과는 7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명자씨와 김대중 대통령의 인연은 74년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당시 MBC 워싱턴 특파원이던 문명자씨는 보도금지 사안인 이 사건을 보도한 후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당시 문명자씨는 공개 석상에서 이후락 부장을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씨가 서울에 들어오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이후락부장이 잠시 보자고 한다”며 그를 모처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이후락씨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직원이 문씨를 마구 때려, 문씨는 안경까지 깨지는 상처를 입었다. 문씨는 이 길로 미국에 망명해버렸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이 사건 뒤에 벌어진 일이다.

    김대중납치사건으로 DJ와 인연

    문명자씨는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긴밀하게 접촉했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면 1994년 4월15일 김일성주석의 생일 무렵 북한을 방문한 문명자씨는 당시 북한이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문씨는 이를 바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했다. 94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7월 방미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씨의 건의 내용은 “DJ가 7월 방미해서 기자회견을 할 때 카터를 대북중재자로 활용하자고 제안하라”는 것이었다. 카터 방북은 이미 북·미가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던 사안이므로 DJ가 짐짓 모르는 체 선수를 쳤다가, 성사되면, DJ의 통찰력을 평가받을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문명자씨는 김대중 대통령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국가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90년부터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던 1994년까지 북한을 6차례나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했을 때는 조문도 했다.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고 미국에 돌아간 문씨는 1994년 9월20일 워싱턴 미주방송에 출연해 김주석의 장례식 이야기를 소개했다.

    북한 로동신문 1997년 7월21일자를 보면 북한과 문명자씨의 돈독한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이 날자 로동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김일성 동지 서거 3돐 추모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조국에 온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이며 아세아 뉴스 대표인 문명자 녀사가 여러 차례 접견을 절절히 희망해온 것과 관련하여 7월13일 그에게 서한을 보내시였다’고 밝혔다. 김정일위원장이 문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나는 여사가 주석님 서거 3돐 추모행사에 참가해준 데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하여 사의를 표한다. 시간을 내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일들이 제기되어 짬을 낼 수 없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지금도 나는 우리 주석님께서 생전에 여사를 만나, 정의의 필봉을 들고 해외에서 애국애족의 활동을 널리 벌이고 있는 여사와 같은 저명한 여류 문필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하시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

    여사가, 주석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나, 우리 곁을 떠나신 이후에나 변함없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조국통일을 위하여 적극 활약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앞으로 조국을 방문하는 기회에 꼭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여사가 건강하여 사업에서 보다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1997년 7월13일 함흥에서 작성된 이 편지에는 김정일 친필 사인이 들어 있다. 북한은 이 편지를 A4크기의 선전지에 담아 대량배포했다. 문씨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장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문씨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틀 뒤인 97년 12월20일에 일산 자택에서 김당선자를 만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167쪽 사진 참조). 문씨가 모리 총리를 만나서 북일 정상회담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북 양쪽의 정상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 가운데 한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문명자의 이중플레이

    문명자씨가 누구의 부탁을 받고 모리 총리를 만났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혼자 판단하여 이렇게 큰 일을 꾸미기는 불가능하다. 추론하자면 남과 북의 최고 지도자 두 사람 중 하나인데, 시기상으로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일 가능성도 있다. 문씨가 6월30일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뒤 바로 도쿄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측이 모리 총리의 친서를 받고 확인 작업까지 벌인 사실을 보면 그랬을 개연성은 떨어진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부탁을 받았을 가능성인데, 증거는 아직 없다. 다만 70년대 중반부터 문씨가 김대통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추리할 수 있을 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씨가 70년대부터 남과 북을 오가며 이중 플레이를 펼친 것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1998년 ‘김대중 X파일’재판 당시 안기부는, 재판 관련 자료로 문명자씨 ‘존안(存安)카드’를 제출했다. 이 카드에는 문씨의 ‘언동요지’가 있는데 그 첫 기록은 1973년 11월8일자로 다음과 같다. 「73·11·8 亡命宣言時까지는 當部業務에 協調, 金大中 渡美動向提報 및 反政府僑胞動向提報」

    안기부는 이 존안카드에, 여러 가지 근거를 들며 ‘문명자는 미 CIA 첩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북괴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이 존안카드가 작성된 1977년 3월9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문씨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문명자씨는 심장병 때문에 워싱턴 근교 자택에 칩거중이다. 북한 당국은 그가 지난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의 병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모리 총리 친서 파동’과 관련해 문씨와 남북한 지도자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가 북한과 일본의 중간에서 벌인 중재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진 모리 총리는 일을 미숙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결국은 사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북일 관계는 오히려 벽에 부닥쳤다. 2000년 10월 말 11차 수교 교섭에서 북한은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북일수교시 한·일 기본조약의 청구권 방식 적용과 일본인 납치의혹 해소를 요구하면서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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