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극우파 지식인들의 국수주의 부활 행동대

추적!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정체

  • 심규선 <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kisshim@donga.com

    입력2005-04-15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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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존 일본 역사 교과서가 ‘자학사관’ ‘암흑사건’에 빠져 있다고 공격하며, 스스로 ‘자유주의사관’을 내세우며 등장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는 단 한 명도 없이 13명의 리더가 이끌어가는 이 모임의 정체와 그 배후세력은?
    한일관계를 격랑 속에 몰아넣고 있는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은 1996년 12월 기자회견을 갖고 창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창립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설립 취지문을 통해 “전후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잃어버리고 일본인의 긍지를 빼앗아왔다. 특히 근·현대사는 일본이 자자손손 사죄만 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죄인처럼 취급했다”고 주장했다. 취지문은 이어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일본의 어린이들을 위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역사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밝혔다. ‘전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일본인의 긍지를 높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 단체의 회칙 제3조는 ‘본 회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아동과 생도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또 4조는 ‘제3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한다. ①최신의 학문적 식견에 근거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기획 편집한다. ②학교용 교과서에 관한 각종 제도 및 교과서 출판 사정을 연구한다. ③각종 강연회, 역사세미나 등을 개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사(史)’라는 기관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하고 있다.

    연구단체가 학문적 업적을 토대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모임은 아예 처음부터 역사교과서 제작을 목적으로 출범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단체 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1996년 7월 경에 공개된 기존 7개 중학교 역사교과서 개정판 내용인데, 7개 교과서 전부에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들어가 있었다. 일부 불만세력은 이를 삭제하라고 요구하며 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체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다.



    이들은 모임 발족 직후 문부성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에는 “문부상은 교과서 발행자에 대해 신속하게 그(종군위안부) 삭제를 요구하는 권고를 행하도록 강하게 요망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문부성 장관이 갖고 있는 ‘검정통과 후 수정권고권’을 발동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주장은 모임이 어떤 성격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모임은 이번에 자신들이 집필한 교과서에 ‘종군위안부’에 대한 내용을 한 줄도 기술하지 않았고 그대로 합격했다. 모임측은 이를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모임측은 출범하며 기존 역사교과서가 ‘자학사관’ ‘암흑사관’에 빠져 있다고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자랑할 것도 많은데 유독 일본의 나쁜 점만 강조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것이 ‘제3차 교과서 공격’이다.

    1차와 2차 교과서공격은 1955년과 1980년에 있었다. 모임은 자신들의 역사인식을 ‘자유주의사관’이라고 불렀다. 모임의 이사인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교육학) 도쿄대교수가 모임 결성 전인 1995년 1월에 만든 ‘자유주의사관 연구회’에서 따온 말이다. 자유주의사관 연구회도 같은 해 8월 이미 ‘중학교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역사학자 참여 없었다

    이 단체의 발기인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독일문학) 전기통신대교수,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교육학) 메이세이(明星)대교수, 후지오카 도쿄대교수,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일본정치사상사) 가쿠슈인(學習院)대교수,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등이었다. 이중 니시오 교수가 회장, 다카하시 교수가 부회장, 나머지는 이사(대우)가 됐다. 그 후 이사가 몇 명 늘어나 회장 부회장 및 11명의 이사 등 13명이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는 없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고 해서 교과서를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학문 외적인 이유에서 단체를 결성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99년 니시오 회장은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중학 역사교과서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를 집필했고 이번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집필도 맡았다. 그는 문부과학성의 수정지시에 대해 “수용하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다”며 불만을 표시하고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고 밝혔다. 이는 합격하려고 몇 군데 고치기는 했지만 일본인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일본 중심의 역사교과서를 쓰겠다던 당초 취지는 살렸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후지오카 도쿄대교수는 모임의 이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4월13일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들이 쓴 교과서에서 137곳을 고쳤다고 하니까 굉장이 많이 수정된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며 “처음에 교과서를 만들면 그 정도의 수정지시는 적은 편이며 실제로 문부과학성 관계자도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모임의 이사 다쿠보 다다에(田久保忠衛·국제정치학) 교린(杏林)대교수는 “일본은 독일에 비해 전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적에 “일본은 독일처럼 인종학살을 한 적이 없다. 독일은 전후에 모든 죄과를 나치에게 뒤집어씌우고 책임에서 도망쳤다”며 독일과 비교하는데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는 또 “천황과 총리가 몇 차례나 사과를 했는지 알고 있느냐”며 “일본은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모임에 이사로 참여한 니시베 스스무(西部邁·평론가)는 이번에 공민교과서를 집필했으며 이 교과서도 합격했다. 이 공민교과서의 최초검정본에는 핵무장 필요성을 시사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등 ‘개인’보다는 지나치게 ‘국가’나 ‘사회’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어 일본 내부에서는 역사교과서보다 더욱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니시베는 공민교과서의 원본인 ‘국민의 도덕’이라는 책 집필에도 참여했다.

    ‘전쟁론’과 ‘대만론’으로 유명한 만화가 고바야시는 만화를 통해 모임의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최근 중국어로 번역된 ‘대만론’에도 ‘종군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그는 한때 대만으로부터 출입국금지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모임의 실무책임자인 사무국장은 국학원대 강사인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신도학)가 맡고 있다.

    모임은 발족 이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강연회, 심포지엄, 요인면담회 등을 열어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했다. 지부결성에도 착수해 99년 10월까지 도쿄(東京) 두 곳을 포함해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전체에 지부를 만들었다. 회원은 지난해 3월 1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모임이 이처럼 급속하게 세를 넓혀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민당내 보수세력이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자민당은 1993년 8월 ‘역사검토 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1995년 2월까지 19명의 강사를 초빙해 20회의 회의를 열었다. 이 위원회가 낸 최종 보고서는 일본의 침략 및 가해 사실을 부정하고 이를 국민의 역사인식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운동’이나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제작’ 등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의 지향점은 모임의 지향점과 비슷하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를 비롯해 현내각 각료의 3분의 1가량인 6명이 이 ‘역사 검토 위원회’의 멤버였다.

    1996년 6월 자민당 내에 결성된 ‘밝은 일본 국회의원 연맹’과 1997년 2월에 출범한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도 동조자다. 이들은 교과서검정기간에 나타난 한국과 중국 등의 수정요구는 명백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마키타 구니히코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국회답변을 통해 “내정간섭이라는 것은 국제법상 타국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사항에 개입해서 강제적으로 자국에 따르게 하는 것”이라며 “한국 등의 주장은 내정간섭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자 이를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또 “한국 등의 교과서에도 일본을 왜곡해서 기술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에 대해 항의를 한 적이 있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젊은 의원 모임’은 모임의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뒤에는 “앞으로 교과서 채택을 엄정하게 하는지 감시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자민당의 문교과학부회도 “나라 안팎의 부당한 요구가 있어도 최후까지 엄정하고 공정한 검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측면에서 모임을 지원했다.

    국회 질의나 답변을 통해 모임 측을 지원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문부성 장관은 1998년 6월 국회에서 “현행 역사교과서가 균형을 잃고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며 “검정 전에 내용을 시정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검정 전 시정’이라는 것은 출판사가 최초 검정본을 내기 이전에 스스로 내용을 고쳐서 제출하는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것으로 이는 ‘사전 검정’에 해당된다.

    이 발언은 기존 7개 역사교과서가 ‘종군위안부’를 없애거나 축소하고, ‘침략’이라는 단어를 ‘진출’로 고쳐 검정을 신청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물론 해당 출판사들은 문부성으로부터 아무런 압력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디까지나 자주적으로 결정(자주규제)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정부와 문부성, 그리고 정치인의 압력 때문에 ‘알아서 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산케이신문의 지원사격

    2000년 8월 자민당의 고야마 다카오(小山孝雄) 참의원의원은 교과서 채택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통해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 관방 장관과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문부성 장관으로부터 “교과서 채택권한은 교사들이 아닌 교육위원회가 갖고 있다”는 답변을 끌어냈다. 이는 모임측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답변이었다.

    1997년 개헌운동의 선봉장 노릇을 하던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해서 만든 ‘일본회의’도 든든한 후원자다. 일본회의도 각 도도부현에 지부를 갖고 있는데 회원은 모임 회원과 거의 중복된다.

    2000년 4월 발족한 ‘교과서개선연락협의회’라는 새로운 단체도 모임을 돕고 있다. 이 단체는 교과서 집필자여서 어느 정도 법적규제를 받게 되는 모임을 대신해 활발한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산케이신문의 지원사격도 빼놓을 수 없다. 산케이신문은 1999년 10월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통신부’라는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이는 기존 역사교과서에 점수를 매기는 기획으로 집필자는 모임 멤버들이었다.

    모임이 집필한 교과서를 출판하는 후소샤도 산케이신문 계열의 자회사다. 따라서 산케이신문은 신문사이기에 앞서 이해 당사자에 해당된다. 이 신문은 그동안 수차례의 사설과 기사 등을 통해 이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한 아사히신문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일본 정부는 한국이나 중국의 주장에 굴해서는 안된다고 촉구했다.

    산케이신문은 한국이나 중국이 교과서검정과정에 근린제국(近隣諸國)조항 적용을 요청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나카니시 데루마사(中西輝政) 교토대교수의 기고문을 통해 반박했다. 나카니시 교수는 “중국과 한국에는 근린제국조항이 없다. 이는 일본만 지고 있는 의무다. 근린제국조항은 법률이 아니고 일본의 내규나 실무수준의 처리기준, 관청내 문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타국이 (이를 근거로) 참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는 1982년 ‘근린제국조항’을 만들 때의 배경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단 만들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불리하다. 그러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다. 모임측의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뒤 산케이신문은 ‘총리와 문부과학성이 잘 대처했다’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정부의 책임을 묻는 한국이나 중국 등의 목소리는 ‘내정간섭’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정치가나 관료의 오직사건을 교과서에 쓰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외국에 나가서 저지른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로 심대한 피해를 본 사람들이 그런 내용을 정확하고 성실하게 기술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모임측은 앞으로 이 교과서가 일선 교육현장에서 더 많이 채택되도록 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합격판정을 받은 출판사는 5월 중순까지 견본 교과서를 만들어 문부과학성에 납본하고 7월 한 달 동안 전국 470여 개 블록별로 교과서전시회를 연다. 8월 경 학교설립자인 각 지역 교육위원회(국립 및 사립학교는 학교장)는 자신의 지역 및 학교에 맞는 교과서를 결정해 출판사에 주문하고 이듬해 4월 신학기부터 사용하게 된다.

    모임측은 이미 검정통과를 전제로 활발한 ‘정지작업’을 벌여왔다. 모임은 전국 도도부현에 설치한 지부 등을 통해 현의회에 “교과서를 결정할 때는 현장교사의 의견보다는 교육위원회의 판단을 우선해야 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나 청원서를 제출했다. 3월 중순 현재 홋카이도(北海道)와 30개 현 등 31개 광역의회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모임의 다카모리 사무국장은 진정서 등을 제출한 이유에 대해 “교과서 채택권한은 교육위원회가 갖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교사들이 결정하고 교육위원회는 추인만 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 채택 과정에 교사들보다는 교육위원들을 설득하기가 쉽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3월16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모임측이 교과서 채택과정에 현장교사의 목소리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놀랐다”면서 “앞으로 집필활동을 통해 이 교과서의 채택에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후소샤는 2000년 4월 ‘역사에의 초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사립중학교에 배포했고 모임측은 같은해 5월 ‘국민의 방심’(문고판)이라는 책을 교육위원들에게 우송했다. 또 모임 회원들은 니시오 간지 회장이 쓴 ‘국민의 역사’를 구입해 유력인사들에게 나눠주는 등 채택률을 높이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모임측은 자신들이 쓴 교과서의 시장점유율을 10%로 잡고 있다. 현재 중학 역사교과서의 점유율은 도쿄서적 41.2%, 오사카(大阪)서적 19.3%, 교육출판 17.8%, 니혼(日本)서적 12.9% 등 상위 4개사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기존 7개사가 8개사로 늘어나면 점유율은 조금씩 떨어질 게 틀림없다. 따라서 모임측이 목표로 하고 있는 10%의 점유율은 8개 교과서중 4위로 올라서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모임이 교과서 채택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합격을 했어도 쓰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며 채택률이 저조하면 오히려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실례가 있다. 1986년 황국사관에 입각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저술한 고교 역사교과서 ‘신편일본사’의 내용이 알려지자 한국과 중국은 크게 반발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 교과서 내용을 대폭 수정해 합격시켰다. 이에 대해 우익들은 일본 정부가 한국과 중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며 일본 정부의 태도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만약 이 교과서가 일선 고교에서 많이 채택됐다면 우익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이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거의 없었다.

    만약 모임의 교과서가 거의 채택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내외의 압력과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합격을 쟁취했다며 축제분위기에 싸여있는 모임에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학교측이 자신들의 주장에 등을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단체의 존폐위기에까지 내몰릴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채택률을 높여야 할 형편이다.

    정치혼란과 경제불황이 원인

    그러나 이 교과서에 반대해온 시민단체들은 채택저지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하고 있어 앞으로 교과서 파동은 제2라운드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4월13일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있었던 시민단체 기자회견에서 이시야마 히사오(石山久男) 역사교육자협의회 사무국장은 채택저지결의를 밝힌 뒤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일본 국민 중에도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밖에 일찍부터 모임 교과서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 21’도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해 수만 명의 반대 서명을 받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 단체의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사무국장은 “대의명분은 시민단체 쪽에 있기 때문에 운동을 열심히 하면 승산은 있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모임의 교과서가 일선 중학교에서 어느 정도 채택될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교과서의 채택률은 일본 사회의 역사인식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교과서를 채택하는 학교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일본 사회 속에는 언제나 이런 교과서가 등장할 수 있는 요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이런 교과서의 출현을 방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깝게는 일본의 경제불황과 정치혼란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이 많다. 고모리 요이치(小林陽一·일본근대문학) 도쿄대 교수는 “정치와 경제 모두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교과서가 출현한다”며 “과거를 미화하고 일본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우월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감 부족을 감추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모임측이 만든 교과서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가 과거를 찬양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비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가토 다카시(加藤節·정치철학) 세이케이대 교수는 “일본의 ‘대국의식’은 경제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경기가 후퇴하면 갑자기 사그라든다”면서 “그 반작용으로 새롭게 기댈 곳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자국 중심적인 역사의식”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일본 사회에 태평양전쟁 이전의 ‘강한 일본’을 그리워하는 세력이 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 패배함으로써 전후 국가체제가 미국의 입맛대로 만들어졌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미국에 의해 벌거벗겨졌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군정(GHQ)이 만든 ‘평화헌법’이다. 교전권과 군대보유를 금지한 헌법을 고치자는 주장의 근저에는 이런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 중에 하나가 패배 이전의 일본을 찬양하는 것이다.

    전후 일본이 안고 있는 ‘부(負)’의 유산을 청산하는 과정에 역사인식이 악용되는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는 전후 체제를 청산하고 ‘보통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 과거 일본의 ‘치부’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모임측이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 싸하다.

    그러나 이들 주장의 가장 큰 잘못은 가해자였음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를 ‘쇄국의 멘탈리즘’이라고 명명하고 “쇄국의 멘탈리즘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모임의 교과서”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모임과 같은, 소위 우익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다수 일본인들이 우익세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현실참여파 사회학자인 히다카 로쿠로(日高六郞·84·전 도쿄대교수)는 3월23일 사민당이 주최한 원내집회에서 “‘모임이 만든 교과서는 지금까지의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교과서이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왜 이 문제를 철저하게 비판하지 못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선진 7개국(G7) 중 교과서의 역사인식이 흔들리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면서 “만약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았다면 ‘침략’을 가르쳤던 교과서가 잘못된 것이며, 그 반대라면 ‘침략’을 가르치지 않는 교과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문부성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프랑스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프랑스에서 이 교과서의 최초 검정본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더욱 각별했다”면서 “이 교과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통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일본인들이 역사인식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를 이뤄내는 일이다. 한국이나 중국이 비난을 해서 그때 그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가 이런 교과서의 출현을 막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과서 문제는 한일이나 중일간의 문제가 아니라 일일(日日)간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이나 중국이 간여를 하지 말라는 주장이 아니라 결국 일본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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