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교과서의 ‘얼굴’을 아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은 교과서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라는 책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책은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전기통신대 교수가 썼으며 1999년 10월 출간됐다. 이 책은 현재까지 80여 만부가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시오 회장은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본의 장래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돌이라고 생각한다. 모임이 2002년 4월에 쓸 중학교 역사 및 공민 교과서를 만든 것도, 이 교과서 채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일본의 먼 미래를 향해 돌을 던지는 각오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책과 모임의 정신은 하나다.”
저자도 인정했듯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과서의 지향점과 같다. 교과서보다 훨씬 확실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교과서를 읽는 것보다 훨씬 쉽게 본심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에서 한국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이 책은 34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3개 장은 제목만으로도 한국을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히데요시(秀吉)는 왜 조선으로 출병했는가’(16장) ‘조선은 왜 계속 잠들어 있었는가’(23장) ‘나는 지금 일한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32장)가 그것이다.
‘조선은 왜 계속 잠들어 있었는가’라는 장은 일본이 한일합방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관련된 핵심 부분이어서 조금 길게 인용한다.
한국인의 이유없는 일본 우월감
“근대 일본사는 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다음에 지적하는 세 가지 포인트를 전제하지 않으면 역사 그 자체를 서술할 수 없다.
우선 제1포인트는 근대 일본의 출발점에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독일 등 열강의 구체적인 무력 위협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아시아 국경은 이름뿐이었고 담도 목책도 없는 황량한 들을 도둑떼들이 휘젓고 다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즉 구미열강의 식민지배와 열강끼리의 상호견제 이외는 제약이 없었다.
열강의 지배권 확정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로서의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노력하는 기간에 진행됐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완성된 것은 메이지유신 10년 전이지만 미얀마 지배는 1886년(메이지 19년), 말레이반도의 완전한 식민지화는 1909년(메이지 42년)이었다. 프랑스가 청불전쟁으로 청나라로부터 베트남을 빼앗은 것은 1887년(메이지 20년), 인도네시아가 정식으로 네덜란드령이 된 것은 1904년(메이지 37년)이다. 그리고 남태평양으로부터 미국이 북상해 왔다.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한 것이 1898년(메이지 31년), 필리핀을 탈취한 것도 같은 해였다. 한편 북으로부터는 부동항을 찾아서 남하하고 있는 최대의 위협, 러시아가 있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은 얼마나 마음이 허전했을까. 이 허전함이 모든 역사 이야기의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이런 불안한 때에 기댈 만한 중국(청)은 자기 영토의 보전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관료적 노쇠국이었고 조선은 그 속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제2의 포인트다.
조선반도는 북으로부터의 위협이 지나가는 통로였다. 메이지 일본은 자위를 위해서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해 근대화를 이룰 것을 바라며 정말로 그를 위해 도움을 줬지만, 조선반도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눈을 뜨지 못했다. 자기 나라도 유지하지 못하는 청에 조선반도를 좌지우지하게 만든 채 그대로 방치한다면 반도는 러시아 것이 되든가 아니면 구미제국의 꼴 베는 마당이 됐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일본의 독립 상실과 분할 통치로 나타났을 것이다. 일본은 잠자코 좌시해야 했을까. 근대 일본이 선택한 길 이외에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었을 것인가. 에도시대를 통해서 무신(武臣)사회였던 당시 일본인은 중한 양국인에 비해 위기의식면에서 큰 차가 있었다. 지금의 일본이 존재하는 것은 그 덕택이다.
제3의 포인트는 중국과 한국은 무력하면서도 일본에 이유없는 우월감을 갖고 있어 다루기 어렵고 귀찮은 존재라는 점이다. 양국은 모두 고색창연한 동이(東夷)사상, 중화(中華)사상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까부는 일본’이라는 일본모멸 감정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감정적 갈등의 원점이다. 양국은 구미의 자국 진출에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으나 우리나라의 진출만큼은 신참자 일본이 까분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저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는 일본과 한국이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그런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한병합은 아시아평화의 최선
이 장에서 한국관련 서술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드디어 조선반도는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루기가 힘든 애물단지라는 점에서 지금의 북한과 많이 닮았다.”
“일청전쟁은 일본에서 보면 완전한 성공이었다. 구미열강은 일본의 승리에 갈채를 보냈고 그들의 특권을 잇따라 포기했다. 조선은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해방돼 ‘독립국’이 됐다.”
“1910년의 일한병합은 당시로서는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세계가 당연하다고 보았던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병합은 국제법상의 ‘강제’가 아니다. 다른 나라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았던 히틀러의 체코 및 오스트리아 합병, 소련의 발트 3개국 합병과 성격이 다르다. 세계는 그 당시 일한병합을 아시아 평화를 위한 최상책이라며 지지했다. 만약 이것이 범죄라고 한다면 영국은 ‘공범’이며, 미국은 적어도 ‘종범’이라고 헬렌 미어즈는 ‘미국의 거울, 일본’이라는 책에 기술하고 있다. 이 건에 대한 일본의 행동은 전부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합법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행동기준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32장 ‘나는 지금 일한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곳에서 저자는 한국인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한관계를 생각하면 유쾌했던 적이 한번도 없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그럴 것이고, 아마 한국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일본인이 그렇듯 오랫동안 자기 변명이나 자기 주장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최근 잘못을 깨달았다. 마치 일본이 강제로, 싫어하는 한국인을 군대에 집어넣어 병사로 내몰았다는 일방적인 기술을 읽었을 때 ‘아아, 이건 아니다’라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누구나 의문을 가져왔다.
당시 제국 군인이 되고 싶어하던 한국인은 많았다. 또 조선출신자로서 장교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는 대만인의 입학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많은 한국인을 받아들여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했다.”
“구 일본총독부는 조선과 대만이라는 두 개의 식민지에 대해 같은 대응을 했던가. 오히려 조선쪽에 유리한, 친애(親愛)를 담은 대응을 했을 터다. 그러나 결과는 보기좋게 반대였다. 이 차이는 조선쪽에 역사 문화가 있었고, 중화문명 습득에 있어서도 일본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마저 갖고 있었다는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일본에 대해 지금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일본과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에 조선인이 대만인을 모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조선이 일본의 통치자, 즉 총독부로부터 받은 지원은 대만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은 병합이 결정된 해에 연간 예산 1700만엔을 조선반도에 주었고 3000만엔의 거금을 투자했다. 물론 당시 왕후 귀족을 비롯해 우수한 사람들에게 많은 하사금을 준다는 정책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그중 약 60%은 직업 연수, 맹아자나 정신병자 치료기금, 일반 빈민구제기금, 행려병자 구제기금 등 다방면의 복지자금으로 쓰였다. 일본 총독부는 병합 후 곧바로 근대화의 기초가 되는 인구조사나 토지조사, 치산·치수·관개·농업개량·소작제도 개선, 나아가 교육보급과 공평한 사법도입 등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