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대동아 공영은 있되, 위안부는 없다”

日本 우익세력의 바이블 ‘국민의 역사’ 완전해부

  • 심규선 <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kisshim@donga.com

    입력2005-04-18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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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마다 일본정부에 사죄를 요구하는 한반도인들의 불합리도 생각해보면 뒤틀린 한(恨)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일본인은 동정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다” “세계사의 필연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사과할 게 없다” 등 일본 우익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책 ‘국민의 역사’에는 소름끼치는 주장들이 담겨 있다.
    “대동아 공영은 있되, 위안부는 없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이 집필해 지난해 4월 문부성에 제출한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최초 검정본 내용 중 한국관련 부분은 상당히 수정돼 통과됐다. 그러나 교과서 내용이 대폭 수정됐다 하더라도 이 교과서가 주장하고자 하는 ‘본심’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화장을 고쳤다고 해서 ‘얼굴’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교과서의 ‘얼굴’을 아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은 교과서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라는 책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책은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전기통신대 교수가 썼으며 1999년 10월 출간됐다. 이 책은 현재까지 80여 만부가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시오 회장은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본의 장래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돌이라고 생각한다. 모임이 2002년 4월에 쓸 중학교 역사 및 공민 교과서를 만든 것도, 이 교과서 채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일본의 먼 미래를 향해 돌을 던지는 각오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책과 모임의 정신은 하나다.”

    저자도 인정했듯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과서의 지향점과 같다. 교과서보다 훨씬 확실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교과서를 읽는 것보다 훨씬 쉽게 본심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에서 한국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이 책은 34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3개 장은 제목만으로도 한국을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히데요시(秀吉)는 왜 조선으로 출병했는가’(16장) ‘조선은 왜 계속 잠들어 있었는가’(23장) ‘나는 지금 일한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32장)가 그것이다.



    ‘조선은 왜 계속 잠들어 있었는가’라는 장은 일본이 한일합방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관련된 핵심 부분이어서 조금 길게 인용한다.

    한국인의 이유없는 일본 우월감

    “근대 일본사는 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다음에 지적하는 세 가지 포인트를 전제하지 않으면 역사 그 자체를 서술할 수 없다.

    우선 제1포인트는 근대 일본의 출발점에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독일 등 열강의 구체적인 무력 위협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아시아 국경은 이름뿐이었고 담도 목책도 없는 황량한 들을 도둑떼들이 휘젓고 다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즉 구미열강의 식민지배와 열강끼리의 상호견제 이외는 제약이 없었다.

    열강의 지배권 확정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로서의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노력하는 기간에 진행됐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완성된 것은 메이지유신 10년 전이지만 미얀마 지배는 1886년(메이지 19년), 말레이반도의 완전한 식민지화는 1909년(메이지 42년)이었다. 프랑스가 청불전쟁으로 청나라로부터 베트남을 빼앗은 것은 1887년(메이지 20년), 인도네시아가 정식으로 네덜란드령이 된 것은 1904년(메이지 37년)이다. 그리고 남태평양으로부터 미국이 북상해 왔다.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한 것이 1898년(메이지 31년), 필리핀을 탈취한 것도 같은 해였다. 한편 북으로부터는 부동항을 찾아서 남하하고 있는 최대의 위협, 러시아가 있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은 얼마나 마음이 허전했을까. 이 허전함이 모든 역사 이야기의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이런 불안한 때에 기댈 만한 중국(청)은 자기 영토의 보전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관료적 노쇠국이었고 조선은 그 속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제2의 포인트다.

    조선반도는 북으로부터의 위협이 지나가는 통로였다. 메이지 일본은 자위를 위해서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해 근대화를 이룰 것을 바라며 정말로 그를 위해 도움을 줬지만, 조선반도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눈을 뜨지 못했다. 자기 나라도 유지하지 못하는 청에 조선반도를 좌지우지하게 만든 채 그대로 방치한다면 반도는 러시아 것이 되든가 아니면 구미제국의 꼴 베는 마당이 됐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일본의 독립 상실과 분할 통치로 나타났을 것이다. 일본은 잠자코 좌시해야 했을까. 근대 일본이 선택한 길 이외에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었을 것인가. 에도시대를 통해서 무신(武臣)사회였던 당시 일본인은 중한 양국인에 비해 위기의식면에서 큰 차가 있었다. 지금의 일본이 존재하는 것은 그 덕택이다.

    제3의 포인트는 중국과 한국은 무력하면서도 일본에 이유없는 우월감을 갖고 있어 다루기 어렵고 귀찮은 존재라는 점이다. 양국은 모두 고색창연한 동이(東夷)사상, 중화(中華)사상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까부는 일본’이라는 일본모멸 감정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감정적 갈등의 원점이다. 양국은 구미의 자국 진출에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으나 우리나라의 진출만큼은 신참자 일본이 까분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저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는 일본과 한국이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그런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한병합은 아시아평화의 최선

    이 장에서 한국관련 서술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드디어 조선반도는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루기가 힘든 애물단지라는 점에서 지금의 북한과 많이 닮았다.”

    “일청전쟁은 일본에서 보면 완전한 성공이었다. 구미열강은 일본의 승리에 갈채를 보냈고 그들의 특권을 잇따라 포기했다. 조선은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해방돼 ‘독립국’이 됐다.”

    “1910년의 일한병합은 당시로서는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세계가 당연하다고 보았던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병합은 국제법상의 ‘강제’가 아니다. 다른 나라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았던 히틀러의 체코 및 오스트리아 합병, 소련의 발트 3개국 합병과 성격이 다르다. 세계는 그 당시 일한병합을 아시아 평화를 위한 최상책이라며 지지했다. 만약 이것이 범죄라고 한다면 영국은 ‘공범’이며, 미국은 적어도 ‘종범’이라고 헬렌 미어즈는 ‘미국의 거울, 일본’이라는 책에 기술하고 있다. 이 건에 대한 일본의 행동은 전부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합법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행동기준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32장 ‘나는 지금 일한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곳에서 저자는 한국인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한관계를 생각하면 유쾌했던 적이 한번도 없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그럴 것이고, 아마 한국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일본인이 그렇듯 오랫동안 자기 변명이나 자기 주장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최근 잘못을 깨달았다. 마치 일본이 강제로, 싫어하는 한국인을 군대에 집어넣어 병사로 내몰았다는 일방적인 기술을 읽었을 때 ‘아아, 이건 아니다’라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누구나 의문을 가져왔다.

    당시 제국 군인이 되고 싶어하던 한국인은 많았다. 또 조선출신자로서 장교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는 대만인의 입학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많은 한국인을 받아들여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했다.”

    “구 일본총독부는 조선과 대만이라는 두 개의 식민지에 대해 같은 대응을 했던가. 오히려 조선쪽에 유리한, 친애(親愛)를 담은 대응을 했을 터다. 그러나 결과는 보기좋게 반대였다. 이 차이는 조선쪽에 역사 문화가 있었고, 중화문명 습득에 있어서도 일본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마저 갖고 있었다는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일본에 대해 지금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일본과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에 조선인이 대만인을 모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조선이 일본의 통치자, 즉 총독부로부터 받은 지원은 대만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은 병합이 결정된 해에 연간 예산 1700만엔을 조선반도에 주었고 3000만엔의 거금을 투자했다. 물론 당시 왕후 귀족을 비롯해 우수한 사람들에게 많은 하사금을 준다는 정책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그중 약 60%은 직업 연수, 맹아자나 정신병자 치료기금, 일반 빈민구제기금, 행려병자 구제기금 등 다방면의 복지자금으로 쓰였다. 일본 총독부는 병합 후 곧바로 근대화의 기초가 되는 인구조사나 토지조사, 치산·치수·관개·농업개량·소작제도 개선, 나아가 교육보급과 공평한 사법도입 등을 실시했다.”

    “중국황제를 중심으로 동심원으로 퍼져가는 화이(華夷)질서에서 중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문명적이고, 밖으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야만적이라는 아주 오랜 옛날 옛적의 서열의식이, 다른 나라에는 그 예가 없을 정도로 한국에는 고착돼 있다. 원래 북쪽 오랑캐로서 한국인이 멸시하고 있던 만주족이 중국의 중원을 빼앗아 청을 건국한 이래 한국인의 심리는 굴절됐다. 그 후 중화문명의 계승자는 한국이라는 ‘소중화의식’이 이 나라의 특징이 되어 힘으로 눌리면 눌리수록 다른 지역을 원망하는 심리적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이런 사실은 반도인의 짓눌린 심리와 중국본토 이상으로 중국 유교체제로 관료화된 전제국가를 500여 년에 걸쳐 형성해온 이(李)왕조의 체질과 연결됐다. 이 때문에 세계에서도 극히 유례가 없는 편향적이고 배타적인 한과 우월감이 섞인,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정신상태를 낳아 지금의 반일심리의 기초가 되었다.… 때마다 일본정부에 사죄를 요구하는 그들의 불합리도, 생각해 보면 뒤틀린 한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일본인은 동정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다.”

    “나는 일한병합 5년 후의 상황을 설명한 조선총독부 보고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읽는 동안 서서히 당시의 일본인 관료에 대한 불쾌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국가를 병합할 때는 땅이 인접해 있거나, 인종이 같거나, 풍속이 비슷하거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는 4가지 조건 중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4조건이 거의 갖춰져 있으므로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일본인의 생각이 처음부터 잘못됐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를 위해 일본에서는 한국인과의 결혼을 장려하거나, 대만 및 그 밖의 지역과는 전혀 달리 한국만을 특별 취급하려고 혈연공동체를 계속 강조했다. 확실히 말해서 친절을 강매한 것이다. ‘일본인은 사람이 좋다’라는 말에 멍청하다는 형용사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종합하면 이렇다.

    “별로 득될 것도 없는 나라를 당시 국제정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합했다. 그러나 일본은 최선을 다해 통치했으며 다른 열강들과는 달리 한국인을 평등하게 대우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아직까지도 사죄만 요구하고 있다. 이는 옛날부터 한 수 아래로 여겨온 일본에 지배를 당했다는 자존심의 손상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사의 필연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도 입이 찢어져도 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백보를 양보해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기술 속에는 식민지배에 따른 한국인의 고통이나 피해는 전혀 언급이 없다. 역사적 사실의 한 면만을 침소봉대해 마치 그것이 거의 전부인 양 강조하고 있다.

    이런 자국 중심적인 역사인식은 이 책 전편에 흐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일본은 거의 전지전능한 국가라는 인상이 든다. 이 책의 내용 중 한국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한다. 한국은 언제나 부정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부정적으로만 인용되는 한국역사

    “신라는 중국의 율령 중에서 자국에 도움이 되는 내용만을 뽑아서 계승하고 스스로의 율령을 만들지는 않았다. 일본도 덴지(天智)시대 때 나온 일련의 법령들은 …백제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율령을 불완전하게 계승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임신(壬申)의 난’(672년)을 거치면서 일본은 독자적인 율령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본의 이 자각적인 자세는 신라가 당의 책봉을 받아들여 중국의 종속국이 되는데 만족했음에 비해서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에 기인한다.”(1장-하나의 문명권으로서의 일본열도)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길을 걸은 것은 일본뿐이었고 조선에서는 신라보다 고려, 고려보다 이조가 점점 중국 전제국가 체제에 경도되는 정도가 심해졌고 일본에 흡수당함으로써 결국 독립적인 문명권을 형성하는 파워는 갖지 못했다.”(위와 같음)

    “문화는 동양과 서양이 대립하고 있고, 일본 문화는 그중에서도 동양문화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서양문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동양문화와도 대립하고 있다. 즉 양 문명을 합친 유라시아대륙 전체 문화와 일본문화가 서로 맞서고 있다고 생각된다.”(6장-신화와 역사)

    “일본어를 ‘고립언어’(독립언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 유래를 밝히는 것이 극히 곤란한 언어의 하나이며, 따라서 일본문화 그 자체가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독립한, ‘영광의 고립’을 지킬 만한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하나의 문명권이라는 것을 독자가 납득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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