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봄, 일본에서는 ‘역사 재검토’가 한창이라는 말이 들린다.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고도 하고, 이 전쟁으로 인해 구미열강의 아시아 식민정책이 사라졌다고도 한다. 이러한 역사 재검토와 함께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일본의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시마네(島根)현 지사의 발언도 들려온다. 그리고 교과서 개정문제가 또다시 등장했다.
역사재검토가 한창인 일본
이러한 뉴스는 과거 여러 차례 있었던 일왕의 사죄 또는 사과문은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천황과 내각 총리들의 ‘사과’라는 말은 그때그때의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했던가? 그들이 “깊이 반성하겠노라”고 했던 말은 어떤 뜻을 품고 있었나?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반성하겠노라고 했던 것인가?
필자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사과문을 낭독한 위인들의 진의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일본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통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정치인들은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일본제국은 메이지(明治)유신 이래로 동양 모든 나라에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아시아 민족의 해방전쟁이었다는 주장이 이러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패전 50년을 기(期)해서 일본 중의원이 사과문 채택을 부결시킨 것도 이를 보여주는 증거다.
추측건대 일본의 일반 시민들은 ‘과오론’과 ‘혜택론’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명)가 일본 영토라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수긍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왜 태평양전쟁이,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난 러·일전쟁이 황색인종의 해방전쟁이 될 수 없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릴 필요가 있다. 또 독도에 대한 주장도 해방전쟁론처럼 ‘반성’의 대상이라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 현이 1905년 2월, 무인도였던 다케시마를 편입하였고, 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항의를 제출하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과 ‘반성의 부족’이 낳은 소치(所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태평양전쟁이 아시아인종, 즉 황색인종의 해방전쟁이었다는 주장을 검토해보자. 필자는 이 주장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볼 때 ‘아시아의 해방’이란 구호는 참으로 매혹적이고 뜻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케이크 조각처럼 나눠 삼켜버린 서구열강의 야욕에는 끝이 없는 듯했다. 아프리카 다음으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를 삼켜버린 서구열강은 말레야(지금의 말레이 반도)를 삼키고, 인도네시아를 삼키고, 인도지나(지금의 베트남 라오스 등)와 필리핀을 정복하고, 계속 북상하여 중국을 할거하고 있었다.
서구열강은 황인종을 미개인종으로 취급하고 그 위에 군림하였다. 여운형(呂運亨)은 1920년대에 중국 학생운동팀을 인솔하고 마닐라에 가서 동양인의 해방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가, 미국 통치하에 있던 필리핀 관헌(官憲)에 체포된 적이 있다. 당시 동양 지성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 해방전쟁론의 허구
제국주의 서구열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절실한 문제였다. 당시 일본은 동양의 여러 민족을 대표해, 아시아 해방의 선도자가 되고 아시아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왕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 군주가 ‘설마병’에 걸려서 (설마 누가 우리를… 하는 병)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일본은 개혁을 단행했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서 막강한 국력을 육성했다. 따라서 19세기 말엽부터 일본은 조선을 포함한 동양 여러 나라 지성인들 동경하는 대상이 됐다. 일본이 스스로 서양 못잖은 개혁을 이룩한 것은 인류 역사상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끝내 동양의 맹주가 되지 못했다. 될 수 없었다. 맹주가 되지 못한 것뿐만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돼버렸다. 왜 일본제국은 동양의 맹주가 되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가. 이 문제는 실로 일본의 정치인들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린다면, 일본은 다시 독도문제를 거론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한 해답을 1904년 6월4일자의 주한미국공사 호레스 앨런(Horace Allen)의 보고서에서 발견했다. 그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국의) 외무장관은 (일본 공사관의) 하기와라 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즉 지난 2월에는 (한국사람들) 10명 중 9명이 일본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일본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10명 중 1명 이상 찾는 것이 불가능하고, 다른 9명은 러시아의 성공을 기원(祈願)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과 중국 뤼순(旅順)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침했고 막강한 병력을 상륙시켜서 조선반도를 점령했으며 만주 각지에서 러시아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들은 일본을 지지했고, 조선 정부도 그랬다.
19세기 말 국제정세가 복잡해지고, 구한말(舊韓末)의 국내 정세도 유동적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당시의 조선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한국 사람이 많고 학자들도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
러·일전쟁 때 많은 조선인이 일본측에 동조했고, 일본군을 도왔다(조선 정부가 자발적으로 일본을 도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륙한 지 얼마 안 돼서 조선의 여론은 일본을 배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러시아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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