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심층보도 틀 세우며 민주화 견인

  • 유재천 < 한림대 부총장 · 언론정보학 >

    입력2005-04-18 14: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민 계몽을 목적으로 태어난 한국의 잡지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고발하고 민주화에 기여해왔다. 신동아가 그 전형이었다. 신동아가 창간 이후 겪었던 탄압과 필화사건이 그 사정을 잘 말해준다.
    “조선민족은 바야흐로 대각성, 대단결, 대활동의 曉頭(효두·이른 새벽)에 섰다. 사업적 대활동의 前軀(전구·행렬의 맨 앞에 선 사람)는 사상적 大釀(온양·마음에 어떤 생각을 은근히 품음, 술을 담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상적 대온양은 민족이 포함한 특색있는 모든 사상가, 경륜가의 의견을 민족대중의 앞에 제시하여 활발하게 비판하고 흡수케 함에 있다.

    이러한 속에서 민족대중이 공인하는 가장 유력한 민족적 경륜이 발생되는 것이니 월간 新東亞의 사명이 正히 이곳에 있는 것이다. 新東亞는 조선민족 전도의 대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론장이요 온양소다. 그러므로 新東亞는 어느 일당 일파의 선전기관이 아니다. 하물며 어느 일개인 또는 수개인의 전유기관이 아니다. 명실공히 다같은 조선민주의 公器다….”

    1931년 11월에 창간된 ‘신동아’ 창간사 가운데 한 부분이다. 이 창간사에서 당시 송진우 사장은 대체로 두 가지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신동아가 조선민족의 앞날을 위한 대경륜을 제시한다는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조선민중의 공기라는 것이다.

    신문잡지 시대 열다

    창간 당시 신동아는 4·6배판으로 120쪽을 발행했으나 이 체제는 36년 4월까지 유지되다가 5월호부터 국판 350쪽 내외로 증면 발행됐다. 그러다 1936년 9월호로 폐간의 비운을 맞는다. 그 뒤 8·15 광복을 맞이했으나 복간되지 않고 있다가 1964년에야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1936년 폐간당한 이후 약 28년간 공백기를 가졌다고는 하나 창간 후 7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는 것은 우리나라 잡지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라 하겠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 정책에서 선회해 이른바 문화통치를 시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보’ 등의 일간지도 발행됐고 잡지도 여러 종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3·1 독립운동 이후 몇 년 동안 발행됐던 잡지들은 대부분 특정 단체의 기관지가 아니면 친일 어용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몇 년 동안 문학동인지 시대가 열렸지만 여전히 종합교양잡지는 부족했다. 신동아가 창간되던 1931년 전후를 보면 천도교 계통의 ‘개벽’이 1926년 8월에 이미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고, 흥사단을 배경으로 한 ‘동광’이 1926년 5월에 창간된 후 약 40호를 내 종합지 면모를 갖췄으며, 1929년에 창간된 ‘삼천리’가 비교적 오래 간행된 축에 들 정도였다. 다시 말해 신동아가 창간될 당시 우리나라의 종합교양지는 종류로 보아 매우 보잘것 없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신동아가 창간된 것은 우리나라 잡지언론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또한 신동아 창간은 우리나라 잡지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신동아는 우리의 잡지 역사에서 이른바 ‘신문잡지’ 시대를 연 것이다. 신동아가 창간되자 다른 신문사들도 잡지를 창간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소자본으로 운영되던 개인 발행 잡지나 단체 발행잡지들에 비해 신문사가 발행하기 시작한 ‘신문잡지’들은 풍부한 인력과 취재망, 그리고 광고 수주력을 활용할 수 있었던 까닭에 잡지계의 판도를 신문사 중심으로 바꿔놓았다. 이 시대를 잡지사에서는 ‘제1차 신문잡지 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제2차 신문잡지 시대’도 1964년 9월 신동아가 복간되면서 시작됐다. 신동아가 복간되고 여러 신문사가 주간지를 발행하면서 두 번째 신문잡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잡지 역사를 보면 나라마다 발생 배경이 다르지만 특히 서구와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우 대조적이다. 서구에서는 근대신문의 발생에서 보듯 영리를 목적으로 잡지가 발행된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구한말 제국주의 외세의 침탈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우리나라 각 지방에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유지 선각자들이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학회를 조직하고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잡지는 국민을 계몽해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개명한 독립국가를 만들려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생겨났으며 따라서 비영리 잡지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발생 배경은 그 후 상당 기간 한국 잡지의 성격을 규정해왔다.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은 일제시대는 물론 적어도 197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신동아는 그런 배경을 지니고 탄생했으며, 또한 그러한 구실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한국 잡지의 계몽주의적 전통은 상업주의 대중문화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하고 군사독재정권의 언론자유 말살정책에 따라 흥미 위주의 내용만 다룰 수 있던 정치적 상황 등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단절되고 만다.

    사회개혁의 불씨

    잡지는 정시성과 항구성, 신속성과 심층성을 동시에 지닌 유일한 매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신속성과 심층성이라 할 수 있다. 신속성은 신문매체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같은 인쇄매체인 책에 비하면 상대적인 의미에서 신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심층성은 그 어느 매체보다 월등하다.

    바로 이러한 심층성이야말로 잡지가 사회변혁의 매체로 기능하는 조건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잡지는 사회변혁의 촉매자 기능을 담당해왔다. 예컨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잡지들은 미국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고발하는 폭로주의 저널리즘을 추구했다. 사회의 밝은 면을 다루기보다는 어두운 면을 고발하던 그 시대의 잡지에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폭로자(muckraker)’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미국 잡지의 폭로주의 저널리즘은 요즘의 탐사보도에 해당한다. 폭로주의 저널리즘은 일면 선정주의로 흐르기도 했지만,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도함으로써 사회개혁에 불씨가 되었던 점은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잡지는 사회개혁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잡지는 태생부터 국민을 계몽하려는 목적을 지님으로써 사회개혁 토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그런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 잡지는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고발해 왔으며, 특히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했다. 1950∼1960년대의 ‘사상계’가 그러했으며 필화로 폐간된 ‘다리’,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등이 그런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신동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신동아가 복간 이후 겪어야 했던 탄압과 필화사건이 그러한 사정을 웅변하고 있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은 한국언론의 위상에 어떤 변화가 초래됐는지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필화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중심으로 언론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을 전개했으나 좌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신문편집인협회장 최석채씨는 신동아 필화사건과 관련, 언론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옹호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 회장직 사퇴를 표명한 직후 기자협회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의 시련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문이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경영주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까지 한국 언론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양상의 시련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는 일종의 성(城)이다. 이 성에는 경영주와 편집인, 기자가 공존한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이 성에서 불신이 싹트고 반란이 일어나 성주를 향해 국민이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성주와 국민의 간격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넓어지고 있다. 이 시점에 나는 언론의 자유가 외부로부터 침해받는다는 사실은 2차적인 문제로 다뤄야 할 것으로 본다. 언론이 스스로 단결해 싸우지 못하고 성문을 열어 외적을 불러들인다면 누구에게 구원을 청할 것인가. 언론계는 이 점에 대해서 냉혹한 자기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최석채 회장의 술회는 당시 3선 개헌을 앞둔 시점에 박정희 정권의 교묘한 언론통제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 후 3선 개헌이 되고 재집권한 박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해 헌정을 중단시키고 만다. 유신체제에서 언론은 극심하게 탄압받았고 뒤이은 긴급조치로 암흑시대를 맞는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언론은 자유를 잃고 제 구실을 못하게 됐으며, 이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이 동아일보의 언론자유수호투쟁과 같은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정치권력의 모진 탄압으로 투쟁은 무산됐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서 일종의 ‘우민통치’를 했다. 정권을 비판하는 어떤 언론도 용납하지 않는 대신 선정주의적 상업주의는 너그럽게 용인한 것이다. 선정적인 주간지나 월간지가 활개치게 된 것도 우민정책 덕분이었다.

    이런 상황은 전두환 정권 아래서도 지속됐다. 그런 세월 속에서 한국 잡지의 성격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상업주의로 굳어졌다.

    잡지는 신문과 달리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를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책과도 달라 다양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특성을 가진 매체이다. 우리는 종합월간지가 어떤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를 특집 형식으로 다각적이며 심층적으로 다뤄주던 시대를 기억한다. 바로 그 점이 잡지의 매력이었으며 잡지를 구독케 하는 유인이었다.

    그러한 특집이나 깊이 있는 기사, 자료 등으로 인해 잡지의 항구성, 즉 보존가치도 높았다. 학자들은 잡지에 게재된 자료를 인용하기도 하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두고두고 참고하기도 했다. 그것이 더욱 가능했던 것은 필자들이 사계의 전문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잡지는 그래서 교양의 샘이었고 세상을 인식하는 교과서이기도 했다. 그만큼 잡지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종합잡지에서 특집다운 특집은 볼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잡지들이 특집을 꾸며 다각도로 깊이 있게 파헤칠 관심사가 현실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잡지들이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외면하는 까닭도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런 기사를 독자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거운 기사를 기피하는 독자들의 취향변화가 이유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관점과 주장에 세태의 변화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상업주의가 항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다. 독자들의 흥미에 영합하는 기사를 위주로 잡지라는 상품을 만든다 할지라도 소재에 참신함이나 깊이를 줄 수 있을 텐데, 오늘의 종합잡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신동아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 종합잡지들을 보면 가십의 뻥튀기가 거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신문에 이미 보도된 가십성 기사를 이리저리 모아 담은 데 그치는 경우가 흔하다.

    신동아에 거는 기대

    그래서 요즘 종합잡지가, 호기심으로 사서 읽고 버리는 스포츠신문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이다. 그런 일회용 읽을거리는 보관할 까닭이 없으니 항구성은 더 이상 잡지의 미덕이라고 할 수 없게 됐다. 잡지가 다른 매체와 차별되는 항구성과 심층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잡지매체의 특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모든 잡지가 진지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선정주의를 판매하는 잡지도 있어야 하고 오락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잡지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의미에서도 그러하며 시장의 기능에 비춰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잡지가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고 세계를 깊이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내용과 당대 우리사회의 공동 관심사와 쟁점을 다각적으로 깊이있게 천착하는 잡지가 몇 개는 있어야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그럴 때 비로소 다양성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잡지를 만들어줄 것인가. 아마도 사명감을 지닌 개인이나 비영리재단 등에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실현성에 의문이 따른다. 재원의 한계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기대를 걸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면서 신동아 지령 500호의 의미를 짚어보게 된다. 그러면서 1931년 창간 당시의 신동아가 추구했던 목표와 오늘의 실상을 대비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지금의 신동아가 옛날로 돌아가기를 기대하기 때문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무시한 요구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신문잡지’의 위상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신문사가 잡지를 발행하는 것은 다각 경영의 일환이므로 그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신문 경영이 ‘규모의 경제’에서 ‘범위의 경제’를 지향하는 추세임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신문잡지’는 신문사라는 배경으로 인해 개별 잡지사가 발행하는 잡지보다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누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풍부한 자본, 광고 확보의 용이성, 취재원에 대한 접근의 유리함, 본지 지면을 활용한 홍보효과 등 ‘신문잡지’의 이점은 무척 많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지령 500호를 맞은 역사적 사명에 견주어 오늘의 신동아를 성찰했으면 한다. 신동아가 본지를 위시한 여타 간행물에 비해 그 위상이 걸맞은지를 비롯해 편집정책 전반을 검토하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흥밋거리를 전적으로 배제하라는 주문은 적절하지 못함에 틀림없다. 다만 전체 기사 중에 몇 가지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양식이 되고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게 배려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럼으로써 신동아가 지령 500호라는, 우리 잡지 사상 가장 오랜 종합잡지의 역사를 빛내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잡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