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늦은 가을 유서 깊은 경주를 찾았다. 2000년 세계문화엑스포장에서 계림로 단검이나 토용 같은 서역계 유물들을 두루 돌아보고, 시 남쪽 외동면에 자리한 괘릉(掛陵)에 들렀다. 외호물로(外護物)서의 심목고비(深目高鼻)한 무인석상은 여전히 무언 중 유언의 증인으로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친 김에 울산 처용암도 둘러봤다. 이제 처용가 비문에도 세월의 티가 아련히 끼기 시작했다. 늘 마음에 두고 있던 곳들이라서 몇 년 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일전에는 서울 한남동 이슬람사원(마스짇)에 찾아가 주마(금요일예배)를 지켜보기도 했다. 역시 몇 년 만의 일이다. 낯익은 한국 무슬림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이 낯선 외국인 무슬림들이다. 한국 이맘님(‘이맘’이란 예배인도자란 뜻)의 인도에 따라 거행되는 예배의식은 자못 진지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에는 북한산 등산길에서 오래간만에 몇몇 지인과 대작(對酌)하면서 소주의 내력을 더듬어보기도 했고, 이 글을 준비하느라 ‘고려사’에 실린 ‘쌍화점’ 가사를 다시 음미하기도 했다.
필연적인 두 문명의 만남
이 모든 것에 대한 회상과 영상의 줌렌즈를 클로즈업하니 1000여 년 전부터 있어온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란 묘연한 역사가 마냥 한 폭의 축도로 현상된다. 비록 시간적인 단절이나 공간적인 한계는 있어도 이러한 만남은 분명 두 문명간의 교류에서 온 만남이다. 문명간의 만남은 역사의 필연이다. 그 누구도 이러한 만남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외압’에 의해 그 만남이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영원한 정지는 없다.
문명은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대하와도 같다. 문명의 만남 속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는 마찰이나 갈등은 어느 한 물굽이에서 생기는 자그마한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소용돌이를 보고 거센 물결이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더욱이 굽이를 지나기만 하면 곧장 사그라지는 순간의 얄팍한 소용돌이가 영원의 웅심(雄深) 깊은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이른바 문명간의 ‘충돌’을 놓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21세기를 ‘문명충돌’의 한 세기로 특징짓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민족분쟁이나 종교갈등을 일괄하여 얼토당토 아니한 숙명적인 ‘문명충돌’로 치부하면서 ‘충돌론’의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문명충돌’(만약 이러한 충돌이 있다면)을 부채질하는 작태다.
인류의 문명은 본질에서 인류 공동의 창조물이고 향유물이며 소유물이다. 오늘의 서구 기술문명은 서구인들만의 창조물이 아니라 아득한 역사시대부터 신·구대륙 제민(諸民)의 공동노력과 희생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정도나 선후 차는 있어도 세계인 모두가 그것을 공히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은 누가 억지로 막으려고 해도 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면팔방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 방편은 바로 교류다. 그런데 전파와 수용 및 문화접변(文化接變)을 수반하는 문명교류에는 가끔 일방적인 흡수에 의한 동화(deliquescence) 같은 역기능적 교류가 있기는 하지만, 문명 발달의 전과정에서 보면 이것은 한낱 장류대하(長流大河) 속의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선진문명을 수용하고 전통문명을 풍부하게 하는 순기능적 융합(fusion)은 항시 문명교류의 주류를 이루고 인류문명사를 이끌어왔다. 그렇지 않았던들 서구인을 포함해 인류는 오늘의 문명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文明 충돌론은 허구
‘문명충돌’이 21세기를 풍미할 것이라고 한 소위 ‘문명충돌론’의 요체는 8대 문명권(일본도 한 문명권?) 가운데서 우리나라와도 오랜 만남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슬람문명권과 우리가 포함된 유교문명권이 ‘문명충돌’의 주범이 될 것인즉, 여타 문명권들은 제휴해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문명을 정치적 시각으로 본 구미(歐美)의 안보관에서 출발한 이러한 억측과 주장은 좋게 말하면 몇 그루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종의 편견과 단견이고, 혹평하면 역사에 대한 왜곡과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짧지 않은 중세시대에도 동·서방에 이슬람제국과 중화제국(당·송)이 그야말로 유아독존 격으로 병립하면서 주변문명들 위에 군림했을 때도 역사는 그 시대를 문명의 충돌시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세기는 사상 초유의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은 ‘대재난’의 세기였다. 충돌치고 이보다 더 큰 충돌이 어디 있으랴만, 그것을 문명의 충돌로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벙어리 대화’만 해오던 인류는 그 속에서 떳떳이 만나 나눔을 시작했고, 토인비는 그러한 재난의 출구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생성과 공존에서 찾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역사상의 모든 충돌은 문명 외적이거나 비문명적인 요인들, 예컨대 유한(有限)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제압이나 경제적 이권의 추구 등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지, 결코 문명 자체에서 온, 또는 문명을 위한 충돌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가게 될 이 세기는 문명충돌의 세기가 아니라, 문명간의 공존과 대화, 이를테면 문명교류가 미증유의 규모로 확산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름에서 오는 문명간의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마찰을 충돌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확대하거나, 개별성을 전체성으로 비화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견강부회적이고 아전인수격인 사변논리에 불과하다.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고 하여 도도한 물결이 멈추지는 않고 몇 그루의 나무가 썩었다고 해서 숲이 망가지는 법은 없다. 문명간의 관계는 ‘오행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무에서 불, 불에서 흙, 흙에서 쇠, 쇠에서 물, 물에서 나무가 나는’ 것 같은 상생 관계지, 결코 ‘쇠는 나무를, 나무는 흙을,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쇠를 이기는’ 것 같은 상극(충돌)관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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