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 정수일 < 전 단국대 교수 >

    입력2005-04-18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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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문명은 인류 공동의 창조물이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문명충돌이란 문명발달의 長流大河 속에 있는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문명은 끝없이 교류한다. 한반도와 무슬림은 3국 시대에 만났고, 고려시대에도 만났으며 조선시대에 교류했다.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으로, 여기에는 문명교류의 온당한 원리와 귀중한 경험이 온축(蘊蓄)돼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진취적인 문명관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지난해 늦은 가을 유서 깊은 경주를 찾았다. 2000년 세계문화엑스포장에서 계림로 단검이나 토용 같은 서역계 유물들을 두루 돌아보고, 시 남쪽 외동면에 자리한 괘릉(掛陵)에 들렀다. 외호물로(外護物)서의 심목고비(深目高鼻)한 무인석상은 여전히 무언 중 유언의 증인으로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친 김에 울산 처용암도 둘러봤다. 이제 처용가 비문에도 세월의 티가 아련히 끼기 시작했다. 늘 마음에 두고 있던 곳들이라서 몇 년 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일전에는 서울 한남동 이슬람사원(마스짇)에 찾아가 주마(금요일예배)를 지켜보기도 했다. 역시 몇 년 만의 일이다. 낯익은 한국 무슬림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이 낯선 외국인 무슬림들이다. 한국 이맘님(‘이맘’이란 예배인도자란 뜻)의 인도에 따라 거행되는 예배의식은 자못 진지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에는 북한산 등산길에서 오래간만에 몇몇 지인과 대작(對酌)하면서 소주의 내력을 더듬어보기도 했고, 이 글을 준비하느라 ‘고려사’에 실린 ‘쌍화점’ 가사를 다시 음미하기도 했다.

    필연적인 두 문명의 만남

    이 모든 것에 대한 회상과 영상의 줌렌즈를 클로즈업하니 1000여 년 전부터 있어온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란 묘연한 역사가 마냥 한 폭의 축도로 현상된다. 비록 시간적인 단절이나 공간적인 한계는 있어도 이러한 만남은 분명 두 문명간의 교류에서 온 만남이다. 문명간의 만남은 역사의 필연이다. 그 누구도 이러한 만남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외압’에 의해 그 만남이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영원한 정지는 없다.



    문명은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대하와도 같다. 문명의 만남 속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는 마찰이나 갈등은 어느 한 물굽이에서 생기는 자그마한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소용돌이를 보고 거센 물결이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더욱이 굽이를 지나기만 하면 곧장 사그라지는 순간의 얄팍한 소용돌이가 영원의 웅심(雄深) 깊은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이른바 문명간의 ‘충돌’을 놓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21세기를 ‘문명충돌’의 한 세기로 특징짓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민족분쟁이나 종교갈등을 일괄하여 얼토당토 아니한 숙명적인 ‘문명충돌’로 치부하면서 ‘충돌론’의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문명충돌’(만약 이러한 충돌이 있다면)을 부채질하는 작태다.

    인류의 문명은 본질에서 인류 공동의 창조물이고 향유물이며 소유물이다. 오늘의 서구 기술문명은 서구인들만의 창조물이 아니라 아득한 역사시대부터 신·구대륙 제민(諸民)의 공동노력과 희생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정도나 선후 차는 있어도 세계인 모두가 그것을 공히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은 누가 억지로 막으려고 해도 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면팔방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 방편은 바로 교류다. 그런데 전파와 수용 및 문화접변(文化接變)을 수반하는 문명교류에는 가끔 일방적인 흡수에 의한 동화(deliquescence) 같은 역기능적 교류가 있기는 하지만, 문명 발달의 전과정에서 보면 이것은 한낱 장류대하(長流大河) 속의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선진문명을 수용하고 전통문명을 풍부하게 하는 순기능적 융합(fusion)은 항시 문명교류의 주류를 이루고 인류문명사를 이끌어왔다. 그렇지 않았던들 서구인을 포함해 인류는 오늘의 문명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文明 충돌론은 허구

    ‘문명충돌’이 21세기를 풍미할 것이라고 한 소위 ‘문명충돌론’의 요체는 8대 문명권(일본도 한 문명권?) 가운데서 우리나라와도 오랜 만남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슬람문명권과 우리가 포함된 유교문명권이 ‘문명충돌’의 주범이 될 것인즉, 여타 문명권들은 제휴해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문명을 정치적 시각으로 본 구미(歐美)의 안보관에서 출발한 이러한 억측과 주장은 좋게 말하면 몇 그루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종의 편견과 단견이고, 혹평하면 역사에 대한 왜곡과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짧지 않은 중세시대에도 동·서방에 이슬람제국과 중화제국(당·송)이 그야말로 유아독존 격으로 병립하면서 주변문명들 위에 군림했을 때도 역사는 그 시대를 문명의 충돌시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세기는 사상 초유의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은 ‘대재난’의 세기였다. 충돌치고 이보다 더 큰 충돌이 어디 있으랴만, 그것을 문명의 충돌로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벙어리 대화’만 해오던 인류는 그 속에서 떳떳이 만나 나눔을 시작했고, 토인비는 그러한 재난의 출구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생성과 공존에서 찾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역사상의 모든 충돌은 문명 외적이거나 비문명적인 요인들, 예컨대 유한(有限)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제압이나 경제적 이권의 추구 등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지, 결코 문명 자체에서 온, 또는 문명을 위한 충돌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가게 될 이 세기는 문명충돌의 세기가 아니라, 문명간의 공존과 대화, 이를테면 문명교류가 미증유의 규모로 확산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름에서 오는 문명간의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마찰을 충돌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확대하거나, 개별성을 전체성으로 비화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견강부회적이고 아전인수격인 사변논리에 불과하다.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고 하여 도도한 물결이 멈추지는 않고 몇 그루의 나무가 썩었다고 해서 숲이 망가지는 법은 없다. 문명간의 관계는 ‘오행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무에서 불, 불에서 흙, 흙에서 쇠, 쇠에서 물, 물에서 나무가 나는’ 것 같은 상생 관계지, 결코 ‘쇠는 나무를, 나무는 흙을,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쇠를 이기는’ 것 같은 상극(충돌)관계는 아니다.

    바로 이러한 상생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다. 한국과 이슬람은 실로 이질적이고 원격(遠隔)한 두 문명이지만 그 만남은 역사의 필연이다. 이로 인해 그 생명력은 면면히 이어졌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이슬람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이 합일된 생활양식이며, ‘인간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조화로운 전체’이고, 종교와 세속 쌍방을 모두 아우르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기독교 사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있으나, 이슬람 사회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샤리아(이슬람법)에 의해 통치·운영되는 정교일치 사회다. 그리하여 이슬람에는 사회 제반 영역에 관한 고유의 사상과 이념, 제도와 규범이 나름대로 마련되어 있다. 이것이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슬람’이라는 단어에는 종교로서의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해 창출된 결과물의 총체로서의 이슬람문명이라는 두 가지 뜻이 복합적으로 내재한다. 따라서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란 한국과 종교인 이슬람교의 만남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문명)와 이슬람문명과의 만남도 아울러 뜻하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13억 신도를 가진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유라시아대륙 50여 개 나라를 망라하는 범세계적인 이슬람문명권(일명 이슬람세계)이 형성되어 인류 역사발전에 간과할 수 없는 기여를 해왔다. 이슬람문명권은 발원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동서에 활 모양으로 뻗어 있다. 일찍이 그 동단(東端)의 가장자리에서 3국 통일로 성운을 맞은 한국(신라)과 처음으로 만났다. 한국으로 보면 그 만남은 실로 범상치 않은 만남이었다. 세계로의 비상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5년경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W. Rubruck)가 그의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카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G. de Cespedes)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1627년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네덜란드 상선 프리깃선 오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가 한국 해역에 나타난 최초의 이양선(異樣船: 외국배)이라고 여겨져왔다.

    서구보다 앞선 아랍과의 만남

    이처럼 한국과 서양이 뒤늦게 만나다보니 근세에 이르러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세상을 알지 못하고, 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이른바 ‘은둔국’이었다. 한국에 은둔국이란 이름 아닌 이름을 붙인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며 목사인 그리피스(W. E. Grifis)다. 그는 일본 도쿄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 1871년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모든 것이 금시초견(今時初見)이고 초문(初聞)이라서 의아하기만 하였다. 돌아간 다음해에 그는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한국을 일컬어 ‘은둔국’이라고 한 것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아온 한국을 이제서야 발견했다는 뜻에서였다. 2년 후 한국에 온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도 저서 ‘한국역사(History of Corea)’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면 과연 한국은 그네들이 빈정대듯 호젓하고 닫힌 나라였는가? 서구인들의 주장처럼 그들에 의해 비로소 한국이 세상에 알려졌는가? 대답은 역사가 한다.

    루브루크보다 400~500년,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00~800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무슬림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하였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귀중한 사료가 중세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요컨대 한(漢)문화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만방에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 무슬림들로, 그 역사는 자그마치 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아랍 무슬림 학자들은 자신의 견문이나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로부터의 전문 등을 토대로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지견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술하였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첫 기록을 남긴 사람은 술라이만(al-Sulaiman)이란 아랍 상인이다. 그는 현지 체험기인 ‘중국과 인도의 소식’(851년)에서 신라가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 후 아블 피다(Abu’l Fida) 같은 지리학자는 신라의 경도와 위도까지 상세히 기술하였다. 이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지리관념이 타파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이 첨가되었다.

    10세기 이후 신라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한층 자세하다. 특히 중세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al-Idrisi)가 작성한 세계지도에는 신라를 중국 동남해상에 위치한 여러 개의 섬나라로 명기하였다. 이것은 서방의 세계지도에 한국이 처음 등장한 벨호(B. Velho)의 지도(1562년)보다 무려 408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명이 기입된 현존 세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 무슬림들로서는 산명수려하고 무구무병(無垢無病)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가 비록 멀기는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지리학자 마크디시(al-Maqdi shi)가 966년에 쓴 책 ‘창세와 역사서’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라고 기술한 것이 그 한 예다.

    저술자들은 또한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 특히 황금이 풍부하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문자 그대로 ‘황금의 나라’였다.

    최초로 신라를 세계지도에 명기한 이드리시는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라고 기상천외의 놀라움을 토로했다.

    만인이 그토록 선호하고 귀중히 여기는 황금이 여기 신라 땅에서는 개의 사슬로부터 가옥의 단장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흔하게 쓰이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못내 놀랍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은 한마디로 이상향이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絶好)의 나라다. 그곳에서는 … 불구자를 볼 수 없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이것이 중세 아랍 무슬림들의 눈에 비친 신라인의 생활상이다. 또한 그들은 신라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며 ‘양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바로 이것이 외래인들이 신라를 찾아갔다가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이렇듯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선망하였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이 신라에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處容說話)’에 나오는 주인공 처용의 정체는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설화의 최초 대본인 ‘삼국사기’는 처용 일행을 어느 날 동해변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보다 약 400년 후에 쓴 ‘삼국유사’에는 느닷없이 처용이 동해 용의 한 아들로 둔갑하면서 신비와 주술이 함께 한 설화로 윤색·가공되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때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 3월, 곳은 개운포(開雲浦: 오늘의 울산)다. 그러면 그 무렵 신라의 최대 국제무역항인 울산에 나타날 수 있는 낯선 이방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서구인들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500년이나 이른 시기이고 보면 분명히 당시 지중해로부터 홍해와 인도양,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남해 전역을 활동무대로 누비던 아랍 무슬림 중 몇몇이라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랍 무슬림들이 범선을 타고 사나운 파도를 가르던 그 바닷길을 따라 일찍이 아랍 땅을 찾아간 한국인도 있으니, 그가 바로 신라의 대덕고승 혜초(慧超)다. 그는 727년경 구법차 천축(天竺: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식(大食: 아랍)을 역방(歷訪)하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중국을 포함한 한문화권 내에서 처음으로 아랍 현지를 방문하고 유명한 견문록(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견문록은 8세기의 서역에 관한 기록 중에 단연 으뜸가는 진서(珍書)로 공인되고 있다. 스님은 진정 이 나라의 자랑이고 역사의 선구자였다.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그를 알고 기리는 일이 너무나 소홀하고 미흡함에 못내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신라와 아랍 간에는 교역도 진행되고 있었음이 아랍문헌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아랍 무슬림들이 신라에 왕래한 첫 기록을 남긴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는 845년에 쓴 역사지리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황금의 산출, 그리고 아랍인들의 왕래에 관해 기술한 다음 신라에서 수입되는 비단·검·사향·침향(沈香)·말안장·초피(貂皮: 담비가죽)·도기·범포(帆布)·육계(肉桂: 계수나무 껍질)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반도에서도 아랍을 비롯한 서역계의 유물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향(乳香)과 안식향(安息香)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 신라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 서민들도 애용하던 슬슬(瑟瑟: 비파)이나 구슬 같은 기호품, 단검이나 토용 등이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서역에서 수입한 침향이나 육계, 낙타 등을 일본에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의 지혜도 발휘하였다.

    경주에서 남쪽으로 얼마쯤 가면 경주군 외동면 괘릉리에 이른다. 신라고분군과는 동떨어진 이곳에 능의 주인공이 원성왕(元聖王, 8세기)으로 짐작되는 괘릉이 자리하고 있다. 만고의 영생을 꿈꾼 한 제왕의 성역에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한 장구(長鷗)의 무인석상 한 쌍이 능을 수호하고 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길게 드리운 구레나룻, 움푹 팬 큰 눈과 우뚝 선 매부리코, 우람한 몸통… 어느 모로 보나 심목고비한 전형적인 중세 서역(오늘의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인의 생김새다. 안강의 흥덕왕(興德王, 9세기)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다.

    신성한 묘역에 이례적으로 이러한 석상을 세운 것은 서역인의 장대한 기골과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적 기능을 노린 것으로 사료된다. 1000여 년 동안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도 의젓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이 석상을 눈여겨볼 때마다 그 무언(無言) 속의 ‘유언(有言)’에 귀기울이게 된다. 이 요지부동의 무인석상이야말로 신라인들의 높은 지혜를, 그리고 그들과 서역인들 간에 있었던 어울림과 만남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오면서 오늘도 무언가를 더 증언하려는 성싶다. 다만 그것이 ‘역사의 언어’여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세계 속의 한국이었다는 역사의 한 단면을 전해주는 데는 족하다.

    準몽골인 回回人

    역사는 언제나 냉철하다. 누가 무어라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1000여 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부터 있어온 한국과 아랍-이슬람세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단코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렇기에 한국과 이슬람은 신라를 이어 고려와 조선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래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과하면 적어도 근세까지는 직접적인 만남보다는 중국이나 몽골, 러시아나 일본 등 주변국에 밀려든 이슬람의 여파에 편승된 만남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만남은 문명교류의 궤를 따라 면면히 이어져 왔다.

    고려시대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새 장이 열린 시대다. 고려 시대 초엽에는 아랍상인들이 대거 몰려왔고, 말엽에는 주로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고 십분 활용한 원제국(몽골)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영내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이나마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 문헌, 특히 한적(韓籍)에 의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사적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에 관한 기사가 간간이 나타난다. 모두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 열라자(悅羅慈), 하선(夏詵), 보나합(保那盒)을 비롯한 대식(大食: 아랍)상인이 100여 명 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沒藥: 난초과의 교목으로 방부제로 쓰임), 소목(蘇木: 한약재 일종) 같은 방물을 가지고 상역차 개경에 찾아왔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객관(客館)까지 마련하여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금백(金帛)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다운 처사이며, 두 이질문명의 화목한 만남이다.

    여말에 이르러 한반도에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는데, 그것은 호한(浩瀚: 넓은)한 몽골초원으로부터 달려온 기마유목민과 통칭 ‘색목인(色目人)’이라고 하는 그들의 ‘문화교수 (Professeurs de civilization)’인 서역 무슬림에 의해서다. 원 제국에서 이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구실을 하였다. 이슬람이란 이질적 문명이 그 신봉자도 아닌, 그저 이용자일 뿐인 이방의 북방 기마유목민의 등에 업혀 반입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아이러닉한 사변이 침묵을 깨는 일이 가끔 있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라는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던 무슬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원제국의 고려 경략에 동참하여 사신이나 역관, 서기, 근위병, 시종무관 등 여러 가지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 파견되었다. 그 밖에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에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 무슬림, 특히 귀화무슬림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의 비조가 되고 이슬람의 정초자가 되었다. 그 대표적 일례가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다.

    삼가는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인 제국(齊國)공주(원 세조의 딸)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벼슬이 낭장(郎將)에서 장군을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올랐다. 그는 덕수현(德水縣)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남기고 44세에 죽었는데, 후손은 본관을 덕수로 하고 그를 덕수 장씨의 시조로 모셨다. 오늘날까지 12종파 25대로 이어져 내려온 덕수 장씨 문중에는 조선시대의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장유(張維, 12대손)를 비롯해 많은 명인을 배출했다. 지금도 명문대가로 그 후예들이 선조의 종묘가 있는 평택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삼가의 귀화 후 일족의 신앙상황은 밝혀진 바 없으나, 적어도 몇 세대까지는 무슬림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슬림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하여 서임된 이로는 삼가 외에 민보(閔甫)가 있다. 벼슬이 대장에 이른 그는 매를 가지고 다섯 번이나 원나라에 사행하고 충선왕 때에는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존무사(存撫使)를 겸하기도 했다. 삼가나 민보보다 좀 뒤늦게 고려로 와 귀화하고 관직에 나아간 사람으로는 경주 설씨(氏)의 시조인 회골(回: 위구르) 출신의 설손(遜)이 있다.

    원래 그는 원나라 순제 때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칠 정도로 문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방에 좌천되자 교분이 있던 공민왕을 찾아 고려에 와서는 봉후(封侯)되고 전답까지 하사받았으며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설씨 일가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명문가로 조선조 개국시 명나라에 여덟 차례나 사행한 큰아들 설장수(長壽)를 비롯해 여러 명인을 배출하였다. 설씨 일가와 비슷한 경륜을 가진 가문으로는 임천(林川) 이씨가 있다.

    개경의 무슬림 공동체

    이와 같이 몽골 통치시기에 ‘준몽골인’으로 고려에 온 무슬림들, 특히 귀화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전파와 정착을 선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에서 상당한 권력도 행사하였다. 회회인들은 신전(新殿)에서 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때때로 왕을 자신들의 연회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충혜왕은 피륙을 회회가에 나누어주어 그 이익을 취하게 하였으며, 매일 그들로부터 15근의 쇠고기를 받았다. 몽골풍에 젖은 우왕(王)은 한 무슬림 가정의 아들과 딸을 데려다 시종으로 삼았으며, 매를 관리하는 응방(鷹坊)에는 많은 무슬림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하니, 언필칭 서로의 친밀함이요, 이슬람에 대한 공허(公許)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즈음에 고려의 개경에는 이미 무슬림의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어 하나의 사회경제적 세력으로 고려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에 이르는 약 150년간에 원나라로부터 유입된 무슬림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에서 취락을 이루고 집단거주하며 고유의 생활양식과 종교의식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이슬람 사원 격인 ‘예궁(禮宮)’에서 예배를 근행하고 회회사문(回回沙門: 이맘)의 인도에 따라 이슬람의 예배의식인 ‘대조회송축(大朝會頌祝)’을 조정에서 거행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려왕실 주변에는 색목인 출신으로 봉군(封君)된 최노성(崔老星) 같은 호상도 다수 있었다.

    이제 무슬림들이 고려사회에 어지간히 적응하여 ‘고려화’하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풍자가사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한다. 26각(刻)의 곡조로 된 속요(俗謠) ‘쌍화점(雙花店)’에서 ‘상화떡집 회회아비(무슬림 주인)’는 떡 사러 온 고려여인의 손목을 잡아채며 연애를 건다. 이를테면 비록 이질적인 두 문명의 만남이지만 어쩔 수 없이 세진(世塵) 속에서 융화되다 보니 마침내 인간 본능적인 낭만이 생긴 셈이다. 상화(霜花)떡은 이슬람 고유의 빵으로 보인다. 그 밖에 송도 설씨(薛氏, 무슬림 ?)에게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적(薛炙)은 쇠고기나 소의 내장을 꼬챙이에 꿰 구운 후 고명을 얹은 음식인데, 오늘까지 유행되고 있는 중동의 케밥이나 동남아의 사떼와 흡사하다.

    일찍이 삼국시대에 유입된 서역의 악무가 고려시대에 와서도 그 맥을 이어갔다. 주로 중앙아시아로부터 들어온 비파나 나팔, 소 등 호악(胡樂)과 호가(胡歌), 그리고 호무(胡舞)는 인기리에 널리 퍼졌다. 심지어 우왕같은 임금도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을 친히 연주하고 화원에서 호가를 즐기며 때로는 자신이 직접 호적을 불고 호무를 추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호악호무가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지고한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 술이라는 말이 있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 그 이유라도 하나, 그 진의가 무엇인가는 각설하고,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술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을 주선한 ‘매파’가 되었다고 한다면, 신이 두 문명에 준 선물치고는 실로 진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탁주·청주와 더불어 한국의 3대 토주의 하나로 꼽히는 소주는 그 연원이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침한 몽골군이 가죽 술병에 넣고 다니면서 마시는 아락주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증류주인 소주다. 그런데 원래 이 소주는 유목민인 몽골인의 것이 아니라, 몽골 서정군이 아바스조 이슬람제국을 공략할 때 농경민인 서아시아인들로부터 그 양조법을 배워온 것이다.

    아랍어로 ‘증류’란 뜻의 ‘아라끄(araq)’에 어원을 둔 이 소주(오늘까지도 서아시아 일원에는 ‘아락’이란 우윳빛 소주가 유행)는 몽골어로 ‘아라킬’, 만주어로 ‘알키’, 중국어로 ‘아랄길주(阿剌吉酒)’, 힌두어로 ‘알락’이라고 하며, 고려 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하였다. 이러한 어맥(語脈)과 역사사실로 미루어 한국의 소주는 기마유목민인 몽골인을 매개로 만난 두 문명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문명간의 만남은 서로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 두 문명의 만남과 교류는 보다시피 제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는 미숙한 상태였다. 당대 고려에 관한 대표적인 이슬람문헌 기록으로는 라시둣 딘(Rashidu’d Din)의 세계통사 ‘집사(Jamio’d Tawarikh)’가 있는데, 당서에서 이러한 실상을 찾아볼 수 있다.

    라시둣 딘은 저서에서 이슬람학자로는 최초로 한국을 신라가 아닌 고려(Kao-li)라고 칭하면서 고려를 원의 12개 중 한 개 성(제3성)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의 왕권정체를 지적하고 몽골과의 혼인관계도 언급하고 있다. 모두가 사실과는 어긋남이 없으나 극히 소략한 기술에 머물고 있다.

    고려를 이은 조선에 들어와서 그 초기에는 전대의 맥을 이어 이슬람과의 만남이 성숙도를 더해갔다. 그러나 중·후기에는 여러 가지 주·객관적 요인으로 그 만남이 단절되다시피 하여 두 문명간의 만남과 교류에는 한때 공백기가 생겼다.

    고려조로부터 조선조라는 왕조의 변천에 따르는 혼란기에도 재한 무슬림의 정치사회적 위상은 큰 변화 없이 확고하였으며,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란 역사적 대명제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만남이 가능하였던 것은 내부적으로는 역대 위정자들이 개방적인 문화수용책을 취하고, 외부적으로는 이슬람문명이 갖고 있는 진취성 때문이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도래한 무슬림들이 ‘준몽골인’이란 외연적인 위압도 일정하게 작용했겠지만, 그러한 ‘위압’이 사라진 조선 초에 와서도 전과 다를 바 없는 만남이 지속된 것은 어디까지나 위의 내·외부적 요인의 소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선초의 여러 사적에는 전대의 문헌기록과 마찬가지로 회회인들의 정착 및 사회활동과 지위에 관하여 누누이 언급하고 있다. 실록에 따르면 1407년에 회회사문(이슬람 이맘)인 도로(都老)가 처자를 데리고 내조하자 태종은 집을 주어 살게 하고는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그러던 태종이건만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왜인과 회회인들에게 주던 녹을 줄이라고 하명하였다. 회회인이 받는 녹을 줄여서 국고를 충당할 정도라면 녹을 받는 회회인이 수적으로도 많거니와 그들의 직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시사한다.

    조선조의 건국 성왕인 세종의 행적을 기록한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무슬림들은 조정의 특별한 배려를 받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회회노인(무슬림 원로)과 회회승도들은 그들 나름의 이색적인 복식을 하고 근정전에서 거행되는 신년하례식이나 동지 망궐례(望闕禮) 같은 각종 궁정행사와 의식에 꼭꼭 참석했다. 나라 임금에 대한 그들의 하례는 당대 무슬림이 누리던 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인화와 상술에 능한 무슬림들은 조정과의 관계에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이다. 회회사문 도로가 태종에게 모자에 다는 수정구슬을 방물로 진상하자 왕은 보답으로 그에게 쌀 5석을 하사하고 금강산과 순흥, 김해 등지에서 수정을 채집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도로는 마침내 300근이나 되는 수정을 채집해 태종에게 헌상하였다.

    무슬림 신앙생활 허용

    무슬림들은 조정의 배려를 받으며 선초까지도 그들 특유의 복장을 하고 이슬람식으로 궁정의례를 치렀으며, 불승들과 동등한 서열로 조정하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던 그들이 한화(韓化)해 여느 백성과 다를 바 없자 세종대에 와서는 무슬림의 이방적인 행태를 금하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회회인들의 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인하기를 꺼리므로 이미 백성이 된 이상 한식 복장을 따르고 이슬람식 송축예법도 폐지해야 한다는 예조(禮曹)의 상주를 듣고 그렇게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슬람교는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공허)을 받고 있었으며, 무슬림들은 평등하고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 이슬람문명과의 만남에서 특기할 사항은 몇 가지 이슬람과학기술의 수용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슬람역법의 도입이다. 선초에 세종은 새로운 역법을 창제하기 위해 정인지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명하여 원대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대의 대명력(大明曆), 이슬람의 회회력을 구해 연구하게 하였다.

    수시력이나 대명력은 모두 당시로는 가장 발달한 이슬람력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기는 하나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이순지 등 학자들은 별도로 이슬람력을 집중 연구하였다. 다방면으로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라는 조선조의 역법이다.

    그중 외편은 순태음력인 이슬람력 원리를 도입하여 만든 것으로서 ‘조선의 이슬람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역법은 이슬람력의 역원(曆源)인 히즈라(메카로부터 메디나로의 聖遷, 622년)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전래의 태양태음력에 따른 윤달을 따로 설정하지 않고 30태음년에 11일의 윤일을 두고 있다. 또한 분도법에서도 중국의 100진법이 아닌 이슬람의 60진법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칠정산외편’은 이슬람역법의 기본원리와 특성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관용적인 문명교류의 한 증좌(證左)라 하겠다.

    역법과 관련이 있는 천문기상학과 천문관측기기의 제작에서도 이슬람천문학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연구가 미흡해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조선조에 제작 정비된 대소간의나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태양과 별의 운행시간을 관측하는 일성정시의 등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기가 원대 중국에 도입되었던 동류의 이슬람 천문기기와 구조나 기능에서 대동소이하다. 그중 자격루에 맞먹는 소리나는 물시계가 이슬람세계에서는 이미 8세기에 만들어져 프랑크 국왕에게 선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공예기술 면에서도 이슬람문명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도자기의 청색 안료인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 muslim blue)의 도입이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지역에서 산출되던 이 안료는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중국과 한국(조선조)에 수출되었다. 이 새로운 안료의 사용으로 15~16세기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청색무늬를 넣은 독특한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출현하였다. 조선조에서는 세종 때까지 백자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세조 때에 와서 중국으로부터 회청이 들어오자 화려한 청화백자가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료 수입이 어려워서 생산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국내산 안료가 개발됨에 따라 청화백자는 다시 부활했다.

    여말선초에 위구르문자와 언어가 관부를 비롯한 상층사회에서 사용된 사실은 이슬람문명 교류사에서 특기할 사항이다. 일찍이 문자가 없던 몽골은 위구르문자를 빌려다가 자신의 언어를 표기함과 동시에 위구르어를 공식어로 채택했기에 원조에는 위구르어가 널리 통용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후기 고려에 위구르어가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간섭이 극성이던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엽까지 회회어와 회회문으로 알려진 위구르어와 문자는 고려 상층부에서 필요언어로 각광받았으며 비공식 궁중용어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위구르어는 공식외국어로 교습되고 번역관 고시에는 몽골어와 더불어 필수 시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차제에 부언할 것은 이 즈음에 창제된 훈민정음에 같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의 언어적 요소가 섞여 들어왔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이다. 신숙주를 비롯한 일부 집현전 학자들은 몽골어에 정통하였는데, 그러자면 그 표기문자인 위구르문자를 필히 장악했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훈민정음 창제에서 이미 정연한 문자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또 그들이 파악한 위구르문자에서 무언가 참고했으리라고 짐작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의 약 150년간에 위력적으로 사용되던 위구르어는 1427년에 공포된 외래습속금령으로 인해 제반 외방적인 복식 및 의례형식과 더불어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비록 이 모든 것은 이슬람문명권 언저리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권내 무슬림의 관심 밖에 있을 수는 없었다. 한국에 관한 기록을 조선조시대에 남긴 이슬람 학자는 오스만 터키 출신의 알리 아크바르(Ali Akbar)다. 그는 1500년대 초 오아시스 육로로 호탄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 1516년에 페르시아어로 중국여행기 ‘키타이서(Hitayname)’를 저술하였다. 저술시기는 조선시대지만 그 내용은 고려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여행기에서 카올리(Kao-li), 즉 고려는 12개 중국 행정지역의 하나(제9지역)로 소규모의 영세상인들조차 15만 시르의 자금을 갖고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지역이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아마포는 품질이 우수하다면서 카올리 상인들로부터 은화로 여러 가지 상품을 구입한다고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기술은 라시둣 딘의 고려 관련 기술과 비슷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특히 말엽부터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동안 이슬람과의 만남은 여러 모로 상승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에 밀려 이러한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고 급기야 그 후 수세기 간 단절기, 공백기를 겪게 되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그간 한국에 대해 이슬람 ‘공급원’ 노릇을 해오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관문’ 노릇을 해오던 중국이 해금(海禁), 관금(關禁) 등 대외폐쇄정책을 실시(明나라))한데 이어 무슬림에 대해 심한 탄압정책을 자행(淸나라)하였으며, 이에 더해 서세동점의 새로운 국제정세하에서 무슬림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 모든 객관적 정세로 인하여 이슬람의 동방 진출이 퇴조되고 한반도에 이르는 이슬람의 유입루트가 소멸·차단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대내적으로는 보수적인 유교문화와 쇄국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한 나머지 외래문명에 대한 수용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외래문명, 특히 이슬람과 같은 이질문명을 경원시하게 되었다. 또한 주로 상층에서만 맴돌던 이슬람교가 대중에 착근하지 못하고, 극소수에 머물렀던 무슬림이 대부분 한국사회에 동화되다 보니 이슬람은 자생력을 잃고 더 이상 생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개화운동에 편승해 닫힌 빗장이 조금씩 풀리자 이슬람과의 만남이 다시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 계기는 오스만제국의 적극적인 대동방 진출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제국에서 일어난 범이슬람주의 부흥운동과 반러시아공동전선의 필요성은 동방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관심을 크게 촉발하였다.

    그리하여 오스만제국은 중국과 일본에 대하여 미증유의 접근전을 펼쳤다. 특히 일본과는 사절이나 군함을 교환하는가 하면, 공동으로 도쿄에서 범이슬람대회(1906년)까지 개최하려 하였다. 물론 이 대회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의 강력한 반대로 말미암아 개최 직전에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이슬람의 새로운 동방 진출을 과시하기에 충분하였다.

    이슬람의 동방 진출에 겁을 먹은 서구인들은 그 성세를 13세기 몽골의 서구 원정에 견주면서 그로부터 초래될 재화를 이른바 ‘신황화(新黃禍)’로 규정하고 크게 경계하였다. 이웃에서 일어나는 이슬람의 이러한 새로운 기운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대 共同體 구성

    그리하여 20세기 초엽에 간헐적이기는 하나 무슬림의 한국행이 재연되었는데, 그들을 통해 격동기의 한국이 세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 일례가 러시아 투르크족 출신의 종교지도자 압둘라시드 이브라힘의 한국 방문이다.

    러시아에 강점된 투르키스탄 자치를 위해 투쟁하던 그는 아시아 순방길에 일본을 거쳐 1909년 한국에 들렀다. 한 주 동안 부산, 밀양, 서울 등지의 고적과 교육문화시설 등을 두루 돌아보고 귀국한 그는 여행보고서 ‘이슬람세계’를 저술했는데, 그중 ‘조선편’에 바야흐로 국운이 꺼져가는 참담한 현실과 한국인의 윤리도덕, 재한 외국인 실태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그 후 무슬림이 집단적으로 한반도에 이주해 자그마한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그들 대부분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후 망명한 투르크계 사람들로서 만주를 거쳐 일제 치하의 한국에 들어왔다.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그들은 신의주, 혜산, 평양, 흥남, 서울, 천안,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일제의 비호하에 각종 생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서울에 학교와 사원을 세우고 경전 ‘꾸란(코란으로 알려져 있다)’을 출간하여 이슬람 교육과 종교의례를 계속 지켜갔다. 심지어 홍제동 부근에는 무슬림 전용묘지도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한반도 광복과 1950년의 전쟁이란 잇따른 충격으로 결국 그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한편 그들이 경영하는 점포에서 일하던 몇몇 한국인이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현대 한국 무슬림의 비조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이 시기에 만주에서 일본 회사나 기관의 역원으로 있던 한국인들은 그곳에 있는 무슬림과 접촉하면서 이슬람 신앙을 싹틔웠는 데, 후일 그들은 한국 무슬림의 초대 지도자 반열에 서게 되었다.

    6·25전쟁은 무슬림인 터키군이 참전한 터라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무슬림들이 피를 흘린 전쟁이다. 무슬림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피흘린 것은 그로부터 약 680년 전 삼별초가 항몽전을 일으켰을 때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항몽군들은 항몽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장수 이백기(李白起)를 체포하여 노상에서 몽골이 파견한 회회인들과 함께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처절한 현장은 문명 외적인 비사일 뿐, 결코 대치문명간의 숙명적인 충돌은 아니다. 그러한 ‘충돌’이었다면, 그 뒤를 이은 문명의 만남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흔히 충돌은 앙금을 낳고, 앙금은 불신을 결과하며, 불신은 두절로 이어지니까 말이다.

    여단 규모의 터키군이 살벌한 6·25전에 참전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한국에 무슬림공동체가 형성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앙카라학교’를 세워놓고 전쟁고아들을 양육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군 이맘 압둘가푸르(Abdulgafur)가 직접 대민선교에 나서서 현대 한국 무슬림 제1세대를 탄생시켰다. 그의 인도로 1세대들은 1955년에 드디어 첫 이슬람공동체인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하여 이슬람 정착에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 후 여러 이슬람국가와 국제이슬람단체들의 형제애적인 지원과 한국 무슬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한국 무슬림공동체는 점차 구색을 갖추고 의젓이 자라나, 마침내 서울 중앙사원을 비롯해 전국에 5개의 사원을 건립하고 약 4만 명의 신도를 구성원으로 갖게 되었으며, 범세계적 이슬람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좁은 의미의 이슬람공동체는 한국이슬람중앙회를 정점으로 하여 그 ‘우산’ 속에 망라된 여러 조직성원과 국내외의 무슬림으로 구성된 순수 종교유대체로 한정되나, 넓은 의미의 이슬람공동체는 이러한 종교유대체말고도 한국이슬람학회와 4개 대학의 아랍-이슬람학과를 비롯해 이슬람문명을 연구·전파하는 모든 인적 및 물적 역량을 총망라한 문명유대체를 말한다. 사실상 이러한 문명유대체인 이슬람공동체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이나 교류를 추진하는 견인차 구실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의 이슬람문명권을 연결하는 고리구실도 아울러 담당하고 있다.

    작금 이러한 이슬람공동체의 선도적 역할에 힘입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는 전대미문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두 문명 사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방면에 거쳐 오늘의 문명사에 걸맞는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니, 문명사의 오늘을 뛰어넘는 기적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인의 힘과 지혜로 저 멀리 리비아 대사막에 생명수가 콸콸 흐르게 하는 그러한 기적 말이다. 바싹바싹 메마른 사막을 물로 한번 흠뻑 적셔보고파 하던 인간의 꿈이 현실이 되던 날,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세계의 ‘제8대 불가사의’라고 경탄하였다.

    이질성은 교류의 조건

    문명사란 본질적으로 주고받음의 역사일진대, 주로 받기만 해온 우리 겨레가 이제 남들이 ‘불가사의’라 부를 만큼 엄청난 일을 해냄으로써 그 불균형을 깨고 갚음을 했으니, 기적치고 그보다 더한 기적이 어디에 있으랴. 진정 그것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세워진 하나의 불멸할 이정표다. 그런데 그 이정표에 암운이 드리울 거라는 소문이 나도니, 자못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의 오감이나 주고받음은 그것이 눈곱같이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밀알이 되고 씨앗이 될지니, 의당 소중히 여기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1000여 년간 이어져온 한국과 이슬람 간의 만남과 교류의 역사를, 주로 문명사적 시각에서 개략적으로 훑어봤다. 두 문명은 퍽 이질적이고, 또한 지정학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만남은 문명교류사 일반에서 그리 흔하지 않는 양상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문명교류의 관행적인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문명의 특성에서 오는 교류의 당위성은 두 문명의 만남과 교류에서 이론의 여지없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문명은 보편성과 개별성, 전파성과 수용성이란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비로소 그 교류가 가능한 것이다. 같은 환경이나 여건에서는 물론, 때로는 다른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용과 형태에서 유사한 문명이 창조된다는 보편성은 문명간의 접근을 가능케 하며, 또한 인류는 항시 이러한 보편성에 바탕을 둔 문명의 공유를 염원하여 교류하게 된다. 개개의 문명이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타문명과 구별된다는 개별성(고유성)은 문명간의 이질성을 조건지어 주기 때문에 교류에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일단 창조된 문명은 물리적 거리나 장애에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주위에 조만간 전파되는데, 이러한 전파는 교류의 필수적 과정으로 그 양태에 따라 교류상이 좌우된다. 궁극적으로 전파된 문명이 피전파문명에 합류·정착, 즉 수용될 때만이 실질적인 교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수용성은 교류의 징표인 것이다.

    비록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그 양상에서 부침이 심하고 폭과 깊이에서 상대적인 제한성이 두드러지지만, 두 문명 고유의 제반 특성이 순리대로 발현된 결과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바로 여기에 당위성과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역사를 통해 실증된 두 문명의 만남은 시종일관 상극관계가 아닌 상생관계에서 공생공존하고 상부상조함으로써 문명교류의 본연(本然)을 그대로 구현하고 실천하여 왔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실천과정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교류내용의 단향성(單向性)이다. 원래 문명교류는 문자 그대로 서로 오가며 주고받는 것이나, 한국과 이슬람이 만나온 역사를 통관하면 대체로 현대사를 빼고는 여러 가지 내·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이슬람의 대한국 전파가 거의 일방적이고, 한국의 대이슬람 접촉은 극히 드문 상태이며, 서로의 영향관계도 이에 상응하였다.

    다음은 교류방법에서 점파(點播)에 의한 간접전파라는 특징을 가진다. 문명교류란 문명의 전파와 수용과정이다. 그런데 전파에는 문명간의 직접적인 통로나 매체에 의해 실현되는 직접전파와 제3자를 통해 실현되는 간접전파가 있다. 직접전파는 원형적인 문명요소가 신속하게 확산되는데 비해, 간접전파는 변형적인 문명요소가 비교적 완만하게 보급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문명전파에서는 간접전파보다는 직접전파가 더 요망된다.

    또한 문명전파에는 전파가 간단없이 이어지는 연파(延播)와 연속성 없이 군데군데에 점재되는 점파(點播)가 있다. 연파가 문명의 자연적이고 광폭적인 확산이라면, 점파는 대개 우연적이고도 소폭적인 보급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서 일어난 전파상, 특히 이슬람의 대(對)한국 전파상을 살펴보면 점파에 의한 간접전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하였음을 인지하게 된다.

    교류의 무한 확산

    끝으로 말할 특징은 교류결과로서의 문화접변이 미약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문명의 수용과정에는 순기능적 수용이건 역기능적 수용이건 간에 이른바 문화접변(文化接變, acculturation)이라고 하는 문화(문명)적 변동이 일어나는 법이다. 문명교류는 구경에 있어서 이러한 변동을 목적으로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서 이러한 문화접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극히 희미하다. 그 원인은 연파에 의한 직접전파가 아니라 점파에 의한 간접전파라는 취약점과 함께 두 문명의 만남은 주로 이슬람문명권의 언저리에서 여파에 의한 ‘변두리접촉’에 머물렀다는 한계성, 그리고 강한 이질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인류는 바야흐로 교류의 무한대 확산시대을 맞고 있다. 이제 문명인에게 교류는 절체절명의 생존전략이다. 이러한 대명제하에서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지난날의 만남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편향을 털어버리고 진정한 교류인으로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올바른 앎이다. 한국인으로 말하면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앎이다.

    오늘 이슬람에 대한 여러 가지 무지와 오해는 서로의 만남을 어렵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는 따지고 보면 이른바 ‘서구문명중심주의’ 때문이다. 이슬람을 ‘한 손에는 꾸란(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폭력종교로 오도하고, 근대의 이슬람부흥운동에 엉뚱한 ‘이슬람근본주의’ 딱지를 붙여 호전(好戰)종교로 몰아붙이는 것도 그 진원지는 예외 없이 서구다.

    서양사의 구성체계(국내외의 모든 교재)를 보면 서양문명의 첫머리에 ‘오리엔트문명’을 얹어놓고, ‘중세 유럽세계의 성립’장에 ‘이슬람세계’를 한 절로 끼워 맞추고 있다. ‘오리엔트’와 ‘이슬람세계’가 분명 서양세계는 아닐진대, 그러한 발상과 저의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작금 서구에서도 들을 법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현대 서구 이슬람학계의 태두이자 목사인 영국의 와트(W.M.Watt)는 ‘중세기 기독교 학자들이 많은 점에서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힐 정도로 이슬람상을 추하게 조작했다는 사실이 근년에 와서 명백해졌다’고 자성하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학자들이 노력한 결과 더 객관적인 이슬람상이 서구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낙관과 기대를 표명하였다.

    ‘이슬람을 모르고 세계종교를 안다고 자신하지 말라’ ‘이슬람문명에 무지하면서 어떻게 감히 그 자양분을 받아 자라난 근대 서구문명을 논할 수 있는가’, ‘징검다리 구실을 해온 이슬람문명을 제쳐놓고 동서문명의 만남이나 교류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등등은 누군가의 절규다. 이러한 양식의 절규와 메시지에 귀기울이고 순응할 때만이 비로소 제대로 된 이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슬람문명을 포함한 인류문명에 대한 불편부당한 정견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단순하고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으로 거기에는 문명교류의 온당한 원리와 귀중한 경험이 온축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롭고 진취적인 문명관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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