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사업은 연극처럼, 연극은 사업처럼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8 14:5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부품을 100% 수입해 뚜껑만 씌워 팔던 (주)하츠는 설립 초기부터 부품 국산화에 주력, 세계 수준의 레인지 후드 업체로 성장했다. 하츠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40%에 달하며 회사 설립 후 13년간 한해도 빠짐없이 연 30%의 성장세를 과시했다.
    이수문씨(李秀文·52)는 사업가이자 연극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레인지 후드를 만드는 (주)하츠의 사장이며, ‘명성황후’를 제작한 뮤지컬 컴퍼니 ‘에이콤’의 운영위원이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싹튼 연극 사랑이 나이 오십을 넘긴 지금도 변함이 없어 사업을 하면서도 연극 동네를 떠나지 못한다.

    사업과 연극이라는 전혀 다른 두 바닥을 넘나들며, 인생의 긴장과 여유를 적절히 조율하며 살아가는 이사장은 굳이 말하자면 기업가 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이 더 강하다. 틀에 박힌 생활보다 자유분방한 삶을 좋아하고, 체질적으로 심심한 걸 못 참아 항상 재밋거리를 찾아 헤매는 게 그렇다. 한 가지 일을 3년 이상 못하는 것도 그렇다. 이런 자신을 그는 “진지하지 못하고 엉성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어디에 갖다 놓아도 금방 적응하는 것은 장점이라고 했다. 연극을 통해 닦은 유연한 사고 덕분에 사물을 제대로 분석하고 동태적으로 볼 줄 알게 됐다는 이사장은 “연극이 내 인생을 폭넓게 해줬으니 늘 연극에 빚진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회사도 이런 예술가적 기질로 끌어간다. 배우들에게 신명나게 뛰어놀 판을 만들어 주고 객석에 앉아 그걸 바라보듯, 회사를 경영할 때도 ‘진두지휘’를 하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일할 마당을 만들어주고 자신은 한 발 물러서 제 방향으로 가는지 지켜볼 뿐이다. 두 팔 걷고 현장을 누비며 하나부터 열까지 빼놓지 않고 챙기는 여느 중소기업 사장들과는 사뭇 다르다.

    ‘쿠치나’로 명성

    “오너가 일일이 간섭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끄고 있으면 지금 당장은 일이 잘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해요. 사장은 기업이 나아갈 큰 방향만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목표에 다가가는 방법은 직원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흐름만 살피되, 행여 흐름을 방해하는 문제가 생겨도 방향을 잘못 잡을 만큼 심각한 게 아니면 직원들이 해결하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직원들이 일하는 보람도 느끼고 창의력도 발휘합니다.”



    직원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해도 수업료 좀 든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실수를 용인하지 않으면 직원들은 어떤 일도 시도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는 “오너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는 30%만 관여하고 나머지 70%는 미래를 준비하는 데 쏟아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관련 업종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기초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객관적인 눈을 갖는 것이다. 이사장은 어린 시절 시나리오를 분석하면서 그런 눈을 키웠다고 한다. 그의 ‘뜨인 눈’ 덕분인지, (주)하츠는 지금껏 매년 30%대의 성장세를 보여왔다.

    올해로 설립 13년을 맞는 하츠는 부엌에서 조리할 때 나는 냄새를 배출하는 레인지 후드 전문업체다. 지난 1월 사명을 ‘하츠’로 바꾸기 전까지는 ‘한강상사’라는 이름으로 ‘쿠치나’(이탈리아어로 ‘kitchen’) 후드를 생산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말 세계 시장을 겨냥해 120억 원을 투자,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연간 90만 대의 후드를 생산할 수 있는 1만1000평 규모의 경기도 평택공장을 열었다.

    아울러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기업 이미지 통일(CI) 작업도 벌였다. 이때 회사 이름과 브랜드 이름을 모두 ‘하츠’로 바꿨다(다만 ‘쿠치나’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지도가 높아 보급형 제품에는 당분간 ‘쿠치나’ 상표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 ‘하츠(Haatz)’는 ‘Human, Art And Techno Zone’의 약자로 ‘인간, 예술, 기술의 조화를 통해 밝은 미래와 쾌적한 환경을 구현한다’는 기업정신을 담고 있다. 이사장은 “수출품 생산라인을 완벽하게 갖췄고, 세계적인 제품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도록 적극적인 마케팅 작업까지 끝내 이젠 열심히 뛰는 일만 남았다”고 자신한다. 현재 하츠는 일본과 호주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데, 곧 홍콩과 동남아 시장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주)하츠 평택공장의 게이트웨이에서 내려다본 작업장은 널찍하게 확 트인 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힘든 작업은 기계가 맡고 있기 때문에(전체 공정의 50%) 작업과정은 전반적으로 수월해 보였다. 이 공장에선 환경을 오염시킬 만한 유해물질은 모두 자동화 시스템으로 처리해 유해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가령 가공된 철판을 세척한 물은 ‘쿨 포스 시스템(Cool Phos System)’이라는 장치를 통해 기화 및 액화과정을 거쳐 자동 정화되도록 했다. 페인트칠을 하는 공정에도 ‘분체정전도장 시스템’을 이용, 유해 물질이 배출되지 않도록 통로 모양의 관 속에서 미세한 분말로 페인트칠을 해 말리게 했다. 이사장은 “덕분에 시설비는 두 배 이상 더 들었지만, 직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800억 원대 규모의 국내 후드 시장에서 하츠는 지난해 3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업계 1위를 차지했다. 현재 국내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이 회사는 내년에는 50%, 2003년에는 60%의 시장점유율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이제는 세계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3년 후면 이탈리아가, 5년 후면 중국이 국내 시장에 들어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대량 생산을 하는 데다 인력관리가 잘 돼 있어 우리 제품보다 가격이 20% 정도 쌉니다. 앞으로 이런 업체들과 경쟁하려면 과감한 기술혁신과 효율적인 인력관리가 꼭 필요합니다.”

    이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하츠는 지난 2월부터 ERP(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 작업에 들어가 7월쯤이면 작업이 완료된다. 이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생산원가를 지금보다 20∼30% 절감할 수 있다.

    현재 하츠가 생산하는 후드는 40여 종. 저가품인 보급형, 기능과 규격을 완전하게 갖춘 시스템형, 그리고 기능성에 디자인을 강화한 데코형 등으로 분류된다. 품질과 디자인에 따라 가격도 20만 원에서 100만 원대까지 다양하다. 시장 판매율은 보급형 60%, 시스템형 30%, 데코형 10%의 순.

    우리나라에선 아직 후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아 많은 가정에 그저 형식적으로 달려 있을 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후드의 기능은 조리할 때 나오는 음식 냄새, 가스가 불완전 연소되면서 나오는 일산화탄소 등을 빨아들여 밖으로 배출하는 것. 이 밖에 분진과 습기를 제거하는 기능도 있는데, 후드가 이런 기능을 제대로 해내려면 무엇보다 필터가 온전해야 한다.

    개발 다원화 정책

    필터에는 천연섬유필터와 금속필터 두 종류가 있는데, 섬유필터는 3개월마다 갈아줘야 하고, 금속필터는 3개월마다 중성세제로 닦아주면 된다. 천연섬유필터는 수명이 다하면 검붉은 색으로 변해 교환시기를 쉽게 알 수 있고 특수처리가 돼 있어 불이 붙을 염려가 작다. 하지만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 섬유필터에는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것도 있는데, 이 필터는 제때 갈아주지 않으면 발암물질이 나오고, 특수처리가 안 돼 있어 불이 붙을 위험이 있다.

    “많은 주부가 후드 필터를 갈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한번 설치해 놓으면 영구적인 것으로 알고 요리 할 때면 습관적으로 트는데, 필터가 오래된 경우라면 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리가 나니까 해로운 공기도 빠져나가고 있겠지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많은 가정의 후드가 이런 상태일 겁니다.”

    이사장은 주부들이 후드의 필터만 제 때 갈아줘도 값비싼 공기 청정기를 들여놓은 등 집안 공기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어질 거라고 말한다.

    후드는 소리가 작고, 냄새를 잘 빨아들이며 디자인이 아름다워야 한다. 세계 후드 시장에서는 기술은 독일, 품질은 일본, 디자인은 이탈리아를 각각 으뜸으로 친다. 하츠는 이들의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제품개발 다원화 정책을 펴고 있다. 즉 기술개발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디자인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팀, 그리고 품질개발과 성능연구는 산학연구기관과 자체 개발팀에 맡겨 전문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하츠는 99년 5월 호주와 첫 수출계약을 맺었다(당시는 ‘한강상사’). 자국에 후드 생산공장이 없는 호주는 그때까지 수입해 쓰던 이탈리아 회사 제품 대신 ‘쿠치나’를 선택했다. 그 이탈리아 회사는 초창기 한강상사에 후드를 수출하던 곳이었다. 10년 만에 수입회사를 뛰어넘은 것이다. 하츠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후드산업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

    이수문 사장이 후드와 인연을 맺은 것은 75년 (주)한샘에 입사해 그 무렵 주택 건설 붐이 일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로 싱크대를 팔러 갔을 때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싱크대를 설치할 때 다른 부엌 살림이 한꺼번에 들어가도록 돼 있었어요. 그래서 싱크대를 제외한 냉장고, 식기세척기, 가스오븐레인지, 레인지 후드 등은 모두 다른 나라 제품을 사서 넣어줬는데, 바이어들이 다른 제품들은 모두 메이커만 보고 좋다고 하는데 유독 후드만은 자세한 데이터를 요구했어요. 그래서 독일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에서 만든 후드들을 하나하나 조사해보니 의외로 구조가 간단하더군요.”

    그는 한샘에서 10년을 근무한 후 현대종합목재산업으로 옮겨 3년간 회사생활을 더 한 뒤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눈여겨 봐 만만하게 생각하던 후드로 승부를 걸고 싶었다.

    “원천 기술만 있으면 제조 비용도 많이 들지 않는데다, 당시 이 분야 업체들이 가격경쟁을 벌이느라 기술개발에 소홀했어요. 조금만 노력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죠.”

    1988년 그는 저축해둔 6000만 원과 한샘 사장에게 빌린 1억4000만 원 등 2억 원으로 한강상사를 설립, 먼저 공장 지을 땅 2000평을 샀다. 땅을 사고 나니 자본금이 바닥났다. 그래서 땅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대출을 받아 공장을 지었다. 공장을 짓고 나서 공장 설비는 모두 빌려서 들여놨다. 이때 그는 공장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 보쉬사에서 냉장고 식기세척기 오븐 후드 등을 수입해 팔았다. 공장은 92년부터 가동됐다. 이사장은 그 인연으로 지금도 독일 미국 프랑스 등에서 커피메이커 청소기 조리기구 등 소형 가전제품을 수입해 팔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연 80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당시 수입해온 후드는 국산 제품보다 가격이 10배 정도 비쌌다. 디자인도 국내 제품과는 전혀 다른 서랍 식으로, 몸체를 빼면 작동되고 넣으면 꺼지는 식이었다. 디자인도 특이하고 성능도 좋다보니 값은 비싸도 많이 팔려 나갔다.

    그렇게 1년쯤 반응을 지켜본 후 시장성이 있다는 게 확인되자, 이사장은 보쉬측에 “우리 사회에선 외국 물건을 수입해 파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제품들은 계속 수입하되 후드 정도는 우리가 만들어야겠으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들은 도면도 주고 부품업체도 소개해주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직원들이 현지공장에 가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처음엔 부품은 모두 수입하고 커버만 만들어 씌워서 팔았다. 이렇게 해서 90년 5월 자체브랜드 ‘쿠치나’를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할 순 없었다. 부품을 모두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부품회사가 언제 부품 값을 올릴지 불안했고, 그러다 납기일을 못 맞추면 공장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핵심 부품부터 하루 빨리 국산화하기로 했다.

    이사장은 부품을 들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찾아갔다. 그는 이곳의 열유체공학연구소와 18개월 동안 함께 연구한 끝에 소음을 최소화하고 거의 완벽한 흡입력을 갖춘 팬 제작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다른 부품도 차례로 국산화했다.

    제품을 완전 국산화하면서 가격을 30% 정도 낮출 수 있었다. 부품 개발에 속도가 붙으면서 후드 기술을 선도하던 일본보다 먼저 모터 두 개짜리 후드를 개발, 일본 업체들을 놀라게 했다. 요즘 하츠는 일본 오사카에 짓고 있는 31층 빌딩에 들어갈 후드 개발을 의뢰받아 연구중이다. 4월 말경 이 계약이 성사되면 연간 1만 여 개(15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게 된다.

    순수 자체 기술로 만든 ‘쿠치나’는 기존 국내 후드와는 여러 면에서 차별화된 것이다. 그 전까지 나온 후드는 화장실에 설치되는 환풍기에 커버를 씌운 수준이어서 날개도 5∼6개밖에 안 되는 데 비해 쿠치나는 날개가 30여 개나 달린 데다 모터도 축을 고정하고 몸통이 돌게 했다. 그러자 흡입력은 강해지고 소음은 줄어들었다. 제품에 균형이 잡히니까 수명도 길어졌다.

    ‘명성황후’ 탄생 산파 노릇

    이사장은 “좋은 제품을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날아가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그간 하츠는 제품을 개발하기 전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나라의 제품을 수입 판매해 시장의 반응을 본 뒤 해볼 만하다 싶으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사장은 “삶은 가장 단순한 눈으로 바라볼 때 길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가 그런 눈을 갖게 된 것은 연극 덕분이라고 한다.

    이사장은 서울 경기중학에 입학하면서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남학교 연극반에선 여자 배역을 찾는 게 늘 골칫거리다. 그러던 판에 갓 입학한 곱상한 얼굴의(지금 얼굴에선 상상이 안 가겠지만 본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화동(花童)으로 활동했을 만큼 당시엔 미모가 출중했다”고 말한다) 이수문이 눈에 띄자 연극반 선배들은 ‘바로 저 놈이다’며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연극이 뭔지도 모르고 선배들 손에 끌려온 그는 중학교 시절 내내 여자역을 맡아 여장을 하고 무대에 섰다.

    그렇게 연극과 맺은 인연은 경기고, 서울대 건축과로 이어지는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을 거쳐 지금까지 40년 동안 이어졌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이사장과 한샘 조창걸 회장이 어느 상가(喪家)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다 싹을 틔운 작품이다.

    “조회장이 제가 연극판에 몸담고 있는 걸 알고 ‘도대체 작품다운 작품 하나 못 만들면서 무슨 연극을 한다고 다니느냐’며 핀잔을 주더군요. 그래서 ‘돈이 없어서 못 만들지, 돈만 있으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다’고 했더니 ‘그럼 한번 해 볼테야?’ 하고 물어요. 그래서 ‘밀어만 주신다면 해보겠다’고 했어요.”

    조회장은 4억 원을 쾌척, ‘명성황후’ 제작을 위한 기초작업이 이뤄지게 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이수문 사장은 연출가 윤호진씨, 작가 이문열씨 등과 함께 한 달간 해외 견학을 다녀왔다. 90년대 초의 우리나라 상황이 100년 전 주변 열강에 휩싸였던 상황과 유사하다는 데 착안해 작품을 구상했다. 이문열씨가 대본을 만들었고, 운영위원장으로 공연기획에서부터 극단 살림살이까지 도맡았던 이사장이 제작비를 끌어모았다. 대연출가 윤호진씨가 마침내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학창시절에 딴짓을 많이 했다. 초등학교 때는 걸핏하면 학교를 빼먹고 다락방에 숨어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 단테의 ‘신곡’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삼국지’ 등을 읽었다. 중학교 때는 연극부에서, 고등학교 때는 연극부와 밴드부에서 활동했다. 밴드부에서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잠시도 심심한 걸 못 참아 끊임없이 흥밋거리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군대도 심심해서 갔다. 입영통지서를 받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군에 입대하겠다고 입영열차를 탄 것은 순전히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국가관을 갖게 됐고 군에 매력을 느껴 입대를 결심했다. 입대하는 친구들을 환송하러 수색의 한 군부대에 갔다가 ‘이거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입영열차에 올라탔다. 영장을 보여달라고 하기에 “잃어버렸다”며 사정했다. 머리통 몇 대 쥐어박히고 입대를 허락받아 당번병으로 배치됐다. 얼마후 이 생활도 따분해지자 69년 여름, 베트남전 파견을 자원했다.

    제대를 하고 복학한 그는 여전히 놀기를 좋아해 졸업할 무렵엔 학교 근처의 식당과 술집, 당구장에 깔린 외상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외상값을 갚기 위해 후배들을 데리고 건축대전에 응모했다. 운이 좋았는지 국무총리상을 받아 상금 50만 원으로 외상값을 모두 갚고, 학교 도서관에 책까지 사서 기증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졸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창시절에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남다른 집중력 덕분이다. 그러나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는 학창시절은 물론 지금까지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름에 걸맞게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그의 삶에서 유일한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런 중압감이 있었기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고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듯하다. 실패가 없었기에 이사장은 여느 중소기업과는 달리 은행에서 돈 빌리는데 어려움을 당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세상은 잘 되는 사람에게 투자하기 마련이다.

    이사장이 실패의 쓴맛을 보지 않은 것은 보루네오통상(72∼75년), 한샘(75∼85년), 현대종합목재산업(85년∼88년) 등 15년에 걸친 직장생활을 통해 생산공장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영업전략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 졸업 직후 법정관리 상태에 있던 보루네오통상에 들어가 배운 것은 오너와 중간관리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이뤄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시설을 갖출 때 충분한 시장조사와 유통망을 확보한 후 그에 맞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너가 너무 앞서가면 안 되고, 직원들보다 한 발쯤 앞서 나가되 중간관리자들이 오너의 뜻을 충분히 수용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하츠는 2003년 세계 10위를 목표로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사장은 5∼10년 후엔 후드의 시장성이 떨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따라서 후드 대신 주택 전체를 환기시키는 주택공조시스템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하츠는 지난해 말부터 연구소에 공조팀을 구성,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이사장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직원들이, 연극배우들이 그냥 연기가 좋아서 신들린 듯 연기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으면 한다. 그는 직원들의 논리적·조직적인 사고에 이런 정열이 보태지면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1년에 두세 차례씩 직원들에게 연극을 보여준다.

    ‘기술개발과 인재육성’이 중소기업이 살 길이라고 믿는 이사장은 아직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찾지 못한 게 가장 큰 고민이다. 그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회사에 대한 기여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55세가 되면 두말없이 일선에서 물러날 계획이다. 일을 접은 후 그는 연극 공연장의 멋진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