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스타 요리사’ 5인의 천태만상 요리인생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5-04-18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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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담동은 한국의 첨단요리들이 각축을 벌이는 곳이다. 청담동 요리사들은 외국에 나가서 아이템을 얻어온다. 그래서 이곳은 새로운 요리와 레스토랑이 많은 곳이다. 또 새로운 레스토랑이 많이 생기기도 하지만 없어지는 숫자도 많다. 청담동 요리사들은 외국으로 나가 요리를 배우지만 지방과 서울 강북 요리사들은 이곳에 와서 요리를 배워간다.
    21세기 국가 경쟁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경쟁력이라고 한다. 문화경쟁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국가를 ‘매력적인 국가’ ‘가서 살고 싶은 국가’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음식 문화는 이 문화경쟁력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분야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레스토랑과 요리사다. 그래서인지 최근 요리사가 등장하는 책과 방송 등이 부쩍 늘고 있다. 그들의 삶과 직업세계는 연예인 못지 않게 대중의 관심을 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요리사는 누구일까?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요리사가 됐을까. 또 그들이 빚어내는 요리인생의 빛깔은 어떤 것일까. 여기에 소개하는 ‘스타 요리사’는 ▲최고수 요리사 ▲해외유학파 ▲청담동 퓨전 요리사 ▲가능성 있는 젊은 요리사 등이다. 한식 요리는 그것 자체로 갈래가 너무 많고 양식, 중식, 일식과 같이 분류하기가 모호하기 때문에 배제했다. 특이한 점은 직업 요리사들이 대부분 남자였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여자들이 요리를 하는데 직업 요리사 세계에선 여자가 적은 이유는 지구력과 체력 때문이었다. 음식 하면 섬세함이 떠오르지만 직업 요리사 세계는 일차적으로 육체 노동이 필요했다. 가정요리와는 달리 많은 사람에게 요리를 내야 하는 레스토랑 요리사는 지구력과 체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서 여자가 희귀했다.

    ▶ 안효주 (44·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케’주방장)

    한번 밥알을 집으면 정확하게 16g. 한국 최고의 초밥왕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케 주방장 안효주씨 솜씨다. 그는 몇 달 전 한 방송사에서 실험했는데 10번을 집은 밥알이 모두 16g이었다. 그가 잡은 초밥에 들어있는 밥알은 정확히 350개. 오차는 ±3개밖에 안된다. 하지만 그는 350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체격이 크고 입이 큰 사람은 400개 정도를 집어준다. 키가 큰 외국인들은 450개. 여자들은 280개까지 낮춘다.

    그의 전직은 요리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권투선수였다. 전북 남원농고 1학년 시절 그는 권투를 시작했다. 고교시절 전국학생선수권대회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하여 준우승한 경력이 있었다. 고교를 졸업한 후 1978년 권투를 계속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먹고 잘 데가 없어 고향 선배 소개로 찾아간 곳이 명동에 있는 한 일식집. 접시닦이였다. 이때만 해도 그는 요리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숙식을 해결해줄 곳이 아쉬웠던 것이다.



    아무리 주방 헤드렛일이라 하더라도 배우는 바가 있었다. 더구나 그는 학교에 다닐때 라면 하나를 먹어도 그냥 끓이지 않고 우유로 끓여 먹는 등 요리에 기본적인 자질이 있었다. 숙식을 해결해준 일식당 주방에서 그는 일식 요리의 기본 과정을 익혔다. 운명이 그를 요리사로 이끌었을까. 권투선수로는 그의 인생이 풀리지 않았다. 변변한 성적도 거두지 못했고, 프로 데뷔를 위해 데뷔전 날짜까지 잡아놓고 독감에 걸려 프로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권투선수를 포기하고 해병대에 자원해서 군복무를 마쳤다. 회 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니 해병대에서도 지원만 했다면, 사령관이나 장성의 전속 조리사로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에서 정신력을 키워보자는 결심 아래 전투병으로 근무했다.

    제대하고 나오니, 어느덧 27세. 권투를 다시 할 수도 없고, 직업 경력은 일식집 주방 경력밖에 없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요리학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딴 뒤 서울 강남의 일식집 ‘일번관’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그는 스승 이보경씨(58)를 만났다. 이보경씨는 성실하고 정신력이 강한 안효주씨를 기특하게 여기고 자신의 기술과 조리 정신을 전수했다. 스승이 강조한 것은 첫째 위생이었다. 도마와 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생선은 대가리를 자른 뒤에는 절대로 물을 묻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때 배웠다.

    또 스승은 안되면 될 때까지 해야 한다는 정신력을 강조했다. 가령 무를 깎아도 신문지 위에 두면 활자가 보일 정도로 얇게 깎는 일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안되는 일이었다. 스승은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재주가 없는 사람도 수십번 수백번 하다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프로라는 주문이었다. 또 일식은 머리카락도 스치면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칼을 사용한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다친다. 이런 부상은 오직 집중해서 정신력을 쏟아야만 극복할 수 있다.

    스승은 그를 신라호텔에 추천까지 해주었다. 안씨는 85년부터 신라호텔에서 근무했다. 일본 요리는 초밥·생선회·튀김·조림·회석요리(會席料理)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신라호텔에 들어온 뒤 안씨는 초밥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이후 그는 일본 도쿄와 북해도의 최고 초밥집에 매년 연수를 다니며 실력을 다졌다. 이렇게 다진 실력으로 98년에는 ‘이것이 일본 요리다’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일본 요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기본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일식 요리사의 가장 큰 차이는 기본기라고 말했다. 기본기가 제대로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처음에는 별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격차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는 퓨전 요리에 비판적이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다른 요소를 섞는다고 성공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요리책에서도 정통과 기본을 강조했다. 그가 쓴 책은 여러 요리학교에서 교재로 쓰고 있다.

    요리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늦깍이 공부를 계속했다. 97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보건전문대학, 초당대 조리과학과에서 수학했고 올해부터는 경기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98년에는, 요리사 세계에서는 최고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능장 시험에도 합격했다. 이렇게 요리에 미쳐 살다보니, 그는 수족관 관상어를 보더라도, 저 물고기로 회를 뜨면 몇인분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가 근무하는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케 초밥 카운터는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닐 정도의 최고 VIP들이 출입하는 식당이다. 이 고객들은 초밥 카운터에 앉으면 안효주 차장을 찾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고등어를 좋아하는 사람, 두껍게 길게 썬 생선회를 좋아하는 사람, 얇게 썬 회를 좋아하는 사람 등 고객의 기호를 그가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도로 주문하지 않아도 그는 손님을 알아보고 척척 내놓는다.

    이렇게 초밥 카운터에서 손님을 상대하려면 초밥 기술 뿐만 아니라 접대술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신라호텔 아리아케 주방 직원 28명 가운데 초밥 카운터에 서는 직원은 6명 뿐이다. 까다로운 접대술 가운데 첫째는 좋은 인상이다. 다음은 센스다. 손님의 대화에 적절하게 개입해야 하기 때문에 입이 너무 무거워도, 가벼워도 안된다. 또 시사 문제에 밝아야 한다. 특히 상대하는 고객이 모두 한국의 최고 VIP기 때문에 한 손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손님에게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일본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한국 완결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안효주씨. 그는 누가 뭐라해도 한국 최고의 초밥 요리사다.

    다음은 특급호텔과 해외 유학을 동시에 경험한 요리사다. 최고급 승용차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키네마 극장 건너편 바(Bar)거리. 이곳에는 매일 저녁 6시 열명 안팎의 손님만을 위해 문을 여는 간판 없는 식당이 있다. 프랑스 유명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 출신 서승호씨(35)가 운영하는 정통 프랑스 식당 ‘라미띠에’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탁자 서너개를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손님을 맞는데, 예약으로만 손님을 받는다. 이 식당의 요리사는 서씨를 포함하여 모두 5명. 따로 웨이터를 두지 않고 요리사들이 홀에서 서빙도 하는데, 요리사 1명이 1.6명꼴로 손님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음식을 대하는 손님에게는 그가 직접 음식 재료와 조리 과정을 설명한다.

    이곳에는, 대여섯명이 함께 와서 한 사람이 주문하면 줄줄이 똑같은 것을 시키는 우리네 식당문화는 발을 붙일 수가 없다. 대신 서로의 기호에 맞는 음식을 최대한 편안하게 먹으며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식사법을 배울 수 있다. 식사 시간은 짧으면 1시간30분에서 길게는 4시간까지 이른다. 이 식사 시간은 서승호씨를 비롯한 요리사들이 조절한다.

    ‘라미띠에’의 요리는 그야말로 ‘느린 음식(slow food)’다. 이는 프랑스의 레스토랑 문화를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프랑스 음식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먹는 사람이 여유가 있고 ▲맛있게 음식을 먹고 ▲웨이터도 음식을 빨리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레스토랑은 지친 일상에서 회복하고 삶의 에너지를 찾는 공간이다. 그들은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일한다. 적어도 저녁만큼은 그렇게 먹는다. 이 식당의 음식이 느린 만큼 서씨도 느리다. 그는 출퇴근은 물론이고 음식재료를 구입하러 백화점에 갈 때도 자전거만 탄다. 자동차는 아예 없다. 1994년 조선호텔에서 일할 때부터 그랬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간판도 없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그는 어떻게 요리사가 되었을까? 그는 한마디로 운명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요리에 끌려서 요리 관련 서적을 많이 보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리사가 되지 못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하지만 요리사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퇴근 뒤 요리학원에 다녔다. 그러더니 결국 1992년 1년 과정인 경주 호텔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5년 당시에도 이 학교에 진학하려 했는데, 부모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직장도 다니고 군복무도 마친 뒤인 7년 만에 결국 자신이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현재는 요리사를 보는 인식이 많이 나아졌으나, 15년 전 당시만 해도 그리 좋지 않았다.

    경주호텔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1992년 겨울, 조선호텔에 입사했다. 이후 조선호텔 양식당 조리사로 근무하던 그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공부하기 위해 1996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비용은 5년간 호텔에서 일하며 저축한 것을 모두 털었다.

    그가 들어간 학교는 외국인을 위한 프랑스 전통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 이 학교에는 ‘바즈(기본 과정)’과 엥떼르미디에(중급), 슈페리에(고급) 과정이 있다. 바즈 과정은 기초와 가정요리를, 엥떼르미디에 과정은 가정요리와 지방요리, 슈페리에 과정은 레스토랑 음식을 가르친다. 그는 이 학교에서 엥떼르미디에 과정까지 마치고 IMF가 터지는 바람에 귀국했다.

    5년간의 요리사 생활 뒤 프랑스로 간 그는 “한국에서 보낸 5년간의 요리사 생활보다 파리에서 하루 동안 배운 것이 나았다”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어깨 너머로 배우느라 몇 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당연한 것으로 친다. 그만큼 선배들이 요리 기술을 공개하지 않고 폐쇄적으로 유지한다. 한국에서는 경력이 요리사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통한다. 시간이 지나야 실력이 붙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시키지 않는 프랑스

    그러나 프랑스는 누구나 물어오면 가르쳐주기 때문에,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노력했느냐가 관건이었다. 프랑스의 교육방식은 교육생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해할 때까지 시키는 것이다. 식재료를 예로 들면 ‘아스파라가스’라는 채소를 한국에서는 그냥 껍질을 까서 삶으라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자라는 곳, 생장 조건, 영양학적 특성, 다른 음식과의 조화, 화이트 아스파라가스와 그린 아스파라가스의 차이 등을 조목조목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채소를 삶을 때 물 1ℓ에 소금 30g을 넣으라고 하면서도, 조리 시간을 줄이고, 섬유질에 탄력을 주고, 색의 선명도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떤 음식과 어떤 소스가 어울린다는 설명은 기본이다.

    또 한국과 다른 점은 아무리 신참 요리사라 할지라도 설거지를 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설거지만 따로 하는 사람이 있고, 요리사에게는 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 요리사는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이 일을 소화하기도 벅차다는 인식이 상식으로 통한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그렇듯 서씨도 2년간의 파리 유학을 힘겹게 보냈다. 경제적인 빈곤과 육체적인 피로 등 모든 것이 어려웠다. 계속 서서 일하기 때문에 무릎 아래에 걷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왔는데, 병원이 모두 예약제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던 적도 많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는 다시 조선호텔에 들어갔다. 이후 계속해서 조선호텔의 ‘나인스 게이트 키친’에서 근무하다 1999년 3월 그만두고, 1999년 4월4일 ‘라미띠에’를 개업했다. 개업 뒤 처음 4개월 동안은 손님이 하나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손님 한 명이 어떻게 찾아왔고, 그 손님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나중에는 이 식당이 문 닫는 것을 막기 위해, 처음 찾아왔던 손님들이 일부러 와서 자리를 지켰다. 이 손님들은 지금도 “예약이 펑크나면 언제든지 나에게 전화해라. 가서 먹어주겠다”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서씨는 라미띠에에서 단순히 음식만 팔지 않고 프랑스 음식문화를 퍼뜨리기 위해 일반인을 상대로 프랑스 요리 강좌를 하고 있다. 대상인원은 그야말로 소수다. 일주일에 4번 정도 하는데 한번 수업할 때 3명을 가르친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에서 배운 요리를 쉽게 축약해서 6개월 코스로 가르친다. 스탁(국물), 수프, 전채, 생선, 육류, 가금류 손질, 뼈, 디저트 등 순서대로 하는데,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습을 같이 한다. 본인이 혼자 해도 할 수 있게끔 가르치기 위해서다. 수업 인원을 3명으로 한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은 한국의 첨단요리들이 각축을 벌이는 곳이다. 청담동 요리사들은 외국에 나가서 아이템을 얻어온다. 그래서 청담동은 새로운 요리와 창작 요리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새로운 레스토랑이 많이 생기기도 하지만 없어지는 숫자도 그만큼 많다. 지방 요리사나 서울 강북 요리사들은 청담동으로 와서 새로운 요리를 배워간다.

    청담동에 있는 레스토랑 주인들은 생계형이 아니다. 식당 주인이 취미생활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위기로 식당을 꾸미고 멋진 음식을 파는 경우가 많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가장 앞선 패션거리에는 디자이너와 연예인이 모인다. 또 그 거리를 끼고 있는 골목에는 최고의 음식점들이 모인다. 이 음식점들도 패션처럼 유행을 타고 명멸한다. 한국의 청담동은 바로 그런 곳이다.

    청담동에 퓨전 레스토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하루에’라는 카페가 시초였는데, 미국 뉴욕에서 오래 살다 온 주인이 단골로 드나들던 뉴욕의 카페와 똑같은 형태로 꾸몄다는 것이다. 그 뒤 한식과 양식을 접목한 퓨전 레스토랑 ‘궁’이 생겼고, 중국식과 이탈리아식을 섞은 ‘시안’도 문을 열었다. 이후 청담동에는 퓨전레스토랑이 붐을 이루었다.

    1997년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외식산업이 큰 타격을 입던 시기다. 그러나 청담동은 IMF 바람을 전혀 타지 않고 호황을 누렸다. 이유는 이곳의 고객이 IMF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국의 최고 부유층이었기 때문이다. 청담동 레스토랑의 고객들은 주로 연예인, 정치인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가 외제자동차를 타고 식당을 찾는다. 걸어서 식당을 찾는 손님은 10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 한다.

    한국의 청담동에 퓨전 요리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일본계 미국인 토드 니시모토다. 그는 98년 1월 청담동의 ‘시안’ 주방에 들어와 한국에 퓨전 요리라는 새로운 장을 펼쳤다. 현재 시안은 서울에만 분점을 네 곳 두고 있다.

    김대원씨는 청담동의 퓨전 중식당 ‘마리’의 주방장이다. 한국의 중화요리를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화교다. 1997년 이전만 해도 화교들은 국내의 까다로운 규제 때문에 중화요리집 이외에는 마땅히 할 사업이 없었다. 또 귀화하지 않는 한 취직이 잘 안 되니, 요리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화교 어린이들은, 아이들이 흙과 돌멩이를 가지고 놀듯이 녹말가루와 튀김가루를 주무르며 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중화요리계에서 요리사를 하기는 쉽지 않다. 특급 호텔에서도 화교들의 텃세 때문에 한국인은 보조요리사 노릇을 하기도 힘들다. 지금도 주한 중국대사관과 주한 대만대표부 직원들은 회식을 할 때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집만 애용한다.

    한국 사람인 김대원씨가 운영하는 중식당 마리는 화교들의 중화요리와는 다른, 한국화한 중화요리다. 말하자면 중식 퓨전요리의 시초다. 그는 이 식당에서 이탈리아요리인 파스타도 쓰고 생크림 요리도 만든다. 물론 한국의 화교들이 만드는 중화요리도 중국 본토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 대륙에는 북경 요리, 사천요리, 산동 요리, 광동 요리 등 지역별로 수많은 요리가 있다. 지금부터 100여년 전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한 한국의 화교들은 90%이상이 산동성 출신이다.

    이들은 산동요리를 한국에 수입했고, 이것이 100여년 동안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한 것이 한국 화교들의 중화요리다. 말하자면 한국화한 산동요리가 한국의 중화요리다. 그런데 중식당 마리의 김대원씨가 만드는 중화요리는 이것과는 또 다른,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화한 중국요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화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기름이다. 화교들의 중화요리집에서는 보통 식용유를 쓰는데 김대원씨는 파기름을 쓴다. 파기름은 식용유를 약한 불로 가열한 뒤 양파와 대파의 흰 부분을 잘라 넣고 양파와 대파가 검게 변할 때까지 3∼4시간 튀긴다. 이렇게 만든 파기름은 참기름처럼 순하고 담백하다. 또 양파와 파 향기가 배, 느끼한 맛을 싫어하는 한국인 입맛에 맞다.

    김대원씨가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것은 20살 되던 해인 1985년이다. 식당 홀에서 일하는 웨이터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한 그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큰 중화요리집인 동보성을 찾아가서 웨이터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대원씨는 웨이터로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말을 약간 더듬었던 것이다. 그때 동보성 지배인은 김대원씨에게 “자네는 말을 더듬어 홀에서는 힘드니, 주방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 낫다”며 취업을 거절했다.

    말을 더듬어 요리사가 되다

    요리사가 된 것은 이 거절이 계기였다. 그 길로 그는 서울로 올라와 논현동에 있는 중식당 ‘팬다’에 들어갔다. 팬다는 한국 최초로, 대로변에 독자적인 건물과 주차장을 갖춘 기업형 중식당(좌석수 120석)이었다. 그 뒤 그는 남산에 있는 유명한 중식당 ‘아리산’에 들어가 중국요리의 대가 이면희 선생을 만난다.

    이면희 선생을 통해 그는 다양하고 화려한 중국요리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일 욕심이 많았던 그는 한 식당에서 요리 기술을 다 배우고 나면 다시 다른 식당으로 옮기를 여러 차례 했다.

    화교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요리계에서 그는 전혀 차별을 받지 않는 한국인 요리사였다. 이는 한국인임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는 노력파였기 때문이다. 이런 열성과 성실 탓에 화교들은 그를 견제하지 않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지금도 프라이팬을 들면 처음 만지는 것처럼 설렌다고 한다. 요리사는 그에게 천직인 모양이다.

    현재 청담동에는 ‘마리’ 이외에도 중식당이 많다. 이 중식당은 신라호텔파와 지홍초파로 크게 나뉜다. 신라호텔파는 신라호텔에서 독립해 나온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이고, 지홍초파는 화교 요리사인 지홍초씨 문하에서 배운 요리사들이 차린 식당이다. 김대원씨의 ‘마리’는 지홍초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번성한 문화만큼이나 음식 또한 역사가 길고 내용도 다양하다.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별로 나폴리 요리, 베네치아요리, 에밀리 아로마냐 요리, 토스카나 요리, 리구아나 요리 등으로 구분하지만 공통적인 특징이 몇가지 있다.

    첫째 토마토소스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신대륙 발견 뒤 이탈리아에 들어온 토마토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재배되었으며 과육이 두껍고 신맛과 수분이 비교적 적어 좋은 요리재료가 되었다. 둘째는 올리브유다. 올리브유는 드레싱 뿐만 아니라 마리네이드나 볶음 등에 부드러운 맛을 더해주는 조미료 구실을 한다. 셋째는 와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잘 먹기로 유명하다. 먹는 것 자체를 즐기지만 그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아침, 점심, 저녁을 가족 모두가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다.

    ‘일비노로소’(서울 남산),‘알리오올리오’(수원), ‘안나비니’(서울 청담동) 같은 알아주는 이탈리안 전문 레스토랑을 거친 이탈리아 요리사 김인수씨는 1남5녀로 딸이 많은 집안에서 자랐다. 딸 많은 집 귀한 아들이라 부모님은 그를 부엌 근처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라볶이를 해먹으며 요리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그는 장안대 식품영양과에 진학했다. 물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요리사로 만들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가 엄청났지만 그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몇군데 이탈리아식당을 돌며 이탈리아 요리 수업을 시작했다. 사실 학교에서 배운 요리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요리실력은 거의 실무에서 배운 것이었다.

    가장 먼저 설거지를 배웠고, 다음에 접시와 채소 다듬기를 공부했다. 그 다음은 냉장고와 냉동고 관리였다. 식재료 관리, 즉 재료를 어떻게 보관해야 상하지 않고, 끓인 수프는 어떻게 식히고, 냉장고 청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것이다. 이것을 터득한 뒤에야 요리를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요리는 샐러드 같은 차가운 음식부터 시작해, 스테이크나 스파게티 같은 뜨거운 음식 순으로 배워나갔다. 이렇게 시작한 요리사 생활이 지금까지 만 6년. 최근에 그는 다시 설거지로 돌아왔다. 후배 요리사들이 만든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똑같이 할 수 있는지 뒤치다꺼리를 해주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김인수씨는 주방장치고는 상당히 젊은 편이다. 머리카락도 노르스름하게 염색한 그는 젊은이다운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우선 그는 식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 가령 정통 이탈리아 스파게티는 해물이나 채소 스파게티에 치즈를 넣지 않는다. 그러나 김인수씨는 치즈를 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손님들이 좋아하고 맛만 좋으면 얼마든지 응용하고 변화를 추구한다.

    삶의 방식도 발랄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즐기고 멋을 아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나 여가를 음악이나 스포츠 또는 여행을 하는데 바친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얻기 위해 다양한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한다. 또 아침에는 영어학원을 다닌다.

    그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요리사는 창조적인 직업이다. 자기를 계속 개발하지 않으면 죽어라 일만 하다 도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여행 등으로 밑천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다. 틈만 나면 해외의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맛도 보고, 시장과 소비자들의 기호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후배 요리사에게 강조하는 주문사항으로도 연결된다. 그는 만들 때 아니라고 생각되는 음식은 아예 내보내지도 말라고 주문한다.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5분 정도 늦게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만들자는 주의다. 둘째는 재료를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는 젊은이다운 주문인데, 즐겁게 일하자는 주문이다.

    “인생을 즐기듯이 일도 즐기자, 좋은 생각을 가진 요리사한테는 좋은 음식이 나온다”

    남경표씨는 여느 요리사와는 조금 성장과정이 다르다. 한국에서 요리사들은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씨는 아버지가 의사였고, 집안도 넉넉한 편이었다. 더구나 여동생만 둘을 둔 장남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야구배트로 때려가며 요리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의상실을 경영하던 어머니는 “앞으로는 기술인이 대접받는 시대가 온다”며 요리사가 되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뒤를 밀어주었다.

    1970년생인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성적이었다. 요리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고2 때 외식을 하러 서울 여의도에 있는 일식집에 갔는데 주방장의 하얀 가운과 모자가 너무 눈부시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89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 찾아간 곳은 종로 낙원동에 있던 한정혜 요리학원. 그런데 그는 운좋게 한정혜 원장에게 직접 요리를 배울 수 있었다. 일식 담당 선생이 출산 휴가를 갔던 것이다.

    89년 12월에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딴 그는 첫 직장으로 서울 명동에서 30년 넘게 영업을 하고 있던 일식집 ‘화원’에 들어갔다. 그가 주방에서 처음 한 일은 하수도 파는 것이었다. 어느 음식점이나 마찬가지지만 주방 하수구는 잘 막힌다. 생선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일식집 하수도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생선쓰레기가 썩는 여름에는 생각하기도 싫은 고역이었다. 또 그가 맡은 일은 재료가 들어오면 냉장고나 냉동고로 옮기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식집 주방 규율은 다른 음식점보다 훨씬 강하다. 양식이나 중식은 미생물이 조금 있어도 튀기거나 구우면 별 탈이 없다. 그러나 일식은 재료를 날로 먹는 요리가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바로 문제가 생긴다. 특히 복어는 잘못 다룰 경우 목숨과 직결된다. 일식 주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독과 청결이다. 그가 처음 들어간 일식당 ‘화원’에서는 신참이 들어오면 눈물이 쑥 빠지도록 위생 관념을 가르쳤다.

    다음으로 그가 배운 것은 재료를 보는 안목이다. 일식에서 맛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조미료도, 조리기술도 아니라 재료의 질이다. 배추를 예로 들면 경기도, 전라도 배추가 많지만, 강원도 고랭지에서 자란 배추를 써야 한다. 생선도 흔히 광어라고 부르는 넙치의 경우, 서해산, 제주도산 등이 많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남해산이다. 남해산 중에서도 운반 과정에 밑에 깔린 생선인지, 중간에 깔린 생선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산 채로 수족관에 넣어오는 생선도 활동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려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 오래 시달린 생선은, 비록 살아 있어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살 맛이 떨어진다.

    그는 명동 ‘화원’에서 일할 무렵 생선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새벽부터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일식당 주방에서는 재료의 질과 단가를 맞추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 태풍이라도 불면 재료 값이 크게 올라 낭패를 겪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까다롭고 규율이 엄격했기 때문에 남씨가 ‘화원’에서 근무하던 5년 동안 주방 직원이 무려 36명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3년 6개월간 어렵고 힘든 생활을 참고 견디던 남경표씨는 1993년 8월 여름 휴가 때 도쿄 여행을 떠난다. 일식 요리에 어느 정도 이골이 났고,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본고장 일식 요리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열흘간 체류하면서 완전히 일본 요리에 매료된다. 그는 귀국 뒤 바로 일본 유학 준비를 시작해, 6개월 뒤인 94년 3월 도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는 일식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식집 주방에서 그는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 철저한 관념을 배웠다.

    일본어학교 과정이 끝난 뒤 1995년 4월 그는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도쿄 요요기에 있는 핫토리 조리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규율이 매우 엄한 학교다. 교문 앞에서부터 학생주임 선생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손톱과 복장을 검사했다. 여학생들은 귀고리, 반지 등 장신구를 몸에 지니지 못하게 했다. 당시 이 학교에서 외국인은 남씨 혼자였다.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는 빠듯한 수업을 끝내면, 바로 오후 5시∼10시까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일식당 주방으로 달려갔다. 급료를 받는 시간이 5시간이었지만, 그는 이를 따지지 않았다. 돈보다는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식당으로 달려가서 칼을 가는 등 일을 배웠다. 이렇게 그는 하루 평균 3∼4시간을 무임으로 일했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또 학교 숙제를 하고, 쉬는 날은 서점과 도서관을 찾아 요리 관련 책을 보았다.

    핫토리 조리학교는 1년 과정이다. 졸업하기 두 달 전 그는 96년 4월에 발표한 졸업 작품전 주제를 받았다. 제목은 ‘봄 빛’이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 그는 호박으로 일본 사무라이 투구를 조각했다. 이것을 가운데 놓고 이세에비라고 부르는 일본 바닷가재를 쪄서 살을 다져 만든 초밥을 두 개 놓고 자연산 도미도 쪄서 놓았다. 여기에 푸른 완두콩 소스와 진한 밤색 성게알, 매실 소스로 색깔을 내 장식했다.

    그가 만든 작품은 4월 졸업작품전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이 학교는 역사가 100년이나 되는데 외국인이 일식분야에서 1등상을 탄 것은 유례가 없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그를 인터뷰한 뒤 “학교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현재 남씨가 일하고 있는 청담동의 일식집 ‘시즌즈’는 99년 9월에 문을 열었다. 남경표씨는 전형적인 신세대 요리사다. 그가 윗세대 일식 요리사와 다른 점은 자신의 기술을 공개한다는 것이다.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요리사 세계에서 기술을 공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주방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비법을 공개하고, 자신은 집에 들어가서 새로운 기술을 찾고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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