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요리 배우는 남자들

“30대, 화이트칼라, 취업보다 취미”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8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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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리=집안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대신 요리=취미생활, 요리=행복, 요리=일상이라고 외치는 남자가 많아졌다. 심지어 요리=예술이라며 장보기를 즐기는 남자도 나타났다.
    퇴근 무렵, 책을 사려는 직장인들로 붐비기 시작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각종 취미서적과 실용서적을 판매하는 코너에 다다르자 넓은 진열대를 가득 채운 요리 관련 책들이 눈에 띄었다. 30~40대로 보이는 남성 세 명이 책 고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40세 전후로 보이는 직장인이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 수첩을 들고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슬쩍 보자 ‘채소 손질하는 법. ①뿌리를 짧게 자르고…’ 꼼꼼하게 써 내려간 글씨가 빼곡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별로 경계하는 기색 없이 그가 대꾸했다. “봄철이라 채소 요리가 좋을 것 같아서요.” 컴퓨터 관련 엔지니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승구씨(남·39)는 가족들을 위해 매주 토요일 저녁식사를 직접 준비한다고 했다. 넉 달 정도 지나자 그 동안 갖고 있던 ‘밑천’이 다 떨어졌다고 말하는 이씨.

    “직장에서 하는 일의 성격이 워낙 딱딱하다 보니까 생활 전반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해서 요리에 취미를 붙였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니까 아내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대화를 마치고 그는 “기왕 온 김에 요리 책이나 몇 권 사야겠다”며 다시 진열대로 눈길을 돌렸다. 30세 가량의 또 다른 남성은 ‘101가지 국수 이야기’라고 쓰인 책을 한동안 훑어보더니 계산대로 향했다.

    꼼꼼하고 차분한 남자가 요리 배운다



    실용서적 코너를 맡고 있는 이경화 씨는 “퇴근 무렵이면 요리 책을 고르는 남자 서너 명은 항상 볼 수 있다. 대개 남자손님은 책 구경보다 직접 구입하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다. 컬러화보가 많은 요리 책이 일반서적에 비해 값이 좀 비싸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메모해 가는 남성도 종종 있다. 1,2년 전부터 의외로 중년남성 고객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20대 젊은 층이 아니면 남자들이 요리 책 코너를 찾아오거나 사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각,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강동종합사회복지관 조리 실습실에서 두 명의 남성이 여자들 틈에 끼어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조리대 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선생님, 프라이팬이 없습니다.” 또 다른 남성은 같은 조 여성 수강생에게 썰다 만 홍당무를 보여주며 “이거 너무 굵은 것 아닌가요? 서툴러서 가늘게 잘 안 되네요”라며 미안해했다. 프라이팬을 찾던 남성은 어느새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불꽃을 조절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한식 조리반 수업을 담당한 최숙희 강사는 “이 반에서 수업받고 있는 남성 수강생은 세 명이다. 여성 수강생에 비해 능숙하지 않지만 투박한 손길로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다. 웬만해선 수업도 빠지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경험한 걸로 보아 요리를 배우는 남성 수강생들은 대부분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다”고 귀띔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리반 수강인원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10배 가량 많지만, 자격증 취득여부 비율로 따지면 남성 합격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남성은 요리에 관심이 없는 한 일부러 강습을 받으러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성실히 배운다.”

    홍당무 썰기를 하던 김재혁씨(남·28)는 “맛있는 것 만들어 먹으려고 퇴근 후 술자리도 포기하고 요리학원에 등록했다”고 한다. 원래부터 요리가 취미였다는 김씨는 “기왕 먹는 거라면 맛있는 걸 먹자”주의다. 강습시간에 배운 요리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직접 만들어서 먹어볼 생각인 김씨.

    “오이나 홍당무를 모양내 써는 것도 어렵지만 요리에서 진짜 어려운 부분은 양념으로 간을 맞추는 기술인 것 같다.”

    감자 껍질을 벗기며 곁눈질로 ‘완자탕’과 ‘칠절판’ 요리 책을 열심히 훔쳐보던 남성은 자신을 고등학교 영어교사라고 소개했다.

    “아이들 특기적성교육에서 실습모작을 담당하게 됐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쳐볼까 하는 마음으로 한식 조리반에 등록했다. 아이들과 함께 요리 하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기왕이면 기능사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과목을 가르치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겠다 싶었다. 기능사자격증이 있으면 대학갈 때 특기생으로 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전혀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표면이 매끈하지 않아 오이 깎기가 몹시 어렵다”며 어설프게 칼질했다.

    복지관 이동섭 팀장에 따르면 한식을 비롯해 제과·제빵, 양식 등 요리강습을 신청하는 남성이 20대 후반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거의가 직장인인 이들은 취미 삼아 요리를 배우는 외에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니까’ 하는 생각으로 조리사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이다.

    “취미 삼아 요리를 배우러 오는 남성들은 30만원씩 하는 학원 수강료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사회복지관의 경우 월 수강료가 보통 3만~4만원 수준이다. 분기별로 1년에 4번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요리강습을 신청하는 남자들이 꾸준히 있다. 한 반에 최소 서너 명의 남성이 꼭 있다. 이들은 제과·제빵이나 한식조리반을 선호하는데 아마 대부분이 요리를 처음 배우는 터라 평소 잘 접해보지 않은 일식, 양식 요리는 어렵게 느끼는 것 같다.”

    몇 년 전 중견 탤런트 이정섭이 ‘요리 잘하는 남자 이정섭의 맛있는 우리 음식’이라는 제목으로 요리 책을 펴내 화제가 됐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그를 ‘특별한 남자’로 여겼다. ‘남자 탤런트’라는 점과 ‘자라는 동안 부엌 근처는 얼씬도 못했을 나이의 한국 남자’라는 것. 책 출간과 동시에 쏟아진 그의 인터뷰를 보고 이번에는 사람들이 무척 놀랐다.

    “저 원래 요리하는 것 좋아해요. 음식 솜씨 정말 좋아요.”

    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하며 ‘정말 특별한 남자’로 치부했다. 그가 이미 10년 넘게 식품회사를 운영해온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두번 째 요리 책을 펴낸 그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남자가 아니다. 요즘 요리 잘하는 남자, 요리 책을 펴내는 남자가 흔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수 이현우도 ‘싱글’을 위한 요리 책을 냈다.

    ‘요리=집안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대신 ‘요리=취미생활’ ‘요리=행복’ ‘요리=일상’이라고 외치는 남자가 많아졌다. 심지어 “요리는 예술”이라며 장보기를 즐기는 남자도 있다. 독신이자 자영업자인 고진운씨(남·41)는 혼자 산다고 해서 대충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자라고 해서 매 끼니를 밖에서 사먹지도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퇴근길에 장에 들러 정식 요리를 해먹는다. 기분 내키면 음악에 맞춰 춤까지 추며 요리를 한다.”

    그는 주로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 식품코너에서 장을 본다. “반짝세일 시간에 맞춰 가면 평소 값이 비싸 사지 못했던 싱싱한 물건을 싼값에 건질 수 있다. 그 희열은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하는 고씨. 그는 “요리는 음악이나 미술과 흡사한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요리를 하려고 앞치마를 두르는 남성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몇 가지 자료를 보면 과거에 비해 요리를 만드는 남자가 확실히 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국산업인력공단 통계에 따르면 조리사 자격증이 처음 시행된 75년부터 지난해까지 26년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딴 사람 수는 총 31만 7277명이다. 이 가운데 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17.1%다. 지난 10년간 통계를 보면 해마다 자격증을 취득한 남성 수가 꾸준히 증가해왔고, 증가율 역시 해마다 큰 폭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91년 1917명에 불과했던 자격증 취득 남성 수가 92년 2088명으로 증가했고, 93년 2389명, 95년 3168명, 97년 5588명, 99년 7508명에 이어 지난해는 7789명으로 증가했다. 90년대 초반 매해 100~300여 명이던 증가폭이 95년 이후부터 1000명을 넘어섰다.

    한편 지난해 양식·일식·중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현황을 살펴보면 남녀를 통틀어 양식 9736명, 일식 3101명, 중식 1251명 가운데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30%, 50%, 30%였다. 공단 관계자는 “IMF 이후 자격증을 따려는 남성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취미 삼아 조리를 하다 기왕이면 자격증에 도전하자는 남성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PC통신과 인터넷 포털사이트 요리동호회 역시 요리에 관심을 가진 남성회원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PC통신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회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천리안요리동호회 현재 회원 수는 3000명. 이 가운데 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0% 정도다. 동호회 시솝을 맡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김연경씨(여·38)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매월 1회 회원요리실습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요리는 배우고 싶지만 30만원씩 하는 학원수강료가 부담되고, 시간 맞춰 강의 들으러 가기 불편한 남자 직장인들이 동호회로 많이 몰린다. 회원들에게 정기요리실습대회에 참석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한 번에 1백 명 이상이 참가한다. 남성회원들이 더 열성이라 가족까지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며 “각자 직접 만든 요리를 한 가지씩 가지고 여러 명이 모여 품평회를 열거나 친목을 다지는 포틀럭 파티도 종종 연다”고 덧붙였다.

    천리안요리동호회는 회원에 유명호텔이나 대형 레스토랑 주방장 등 특급요리사가 많아 실습대회 때 이들이 강사로 참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연경 씨는 “동호회에 들면 수강료를 내지 않고도 일류 요리사한테 요리를 배울 기회가 생기는 거다. 어디 가서 특급호텔 주방장한테 무료 요리수업을 받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동호회 초창기 첫 실습 메뉴가 깐풍기였다. 회원 대부분이 생전 처음 배운 요리여서 집에 가서 제대로 할 때까지 열심히 연습한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회원 뿐만 아니라 실험 대상이 된 가족까지 아직도 깐풍기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동호회 게시판에는 “내가 실습으로 만든 요리는 우리집 강아지가 다 먹는다. 개 팔자 상팔자”라고 쓴 남성회원 글이 올라 있다.

    천리안 요리동호희

    인터넷 포털사이트 야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요리동호회와 관련해 12개 웹페이지와 100여개 사이트가 있다. ‘먹자’ ‘노른자’ ‘386요리동호회’를 비롯해 의사·약사·간호사를 회원으로 둔 병원요리동호회도 있다. 요리동호회 회원 수는 최소 수십 명에서 최대 수천 명에 이르며 회원 중 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10~50%다. 때문에 동호회 게시판에서 ‘나만의 요리비법, 맛있는 된장 끓이는 법’ ‘싱싱한 생선 고르는 요령’ 등 남성회원이 올린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5세인 학생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요리 중 하나인 된장찌개를 소개할게요. 나만의 노하우. 아주 걸쭉하게 재료를 듬뿍… 슈퍼에서 파는 된장말고 각자 집에서 담근 장을 쓰시구요. 시장 방앗간에 가면 맛있는 된장이 있답니다. 양파, 무, 대파 1뿌리, 마늘, 고추, 버섯, 감자… 아참, 무는 얇고 길게 썰어주세요. 두께 5㎜·길이 5㎝ 정도. 조개, 미더덕 준비하시구요, 물 양은 지름 20㎝ 냄비에 2/3 쯤 담고 된장은 큰 스푼으로 두 개 정도 넣으세요. 미더덕은 많이 넣어야 맛있어요. …쉽죠? 아마 웬만큼 요리하시는 분들이니까 저보다 더 맛있게 만드시겠죠? 그럼.(김형권)”

    요리하는 일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남자들이 요리에 입문하게 된 까닭은 다양하다. 백규선씨(삼양사 근무·38)는 “전라도 출신이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자랐다. 그래서 요리 하나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어느 날 깨달았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즉석두부 집에 들러 밥을 먹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콩비지를 싸주면서 조리법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기에 집에서 요리를 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손도 안 댔다. 그때 충격이 엄청 컸다. 오기가 생겨서 천리안요리동호회에 가입했다. 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동호회는 훨씬 다양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아내로부터 “음식에 소질 있나보다”는 말을 듣는다.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딸의 담임은 “아빠가 요리사냐”고 묻기도 했다. “주말마다 요리를 해줬더니 아이가 학교 가서 시시콜콜 자랑했던 모양이다. 아내는 동네 슈퍼에 음식을 나눠주며 남편이 만든 거라고 자랑하고 다닌다”며 백씨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진호씨(종로식품 근무·29)의 요리 입문 동기는 ‘애인의 핀잔이었다.

    “여자친구가 다니는 직장은 일이 많아 일요일에도 자주 출근했다. 애인이 있는 동료 가운데 여자친구를 위해 직접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 남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걸 보자 여자친구가 샘이 났는지 왜 다른 남자들처럼 안 하느냐고 서운해했다. 요리라곤 군대시절 취사병 한 것밖에 없는데 별수 있어야지…”

    건축설계사인 조한선씨(33)는 “아내 소원도 들어주고 인간관계도 넓힐 겸” 천리안요리동호회 회원이 됐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과선배 30명과 공동생활을 했다. 전공이 건축과라 작업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학년 때는 막내여서 30명 식사를 책임졌다. 밤새 작업하는 날은 대형 찜통 3개에 라면을 넣고 끓였다. 아무렇게나 만든 음식이지만 사람들이 정말 맛있게 먹어줬다. 그때 후배인 아내도 같이 생활했다. 결혼 후에 종종 왜 요즘은 그때처럼 요리 안 하냐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또 건축 관련 업계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어 이참에 사람들도 사귀자 싶었다.”

    막상 동호회에 가입하자 그의 아내는 “수많은 동호회 중에 왜 하필 여자가 득실거리는 요리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한다.

    “실습모임에서 배운 요리를 집에 와서 해주니까 요즘은 좋아한다. 그런데 식탁에 앉으면 이거 먹어도 괜찮을까 하면서 꼭 한번씩 놀린다. 합숙시절 내가 끓인 오뎅국을 먹고 전부 식중독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 나만 유일하게 멀쩡했다.”

    조씨가 아내를 위해 손수 만들어주었던 요리는 스파게티, 생선·육류 구이, 버섯요리, 깐소새우다. 그 가운데 스테이크를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조씨는 요리 후에 난장판이 된 부엌을 치우는 일이 제일 캄캄하다고 했다. 그는 “요리는 건축과 마찬가지다. 어떤 요리를 할지 정하고 재료는 뭘로 할까, 시장 봐서 손질하고 만들어 예쁜 그릇에 담는 것까지 과정이 건축 설계부터 완공까지 과정과 흡사하다”고 건축가답게 말했다.

    한편 요리를 배우고 싶지만 비싼 수강료가 부담스러운 남성에게 인기를 끄는 곳이 있다. 구청과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종합사회복지관이다. 사회교육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이곳 조리반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성출입금지구역’이었다. 그러나 요리를 배우려는 남성들 문의가 크게 늘자 그 동안 굳게 닫혔던 빗장을 속속 푸는 추세다. 나아가 직장인 남성들을 위해 낮 시간에만 있던 강습 프로그램을 저녁시간까지 확장하는 추세다.

    서울 종로구청이 운영하는 중부여성문화센터 관계자는 “여성 위주로 강습 프로그램을 운영해오다 3년 전 처음 남성을 위해 조리반을 신설했다. 조리기능사반 정원을 30명으로 제한했는데 빈 자리가 없을 만큼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강릉주문진여성회관은 그 동안 여성들만 이용할 수 있던 회관을 올해부터 남성에게 개방했다. 이곳에서 운영되는 강습 프로그램 수강생은 모두 300명. 그 가운데 남성 수강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14%다. 조정순 관장은 “30~40대 남성 3명이 현재 한식조리반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회관이 강릉 시내에서 좀 떨어진 시골에 있는데 서울과 달리 이곳에선 사람들이 뭔가를 배우고 싶어도 마땅히 찾아갈 곳이 없다. 그 때문에 남성 수강생을 처음 받은 건데 예상대로 반응이 좋다. 교육시설이 부족해 원하는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옥수종합사회복지관 원성은씨에 따르면 지난 4월 초 개강 이후 제과·제빵, 한·중·일·양식 조리 강습을 받는 수강생은 총 6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남자가 15명으로 전체 수강생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사회복지관협회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335개에 달하는 사회복지관이 있고, 서울에만 90개가 있다. 협회가 작성한 ‘2000년도 주요사업실적’ 통계를 보면 전체 사회복지관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조리, 양재, 제과·제빵 등의 기능교육에 참가한 사람만 14만 4327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요리하기를 즐기는 남성들이 늘면서 가족단위의 요리 관련 행사가 자주 열리는 것은 새로운 사회 풍경이다. 식품회사 ‘오뚜기’는 96년부터 매해 ‘가정의 달’인 5월에 ‘가족요리페스티벌’ 행사를 마련한다. 일반가정을 대상으로 참가자를 모집하는 이 행사에 연평균 300여 가족이 신청서를 낸다. 행사를 주관하는 광고팀 최광명 과장에 따르면 “참가 가족은 구성인원을 3명으로 제한한다. 그런데 전 가족이 행사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는 5명이 나온 가족이 제일 많았다. 그래서 보물찾기나 레크리에이션, 요리시식 등 부대행사도 다양하게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최 과장은 “요리경연대회에 참가한 가족 중 열심히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아이들과 여자는 부대행사에 참여하느라 정신없다. 대회가 끝나면 뒷정리도 가장들이 한다”고 덧붙였다.

    요리경연대회

    이정우씨(컴퓨터프로그래머·40)는 “다른 취미생활과 달리 요리는 가족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취미생활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얻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삶의 즐거움과 기쁨이 적지 않다. 회사원 최재현씨(32)는 “예전에는 내가 만든 요리가 맛만 좋으면 만족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담아야 좀더 멋지게 보일까 하는 욕심까지 생겼다. 그래서 요리 세팅에 관해 연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최씨는 최근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백화점에 가면 자꾸 그릇 가게를 기웃거리게 된다. 예쁜 포크나 접시가 눈에 띄면 사고 싶다. 덕분에 용돈을 쪼개 써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내가 사온 그릇들을 보면 뿌듯하다. 대신 아내 잔소리는 늘었다. 제발 그릇 좀 그만 사들이라고.”

    요리동호회 회원 중 ‘애인 없는 총각 모임’ 멤버인 박원형씨(30)는 매주 금요일이면 전화통화로 바빠진다.

    “우리 내일 뭐해 먹을까?” “색다른 요리 아이디어 좀 없을까?”

    토요일 오후마다 자취하는 다른 멤버 집에 모여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것으로 애인 없는 허전함을 달래는 박원형씨. 얼마 전 친구가 그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그 뒤 세 번 만났는데 상대는 박씨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싫다는 여자한테 전화 걸기가 어색해서 그만뒀다”고 했다. “나중에 소개해준 친구한테 엄청 구박받았다. 여자 만나서 눈치 없이 줄곧 요리 얘기만 늘어놓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냐고. 요즘 여자들 요리하기 싫어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조차 “뭐해 먹을까?”를 궁리하는 남자다.

    앞서 소개한 백규선씨는 요리 덕분에 매우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회사 거래처 사람이 청탁 건을 들고 저녁시간에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부탁은 들어줄 수 없고,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데 몹시 난처했다. 이리저리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말했지만 상대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거절은 그렇다 치고 집으로 찾아온 사람 홀대한다는 느낌까지 주긴 싫어 해물누룽지탕을 요리했다. 누룽지탕은 뜨거울 때 뚝배기에 부으면 파르르 끓어오르면서 근사해 보인다. 식사 도중 그 사람 안색이 바뀌었다. 계속 맛있다며 재료와 요리법까지 물어올 땐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생전 처음 요리사 직업을 가진 사람들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요리는 교제수단

    최근 인터넷사이트 ‘러브와이프21’은 “요리는 사랑이다. 요리를 만드는 데서 창조적인 즐거움을 찾고, 같이 나누어 먹는 데서 인간관계의 중요한 고리를 찾는다면 이윽고 요리는 노동의 수준에서 사랑의 수준으로 승격한다. 남편들이여, 자랑할 메뉴 몇 가지를 지니자! 아내를 위해 앞치마를 두르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취재 도중 만난, 요리가 좋아 기꺼이 ‘앞치마를 두른 남자’들은 자기가 만든 요리를 누군가 맛있게 먹어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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