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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의 시대’ 를 사는 법|가족

‘프리섹스’, 해방과 혁명을 이끈다

  • 권삼윤 < 문명비평가 > tumida@hanmail.net

‘프리섹스’, 해방과 혁명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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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하는 사회는 가족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가정의 울타리 바깥으로 끌어낸다. 그래서 결혼의 개념이 바뀌고 가족의 기능이 변해간다. 이것을 '해체'니 '파괴'니 하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들어 가는 논의과정이다.
”솔직히 한국 사회가 여태까지 나 사는 데 뭐 하나 보태준 거 있어? 나 같은 사람 주눅이나 들게 했지.”

드라마 ‘아줌마‘ 나오는 오삼숙은 우리 사회의 허구성과 편견을 여지없이 깨부수며 자신에게 충실한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 어려운 선택을 감행했다. 시청자들은 그녀의 이혼 결심에 박수를 쳤고, 그녀의 새로운 일터이자 그녀가 미래의 꿈을 키워 가는 ‘신수동 한정식 백반집’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다. ‘아줌마’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순의 뿌리를 사회의 원초적 구성 단위인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찾았고, 그걸 여실하게, 날카롭게, 그리고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어냈다.

이제 우리의 가정은 더 이상 포근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아줌마’에서 보듯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거짓과 편견이 판치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다. 그래서 또 다른 스트레스의 산실로 등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흔들리는 우리의 가정을 살릴 수 있을까? 이것은 드라마 ‘아줌마’가 진정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당면한 참으로 중요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가정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사회도 국가도 제대로 설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틀지은 것에 대한 저항

가족은 자족(自足)의 단위다. 그 속에선 사랑과 보살핌(care)이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어지며,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자 사회 구성원인 자녀가 태어나고 자란다. 소비의 주체이긴 하나 생산을 가능케 하는 노동력의 원천 노릇을 겸한다. 그것은 교육의 단위이자 문화와 권력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동양에선 나라(國)를 집(家)의 연장이라고 볼 정도였다. 교회가 중심이 되었던 서구사회에서도 가정이 대수롭게 취급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가정은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에도 변화를 가장 덜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도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지식산업사회로 진입하려는 지금, 가정마저 해체와 변모라는 극도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사회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변화의 바람이 가정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은 탓이다.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1993)에서 가족을 일러 “인구에서 예술, 성, 그리고 정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날 커다란 변화에 따라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제도”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 원인은 예전과는 아주 달라진 우리 삶의 방식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의 발전은 가족 구성원들을 가정의 테두리 안에 가둬두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끌어내는 쪽으로 진행돼 왔고, 그것은 다시 가족 구성원의 경제적·사회적 독립을 부추기면서 전통적으로 가족이 수행해오던 기능을 축소시키고 있다.

부부가 집 밖의 일터로 나가고, 육아, 시장 보기, 음식 장만, 세탁, 청소 등 전통적으로 여성이 담당하던 많은 일을 탁아소나 놀이방, 레스토랑, 세탁소, 슈퍼마켓 등의 외부 시설이나 세탁기, 진공청소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식기세척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대신하며, 거기에 홈 오토메이션까지 가세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가족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문이나 TV, 인터넷 또는 직장 동료들에게서 접한다. 재미있는 일을 찾는 곳도, 자신의 ‘끼’와 능력을 발휘하면서 자기 존재를 실감할 수 있는 곳 또한 집 바깥이다. 집의 구조나 가구, 가전제품도 개인적인 용도에 맞게 지어지고 제작된다. 주변 문화와 시설들은 혼자 살기에 아주 편리하게 변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과거처럼 가정, 가족, 문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한때 사회의 전부였던 가정은 점차 그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집과 나라 사이에 그것과는 다른 별도의 ‘사회’가 우리 동양문화권에서도 생겨났고, 그 사회는 날이 갈수록 내용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면서 전통적으로 가족이 수행해오던 일을 상당부분 대신하고 있다.

이제 누구의 아들과 딸, 누구의 남편과 아내, 누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누구의 사위와 며느리임을 앞세우며 ‘남자는 모름지기 남자다워야 한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따위의 주문과 요구는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되고 있다. 그것을 강요하면 스트레스로 받아들여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도 있고, 누군가가 틀 지은 것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며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다.

삶이란 남이 세워놓은 기준이나 틀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믿는 그들은 자신의 의지나 선호, 노력과는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나 세월이 가면 누구나 반드시 갖게 되는 것 따위에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의사나 개성이 들어가 있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개체의 시대가 추구하는 개성이나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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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삼윤 < 문명비평가 >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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