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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김정남 미스터리 제2탄

김정일·김정남 愛憎의 父子관계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김정일·김정남 愛憎의 父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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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김일성에게 큰손자 김정남의 존재를 처음 알린 것은 김일성의 담당 간호원이 김일성의 아들 ‘김현’을 낳았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남몰래 아이를 낳았으니까 김정일은 자기에게도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때가 1975년 경이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이 소식을 듣고 당황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귀여운 손자가 태어난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故 이한영씨(97년 피살)에 따르면 김일성은 김정남이 살고 있는 관저에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975년 이후 할아버지를 보기 위해 김정남이 주석궁으로 갔다. 부모 손을 잡고 가거나, 혹은 김일성이 김정남을 찾을 때는 부관과 같이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이한영씨는 증언했다.

첫손자인만큼 김정남에 대한 김일성의 사랑도 대단했다. 한 일화가 있다. 김정남은 총을 무척 좋아해서 언젠가 김정일이 벨기에산 권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한 날짜에 권총이 도착하지 않자 김정남은 화가 나서 밥도 안 먹고 계속 울면서 심통을 부렸다고 한다.

그런 때 김일성과 김정일이 통화하다가 김정남 얘기가 나왔다. 김정일이 약속을 못 지켜 정남이가 울고 있다고 하자, 김일성은 “큰일났구나. 알았다. 내가 달래주마”고 얘기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때 외국 국가원수를 만나고 있었는데 담화중 김정일에게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전화했다가 그런 소리를 들은 것이다.

김일성은 그 국가원수에게 “우리 손자가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밥을 안 먹고 있답니다. 내가 가서 달래주고 와야갔시오. 우리 밥 먹고 오후에 만납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방문객을 내보낸 김일성이 김정남을 주석궁으로 불렀다. 김일성은 김정남에게 “할아버지가 약속을 꼭 지키마. 총 늦게 가져온 사람은 이 할아버지가 혼내주마”라며 김정남을 달랬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키운 아들이지만, 김정일은 이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 어린 김정남을 사랑했다. 김정남을 직접 키우는 외할머니 김원주씨와 이모 성혜랑씨를 우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남이 서너 살 때 쉬하고 싶다고 하니, 내의 바람의 김정일이 우유병을 들고 아들의 오줌을 직접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혼자 밥을 먹을 때 대여섯 살 때까지 김정남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식사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시 식탁 위에 앉은 김정남은 “빠빠 맛있니?” 하는 등의 애교 있는 말투로 김정일의 혼을 빼놓았다고 한다.

김정남의 생일 행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정남의 생일은 5월10일인데 매년 4월 중순에 호위사령부 2국9부에서 김정남의 생일선물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한다는 것이다. 이한영씨는 그 선물구매액이 100만달러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김정남이 태어난 1971년부터 스위스 유학을 떠날 때까지 홀아비처럼 김정남만 끼고 자면서 ‘15호 관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집을 비울 때는 출장 간다며 아들 정남에게 못 들어오는 사연을 알리곤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김정남이 세 살되던 무렵부터 김정일에게는 김일성이 정해준 여자(김영숙)가 있었고 또 고영희 같은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장남 김정남이 있는 15호 관저를 와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축 보수하고 호위병력도 증강 배치했다.

김정남이 열 살 때인 1980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김정일은 딸 시집 보내는 어머니보다 더 슬퍼했다고 한다. 김정남의 가정교사였던 성혜랑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술을 마시고 아이처럼 울었다는 것이다. 1980년 3월 김정남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뒤에 김정일은 매일같이 김정남에게 전화를 했다. 성혜랑씨에 따르면 이 부자는 그리움 때문에 전화선을 통해 서로 울었다고 한다.

김정일의 여자와 자녀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댁(宅)으로 불리는 여자들을 부인이라고 보면 된다. 현재 ○○댁으로 불리는 여자는 김영숙, 고영희, 그리고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댁이 있다. 이들 세 명은 정실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상으로는 김영숙은 공식 ‘왕후’, 고영희와 ○○댁은 ‘빈(嬪)’으로 보면 된다.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은 공식 부인 개념에는 끼지 못하는 동거녀로 보면 된다. 우리 정보기관이 확인한 김정일의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김정일 가계도 참조)

● 성혜림(동거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사랑이며 장남인 김정남을 낳았다는 점에 의미가 깊다. 1968년께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이었고 영화제작을 지도하면서 영화배우 성혜림을 만났다. 당시 성혜림은 딸을 하나 둔 유부녀인데다 김정일보다 다섯 살 위였다. 성혜림은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을 다니다 부모를 따라 월북, 1960년 평양연극영화대학을 나왔다.

1960년대 북한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는 성혜림, 우인희, 김현숙이었다. 당시 남한은 문희, 남정임 등이 인기였다. 성혜림은 미인인데다 예절에 밝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냥한 서울 말씨여서 대학 다닐 때부터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혜림은 첫 남편 이평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해 영화에만 몰두했고, 그 틈새를 김정일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 김영숙: 김정일의 정식 부인이다. 김정일이 성혜림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김일성은 “서른 살 넘도록 장가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김정일을 다그쳤다. 1974년 김정일은 김영숙과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곧 딸을 낳았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김영숙이 낳은 딸 설송을 첫 손주로 여겼다. ‘설송(雪松)’이라는 이름도 김일성이 지어주었다.

그러나 김영숙이 정식 부인이라고 해도, 서방세계에서 보는 것처럼 퍼스트 레이디와는 거리가 멀다. 김정일과 20여 년을 같이 지낸 성혜랑씨에 따르면 중앙당 김정일 집무실의 타자수 출신인 김영숙은 어느 초대소에서나 볼 수 있는 관리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영숙의 인격이나 됨됨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김정일이 그렇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김정일의 시야 밖에 있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1974년생인 큰딸 설송도 김정남처럼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관저에서 가정교사를 데려다 공부했다. 설송은 고등학교 과정도 일반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김설송을 가르친 가정교사가 황장엽의 부인 박승옥이다.

박승옥은 2대에 걸쳐 김정일 집에서 가정교사를 했다. 박승옥은 김일성의 조카로 평양연극영화대학과 사회안전부 고급군관학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을 지냈다. 김정일이 이처럼 2세들을 평양의 일반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내부 비밀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고영희: 김정일의 애첩으로 무용수 출신이다. 말하자면 김정일의 ‘기쁨조’였다가 고정 파트너가 된 것이다. 고영희는 북송 재일동포 고태문의 딸인데, 어린 나이에 일본에서 부모를 따라 북으로 왔다. 고태문은 북한 유도의 창시자다.

김정일이 고영희를 집에 들어앉힌 것은 1976년경이다. 김정일의 파티에서 김정일 옆에 앉던 고영희는 1977년부터는 파티에 나오지 않았다. 아예 살림을 차린 것이다. 김정일의 관저 중 창광산 관저가 고영희 차지가 되었다. 고영희는 지금까지 김정일의 여인중 가장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

고영희는 1981년에 아들 김정철과 둘째아들 김○○을 낳았다. 현재 김정일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 김정철로 알려져 있다(스위스 유학). 북한전문가들은 만약 북한이 또다시 세습체제에 들어간다면 김정철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 ○○댁: 아들 하나를 낳았다.

● 임경옥(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 출신): ○○댁으로 불리지는 않으나 아들이 하나 있다.

이 밖에도 이름도 모르는 소생이 적지 않다. 이는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이 고교-대학 시절에 김일성 주석관저에서 일하는 여성복무원들을 자주 겁탈하는 바람에 말썽이 나서 당시 김정일 숙소에는 여성 복무원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특각에 배치되는 여자가 적지 않다. 특각은 각 지방의 명승지에 있는 일종의 별장으로 이 여자들은 특각에 근무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긴다. 특히 김정일의 비밀 연회에 참석하면 정말로 대단한 영예로 여기는데, 고영희·임경옥이 술파티에서 낙점된 여자들이다. 비밀연회는 70년대, 8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가 90년대에 들어와서 시들해졌다. 의사가 김정일의 건강에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신동아’는 미국의 한 북한전문가로부터 김정남이 아버지 김정일과 함께 살았던 ‘15호 관저(북한에서는 일오호 관저라고 부름)’ 도면을 입수했다. 김정남의 이모인 성혜랑씨와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남은 15호 관저에서 김정일, 어머니 성혜림, 이모 성혜랑, 외할머니 김원주와 함께 성장했다. 이 도면은 성혜림, 성혜랑 자매가 1996년 모스크바에서 탈출을 시도할 무렵, 모스크바 현지에서 파악된 내용이다. 5년 전의 모습이기 때문에 각 공간의 쓰임새는 달라졌겠지만, 구조는 그대로일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은 여러 곳의 관저를 사용하지만 평양 중심가에 있는 중성동 15호 관저가 중심 관저다. 이 15호 관저는 김정일의 중앙당 집무실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100m 정도 내려가면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도가 나온다. 이 지하도를 김정일은 운동삼아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한다. 지하도는 대리석으로 돼 있는데, 폭은 4∼5m, 높이는 3m 정도다. 관저에서 김정일 집무실까지는 걸어서 6분쯤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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