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서울대 출신자 모임 관악민주포럼(회장·박석운)은 지난 4월19일 창립 1주년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 강사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신영복 교수. 신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관계론적 사고의 중요성과 사회운동의 올바른 방향, 지식인의 사명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있게 풀어놓았다.
- 녹취 후 정리한 것을 신 교수의 감수를 거쳐 게재한다. 편집자
여러분이 젊음을 불태운 소위 80년의 투쟁과 87년의 6월항쟁도 4·19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총알이 이마를 뚫고 지나가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고 잠시 푸른 하늘을 보여줬다가는 사라진, 그리고 지금은 다 잊혀진 과거가 되었다는 점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바쳐 현장으로 감옥으로 뛰어들었던 그때의 열정도 식어버리고 사람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저마다 엉뚱한 일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전공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독서도 체계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책을 통한 공부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통한 공부를 더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특수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하여 사회와 역사를 읽으려고 고민한 셈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학교의 선후배 교수들과 우리 대학의 사회교육원에 오시는 분들입니다. 주로 교육운동이나 노동운동 분야에 몸담고 계신 분들입니다. 저는 그분들과 만나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에 사회를 바꾸어내는 역량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은 상황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이를테면 운동의 상황이 어렵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정부가 보여주는 한계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충격 때문이겠죠. 사실입니다. 사회변혁에 관한 근본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객관적 상황을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87년 당시의 열정과 헌신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고 민주화투쟁에 투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주변화되고 흩어지고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처럼 주체적 역량도 취약하고 객관적 조건도 열악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방향으로 우리 고민을 모아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관한 평소의 제 생각을 몇 가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주체 역량이 역사를 결정한다
사회변혁 문제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체적 역량의 문제이고 둘째는 객관적 조건의 문제입니다.
주체적 역량의 문제는 크게 양적(量的)측면과 질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양적 측면은 차치하고 우선 질적인 문제에 관해서 논의해보지요. 이른바 질적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역량의 조직, 즉 조직적 역량을 중심에 두고 본다는 뜻입니다. 사회변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적 역량입니다. 그것도 조직적 역량, 조직화된 역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역량을 보는 관점이 너무 피상적이고 형식적이지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물론 대규모 집회가 많이 열리고 큰 목소리를 내고, 그러한 고양된 분위기가 중요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중요한 건 역량의 질적 측면입니다. 저는 사회 변혁의 주체적 역량이 지금처럼 분산·소멸 내지는 개량된 이유는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민주화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 결정적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불철저한 인식의 공유에 기초한 역량 결집이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민주화운동의 토대 그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지요.
저는 전주교도소에서 6월항쟁 소식을 들었습니다. 담 넘어 들어오는 소식은 굉장히 부풀려 있어서 거의 80년 광주 때와 같은 상황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6·29선언으로 일단락됩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전주교도소 담 너머로 보이는 완산 칠봉이었어요. 동학혁명군과 관군의 공방전이 치열했던 곳이지요. 이 싸움은 결국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마무리되고 맙니다. 6·29와 전주화약이라는 두 사건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감옥에 앉아 있는 저로서는 6월항쟁을 이끈 지도부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여러 루트를 통해서 알아봤지요. 역시 6·29라는 그런 형태로 일단락지을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도부의 성격이 중요하니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문민화·민주화 이후의 미온적이고 기만적인 전개과정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합니다. 투쟁의 성과를 빼앗겼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잡혀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감옥에 구속되고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많은 사람들이 그 이후의 과정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전선의 소총소대가 아닙니다. 누가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가, 그것이 운동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6·29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과정은 이미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시 설정했던 민주화의 목표,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수준, 이것이야말로 그 후의 전개과정을 결정하는 것이며 결국 오늘의 문제들을 배태한 원인인 것입니다. 배신도 아니고 변질도 아닌 것입니다. 당시 지도부를 구성했던 계층이 그 후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냉혹합니다. 비약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극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의 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급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회주의와 졸속주의입니다. 저는 당시에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에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민주화 과정에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중앙으로 집결하느라 바빴더군요. 민중과의 접촉면을 유지하고 강화하거나 새로이 조직하는 노력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서둘러 중앙으로 결집했다가 또다시 서둘러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죠. 여러분이 더 잘 아는 일입니다.
기회주의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민주화운동 과정에 확대된 사회적 공간, 확대된 운동공간을 놓고 보여준 기회주의적 편향성입니다. 전체 역량의 합의를 거쳐서 그 귀중한 공간에 공동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파가 먼저 가서 깃발을 꽂고 선점하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참담한 실패로 이어졌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패를 평가하는 시각입니다. 아직은 진보주의가 시기상조라는 평가입니다. 나는 이러한 평가가 별 논의 없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잘 납득이 안 됩니다. 이러한 평가는 특정 그룹의 실패가 그 기회주의적 편향성을 반성하기보다는 서둘러서 전체 역량을 매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에 이어서 보여준 것이 바로 개량화입니다. 제도권으로 옮겨가거나 시민운동 형태로 물러서거나 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지요. 생각해보면 이러한 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이라는 것은 인간적 배신감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크게 보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기본적 한계이며 취약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민주화에 대한 이해 수준입니다. 그리고 민주화 문제를 국내정치 지형에서 사고하는 것도 문제지요.
민주화 문제를 국내정치 더 나아가서는 제도정치, 더 나아가서는 의견수렴 과정이라는 형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구조화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매우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구조에 대한 사고가 없다는 것이예요.
따져보면 기회주의와 졸속주의는 피상적이고 허약한 현실인식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야간의 비방이나, 또 이념논쟁이나, 사회계층간의 이해충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이러한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구조에서는 누가 한들 어쩔 도리가 없겠다는 생각을 해요.
어떤 형태의 사회운동도 결국 비슷한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원천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종속적 구조에서는 경제든 정치든 문화든 무엇 하나 제자리를 잡기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합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까지 포함하여 민주화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상품문화에 매몰된 신세대
그리고 주체역량의 관점에서 논의하자고 했습니다만 문제는 이 역량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다시 말해서 세대간에도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 더 절망적입니다. 역량의 후속부대를 이뤄야 할 젊은이들의 사고방식 말입니다.
젊은 세대의 사고와 행동패턴은 물론 민주화운동의 역량이란 관점에서도 문제이지만 한마디로 세계경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재생산 구조를 절감하게 합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은 이전과 완벽하게 달라졌어요. 우리 학교 여러 선생님들이 저한테 1학년 교실을 좀 잡으라고 짐을 지우지만, 잡기는 어떻게 잡아요. 도리어 내가 잡힐 지경입니다. 완고한 벽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 사회의 종속구조가, 교육과 문화에서도 그 재생산구조가 이제 완벽하게 구축됐구나, 그런 걸 실감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리나라의 사회성격 논쟁은 더 이상 여지가 없다고 봐요. 확실하게 상품생산 사회, 자본주의 사회로 구조가 완비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토플준비와 영어공부가 관심의 전부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신세대들은 스스로 개성세대라고 개성을 공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 개성이란 기본적으로는 상품문화에 매몰돼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요. 개성표현에 인간적인 내용은 전혀 없어요. 머리카락을 무슨 색으로 물들일 건가, 어떤 배낭을 짊어질 건가, 그런 수준을 넘지 못하지요. 인간의 개성이 어떠한 고뇌와 방황과 실천과정의 결과로서 경작되는가와는 한 점 상관도 없이 무엇을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무엇으로 형식을 삼을 것인가에서 얘기가 끝나 버려요. 상품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한마디로 인텔리 충원 구조 내지 교육문화의 재생산구조도 완벽하게 자본주의화한 실정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변혁역량의 충원구조가 와해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전제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세계화논리가 막강한 포섭력을 갖게 되고 세계화와 식민의식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제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 자체가 아예 사라지고 없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 노정된 인식의 불철저성에 관하여 언급하였습니다만 사상이란 현실에 대한 압축적 인식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사상투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자본주의 문화로부터 일정기간 격리돼 있었으니까 그러한 자본주의적 의식에 좀 덜 물들어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KBS 촬영 팀과 같이 우크라이나에 갔다가 키예프에 세워진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탑을 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선 제가 보기에 그것은 아무래도 전승기념탑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전승기념탑이라고 하면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점령한 고지에 성조기는 아니더라도 일단 깃발을 세우는 그런 형태의 조형물을 떠올리잖아요. 미국의 전쟁기념관에 있는 전승탑이지요. 그러나 키예프의 드네프르강 언덕에는 여인상이 하나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팔을 벌리고 높은 동산에 서 있는 형상이지요. 의아해하는 저한테 누군가 설명을 하더군요. 전쟁이 끝난 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아들들을 맞이하기 위해 팔 벌리고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 바로 그걸 형상화한 거라고요.
나는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전쟁과 평화에 대해, 아니 진정한 승리에 대하여 얼마나 천박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침통하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모스크바에서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유명한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하는 내가 들은 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봤죠.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비키지 않느냐고요.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 만든 건 아니잖아요.”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저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다른 체제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상품구조가 갖는 엄청난 규정력, 이게 얼마나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느냐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어떠한 전망도, 어떠한 운동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의 사상을 튼튼하게 꾸려 나가려는 노력 없이는 과거의 답습은 물론 또 한 번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판단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것이든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것이든 어쨌건 철저한 반성이 없는 한 운동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운동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만, 이 경우 실천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운동성을 생활에서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생활기반이 이미 황폐해졌다는 사실이에요. 사회역량을 결집한다는 것은 여러 부문에서 고립적으로 형성된 사회역량들이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역량의 경우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량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역량이란 그 개인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사람들간의 관계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봐요. 아주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성이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요. 그 수준이 사회의 질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는 사회가 구성될 수 없잖아요.
지속성이 있어야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지속성이 전제될 때 삼갈 줄도 알게 되고,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도 부정부패 이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관계와 그 지속성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농담 삼아 하는 얘기지만, 감옥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죄명을 알아맞히는 일에서부터 그 사람의 성깔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보고 대강 알게 되거든요. 그런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데가 지하철이에요. 저는 꼭 앉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앉을 수 있어요. 누가 어디서 내릴 건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거든요. 거짓말 같지요?
저는 대체로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날은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2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앉으려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그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끌어다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저도 정말 몰랐던 거지요. 저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엇스듬히 두 사람 걸치기도 하는 법이 없습니다. 확실한 연고권을 주변에 선언(?)해 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노자철학은 민초의 생존술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가.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 여성과 저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에요.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거지요.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사회를 구성하기에는 그 지속성이 너무 짧아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상품교환이라는 형태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체제적 한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에도 썼습니다만,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선왕(宣王)이 제물(祭物)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는 그걸 제물로 쓰지 말고 대신 양(羊)을 쓰라고 신하들에게 명했답니다. 사람들은, 큰 걸 작은 것으로 바꾸라 했다며 인색한 왕이라는 비난을 했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달랐어요. “소를 양으로 바꾼 건, 소는 봤으나 양은 못 봤기 때문이다. 벌벌 떨면서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본 소가 죽는 걸 차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어요.
바로 이 참지 못하는 마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참지 못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속성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회에서는 ‘차마 못할 짓’이 얼마든지 자행될 수 있는 것이지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 상품교환관계가 인간관계의 기본인 사회가 곧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사회적 비극의 원인은 바로 인간관계가 황폐해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적인 방법론은 바로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함은 물론이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가 관계하고 있는 관계망에 대한 사고를 길러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키워가기가 무척 힘듭니다. 관계론적 사고를 운동론에 적용하면 그것이 곧 연대론(連帶論)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운동론적 관점 또한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자기 자신을 키우려는 의지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더 강한 단체를 만들고, 더 영향력 있는 단체로 키워가려는 의지 말입니다. 자기 존재를 강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소위 ‘존재론’적인 관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강력한 존재로 키워가려는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인 사회이며 자본주의 200년 역사는 강철의 역사라고 저는 봅니다. 자기를 더 큰 것으로, 더 경쟁력 있는 것으로, 강한 것으로 키워내려는 욕망에 충실하지요. 제국주의든 세계화든 패러다임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존재론적 패러다임이 이제 우리 사회 운동진영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사회 전체 역량의 조직형태를 아주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겁니다.
아까 주체적 역량을 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연대야말로 그 핵심 고리입니다. 연합에서 연맹으로, 다시 전선으로, 파티(party)로 나아가는 연대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역량을 한번 보세요. 연합형식의 연대도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본적으로 연대라는, 관계론적 정서가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근대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강철의 논리, 그런 존재론적 논리에 다 매몰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공회대 사회교육원에 노동대학이 있습니다. 거기 모이는 노조 간부들께 저는 연대를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왜냐. 연대야말로 가장 약한 사람들, 역량이 취약한 사람들의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삶의 실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노자철학(老子哲學)을 춘추전국 시대 민초들의 전략전술이었다고 봐요. 노자사상은 한마디로 ‘물’입니다. 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연대성입니다. 연대는 아래로 내려가는 겁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연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이라고 하지요. 종속이라고 부릅니다. 자기보다 낮은 쪽으로 흐르는 것, 그래서 결국 가장 큰 것, 바다를 이루는 것이 연대입니다.
바다는 연대성의 최고 개념입니다. 바다의 어원이 뭔지 아세요.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작은 강물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서 가장 큰 걸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바다입니다. 모든 역량을 받아들이는 연대성이야말로 약자의 정서이며, 동시에 우리 삶의 관계성을 승인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어떤 목표라 할지라도 우선은 ‘낮은 곳’과 연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과정이라는 것은 절대로 어떤 수단의 개념이 아닙니다.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며 바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습니다. 논어의 이 구절을 대개 이렇게 풀이해요. ‘군자는 화목하면서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으며 반대로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똑같은 데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전 이걸 좀 다르게 풀이합니다. 이 화(和)라는 것을 저는 연대성으로 봐요. 연대는 공존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그게 바로 화(和)지요. 동(同)이란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흡수합병이 동(同)의 논리지요. 이는 곧 지배의 논리이고 우리가 그 대가를 뼈아프게 치르고 있는 제국주의의 논리입니다. 연대를 하려면 동(同)의 논리가 아닌 화(和)의 논리에 철저해야 하지요.
노동가치설은 노동운동의 이론적 토대입니다. 모든 노동운동가들이 이 점만은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이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전 노동대학 강의에서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다고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는 사용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환가치입니다. 무엇이건 시장에서 그 가치가 실현되지 않으면 제로(0)지요.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노동이 창조한 잉여가치가 상품 안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상품이란 것은 마르크스가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했듯이 팔리지 않으면, 그러니까 가치가 실현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가치가 전혀 없는 것도 팔리기만 하면 자본주의적 가치가 실현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사회의 가치이며 그 실현 형식입니다.
연대 없는 노동운동, 미래도 없다
이건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는 노동자들만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통과정의 부등가교환으로 착취당하고 빼앗기는지, 교통지옥과 불친절에 시달리고 있으며, 불량식품을 사먹고 있는지…. 이는 우리가 날마다 겪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부등가교환과 부당한 교환과정에 만들어지는 것이, 즉 실현되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입니다. 공장만이 유일한 착취의 현장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빼앗기고 있는 겁니다.
연대가 필요한 건 그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운동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운동의 구심이 되어야지요. 그러나 그것이 다른 모든 사회역량을 동(同)의 논리로 흡수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 이상으로 착취당하며, 빼앗기면서 살고 있어요. 이야말로 노동운동이 동의 논리가 아니라 화의 논리에 입각해서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론적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부정적입니다. 노동운동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반성이 필요해요. 요즘은 임시고용직이 전체 노동인력의 50%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열악한 변형근로가 있습니까. 협력업체 사람들과는 샤워장도 같이 안 쓰고, 유니폼도 다르게 입으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들과의 연대 없이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고용노동자 내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깥의 일용직이나 실업자, 더 바깥에 있는 빈민이나 농민들과의 연대에도 굉장히 냉정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연대의 구심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외부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자기비판의 장에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진정한 반성의 계기는 자기비판 형식을 띠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민운동의 경우에도 저는 외부에서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현 단계에서 시민운동은 필요하고 또 얼마든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 우리 학교 동료 교수분들의 요청으로 갔던 참여연대 간부수련회에서는 진지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날 특강 제목이 ‘시민운동 향기가 없다’였습니다. 물론 주최측에서 붙인 제목입니다만, 저는 (우리 시민운동의) 진짜 문제는 변혁의지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감시기능에 국한된 운동은 결과적으로 변혁을 유보하거나 우회하는 개량적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현 단계에서 연대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봐요. 루카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히말라야산맥에 사는 토끼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크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요.
우리의 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요. 스스로 작다고 하는, 우리의 역량이 취약하다는 냉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바로 연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의식 속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존재론적 생각들을 반성하지 않고는 기본적인 운동틀을 짜기도 어렵습니다. 관악민주포럼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려고 해선 안 돼요. 인체에서도 세포 하나가 지나치게 비대한 경우 그것을 뭐라고 하지요? 암이라고 합니다.
연대성의 이론적 기반은 서구 근대사회의 존재론이 아니라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존재가 입자(粒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쿼크나 소립자(素粒子)는 자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인, 이를테면 점입자(點粒子)로 규정하지요. 점은 길이와 부피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이 입증하려는 가설체계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존재는 일종의 ‘확률(確率)’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 역시 신진대사에서 보듯 외부의 물질과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는 열린 시스템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물질과 생명은 그 근본에서 ‘관계성의 총화’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제가 붓글씨를 좀 씁니다. 붓글씨는 서양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동서양 간 패러다임 차이를 느끼게 돼요. 예를 들어 붓으로 첫 획(劃)을 잘못 그었다고 합시다. 각도가 삐뚤어졌거나 생각보다 획이 굵게 그어졌다면, 그때부터 비상체제에 돌입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다음 획으로 첫 획의 잘못을 커버하는 거예요.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 글자로 결함을 커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글자의 결함은 그 다음 글자, 또는 그 다음다음 글자, 또는 그 옆의 글자를 통해 보완하게 됩니다. 한 행(行)의 결함은 그 양 옆에 있는 행으로서 보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 쓸 때는 굉장히 긴장하게 돼요. 한 획을 그으면서도 전체를 다 봐야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흑과 백, 즉 묵과 종이의 조화를 고려해야 합니다.
제 경우는 붓이 지나가는 까만 부분은 별로 보지 않고 남아 있는 종이의 여백을 주로 바라보고 쓰는 편입니다. 절에 있는 대웅전 현판을 볼 때도 글씨의 획보다는 남아 있는 획과 획 사이의 여백을 봅니다.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를 보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흑백의 조화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관계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모든 획과 획이 서로 기대는 것, 모든 글자와 글자가 서로 돕는 상태. 방서(傍書)나 낙관(落款)까지도 전체의 균형에 참여하는 그런 한 폭의 글씨를 격조가 높은 서도작품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글씨는 서도의 경지로 보지 않습니다. 예술과 철학으로서의 서도는 굉장한 관계성의 총체인 것이에요. 한 글자만 빠지면 전체의 균형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관계와 조화, 그것이 서도의 철학이고 서도의 미학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글씨를 보면 착잡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옆 글자한테 기댈 것도 없이 저 혼자 독립적 존재로 집합하고 있는 글씨를 볼 때면 ‘시민적 질서’가 잘 잡혀 있는 글씨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서구의 시민사회라는 것도 그런 게 아니겠는지요.
제가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어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몇 개월 전에 이응노 선생이 출소하셨다고 하더군요. 같이 있었다던 젊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 친구 말이 ‘참 이상한 노인네’였다는 거예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죄명이나 형기를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는 거죠. 한 방에 있는 자기한테도 그랬답니다.
대신 한번은 자기 이름을 묻더라는군요. 자네 이름이 뭔가, 그래서, 김응일입니다, 응할 응(應)자에다가 한 일(一)자입니다, 그랬더니 붓으로 ‘김·응·일’ 석 자를 쓰더랍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하는 말이 “뉘 집 큰아들이 여기 들어 왔구먼…”. 뉘 집 큰아들이란 말에 그 젊은 친구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어요.
교도소는 무엇보다 먼저 죄명과 형기로 존재를 규정하는 곳입니다. 인간관계가 완벽하게 사장된 극히 개인적이고 국소적 존재로 놓이는 공간이지요. 뉘 집 큰아들이라는 말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 누이동생 생각도 나고, 그렇게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눈물이 쏟아지더라는 거예요. 바로 그런 것, 어떤 개인을 뉘 집 큰아들로 볼 줄 아는 그런 관계론적 관점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 정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잠시 귀휴(歸休)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잠시 접견대기실이란 곳을 들러 보았습니다. 가족들이 접견을 오면 어떤 곳에 앉아서 호명을 기다리는지 보고 싶어서요. 마침 접견대기실에는 젊은 여자가 아기를 옆에 두고 얼굴을 묻은 채 엎어져 있었어요. 아마 접견하고 나오는 길이었나 봐요. 울음소리 하나 없었지만 처절하게 흐느끼고 있었어요. 교도소에 돌아온 이후에도 그 정경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군요. 재소자들을 볼 때마다 그 엎어져 있던 여자 생각이 났어요. 저 사람의 가족도 그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요즘도 피의자가 점퍼로 얼굴을 가리고 경찰조서를 받는 뉴스화면을 보면 자꾸 그 가족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개인’이란 관념으로만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우경적 실천’의 중요성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연대문제란 사실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연대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신뢰성의 문제, 신뢰집단의 문제입니다. 한 사회의 연대성의 층위는 결국 신뢰집단을 건설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심각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연대하려고 해도 신뢰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는 거지요. 집단 이기뿐이라는 겁니다. 이는 역량의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자기의 신뢰성을 세워나가야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타인에 대한 불신을 자신의 신뢰성을 선언하거나 방어하는 논리로 삼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공이 스승인 공자에게 물었어요. 선생님, 정치가 뭡니까. 공자가 답하기를 족식(足食), 족병(足兵), 민신(民信)이라고 대답합니다, 먹을 게 충분하고, 병사가 충분하고, 백성들의 신뢰가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어 계속되는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경제, 안보, 신뢰 이 세 가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에는 국경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군주가 신뢰만 얻으면 가장 중요한 자원인 사람은 금방 모여들었죠. 그 당시에도 사람이 가장 큰 전략적 요소였던 거예요.
지금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거의 미신이 되어버린 음양오행이란 것이 있어요. 오행이란 여러분이 잘 알 듯이 수, 화, 금, 목, 토잖아요.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에 따르면 수, 화, 금, 목, 토가 사실은 국가의 자원입니다. 국가가 관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원이 다섯 가지 있는데, 그게 물, 불, 쇠, 나무, 땅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민신(民信), 즉 신뢰라는 거예요. 사람 속에 경제도 있고 병력도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이나 군량미도 결국 마을사람들과의 대화와 관계에서 나왔던 것이었어요.
사회운동단체들이 신뢰받는 집단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의 연대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또 명망이 있거나 규모가 큰 조직과의 연대란 실상 화(和)의 논리가 아닌 동(同)의 논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정에서는 이를테면 ‘빨치산’의 전략전술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빨치산이라는 어휘가 상당히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험악한 단어라고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빨치산 출신들과 참 오래 같이 있었어요. 제가 감옥에 있었던 기간이 60년대 말부터 88년까지니까…. 구빨치부터 신빨치,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던 분들과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빨치산은 전략전술을 독자적으로 구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앙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기본 조건이지요. 마치 운동구심이 부재하고 연대할 수 있는 신뢰집단이 없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빨치산은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창조성을 발휘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주민과의 접촉국면을 최대한으로 넓혀야 합니다. 주민이 전투와 보급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내부의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뿐만 아니라 주민들과의 정치적 민주주의입니다. 이러한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민중적 토대의 문제인 동시에 나아가 신뢰의 문제입니다.
빨치산에 대한 루카치의 언급은 물론 문학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매우 함축적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당 문학가는 지도자의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빨치산이다. 진정한 당 문학가라면 당의 역사적 소명, 주요한 전략적 노선과 깊은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 통일성 내에서, 그러나 자기 고유의 수단을 가지고 스스로 책임지는 가운데 행동해야 한다.’
저는 현재 우리 사회의 역량 배치나 조직 정형으로 볼 때 모든 운동단체는 이러한 기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절차적인 형식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민중현실의 문제, 즉 정치목표의 문제입니다. 정치적 당면과제를 설정하는 문제이고 동시에 그 목표의 민주적 공유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은 민중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 근거지를 만드는 것, 그것을 통하여 신뢰를 구축해 가는 일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봐요. 근거지를 기반으로 외부를 향해 연대가능성을 열어놓는 일, 그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서둘러 중앙을 향하였던 과거의 기회주의적 작풍은 일종의 권력의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긴 호흡을 가져야 합니다. 생활의 운동화가 아닌 ‘운동의 생활화’라는 유장한 작풍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풍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이건 일하는 스타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출소를 앞두고 광복전후시대를 겪은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분들의 대답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자신들도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라며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시는 거였어요. 이 충고의 배경에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전제해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이 결정적으로 위협받지 않으면 절대로 판 자체를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대개 중간층들, 인텔리들의 성급하고 소아병적이며 관념적인 급진성, 그런 것들이 일을 망쳐 놓는다는 거죠.
교도소에서도 이와 관련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도소 건물구조가 가운데 복도가 나 있고 남쪽과 북쪽 양쪽으로 방이 늘어서 있습니다. 거기 있어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겨울철에 남쪽 방과 북쪽 방은 온도 차이가 내복 두 벌입니다. 그런데도 북쪽 방에서 남쪽 방으로 전방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소한 방에서 다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게 바로 기본적인 보수성입니다.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두서 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대개의 인텔리 출신들은, 특히 서울대 출신들은 모든 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논쟁도 무조건 논리 정합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려고 하지요. 자연히 논의는 논쟁적이 되기 쉽고 소모적인 사투(思鬪)로 이어지는 경향을 띠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논쟁 그 자체가 실천이 되고 마는, 다시 말해서 실천적 성과는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오리알에다 제 똥 묻혀서 굴러가듯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껴안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쿨 헤드(cool head), 즉 냉철한 이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원로 철학자와 노의사, 두 사람의 대담이 실려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읽은 지 오래됐는데, 책 제목이 ‘인간에 대하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거기 아주 인상적인 대화가 나와요.
명치유신 때까지 일본에서도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반성하라’고 했던 걸 보면, 그때까지도 인간의 사고가 가슴에서 이뤄지는 줄 알았던가 보다는 얘기였죠. 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사실 ‘머리에 두 손을 얹고’ 반성해야 옳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두 사람의 결론은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간의 의식은 뇌피질에서 이루어지지만 의식의 토대, 즉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가슴’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사고(思考)는 가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또 가슴이 원하는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논리나 냉철한 이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따뜻한 가슴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지요. 인간적 덕성을 가지고 사람을 포용해 나가는 것은 ‘따뜻한 가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일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제가 출소한 직후에 느낀 것입니다만 소위 운동권 문화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저건 옛날에 내가 하던 걸 여태 하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반성이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상당히 까다로운 선배였다고 듣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부드럽게 이야기해도 될 것을 칼로 끊듯이 논리를 세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까지 쉽게 사투로 넘어가는 식이었지요.
광복 전후에도 그런 문화가 팽배했다더군요. 콤그룹 등 당시 운동가들은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소모임으로 분산 고립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논의구조가 직선적이고, 또 구성원간의 관계도 정보에서 조금만 소외되면 굉장한 소외감을 느끼는 그런 구조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잘못된 전통입니다.
문제는 지식인운동의 일반적 경향이 이러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주 좋지 않은 작풍이지요. 이제는 반성하고 그런 것들을 좀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4·19로 시작해 엉뚱한 얘기를 많이 늘어놓았군요. 우리가 4·19나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평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요. 프랑스 기자의 질문과 주은래의 답변은 매우 널리 알려져 있지요. 당신은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주은래가 그랬대요. 아직 20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고. ‘누가 프랑스혁명을 실패라고 하는가’라고 격노했던 앙드레 말로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4·19와 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편협한 시각에 갇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지금 이 지점에서 어떤 고민을 나누고 또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전향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평가는 다소의 전술적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근본적 성찰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냉정하고 철저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