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동양의학 집대성한 ‘한의사들의 대부’ 東原 이정래

文理를 튼 깨달음, 醫道의 경지

  • 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ojong@donga.com

    입력2005-05-24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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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 면허증 없는 신의(神醫)’요 ‘한의사들의 재야 스승’이자 주역과 의학은 한뿌리라는 ‘의역동원(醫易同源)’ 이론으로 방대한 저서들을 남긴 동양의학자. 생전의 고승 탄허스님과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도 각별히 챙긴 대전의 이인(異人) 동원 선생을 만나 보니…
    대전 보문산 기슭에 산다는 한 동양의학자를 만나러 서울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자못 궁금했다.

    멀리 서울까지 날아든 소문을 듣노라면 아찔한 정도로 대단하다. 그는 ‘의사 면허증 없는 신의(神醫)’요 ‘한의사들의 재야 스승’이자 ‘의성(醫聖) 허준과 이제마에 못잖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동양의학자’라는 거다. 또 의학이나 주역의 세계에 눈 동냥, 귀 동냥 정도는 한 사람들 사이에 그의 이름 석자가 심심찮게 회자된단다.

    그는 최근 의학과 주역이 한뿌리라는 의역동원(醫易同源)의 학문적 결정판인 ‘의역한담후집(醫易閒談後輯, 전2권, 동양학술원)’을 내놓음으로써 동양의학체계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양의학의 근본인 주역 원리로부터 바로 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처방까지 이론과 실제를 모두 담은 책인데, 그는 이 책의 발간을 끝으로 더 이상 쓸 게 없다며 붓을 놓았다 한다.

    더불어 관상학과 사주학에서도 이미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전언이고 보면 머리가 핑 돌 정도다.

    분명 기인 풍모가 물씬 풍기는 인물일 것이다. 취재 대상자가 의(醫)·도(道)·복술(卜術) 분야와 관련된 인물인 경우 그 ‘어렵고 튀는’ 정도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대중의 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기사로 소화해내는 데 곤란할 겪을 때가 적잖다.



    그런 느낌은 이미 서울에서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할 때부터 감지됐다. “한 30분 만나면 되지 않겠소”라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을 때부터 뭔가 심상찮았다.

    서울에서 그의 제자인 김정진 씨(한의학박사·뉴코아한의원 원장)로부터 대략 주워담은 정보는 이렇다.

    1943년 충북 보은의 속리산 남녘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59세. 여섯 살 나던 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접했고,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 스승 밑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 열 네 살 무렵에 문리(文理)가 트이려 하므로 그간 억지로 하던 신식학문은 중학교 중퇴로 인연을 끊어버림.

    1958년 열여섯 살 무렵에 독서를 과도하게 하여 신병(身病)을 얻음. 당시 대학병원에서도 원인 모를 불치병이라 하여 손을 놓아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천행으로 속리산 뒤쪽에 사는 한 도인을 만나 한약 한두 재를 지어 먹고 기적적으로 완쾌.

    그 도인은 조선조 정조 때 명의(名醫) 이경화(李景華)의 4대 제자로 ‘계은 선생(溪隱先生)’이라 불림. 계은 선생은 이미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 이정래에게 자신의 ‘의발(衣)’을 전수.

    이후 현재의 대전 보문산으로 이거(移居). 그리고 동양의학 집대성 작업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월각’ 주인의 상(相)

    기차가 대전역에 곧 도착한다는 알림 신호가 있자마자 재빨리 가방에 넣어둔 주역 괘(卦)풀이 책을 펼쳤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를 점쳐보기 위해 내심 설정해둔 절차다.

    ‘주역’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에 대해 광대한 사유체계를 펼쳐놓은 철학서이자, 동시에 미래와 미지에 대한 점복 기능도 있다 하지 않는가. 게다가 주역을 연구한 도인이라 하니 도술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그다지 억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주역 괘 풀이를 위해서는 정결한 장소에서 무심의 경지로 시초(蓍草)를 뽑아 괘를 살피는 게 정석. 그러나 워낙 세상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시절이다 보니 점사(占辭)도 그에 맞추어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이 개발됐다. 원래 역(易)이라는 게 ‘변화’와 ‘바뀜’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중 하나가 점을 보고자 하는 당시 상황에서 시계의 분침과 시침, 혹은 초침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보고 괘를 뽑는 ‘시계 점’이다.

    그의 인물됨을 알고자 하는 욕구에 응해 나온 시계 점 괘는 풍택중부(風澤中浮) 괘. 해설하면 한 뜻에 초지일관하여 기어코 성취하고야 마는 진실함이 있는 괘다. 그는 한마디로 큰 뜻을 가진 사람으로 풀이된다. 또한 ‘내(기자)가 원하면 (상대방이) 기쁘게 화답해온다’고 괘는 부연 설명하고 있으니, 인터뷰도 당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무난히 진행될 성싶었다.

    보문산 초입 대로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2층 양옥이 동원 이정래씨(李正來, 이하 동원 선생으로 호칭)의 거주처. ‘일월각(日月閣)’이라는 문패가 좀 낯설 뿐, 여염집과 별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복차림으로 객을 맞이한 동원 선생은 그 눈빛이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형형하다. 눈매 또한 가늘고 깊게 물결치듯 뻗어가는 형상인데, 관상학에서는 이런 눈을 두고 대귀격(大貴格)으로 친다. 그러나 ‘상학진전(相學眞傳)’이라는 관상학 전문서까지 낸 고수 앞에서 아마추어의 소견은 비례(非禮)를 넘어 무례(無禮)일 듯싶다.

    나중에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중국 대륙 전체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명의인 사해주(謝海州·중국중의연구원 교수)는 동원 선생을 보고 “의용(儀容)의 대방(大方)함이 동방학자로서 학문을 아주 많이 품고 있는 선비상”이라 평했다 한다.

    각설하고 최근 출간한 ‘의역한담’부터 말머리를 텄다. ‘한담(閒談)’의 사전적 정의는 ‘심심풀이로 하는 이야기’라는 뜻. 그러나 책을 들춰보면 웬만한 역학자나 한의학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전문서적이다 보니 혹시 ‘독자 꾀기’용 제목은 아닐는지.

    “그건 아니구요. 요즘 사람들은 물욕(物慾) 명예욕(名譽慾)을 좇느라 늘 바쁩니다. 그걸 버릴 때만이 한가해져요. 또 사람은 한가할 때 참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한가한 가운데 역(易)을 관(觀)하고 의(醫)의 금고(今古)를 담설(談說)한다는 뜻으로 ‘의역한담’이라고 한 거요.”

    충청도 특유의 억양이지만 말은 충청인답지 않게 빠른 편이다.

    원래 ‘의역한담’은 99년에 500여만 자의 고한어(한문)로 집필돼 출간됐는데, 자신들도 읽게 해달라는 한의사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해설서 겸 침구학 등을 새로 추가해 ‘의역한담후집’이란 이름으로 올해 발간한 것이라 한다.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인 ‘동양의약원리’(1977년) ‘태한한학전집’(전3권·1989년) ‘동의요체진전’(전3권·1992년) ‘의역동원’(전2권·1993년)으로 이어지는, 동양의학 체계화 시리즈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자신도 의역학(醫易學)에 대해 “이제 더 쓸 것도 없고 여력도 없다”고 말한다.

    중국의사들도 놀란 고한어 저서들

    이 책과 저자에 쏟아지는 찬사는 멀리 국외에서도 눈부시다. 옛 동양의학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고한문으로 구사된 이 책을 보고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중국 의학자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이 백화문(白話文) 정책을 편 이후 중국 대륙 전체에서 고한문으로, 그것도 전문 의학서를 저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한국에서 그런 인물이 나왔으니 말이다.

    이 책을 보고 사해주 중국중의연구원 교수는 “의도유(醫道儒) 3가(家)를 합한 절세의 학문”이라 평했고, 중국중의연구원 원장 부세원(傅世垣) 교수는 “의도(醫道)에 숙달하고 역리(易理)에 깊이 관통한 책”이라 했다.

    또 중경국의대학(仲景國醫大學) 총장 조청리(趙淸理) 교수는 “의학과 역학은 서로 통한다는 옛말을 실제로 증명한 책이며, 저자 동원 선생은 동양 삼국에서 의역학(醫易學)의 일인자이자 옛적에 끊어진 의역일관(醫易一貫)적 중경학설(중국 후한시기의 명의 장중경이 남긴 의학체계)을 처음으로 밝힌 종사(宗師)”라고 극찬했다. 그는 80대 원로급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동원 선생에게 “국경을 초월하여 선생님으로 생각한다”고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가 중국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이미 90년대 초의 일. 93년에 역시 고한어로 지은 ‘의역동원’이란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을 읽어본 뒤 베이징의 중국중의연구원측에서 그를 초청해 특강을 부탁했던 것. 중국측 원로급 의사 300∼400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의역일원적 동양의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후 그의 명성은 중국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특히 그는 94년에 중경국의대학(하남성 정주시 소재)에서 중의학박사 학위와 명예교수직을 받기도 했다. 이 대학은 중국에서 의성(醫聖)으로 추앙받는 장중경 의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곳인데, 외국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동원 선생이 처음이라 한다. 이에는 까닭이 있다.

    “주역에서 비롯되는 동양의학의 계보는 대략 이래요. 역 철학을 의학 쪽으로 끌어당긴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시작해, 이를 구체적으로 응용한 본격 의학서인 중경의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要略)’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금(金)과 원(元)나라 시대의 ‘후세방’으로 맥을 이어가지요.”

    계속되는 동원 선생의 설명.

    “후세방은 금원(金元)시대 명의 4명(금원 4대가)이 공부는 하지 않고 전해지는 처방전만 달달 외어 약을 짓는 선배의사들의 행태에 분개해 ‘고전으로 돌아가자’며 문예부흥을 부르짖고 만든 것이에요. 그런데 요즘도 적지 않은 국내 한의사들이 뜻은 모르고 기술만 알면서 사람 몸을 다루는 실정입니다. 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예요. 자신들의 의학적 뿌리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들이 드문데, 제가 내경에서 금원 4대가까지 의역일원적 의학체계를 갖춰 내놓으니 공감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그의 모든 저서는 중국중의연구원에 소장돼 있을 정도로 귀하게 대접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요즘도 동원 선생은 국내에서도 고한문으로 강의자료를 준비한다. 동양의학의 모든 의서가 고한문으로 돼 있고, 한문법 자체에 억양(抑揚)이 있는 뜻글이므로 심오하고 함축된 의미를 표현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도학(道學) 세계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반드시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 없이 혼자 깨닫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간혹 ‘나는 스승 없이 혼자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경우다. 그런 사람은 결국 스스로 망신(亡身)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은 물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마련이다. 오죽했으면 작고한 성철 스님이 생전에 “내가 하는 주된 일은 ‘나 깨달았소’하고 찾아오는 중들에게 그대는 아직 못 깨쳤다고 하며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런 면에서 동원 선생은 스승 복을 타고난 행운아라 볼 수 있다. 사서삼경 같은 유학의 세계에 침잠하는 동안 학문이 높은 스승을 예닐곱 명 거쳤고, 또 오늘의 그가 동양의학의 정수를 깨치기까지 계은선생이라는 도력 높은 스승이 절대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그와 스승의 일화를 들어보자.

    “내가 열여섯 살 나이에 문리(文理)를 확 터보려고 너무 책에 몰두한 나머지 죽을 병을 얻어 부모 속도 많이 썩였지요. 그때 아무도 못 고치던 병을 한약 한두 재 먹고 낫게 했으니 그분이 대단해 보였지요. 그런데 당시 나도 사서삼경을 꿰던 시절인데, 계은 선생님이 ‘학문을 많이 하고 안 본 책 없어 줄줄 입으로 흘러 나오지만 득력(得力)을 못했구먼’ 하면서 말만 하는 공부는 필요없다고 싹 무시하지 뭡니까. 그러니 제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몸이 병 들 정도로 이제껏 한 것이 헛공부라는 걸 깨닫고 여러 날 고민하다 선생님께 배움을 청하고 사사했습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주역’ ‘황제내경’ ‘장중경’ 등으로 이어지는 동양의학의 정통 코스를 밟으며 연마했다.

    겸하여 불문진단학(不問診斷學, 묻지 않고 환자의 병세를 진단하는 학문)의 한 방편으로 상학(相學, 관상학)과 명리학(命理學, 사주학)도 연구했다 하는데, 주변에서는 그의 수준이 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다.

    혹시 그의 이런 능력은 타고난 것은 아닐까? 그가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듯이 말이다.

    “그건 모르겠어요. 오랫동안 그런 공부를 해서 그런 건지…. 상(相)을 볼 때 이런 것은 있었어요. 고향(속리산 남녘마을)에 있으면 우리 집에 어른들이 많이 놀러오곤 했는데, 한 어른의 상을 보니 그 집에 불이 날 듯싶어 얼른 가보라고 하니, 실제로 아이들이 보리짚 쌓아놓은 곳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환자를 진단할 때도 상대방을 보고 듣고 바로 알아내는, 그런 거지요, 뭐. 노자가 ‘도덕경’에서 ‘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고 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경지는 돼야 한다고 말했지요. 실제로 장중경 같은 이는 환자를 보고 지금 병을 고치지 않으면 몇십년 후 어느 때 죽는다고 짚어냈잖아요.”

    한방에서는 병을 진단할 때 환자의 얼굴을 보고(望診), 말을 듣고(聽診), 이것저것 물어보고(問診), 만져보고(觸診) 병세를 알아내는 사진법이 있다. 그중 환자만 보고서도 알아내는 망진을 최고로 친다. 한나라 때 의사 장중경이 그저 보기만 하고 모든 것을 알아내므로 신의(神醫)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고 듣고 바로 상태를 알아내는 그 역시 이미 장중경과 같은 경지에 올랐다는 뜻일까? 그는 인터뷰 내내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다’고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해박한 고전 지식과 역사적 사실을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듣는 사람이 ‘새겨서’ 판단해 보라는 무언의 암시를 강력하게 풍겼다.

    아무튼 그가 고향 속리산 기슭에 살던 시절에는 고향 사람들을 상대로 환자를 치료해준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 마을에 의료시설이 전혀 없고, 장마라도 지면 사람이 못 다니는 오지다 보니 다급한 대로 침도 놓아주고 약도 처방했다. 젊은 시절 그가 고향 사람들에 베푼 인술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최근에 마을 사람들이 동원 선생의 덕을 기리는 비(碑)까지 세웠다고 한다.

    황홀한 깨달음의 세계

    이처럼 재능이 특출한 그에게 도학(道學)과 의역학(醫易學)을 전수한 스승은 제자를 불러 각별히 당부했다.

    “그대는 학문을 많이 한 사람이니 의학으로 행술(行術)할 생각은 말고 의학을 깨우치는 의도(醫道)를 펼치라.”

    이후 그는 스승의 당부를 실천하기 위해 스물아홉 살인 1971년 대전 보문산 기슭으로 이사하면서 한의사와 약사회 소속 약사들을 대상으로 동양의학 한마당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대전에 나온 이후부터는 스승의 엄명을 실천했는데, 그는 지금까지도 환자를 진료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대전에 정착한 뒤 그 이듬해인 1972년 무렵, 그는 깨달음의 세계를 강력히 체험하게 된다. 책을 읽던 어느 날 문득 득도(得道)의 황홀한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당시 이를 직접 지켜본 제자 서인석(徐仁錫·내과전문의) 박사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

    “어느날 선생님이 희색이 만면하시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실 듯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선생님을 뵐 때마다 몇 달간 계속 그러시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내가 처음에는 이 학문에 이치가 모호하여 공부를 그만두려 하였으나 이제 모든 원리가 하나로 통함을 깨달은 것 같다’고 내심을 토로하셨다. 그 후 선생님은 누가 무엇을 물어와도 하나의 힘(力)의 운행원리(역의 太極과 음양오행)에 의한 대답을 술술 풀어내셨다.

    이는 생각하건대 선생님께서 이미 여러 번의 부정을 거친 끝에 그 극에 이르러 돌연 긍정적인 면으로 변화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른바 고인들이 설파한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은’ 일이관지(一以貫之) 의 경지로 나아가신 것임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미래읽기와 천기누설

    서씨는 스승을 모신 이후 신비한 체험도 여러 차례 겪었다고 말한다. 서씨가 의예과를 다니던 1974년 1월 어느날, 동원 선생이 서씨를 데리고 대전 중앙시장 뒷골목으로 들어가 술을 한잔 하면서 “자네는 2대 독자 외동아들이니 몸을 잘 간직해야 하네. 올해 음력 7월 중순에 나라가 크게 뒤집어지는데 그때만큼은 몸을 조심하게” 하고 충고했다. 서씨는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스승의 말을 가족들에게 전한 뒤에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러다 정확히 양력 8월15일 광복절에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스승의 말씀이 기억나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는 것이다. 서씨는 이때의 일로 그간 양의사 신분에서는 꺼림칙하게 여겨온 명리학(命理學)도 공부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런 일은 1978년에도 재연됐다. 군의관으로 입대하게 된 서씨는 스승으로부터 또다시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었다. 그때는 아예 날짜까지 정확히 짚어가며 “내년 술월(음력 9월) 며칠, 크게는 국지전쟁까지 일어날 정도로 나라에 혼란이 오니까 그때를 맞춰 휴가를 내든지 어떻게든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라”는 말씀이었다.

    당시만 해도 군의관은 일반적으로 전방에 배치됐으므로 서씨는 정말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74년에도 그런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79년 10월26일 스승이 말한 바로 그날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 온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던 것이다.

    동원 선생은 이 사건을 겪은 후 다시는 나라의 미래를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요 천기누설(天機漏泄)이라는 것이다. 그는 의학도 고차원으로 진입하면 천기에 해당하므로, 최근의 ‘의역한담’ 출간을 끝으로 더 이상 책을 안 쓰겠다고 말한 것도 진도가 더 나아가면 천기누설에 해당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필부에게는 한없이 부러운 게 예지력 아닌가. 어떻게 해서 미래의 일을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걸까. 동원 선생의 말.

    “어느날 한순간에 그간 공부해온 것들이 하나로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가 돌아가는 상황까지 훤히 내다보입니다. 특히 나라의 운명은 기문둔갑을 뚫어지게 알면 제대로 풀 수 있어요.”

    아무튼 도가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이통(理通)이라 하고 그 어떤 깨달음보다 ‘단단하다’ 하여 높게 친다. 예를 들어 영통(靈通)을 한 사람도 한순간에 세상일을 환히 볼 수 있지만, 이치가 뒷받침되지 못한 경우 순식간에 무너지거나 더 이상 진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무속인들이 영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신통한 예언을 하다가도 그 영적인 파워가 약해지면서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가 도를 통했다더라 하면 삽시간에 입소문으로 퍼지는 게 또한 이 분야다. 대전에 도를 통한 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은 컴퓨터 통신 못지않은 속력으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당대의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리던 탄허 스님(작고)의 귀에까지 들려 탄허 스님이 동원 선생을 만나러 대전까지 내려왔고, 이후 두 사람은 두터운 교분을 나눈다. 그의 자택 일월각에는 탄허 스님이 동원 선생을 만나보고 남긴 한문 글씨가 벽에 걸려 있다.

    ‘추국춘란(秋菊春蘭 각유시(各有時) 붕정만리(鵬程萬里) 위군기(爲君期)’

    이에 대한 풀이를 부탁하자 그의 설명.

    “가을 국화와 봄 난초는 각각 때가 있으니, 한번에 구만리를 날아가는 붕새와 같은 큰 만리 길을 그대를 위해서 기약한다…. 큰스님들은 틀린 말은 절대 안 쓰려고 해요. 그랬다가는 고승 소리 못 들으니까, 자기가 본 대로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저한테 이런 소리가 해당합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이 ‘글쎄… 나도 본 데가 있어서…’ 하고 넘어가대요.(웃음)”

    그의 처녀작인 ‘동양의약원리’ 제자(題字) 역시 탄허 스님이 써주었고, 또 고려대 국문과 재학 시절 탄허 스님한테서 공부하던 애제자 최옥화(崔玉和)씨는 현재 동원 선생의 부인으로 ‘재직’중이다. 최씨는 동원 선생의 육필 원고를 컴퓨터로 입력하는 등 저서를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다시 속세인의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평생 공부만 하는 학자를 남편으로 둔 부인은 자식들(1남1녀) 교육이며 살림살이를 어떻게 꾸려가는 걸까. 동원 선생이 얼른 눈치채고 대신 대답한다.

    “호구지책이요? 여기 와서 강의 듣는 제자들이 생활비를 내기도 하지만, 제가 심심풀이 삼아 사주학으로 어느 정도 가정을 꾸려왔지요.”

    “대문에 보니까 그 어디에도 명리와 점을 본다는 간판이 보이지 않던데요?”

    “그야 알 만한 사람만 찾아오고, 그런 사람만 봐주니까 그렇지요.”

    이미 동원 선생은 세속에서도 사주와 관상학으로 국내의 정치·경제·법조계 인사들 사이에 용하다는 평가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1970년대 중반 그에 대한 소문이 이병철 회장의 귀에까지 들려오자 역학(易學)에 관심이 많은 이회장이 지인을 통해 서울로 올라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동원 선생은 이렇게 회답했다.

    “저한테 자문을 구하신다 함은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인데, ‘논어’에 군자(君子)는 어디 가서 가르침을 펴는 예가 없다 하였으니 어찌 제가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정 가르침을 받고 싶으시다면 직접 왕림해주십시오.”

    그때 동원 선생은 사글세로 살았는데 가난한 선비가 재벌 양반한테 찾아가는 것은 오해받기 십상이라 하여 선비의 지조론을 펼쳤던 것이다. 결국 이회장이 우리 사회의 원로라는 점과 경호 문제가 있다 하며 타협을 본 게 서울과 대전의 중간인 용인에서 만나기로 한 것. 무려 3개월간 밀고 당긴 승강이 끝에 나온 결과다.

    결국 용인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고, 동원 선생은 이회장이 잘 모시라며 붙여준 경호원에게 경호를 받으며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저 만나려면 힘들었지요”하며 활짝 웃는다.

    그런데 일반인의 눈에는 명리학이나 관상학이 방외학(方外學)이라는 인상이 짙다. 도가 아닌 술(術)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동원 선생은 동양학에서 방외학이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상학은 묻지 않고 환자의 관형찰색(觀形察色)을 하는 불문(不問) 진단학으로 유정설법(有情說法)이라면, 명리학은 그 인생이 타고난 불변의 법칙을 말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의도(醫道)를 하려면 진정으로 유·무정설법을 다 공부해야 하며, 역에 달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의학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학 전체가 모든 분야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동양학의 지혜를 터득하려면 머리가 맑아야 합니다. 요즘 말로 뇌가 알파파 상태에 있을 때 동양 학문의 가장 고갱이요 객관의 실체인 수리(數理)의 세계가 보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역이 나오고, 의학이 나오고, 상학이나 명리학, 기문둔갑 등이 나오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가사상과 공자의 유가사상도 수리 세계를 바탕으로 한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어요. 그러므로 학인은 모름지기 정신 수행을 통해 머리를 맑게 한 상태에서 이런 학문을 공부해야지요.”

    한동안 세상을 들썩이게 만든 어느 동양학자를 염두에 둔 듯한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 수행을 통하지 않고 머리로만 동양학을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게 이 분야 수행자들의 증언이다. 동원 선생 역시 내공(內功) 수련을 한 수행자다.

    서예의 달인

    그의 무불통지 경지는 다방면에서 끝이 없어 보이는데, 학인에게 서예는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서예는 학문하는 사람이 겸해야 하는 필수 항목이라 하지 않던가.

    동원 선생은 서예에도 역시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1985년에 충남미술대전 서예 부문에서 원로 조병호 선생(위창 오세창 선생의 수제자)과 함께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서당 다니던 시절부터 서예를 익혀 왔는데, 1976년에 작고한 육천(育泉) 안붕언(安朋彦) 선생의 서법을 전수했다 한다.

    육천 선생은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선생 문하의 거유(巨儒)인데, 명필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이 그의 글에 반해 초청하였으나 육천은 “그가 나를 학문으로 초청했으면 가겠으나, 하나의 기예에 속하는 서예로 초청했으므로 거절한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육천 선생은 실제로 유불선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국학자 이가원 교수는 “연암 박지원 이후 최고의 학자”로 다른 사람을 젖혀놓고 육천 선생을 꼽았다. 육천 선생은 말년에 만난 동원 선생을 끔찍이 아끼고 챙겼다고 한다.

    육천 선생의 필법은 중국의 왕희지체 외에 최고 명필로 치는 우림체를 이어받은 것. 우림은 중국의 명필들이 써놓은 것을 수천 첩 탁본한 뒤 그중 제일 잘된 글씨 1000자를 모아 그 글씨를 연마함으로써 독특한 자기 체를 만들어낸 인물. 육천 선생은 일찍이 우림이 남긴 서첩(于右任正統書法)을 구해 썼고 돌아가기 직전 그 서첩을 동원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육천 선생은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가고 나면 동원한테 공부해야 할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한다. 그는 돌아가신 육천 선생을 얘기하다 보니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5년간 친히 지내다가 연세가 많아 돌아가시고 나니 제가 몇 년간 쓸쓸하고 외로워 좋지 않았어요. 이제는 학문을 같이 나눌 사람도 없으니…. 제자들을 가르칠 때나 외로움을 잠시 잊지, 대화할 사람이 없으니… 나 같은 사람도 사연이 있다오.”

    그러더니 불쑥 동원 선생은 “바쁘실 테니 이제는 일어나지요” 하며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 아닌가. 시계를 보니 정식 인터뷰 시간은 정확히 30분. 서울에서 제시한 그대로다.

    이렇게 되면 기차에서의 주역 점괘도 안 맞다 싶어 안색이 변하려는데, 동원 선생은 “유성에 횟감을 준비하라 일러뒀으니 식사나 합시다” 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자리에서 동원 선생의 숨은 비화가 많이 쏟아져 나왔으니 ‘원하면 기쁘게 화답해온다’는 괘는 그런 대로 적중한 셈이다.

    유성의 한 일식집에는 대전에 사는 한의사들과 양의사 두 명도 미리 와 앉아 있었다. 모두 동원 선생의 제자들이라고 했다. 동원 선생은 저서와 경희대 동국대 등 한의과대학 특강을 통해 전국 각지에 수많은 제자를 두고 있다고 했다. 그들과 수인사를 나눈 뒤 동원 선생의 말.

    “우리 집 2층 서재가 강의실인데 복도까지 꽉 차게 앉으면 40명은 공부할 수 있어요. 그중에는 양의사들도 있는데, 내가 양의학 이론도 좀 아니까 동양의학을 강의하면서도 양의사들이 듣기가 편한 게지.”

    실제로 동원 선생은 식사를 하는 동안, 사적으로 제자 양의사들과 전문 서양의학 용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한의학 이론으로 비교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아무튼 짧은 인터뷰지만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는 뿌듯함도 아울러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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