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들은 기념일을 맞아 완전히 상반된 뉴스를 지면에 실었다. 동아일보를 예로 들면, 5·16 정신을 되새기는 ‘5·16 민족상’ 시상식에서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는 “5·16은 누가 뭐래도 나라답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일어난 국민 정신의 일대봉기였다”고 찬양한 사실을 실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바로 옆 지면에 “박정희 기념관 반대국민연대가 상암동에서 개최한 박정희기념관 반대집회에서 이관복(李寬福) 공동대표가 ‘동족을 학대하고 헌정 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를 위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역설했다”는 내용 등을 동시에 보도했다. 그날 밤 텔레비전 화면은 5·16 민족상 시상식 광경을 전한 다음 박정희 소장의 동상이 밧줄에 묶여 두 동강이 난 채 땅에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방영했다.
40년 전에 발생한 일인 만큼 지금쯤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질 법도 하련만 매년 그날이 오면 ‘5·16 흑백논쟁’이 되풀이되는 까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5·16과 관련된 많은 진실이 가려진 채로 오랫동안 권력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록’과 ‘평가’가 진행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1960년 장면 정권에서부터 5·16 쿠데타 발발, 그리고 그후 10개월 동안 계속된 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19개월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윤보선(尹潽善) 씨를 도와 ‘청와대 대변인’ 직에 있으면서 정권의 몰락과 쿠데타 현장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5·16에서 윤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내가 겪은 진실을 가감없이 세상에 밝히기로 한 것은 앞으로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1960년 5월16일 새벽 4시경. 총성 때문에 잠을 깼다. 총성은 차츰 요란해졌다. 우리집은 적선동 서쪽편, 그러니까 현재의 정부종합청사에서 200m 거리에 있었다. 처음으로 총성을 들었을 때 나는 이른 새벽에 강도사건이 발생해 추격하던 경찰관이 발포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총성은 멎지 않고 그 빈도는 더해가지 않는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횃불데모’다 ‘남북교류’다 ‘파업’이다 시끄러운 상태에서 청와대가 비상사태 선포문제까지 검토하던 무렵이었던 만큼 혹시나 불순세력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경찰과 그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잠이 미처 깨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나라 국군이 서로 충돌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헌병에 포위된 새벽의 청와대
총성은 더욱 격해지고 가까워왔다. 점점 불안한 생각이 들어 경비전화를 들었다. 당시 몇몇 비서관에게는 경비전화가 연결돼 있었는데 그 전화는 비서실과 경호실에 직통으로 연결돼 있었다. 경비원이 비서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비서실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청와대는 별일 없습니까?”
“아닙니다. 대통령께서 서재에 벌써 내려와 계십니다.”
그가 말하는 청와대 서재는 대통령의 집무실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비서실장께서 잠시 전에 오셨습니다”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큰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른 새벽에 총성이 나고 대통령이 서재에 내려와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이 없다.
택시를 잡기엔 너무 이르고, 걸어서 가기도 어렵다고 생각해, 청와대 경비실에 다시 전화를 걸어 경비 지프를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지프가 청와대에 도착하기까지 10여 분이 걸렸는데 거리에는 군인도 민간인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무거운 공기 속에서 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프가 청와대 정문에 도착한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경비원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완전무장한 헌병들이 서 있지 않은가. 청와대가 헌병들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누구십니까?”
그들은 대뜸 나에게 물었다.
“나는 청와대 대변인이요.”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당시 청와대비서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 비서들의 횡포가 심했다고 해서 장면 정권 하에서는 아예 청와대 비서들에게 신분증 발행을 금지해버렸던 것이다.
“나 신분증 없소...”
“그게 말이나 됩니까?”
헌병이 군대이동전화로 어디론가 연락하더니 30분쯤 후에 청와대 정문 통과가 허용됐다. 새벽의 총소리, 정문의 헌병.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서재로 직행해서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나를 보자마자 “무슨 소식을 들었는가?”라고 물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복장이었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대통령은 외부 소식을 매우 궁금해 했지만 나는 대답할 아무런 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때마침 비서실장 이재항(李載沆) 씨가 들어왔다. 5시 반이 지났을까. 그 넓은 청와대에는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나 세 사람만 있을 뿐 외부와의 연락마저 두절된 외로운 상황이었다.
“각하께서 지금이라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까지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피신을 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하긴 어디로 피한단 말이요. 내가 명색이 이 나라 대통령 아닙니까?”
피신을 논의하는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의 모습이 더없이 딱하게 느껴졌다.
청와대 정문이 헌병대에 포위된 것을 얼마 전에 체험했던 터라 피신이라는 말 자체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날 새벽 3시경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暎) 장군이 이재항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취침중이라도 급히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고 한다. 비서실장이 경호실에 연락해 대통령과 장도영 총장이 직접 통화한 것은 새벽 3시 반이 넘어서였다.
장총장은 대통령에게 “지금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들의 서울 진입을 한강에서 헌병들로 하여금 저지시키려 했으나 중과부족으로 실패했으며 쿠데타군에 대한 저지선이 무너져 서울 시내에 들어온 그들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요지의 보고를 하면서 “앞으로의 사태가 지극히 우려되는 만큼 대통령은 가능하면 빨리 피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충고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다고 한다.
총성이 청와대 가까이 들려오는 상황에서 그것도 육군참모총장이, 또 청와대 비서실장이 누누이 대통령의 피신을 진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왜 단호히 거절했을까. 대통령의 피신 문제는 그후 정치 쟁점으로 등장하게 됐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졸지에 박탈당한 세력들 사이에서는 윤대통령의 피신 문제가 날카로운 비난의 초점이 됐다.
만일 대통령이 피신만 했더라면 헌법기관이 완전히 소멸되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미 8군사령관이 쿠데타 세력을 책임지고 독자적으로 진압했을 가능성이 있고 만에 하나 8군사령관이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도 일선에 포진한 반 쿠데타 부대에 의해 서울 시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는 내란이 발생해서 반란군이 진압됐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윤대통령이 피신을 하지 않은 것은 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계획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악의에 찬 루머를 의도적으로 전파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끝까지 청와대에 머물게 된 참된 이유는 당시 청와대의 상황이 대통령의 도피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설혹 가능했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인간성이 비겁한 도피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고 헌병대에 포위되어 외로이 청와대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됐다.
5·16 아침 8시경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9시 전후해서 청와대를 방문하겠다”는 요지였다. 곧이어 9시를 기해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엄령 선포자가 ‘군사혁명위원회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이라는 것이다. 몇 시간 전에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빨리 피해달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장 장군이 어느새 ‘혁명위원회 의장’으로 변신했단 말인가. 대통령도 비서실장도 모두 아연실색했다. 계엄령 선포의 합법성 여부를 따져볼 여유조차 없었다.
먼저 권총을 뽑지 않은 장도영과 박정희
오전 9시.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권총을 찬 점퍼 차림의 군복으로 지프에서 내려 청와대 현관에 들어섰다.
두 장군은 약속이나 한 듯이 청와대 정문 입구에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들 앞에는 무기를 예치하는 작은 석재 탁자가 놓여있었고 경호실 직원 한 사람이 부동자세로 권총의 예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도영 장군은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으나 박정희 장군은 그 순간이 첫 대면이었다.
장 장군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몹시 피로한 듯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서 있었고, 대조적으로 박 장군은 석불(石佛)처럼 꼿꼿이 서서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 두 사람은 좀처럼 권총 벨트를 풀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고 서있지 않은가. 서로 상대방이 먼저 권총 벨트 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서로를 불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장 장군이 먼저 권총 벨트를 풀었고, 박 장군이 그 뒤를 따랐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또다시 바닥만 쳐다보며 한마디 말도 없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짧지 않은 순간이 또 흐른 다음 이번에도 장 장군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소형 권총을 꺼내 경호실 경관에게 건넸고 이어 박 장군도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첫날부터 불신의 징조를 보였던 장도영 장군은 몇 달 못 가서 반혁명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후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마침 두 장군과 동행해서 청와대 정문에 들어선 김재춘(金在春) 대령이 눈에 띄었다. 김남(金楠) 비서관이 그를 본관 2층 비서실장 방으로 데리고 갔다. 김 비서관과 김 대령은 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들 질문에 김 대령은 서슴없이 말했다.
“장면(張勉) 총리를 놓쳤습니다. 그들을 잡아서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에서 재판을 해 처단하려고 했는데 장관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습니다”.
김 대령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쿠데타를 말로만 듣고 알았던 나는 그 순간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피를 보려는 쿠데타가 가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곧 아래층 서재로 내려가 대통령에게 김 대령의 말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박 두 장군을 수행한 경호원들의 행동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자동소총과 권총을 찬 채로 본관 복도를 돌아다녔다. 대통령 서재의 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기도 했다. 청와대 안을 수색하는 듯했다. 자기들이 모시는 두 장군의 안전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듯했다. 보다 못해 김재춘 대령에게 수행원들의 난동을 항의했다. 김 대령의 명령이 있은 뒤에야 그들은 본관 밖으로 철수했다.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군인들과 대화할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대통령은 무엇인가 마음을 정한 듯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은 유원식(柳原植) 김재춘 대령 등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소장의 첫 담판이 시작되는 순간이 다가왔다.
대통령은 군인들과 면담하기 위해 소회의실에 들어갈 때 몇 가지 마음의 정리를 했다.
첫째, 설혹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는 일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결의와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피를 흘리는 사태는 막아야 하고, 셋째, 숨어있는 장면 총리를 빨리 나오게 해서 되도록 합법적으로 사태를 수습한 뒤 자신은 국란(國亂)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박정희 소장의 입장은 쿠데타는 강행했으나 군 내부의 동요가 예상외로 컸을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한 전망도 지극히 불투명했던 만큼 불법 행위가 명백한 ‘계엄령 선포’에 대해 합법성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인준만 해주면 박 소장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이미 나의 보고를 통해 김재춘 대령의 충격적인 발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과 ‘사’에 대해 어느 정도 초월한 듯해 보였고 비장한 각오가 서있는 듯했다.
먼저 장도영 혁명위원회의장이 말문을 열었다.
“군의 책임자로서 문제를 일으켜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곧이어 박정희 소장이 입을 열었다.
“근심을 끼쳐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젊은 몸으로서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심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한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박 소장은 “목숨을 걸고…”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얼마 후의 일이지만 ‘정쟁법’의 제정을 말리던 윤 대통령을 향해서 “나는 목숨을 걸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어서, 박 소장이 입버릇처럼 자주 사용하던 “목숨을 걸고”라는 어휘가 아직도 나의 머리속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박 소장은 자신이 넘친 표정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비롯해 서울 전체가 수중에 들어왔다”고 말한 다음 이미 선포한 계엄령을 인준해줄 것을 대통령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통령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각료들 처단하겠다”
옆에서 대통령과 박 소장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아슬아슬한 위기감마저 느꼈다. 한쪽은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감행한 장군으로 수천 명의 쿠데타군을 거느리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다다른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비서관 몇 명을 거느린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변인이라는 직책도 있고 해서 자주 회담 장소를 들락거리며 대화 내용을 체크하기에 바빴다.
대통령은 단호히 말했다.
“아니, 계엄령을 누가 쳐놓고 나에게 추인을 하라는 것인가? 헌법상 대통령이 계엄을 추인하게 되어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계엄령을 선포하기 전에 하는 것인데 계엄령은 이미 선포되었으니 이제 와서 추인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5·16 직전의 혼란한 사회를 수습하기 위해 청와대에 설치된 ‘대통령 자문회의’(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에서 긴급조치의 발동과 계엄령 선포문제가 자주 거론됐기 때문에 대통령은 두 가지 조치에 수반되는 법률 문제에 대해 자세한 브리핑을 받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혁명위원회’ 자체가 법적인 근거가 없었을 뿐 아니라 설혹 ‘혁명위원회’가 3권을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내각책임제 헌법 제 64조에는 “대통령은 국무회의 의결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엄령 선포가 부당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선포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감행한 사람 앞에서 헌법이 어떻고 인준이 어떻고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대통령이 단호하게 태도를 밝히자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박정희 소장은 긴장된 기색인 한편 기분이 매우 나쁜 표정이 역력했다.
계엄령 선포의 인준을 거부한 대통령은 장면 총리의 안위(安危)가 마음에 걸렸던지 “그대들이 만일 애국을 하기 위해서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야될 것이다. 그대들이 계엄을 선포했다고 하니 지금부터는 그대들 말이 곧 법이 될 것이고 ‘생’과 ‘사’가 그대들 말 한마디로 결정될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 다음 “애국에서 나온 거사라면 절대 피를 흘려서는 안되고 더욱더 장 정권 각료들에 대해 보복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했다.
“인천 앞바다 섬에서 장 내각 각료들을 재판해서 처단하려 했다”는 김재춘 대령의 말이 끝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나는 박정희 장군 말 가운데 “인조반정을 하는 마음으로 이번 거사를 단행했다”는 대목에 관심이 끌리게 됐다. 솔직히 당시 나는 ‘인조반정’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청와대 경호원에게 우리 집에 가서 ‘이조 5백년 야사’라는 책을 가져오도록 했다. 바쁘고 무섭고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서 잠시 책을 들여다보고 직감적으로 ‘인조반정’과 당시의 현실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책 속에 담긴 ‘인조반정’은 한마디로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西人)파 무인들이 광해군(光海君)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선조(宣祖)의 조카인 능양군(陵陽君)을 왕으로 옹립한 일종의 무인(武人)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명분을 보면 “광해군이 1608년에 친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1613년에는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영창군의 어머니까지 경복궁에 가두어버리는 등 만행과 폭정을 자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말하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쿠데타, 인정 못한다”
그러나 책을 좀더 읽어보니 30년 동안 악정에 억눌려왔던 서인이 인조를 왕으로 옹립, 권력을 장악한 뒤 철저하게 보복을 자행했던 기록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4·19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지 9개월에 불과했던 장면 정권이 무능하다는 평을 들었을 망정 ‘폐모살제’와 같은 폭정이나 독재를 했다고 믿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것 같지 않다. ‘인조반정’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군인들의 처사는 처음부터 오류를 범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회의장에서 잠시 나갔다가 유원식 대령과 같이 들어온 박정희 소장은 “앞으로 대통령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하겠다”고 새삼스럽게 다짐을 하고 ‘혁명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은 또다시 완강히 거절했다.
“첫째,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어떻게 당신들을 믿고 성명을 낼 수가 있는가. 둘째, 후세의 사가(史家)가 오늘의 사태를 어떻게 평가할는지 모르나 나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했다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 셋째, 내가 성명을 낸다면 국민들은 대통령이 군인들 협박에 못 이겨 성명을 냈거나 청와대가 혁명군과 내통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혁명지지 성명 요청을 거부했다.
5·16 아침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의 인준을 받으려는 박정희 소장의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혁명을 지지하도록 요청한 박 소장의 희망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통령과 면담을 끝낸 장도영 박정희 장군은 군인답게 거수경례로 예의를 갖추고 청와대를 떠났다. 그런데 여기서 빠뜨려서는 안 될 일이 하나 있다. 대통령이 소접견실에서 군인들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 혼잣말로 “올 것이 왔구나…”라고 탄식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던 사실이다. 군인들도 들었고 나도 들었다. 피신을 하지 않은 것 못지 않게 이날의 대통령의 독백은 오늘날까지도 윤 대통령을 비난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5·16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했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5·16 직전까지 윤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솔직히 원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장 총리를 가리켜 “그 사람 아주 속이 좁은 사람이야” “약속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가끔 비난도 했다. ‘거국내각’ ‘국군 통수권’ ‘비상대권 발동’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혁명 직전까지 견해의 차이를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승만 독재정권 밑에서 야당인 민주당을 함께 창당해서 생사를 걸고 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사이이기도 했다.
혁명 직전의 국내 사정을 볼 때 혁신계가 주도했던 사회적 혼란은 극한에 이르고 있었다. 서울 거리는 매일 같이 데모대에 의해 점령되고 밤에는 횃불 데모가 일어났으며 여기저기서 “김일성 만세” 소리가 들려올 판국이었다. ‘4월 위기설’ ‘5월 위기설’이 매일 신문 제목을 장식했고 예상치 못할 국란(國亂)이 마치 내일로 다가올 것과 같은 환상에 온 국민이 사로잡혀 있었다. 시국수습 방법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예리한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 대통령은 약체 내각을 개편해서 강력한 거국내각을 만들고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나라의 혼돈 상태를 힘으로 수습하자고 했다. 그러나 총리측에서는 내각의 개조 요구를 일종의 도각운동(倒閣運動)으로 오해했고, 심지어 청와대를 음모지로 비유할 만큼 견해의 대립이 심각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그토록 이야기해도 듣지를 않더니 마침내 군대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라는 뜻에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탄식의 소리가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5·16 아침, 이미 선포되어 효력이 발생한 계엄령을 “인준해달라” “못하겠다”,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달라” “못하겠다”… 사실상 윤 대통령과 박정희 소장의 역사적인 첫 담판의 결렬은 험한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의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단추가 세 개 달린 상의가 아니면 입지를 않고, 좀처럼 넥타이를 푼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던 윤 대통령은 5척 단구에 깡마르고 보잘것없는 풍채의 박정희 소장이 콧소리가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끊어서 설명하는 모습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저 왜소한 군인이 쿠데타의 주모자란 말인가? 분명 섬뜩한 마음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이 됐다.
반대로 박정희 소장은 차분한 목소리의 영국형 노인인 대통령을 바라보며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청와대 주인으로서, 애써 권위를 지켜보려는 대통령에게 일종의 연민의 정을 느꼈을는지 모를 일이다.
5·16 아침 혁명 주체들이 다녀간 후 11시를 전후해 주한미국 대리대사인 마셜 그린과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청와대에 도착했다. 5·16 쿠데타의 분수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날 아침 미 대사관이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정권을 무력으로 쓰러뜨린 쿠데타를 미국이 지지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영국에 유학한 바 있던 대통령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외국인사와 대화를 할 때에는 장성철(張性喆) 비서를 통역으로 꼭 대동했다. 통역사가 상대방의 말을 통역하는 동안 대답할 내용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한 시간 전 박정희 소장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동족끼리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과 장면 총리를 빨리 나오게 해서 가급적 원만하고 합법적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되겠다는 굳은 생각을 가지고 마셜 그린 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장군을 맞이하게 됐다.
대통령, “미군이 반란군을 진압해달라”
먼저 입을 연 것은 매그루더 장군이었다. “지금 서울 시내에 들어온 반란군의 병력은 약 3600명이다. 야전사령부인 1군은 요지부동이고 대구 지방에 있는 국군 가운데서 약간의 병력이 반란에 참여하고 있으나 현재 속속 원대복귀 중에 있다.” 그리고 “제1군 산하 병력 가운데서 반란군 병력의 10배인 4만 명을 동원하면 혁명군은 항복할 것이고 진압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결국 대통령에게 1군의 동원령을 내려달라는 취지였다.
매그루더 장군은 역시 군인다웠다. “만약 반란군이 끝내 항복을 하지 않을 경우 총력전을 전개하면 반란군 진압은 시간 문제이고 결국 그들은 항복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매그루더 장군은 “현재 통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장 총리는 행방을 감추고 없으니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이 병력 동원에 동의해달라”는 것이다.
곧이어 마샬 그린 대리대사도 매그루더 장군을 거들면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호헌(護憲) 책임이 있고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반란군을 격파해야 한다”고 했다.
마셜 그린 대리대사는 미국인답지 않게 약간 마르고 작은 키에 차분하고 얌전한 인상을 주었지만 매그루더 장군은 장신에다가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로, 흔한 말로 우락부락한 인상을 주는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대통령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전 장 총리가 국군의 통수권은 총리에게 있다고 공언한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과연 대통령은 국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 헌법 제 61조는 ①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 ②국군의 조직과 편성은 법률로서 정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라는 구절을 놓고 장면 정권은 나름대로 통수권에 대해 유권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
즉 “아직 법률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리에게 귀속된다”고 공식발표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8군이나 미국대사가 왜 헌법상 아무런 권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군대의 동원을 요청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1군 동원령 내려라”
매그루더 장군은 분명히 “현재 통수권을 행사할 장면 총리는 행방을 감추고…” 운운하면서 통수권이 총리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이상 총리 유고시 총리직을 대행할 수 있는 ‘합법적인 통수권자’에게 통수권의 발동을 요청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내각책임제를 규정한 당시 헌법 제 70조는 “국무총리가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순위에 따라 국무위원이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매그루더 장군의 병력 동원 요청에 대해 한참 동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과연 통수권이 자신에게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의문 때문이요, 둘째 일선에서 4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했을 때 공산군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데 대한 걱정이 앞섰으며, 셋째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경우 많은 인명 피해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마셜 그린 대리대사는 “주한미국대사로서 매그루더 장군의 요청을 지지한다”고 거들었다.
5·16이 한참 지난 후에 대통령은 긴박했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호헌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만에 하나 공산군의 침략으로 국토가 없어지고 민족이 희생된다면 호헌에 대한 책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었다.
대화 시간이 길어져 12시 가까이 됐을 때 쿠데타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태도를 대통령이 그린 대사에게 물었다. 그린은 분명히 “미국은 합법적인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대통령은 반란군을 미군으로 하여금 진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매그루더 장군! 미군이 반란군을 진압해주세요.”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린 대리대사는 “그것은 미국의 명백한 내정간섭이 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미국은 다른 나라에 대해 내정 간섭을 안 하는 것이 전통”이라고까지 말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요구가 일언지하에 거부되자 화가 났다. “4·19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매카나기 씨가 학생 운동을 두둔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를 권고한 것은 내정 간섭이냐? 아니냐?”라고 다그쳤다.
심지어 대통령은 “매카나기 대사의 행동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한 짓이냐?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한 짓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이와 같은 반문을 하게 된 것은 그린 대리대사가 몇 번이고 “대통령은 호헌을 해야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자 매그루더 장군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외교관인 그린 대리대사는 노련했다. “지금 정오가 지났습니다. 저에게 점심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과 그린 대리대사는 청와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두 분이 점심을 하는 사이에 대통령의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됐다. 그것은 미군을 동원해서 반란군을 진압하더라도 어차피 충돌이 불가피하고 피를 보게 될 것이므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결심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점심까지 들면서 대통령과 마셜 그린 대리대사와의 대화는 원점에서 맴돌다가 끝이 났다. 결국 미국측의 한국군 동원 요청은 대통령이 거부하고 미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해달라는 대통령의 요청은 미측에 의해 거부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미군 동원 요청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오로지 국군의 동원을 거부한 사실만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써 이 또한 대통령에 대한 큰 오해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2001년 5월14일 5·16 쿠데타 40주년을 이틀 앞두고 모 방송사는 미 국무성에서 입수한 자료를 인용,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칼멜 수녀원에 숨어 있었던 장면 총리는 자신은 쿠데타를 반대하며 유엔군사령관이 맡아서 처리해달라고 전화로 마셜 그린에게 요청했다”는 것이다.
헌법기관이며 국군통수권자인 국무총리가 ‘미8군사령관이 처리할 것’을 미국대사에게 요청한 사실이 40년만에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똑같이 8군사령관이며 유엔군사령관인 매그루더 장군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부탁했던 것이다.
앞으로 역사가들은 5·16 쿠데타가 어떻게 해서 성공의 과정을 겪게 됐는가 하는 데 대해 깊이 연구해야 될 것으로 생각되는 대목이다.
장도영에게 농락 당한 대통령의 충정
청와대는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고 비로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혁명위원회의장으로 변신한 것을 알게 됐다. 장면 정권 각료 가운데 단 한사람도 군대의 반란을 알려오거나 대통령의 안위(安危)를 물어온 사람이 없었다. 새벽에 방송으로 발표된 ‘혁명공약’도 박정희 소장이 청와대를 다녀간 뒤에야 청와대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윤 대통령은 원래 군대와는 전혀 무관한 인생항로를 걸어왔다. 청와대 비서진도 소령 출신 비서관이 한 명 있었을 뿐 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솔직히 대통령은 이름을 대면 곧 얼굴이 떠오를 만한 장성이 몇이나 됐을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한림(李翰林) 1군사령관, 민기식 장군, 해군·공군 참모총장 등등 몇 명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셜 그린 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장군이 청와대를 떠난 후 나는 새로 입수한 혁명 공약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혁명 공약 발표자도 역시 ‘육군중장 장도영’이었다. 나는 바쁜 틈을 이용해서 4·19 직전 자유당 시절 장도영 장군이 관련된 소위 ‘수복지구 세금유용 사건’을 간단히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장도영이란 인물을 대통령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내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 직접 현지에 가서 목격했던 일이므로 생생하게 현장을 설명할 수 있었다. 당시 ‘수복지구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해서 수복지구에서는 어떠한 명목의 세금도 부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에 대한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령관이었던 장도영 장군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불법적으로 피란민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거둬들인 세금을 군대후생비로 유용했던 것이다.
세금유용 문제는 마침내 국회에서 문제가 됐고 현지에 대한 국정감사가 실시됐다. 내가 장도영 장군을 만난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모든 부정행위는 현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즉각 확인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던 국정감사반을 ‘회유’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호화판 선상 주연’이었다.
장소는 화천댐. 국회의원들은 압록강에서나 불 수 있음직한 급조된 뗏목에 안내됐다. 화천댐 강물에 띄운 뗏목 위에는 호화판 술상이 차려졌고 어느새 서울에서 불러온 기생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고 술을 따르게 했다.
뗏목이 유유히 화천댐을 흘러 내려가는 사이에 장도영 장군은 불법으로 세금을 걷은 것은 피란민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한 애국적 행동”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피란민들이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으니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그 나름의 이론이었다. 나는 장도영 장군의 기발한 수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장도영 장군에 대한 나의 옛날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본인이 자유당 시절 직접 겪었던 ‘불온문서 사건’을 이야기했다. 불온문서 사건이란 자유당 정권 때 군의 실력자였던 원용덕 헌병사령관이 북한의 김일성이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윤보선(尹潽善) 김도연(金度演) 등 여러 야당 지도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꾸민 사건이다.
편지를 받은 야당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불온문서를 경찰에 신고했는데 만에 하나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국가보안법에 걸려들게 돼 있었다. 이 사건도 국회 국정감사에 의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는데 불온 문서를 보냈던 원용덕 장군도 “야당 지도자들의 애국심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운운하는 변명을 했던 것이다.
포박당한 국방장관
장도영 장군이 발표한 혁명공약에 대해 대통령은 크게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았다. 군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청와대는 당시 혁명위원회 멤버 가운데서 장도영 장군 이외에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던 만큼 장 장군의 급격한 변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를 미리 알고 있었을까? 혹시 박정희 소장과 공모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장 장군에게 비범한 재주가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과연 그를 믿어도 좋을 것인지 청와대는 적지 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장도영 장군이 정식으로 혁명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한 것은 16일 오후 4시40분 경이었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장 장군은 5월16일 아침에 쿠데타가 감행된다는 사실을 쿠데타 발생 전에 알고 있었으며(나중에 자세히 기술키로 함), 5월16일 저녁부터는 혁명위원회의장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장도영과 박정희’의 관계는 첫날부터 상호불신의 징후가 역력했으며 서로가 이용하려는 기색마저 느끼게 했다. 특히 장도영 장군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대통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방패로 삼으려는 이상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16일 저녁 무렵 장 장군은 단신으로 청와대를 찾아왔다.
“자기도 모른 사이에 혁명위원회 의장 감투를 쓰게 됐습니다. 수락해도 좋겠습니까?”라고 대통령에게 물었다. 전날 의장직을 쾌히 승낙하고 이미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대통령의 의중을 타진하려 했을까? 장 의장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청와대는 차츰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대통령은 쿠데타 세력 가운데 오직 장 의장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락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찬의를 표했다. 나는 대통령이 찬의를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해 보였다.
대통령은 장 의장의 방문을 기회로 삼아 “장면 총리와 내각 각료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장 의장은 “책임을 지고 보장한다”고 다짐했다. 대통령은 장 의장의 보장을 믿고 16일 밤 10시경 중앙방송(현 KBS)을 통해 “장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사태를 수습하기 바란다”고 말하고 “군사위원회는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국무위원의 신변을 보장한다고 말하고 있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장 의장의 ‘불구속 보장’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쿠데타를 감행했던 ‘군사위원회’는 5·16 당일 포고(布告) 4호를 결의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4호에서 ‘장 정권의 완전인수’를 선언하고 “민의원과 참의원을 해체하며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할 뿐 아니라 국무·정무(國務·政務)위원 전원을 체포한다”고 공포한 것이다. 대통령의 간곡한 충정은 장도영 의장에 의해 완전히 농락된 꼴이 되고 말았다.
국무위원 체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16일 아침 대통령과 박 소장이 첫 담판을 하던 자리에 현석호(玄錫虎) 국방장관이 헌병들에 의해 끌려들어왔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가 입고 있던 양복 언저리에는 끄나풀로 포박당했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쿠데타로 짓밟힌 장면 정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현 국방장관은 그 시각 대통령 바로 전면에 앉아 있던 장도영 장군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적극 추천한 장본인이 아니던가. 장면 정권 시절 육군 참모총장 자리를 놓고 민주당 ‘노장파’와 ‘소장파’ 사이에 격렬한 대립을 보였다. ‘소장파’를 대표했던 이철승(李哲承) 국방위원장은 “장 장군이 군대 내에서 3·15 부정선거의 책임자일 뿐 아니라 전형적인 부패 장군의 모델”이라고 그의 참모총장 임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장 장군 장인과 두터운 친분 관계에 있던 현 장관은 장면 총리와 동향인 장 장군을 적극 추천해 그의 참모총장 임명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만감이 교차한 듯 일시에 분노가 터진 현 장관은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국토방위를 해야 할 군인들이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눈앞에 앉아있던 군인들을 꾸짖었다.
현 장관의 말이 떨어지자 유원식 대령이 벌컥 소리를 질었다. “아니, 지금 어떠한 상황인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명색이 한 나라의 국방장관 앞에서 장관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할 장교의 말도 말이려니와 그의 불손한 언동을 나무라는 사람이 장도영 장군을 비롯해 단 한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이 대통령 앞에서 말이다.
박정희 소장의 계엄령 선포 인준 요청과 매그루더 장군의 한국군 동원 요청까지 거부했던 대통령은 16일 오후 최두선(崔斗善) 동아일보 사장,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 홍종인(洪鍾仁) 조선일보 주필 등 언론계 대표와 백낙준(白樂濬) 참의원의장 등 4명의 민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긴급 초청했다. 대통령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고립무원인 대통령은 5·16 아침에 겪었던 일, 대화 내용 그리고 자신의 심경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에 대해 네 사람의 솔직한 의견을 구했다.
나는 대변인으로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참석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백낙준 의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취한 태도는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더욱 국군 사이의 충돌을 반대한 데 대해서 동감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동아와 한국의 최·장 두 사장도 “어렵기는 하겠지만 대통령은 합법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쿠데타를 감행한 군인들과 충돌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은 “행방을 감추고 있는 장면 총리가 빨리 나타나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대통령은 아무런 힘이 없으니 장 총리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사태를 수습토록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대통령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 한 사람도 “쿠데타는 있을 수 없는 만큼 미군이나 한국군을 동원해서 분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벌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원만하게 수습하는 길이 상책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대통령과 민간지도자들의 회담은 별다른 결론 없이 끝이 났으나 대통령에게 큰 힘이 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의 직업의식
그런데 이날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보였던 직업의식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장 사장은 청와대에 일찍 들어서기가 무섭게 경비하던 경찰관을 붙들고 “박 소장이 무슨 옷을 입었던가? 장도영 장군과 같은 차를 타고 왔던가? 경호원은 몇 명이나 대동했던가?” 등의 질문을 퍼붓는가 하면, 비서를 만나서는 “장·박 두 장군이 무슨 말을 했던가?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던가?”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기자 못지 않게 취재를 하고 다녔다.
나에게도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장 사장의 그러한 태도가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기관탄총으로 무장한 박·장 장군의 경호원들이 총을 예치하지도 않은 채 군화를 신고 청와대의 빨간 카페트를 짓밟고 다니고 대통령 집무실을 무단으로 들어가기까지 하고 국방장관이 헌병들에게 끌려오는 비상사태를 몇 시간 전에 겪었던 나는 직업의식에 사로잡힌 장 사장의 행동이 밉도록 원망스러웠다. 나는 참다못해서 “장 사장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취재를 하려고 하십니까?” 하고 정색하고 항의했다.
장 사장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과 면담하기 위해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는 대기자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날 밤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지시를 받았다. 1군사령관과 예하 5개 군단장에게 전달될 대통령 친서 초안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5월16일은 내 생애에 쿠데타를 처음 겪은 길고도 불안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