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삼성의 힘’, 이건희의 경쟁력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5-05-20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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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위 14년’을 맞는 이건희 삼성 회장은 웬만해선 앞에 나서지 않는 오너 CEO다. 그러나 총수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삼성은 외풍에도 흔들림없이 ‘한국 최고 기업’의 위상을 굳혔다. 보일 듯 말 듯한 ‘이건희 카리스마’의 실체는 무엇일까.
    삼성의 간판 CEO인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1910~1987) 회장 시절부터 비서실에서 잔뼈가 굵었다. 1987년 이건희(李健熙·59) 회장 취임 이후로는 계열사 사장으로 나간 2년 정도를 빼고는 비서실을 떠난 적이 없고, 지금도 삼성전자 회장실장(이건희 회장의 공식 직함은 삼성전자 회장)으로 이회장을 밀착 보좌하며 ‘이건희이즘’의 전도사를 자처한다. 그런 그가 이렇게 털어놨다.

    “선대 회장이 나를 찾으면 왜 찾는지, 뭘 물어볼 건지, 뭣 때문에 야단칠 건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나를 찾는다고 하면 왜 부르는 건지 감을 못 잡는다. 무슨 얘기를 꺼낼지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은 삼성의 최고참 현역 경영인이다. 1965년 삼성그룹에 입사(공채 6기), 72∼77년 그룹 비서실 차장, 91∼93년 비서실장, 99년 구조조정위원장을 맡아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부자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런 그조차 “나는 이건희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한다. “30년 넘게 이건희 회장을 지켜봤지만, 워낙 비범한 인물이라 진면목의 20%도 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그림자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이 정도라면 ‘인간 이건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는다고 봐야 한다. 그는 여느 대기업 총수처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지도 않는다. 행사나 모임에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니와, 어쩌다 나온다 해도 뚱한 표정으로 정물(靜物)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도 어눌하고 독특한 제스처도 없다.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



    이회장의 성장과정과 성격, 경영스타일, 사생활 등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게 없다. 1987년 선대 회장이 타계한 후 ‘삼성왕국’의 2대 회장에 취임했을 때, 이듬해 ‘제2의 창업’을 하겠다며 이런저런 일을 벌였을 때, 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꿔라”며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했을 때, 99년 자동차사업이 법정관리 신청과 함께 막을 내렸을 때처럼 잊을 만하면 한번씩 세인의 주목을 받았을 뿐, 그의 재위 14년은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라는 말로 요약될 만큼 베일에 가려 있다.

    더욱이 이회장은 구조조정본부와 계열사 사장들에게 경영 재량권을 주고 자신은 ‘방향 제시’에만 신경을 쓴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좀처럼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임원을 서울 한남동 자택으로 불러 보고를 받는다.

    사정이 이러니 하물며 일반인이 이회장의 실체에 다가설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가 ‘보통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는 것은 이채롭다. 지난 1월 온라인 채팅서비스업체 ‘스카이러브’가 네티즌 1500여 명에게 ‘올해를 빛낼 인물’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재계에서는 이회장이 1위를 차지했다. 2월에는 한양대 김재원 교수(경제학부)가 학생들에게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건희-박찬호-안철수(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장)-이재웅(다음커뮤니케이션 대표) 순으로 답이 나왔다. 5월 여론조사기관 P&P리서치가 성인 남녀 1212명을 대상으로 최고경영자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회장이 1위에 올랐다.

    이런 현상은 ‘눈에 보이는 삼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이건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승수효과 때문인 듯하다. 삼성은 외환위기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고속 성장을 거듭, 치명타를 맞은 현대와 대우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국내 1위를 굳혔다. 삼성의 지난해 매출은 130조 원, 순이익은 8조3000억 원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회장이 취임하던 해인 87년보다 매출은 7.6배, 순이익은 41.5배나 증가한 셈.

    삼성은 2000년 한 해 동안 6조 원의 세금을 냈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세예산의 7.5%에 달하는 규모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살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부채비율도 97년 말 366%에서 지난해 말엔 106%로 줄었다.

    지난해 증시 침체로 삼성 상장사들의 시가총액은 1999년 64조2000억 원에서 37조6000억 원으로 급감했지만, 국내 전 상장사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4%에서 20.0%로 오히려 올라갔다. 다른 상장사에 비해 삼성 상장사 주가가 그만큼 덜 하락했다는 얘기다. 지난 5월 말 현재 삼성 주요 계열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삼성전자 58%, 삼성SDI 44%, 삼성화재 40%, 제일기획이 60%에 달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높은 신뢰를 보여준다.

    또한 삼성은 세계시장 점유율 26%를 차지하는 CDMA 휴대폰을 비롯해 D램,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 컴퓨터 모니터, 브라운관, 편향코일 등 13개 제품이 세계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 있다.

    다른 재벌은 총수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쫓아다녀도 기업의 명운이 위태로운 지경인데, 총수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삼성은 이처럼 약진을 거듭하니 ‘삼성엔 뭔가가 있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조용한 총수’ 이회장은 바로 그 ‘뭔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비치면서 호의적인 신비감을 자아낸다. ‘눈에 보이는 실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업과 오너 CEO의 이미지를 함께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건희는 어떤 인물인가. 그가 지닌 ‘열쇠’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건희 회장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문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그는 선친의 사업과 전란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 초등학교를 다섯 차례나 옮겨다닌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중학교 때 귀국해서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에는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다. 그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국내에 동창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 1966년 미국에서 돌아와 경영수업을 시작한 후로는 선대 회장과 ‘태사부’들의 관리체제에 들어갔으므로 기업 이외의 영역과 접할 기회가 흔하지 않았다.

    이회장의 성격 또한 사람들과 왁자하게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었고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젖 떨어지자마자 어머니 품을 떠나 고향인 경남 의령의 할머니댁에서 세 살 때까지 자랐고,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다. 이 회장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삼성 회장 초기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 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게 하게 됐다…가장 민감한 때에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책, 영화(일본 소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1300여 편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이 삶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전란중에 이회장과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4, 5학년을 함께 다녔던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은 “건희가 천장에 매달면 끈을 물고 빙빙 돌아가는 비행기, 레일 위를 달리는 모형 기차 등 당시로선 구경하기도 힘든 장난감을 가져와서 함께 놀던 생각은 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기생인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은 “건희는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생각’이라기보다 ‘묵상’에 가까웠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말을 걸면 돌아오는 답은 ‘응’ ‘아니’뿐이었다. 동작도 느릿느릿했고 한번도 놀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는 천둥벼락이 내리쳐 다른 놈들은 다 기절해도 터덜터덜 집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나 기절할 놈’이라고 놀려줬다”고 고교시절을 회상했다.

    설탕공장(제일제당)을 거느린 부잣집 아들 건희와 그때껏 설탕이란 걸 먹어본 적이 없는 시골 고학생 사덕이 판이한 생활환경에도 불구하고 유별나게 친했던 것은 둘 다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또래답지 않게 머릿속이 복잡했던 건희는 여느 동급생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아 거의 입을 다물고 지냈지만, 시골 서점에 있는 책을 모조리 섭렵하고 상경한 사덕만큼은 드물게 말이 좀 통하는 친구였던 것.

    홍의원은 “건희는 어쩌다 입을 열면 싱거운 소리를 잘했는데, 더러는 충격적일 만큼 독특한 시각과 발상을 내비쳤다. 그런 말을 앞뒤 설명도 없이 ‘본체’만 툭툭 던졌는데, 책깨나 팠다고 거들먹거리던 나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겨우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령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느니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어떤 웅변보다 애국하는 길이다”는 등 그때 고교생으로선 상상도 못했던 얘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건희는 생각은 많았지만 그것들이 제각기 연결돼 하나의 얼개를 이뤘다. 여러 구조물이 공학적으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돼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듯, 한 가닥의 실만 잡아당기면 실타래 전부가 풀려나오듯, 그와 얘기해보면 음악이나 미술에서 화두를 열어도 기업경영, 국가, 인류의 주제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북(鼓) 같은 친구였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오는 북…. 그것은 묵상과 직관의 힘이었다.”

    “나는 사람공부를 한다”

    하루는 건희가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건희는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

    홍의원은 “솔직히 그때는 건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1학년짜리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놀랍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건희 회장의 그런 면모는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다.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에 따르면 “건희는 대화를 나눌 때도 계속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한다. 잘 못 마시는 술이나 한 잔 들어가면 그제서야 띄엄띄엄 한 마디씩 입을 여는데, 말수는 적지만 결국은 자기 뜻을 모두 전달할 만큼 효율적인 대화법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달변가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도 “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회장의 어눌한 몇 마디에서 깨닫게 될 때는 무력감까지 느꼈다”며 “내가 열 마디 할 때 이회장은 한 마디를 하지만 그 한 마디가 내 열 마디를 누른다”고 했을 정도다.

    그런 이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프랑크푸르트, LA 등지에서 평균 8시간 이상, 최장 16시간짜리 회의를 잇따라 열며 3개월 동안 8500쪽 분량의 말을 쏟아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평소처럼 ‘본체’만 던져선 임직원들이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잔뜩 ‘보충설명’을 붙인 결과였다. 이회장은 최측근들에겐 비디오테이프 한 개에 가득 담길 분량의 말을 불과 5∼6개의 문장에 담아 건넨다고 한다.

    홍사덕 의원은 그런 이회장을 오다 노부나가에 비유했다. 노부나가도 그처럼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을 거두절미하고 몇 마디씩 툭툭 던지는 스타일이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뿐이었던 것.

    홍의원에 따르면 고교시절 이회장은 학과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슨 궁리를 하며 사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고 황당한 답을 했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 무렵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회장이 두말 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용인술의 귀재였던 천하의 호암도 어린 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그때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홍의원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 중의 하나는 ‘제2한강교 사건’이다.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건희가 방학 때 서울에 와서 사덕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시속 120km로 한강변을 드라이브하는데, 당시 포장도로라는 게 그저 땅만 대충 편평하게 다져놓은 정도라 차가 계속 요동을 쳤다. 그러자 건희는 “이건 길을 닦은 사람들의 성의 문제다. 일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느냐”며 몇 번이나 분통을 터뜨렸다. 일본 구경 좀 했다고 우리 수준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떨떠름하던 사덕은 차가 마침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지나치자 목에 잔뜩 힘을 주고 한 마디 했다.

    “봐라, 저게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다리다. 어떻노?”

    그 말을 듣고 다리를 힐끔 쳐다본 건희는 대뜸 이렇게 내뱉었다.

    “이 생각없는 놈아, 통일이 되면 한강으로 화물선이 다닐 것 아이가. 그러려면 다리 가운데 있는 교각은 간격을 더 넓게 만들었어야지!”

    사덕은 전율을 느꼈다.

    삼성이 이른바 한비사건으로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한 1967년, 호암은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며 장남 맹희씨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삼성을 이끌어갈 권리를 부여한다고 발표했다. 예상대로 장자 승계가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호암은 1970년 무렵부터 그룹 복귀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맹희씨가 쓴 ‘묻어둔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73년 여름, 아버지는 나를 부르더니 ‘니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갖고 있노?’라고 물었다.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열댓 개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니가 다 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밝질 않았다. 그 전부터 뭔가 낌새를 채고 있었기에 ‘다 잘할 수는 없심더’라고 했더니 ‘그라모 할 수 있는 것만 해라’고 말을 잘랐다….”

    호암은 그렇게 삼성으로 돌아왔고, 3년 후인 1976년 9월 암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가족회의에서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호암은 이어 78년에 이회장을 삼성그룹 부회장에 임명, 승계구도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호암이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구상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듯하다. 이회장에 따르면 호암은 1961년 이회장을 와세다대로 보내면서 “네 성격엔 기업이 안 맞는 것 같다. 매스컴은 어떠냐?”면서 중앙일보 창간을 시사했다. 이회장이 좋다고 하자 “경영학을 하면서도 매스컴에 신경 써서 공부해라”고 당부했다는 것. 66년 이회장이 일본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호암은 그를 동양방송으로 보내 경영수업을 받게 했고, 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로 선임했다.

    호암이 이회장을 염두에 두고서 중앙일보를 만들고, 공부를 마친 그를 맨 먼저 중앙일보로 보낸 데는 그가 ‘기업에 안 맞아’서가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었다는 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이들의 얘기다. 그때 벌써 호암은 향후 기업의 미래가 문화적 개명(開明), 가치체계의 변화, 인재 육성에 달려 있다고 봤고, 그래서 중앙일보와 성균관대에 특별한 애정과 기대를 가졌을 만큼 안목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회장을 눈에 띄게 귀여워했던 호암이 그를 중앙일보로 보낸 것은 삼성의 내일을 이회장과 연결지어 보려는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앙일보에는 호암의 평생 사업 동반자인 홍진기(洪璡基·1917∼1986) 회장이 있었다. 법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낸 후 1965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이끈 그는 호암과 더불어 이회장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다. 이회장은 홍씨의 장녀인 라희씨와 결혼, 장인과 사위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회장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21년간 경영수업

    이회장은 그렇게 21년 동안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호암은 점심시간에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업무를 보고 받았는데, 이 자리에는 홍진기 회장과 이회장이 고정멤버로 배석했다. 78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회장실 바로 옆방에 대기하고 있다가 호암의 스케줄에 맞춰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했다.

    호암은 시계추 같은 사람이었다. 출·퇴근시간은 칼처럼 지켜졌고, 시계도 보지 않고 일하다가 ‘탁’ 하고 펜을 놓으면 정확하게 12시 25분, 점심시간이었다. 목욕물 온도도 일정해야 했는데, 온도가

    1℃만 달라도 몸을 담그자마자 알아차렸다. 계절에 따라 골프 티오프 시간도 분 단위로 다르게 했다.

    그처럼 까다로운 부친 앞에서 이회장은 혈기 넘치는 20대 중반부터 자세 한번 흐트리지 않고, 그 좋아하는 담배 한 대 못 빼 물고 꼬박 20년 넘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계열사 사장들이 “점심때 두 시간만 불려갔다 와도 오후에 일을 못할 만큼 무너져 내렸다”는 호암 앞에서.

    하지만 덕분에 이회장은 모직, 합섬, 제당, 중공업, 항공, 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열사들의 사정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다고 한다.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이 1985년 미국에서 돌아와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일이다. 이사장이 당시 이건희 그룹 부회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생명으로 가신다면서요? 보험회사는 모집인(설계사)이 전붑니다” 하고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보험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없는 이사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거니와, 당시 동방생명은 지금처럼 생명보험업계에서 수위를 달리지도 못했고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했기 때문에 ‘경영수업중인 부회장이 보험에 대해 뭘 안다고 저러시나’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새겨들은 이사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눈여겨보니 과연 보험회사 경영을 좌우하는 것은 모집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파격적으로 대우해줬더니 2∼3년 후부터 실적이 급증하더라는 것. 계열사 돌아가는 형편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핵심 경영전략을 귀띔해준 이 부회장을 그 후부터 다시 보게 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 회장 앞에서는 ‘정규수업’을 받았지만, 선대 회장 뒤에서는 ‘자율학습’에 골몰했다.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쪽으로는 취미가 없었던 이 회장은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 “이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자동차 마니아인 이회장은 유학 시절부터 중고차를 사서 엔진까지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준다. 부품업체인 삼성전기의 매출액이 1996년 1조4000억 원에서 외환위기 파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조2000억 원으로 4년 만에 3배나 늘어난 것도 이런 사정에 힘입은 바 크다. 이회장은 경영수업을 받던 시절에도 전자·정보·통신 계열사 임원들만큼은 무시로 불러올려 지시를 내렸다. 직접 해외에 나가 배워온 선진 기술을 임원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초기의 휴대폰에는 ‘SEND’ 키와 ‘END’ 키가 키판 맨 아래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회장은 휴대폰을 며칠 만지작거려 보더니 “가장 많이 쓰는 키가 ‘SEND’ 키와 ‘END’ 키인데, 이게 아래쪽에 있으면 전화를 받거나 끊으면서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기에 불편하다. 두 키를 위쪽으로 올려라. 그리고 눈에 잘 띄도록 키 글자 색깔도 다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반듯하게 각진 외형도 약간 오므린 형태로 변형해 손에 쥐기 쉽게 만들었다. 삼성 휴대폰 ‘애니콜’이 이런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자 지금은 국산, 외국산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휴대폰이 이런 형태로 출시되고 있다.

    신경영 선언의 기폭제가 된 사건도 그의 ‘분해실습’이었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의 회고.

    “1991년 이회장과 임원들이 LA로 출장을 갔는데, 하루는 회장이 시내 구경이나 하라며 휴가를 줬다. 실컷 놀다가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회장 방으로 갔더니 삼성 VCR와 도시바 VCR가 분해되어 있었다. 전자제품 가게에 들른 회장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VCR를 보고 열이 받아 두 제품을 사들고 와서 뜯어본 것이었다.

    이회장이 부품 수를 세어봤더니 삼성 VCR의 부품 수가 도시바 VCR보다 30%쯤 더 많았다. 그런데 가격은 삼성 제품이 오히려 30%쯤 쌌다. 회장은 ‘부품 수가 많으면 원가가 올라가고, 제품이 무거워져 물류비가 올라가고, 고장률이 높아져 AS비용도 올라가는데, 그러고도 왜 싸게 팔고 있느냐’며 다그쳤다. 그 후 이회장의 ‘기술자문’을 받아 도시바 제품과 부품 수가 비슷한 ‘위너스 VCR’를 개발했는데, 이 제품은 시장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반도체사업 주도

    최근 삼성에서는 그룹의 젖줄 노릇을 하는 반도체사업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종 결재는 선대 회장이 했지만, 실제로 사업을 이끌어간 사람은 이건희 회장”이라는 논리를 ‘모범답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삼성이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왕국을 건설하는 데 이회장의 ‘기술 마인드’가 핵심인 요소로 작용한 것은 삼성 안팎의 많은 이들이 수긍하는 사실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1973년 오일쇼크를 겪은 후 재래형 기술사업의 한계를 절감했으며, 오일쇼크 당시 일본 업체들이 TV, 냉장고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인 IC의 물량과 가격을 통제하며 횡포를 부리자 자체 반도체 산업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일본에서는 이미 반도체산업을 대표적인 미래 하이테크 사업으로 보고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었는데, 이회장은 “반도체산업이 우리 민족의 문화특성에 꼭 맞기 때문에 미국, 일본과의 10년 남짓한 기술격차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30년 전에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는 사람은 삼성 안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동물적인 사업감각의 소유자였던 이병철 회장도 그가 반도체 얘기를 꺼내면 “이놈아, 그 돈이면 TV를 몇백만 대나 더 만들 수 있는데 그 쪼그만 것 만드는 데 쓰겠다는 거냐”며 답답해 했다고 한다. 부친이 지원할 기미를 안 보이자 그는 1974년에 파산한 한국반도체를 그해 12월 사재를 털어 인수했다. 회사 이름만 ‘반도체’였지, 실제로는 트랜지스터나 조립하는 수준이었는데, 이회장은 이 회사를 베이스캠프로 삼고, 미국·일본을 오가며 기술 확보에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게 전자 손목시계용 칩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호암에게 끊임없이 미래산업의 변화상을 설명하고 선진 감각을 불어넣으며 조금씩 마음을 움직여갔다. 장인인 홍진기 회장까지 나서서 “내가 외국에 나가봐도 사위의 얘기가 맞습디다”며 사돈을 설득했다.

    반도체산업 진출 여부를 최종 결정할 때는 사장단들도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도체산업을 하려면 당장 4000억 원의 투자가 필요했는데, 당시 삼성그룹 전체의 연 시설투자 규모가 8000억 원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한 해 투자액의 절반을 불투명한 미래산업에 쏟아부을 판이었으니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결국 호암의 최종 재가는 났지만, 국내에 반도체 기술자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외국업체들과의 기술제휴, 전문인력 영입, 생산설비 도입과 라인 증설 등의 과제는 고스란히 이회장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새너제이 일대를 50여 차례나 드나들었을 만큼 반도체에 미쳐 있었다. 또한 아이비리그를 비롯해 미국 전역의 대학을 강의실까지 뒤져가며 반도체 분야를 전공한 한국·일본의 연구인력을 맨투맨으로 만났다. 그렇게 찾아낸, 기껏해야 30대 초반의 전문가들을 400만∼500만 원의 파격적인 월급에 아파트까지 제공하는 조건으로 대거 스카우트했는데, 당시 삼성전자 사장 월급이 100만 원이었다.

    “뛰어다니게 놔둬봐라”

    이회장은 부회장 시절에도 수행원 없이 혼자 해외출장을 다녔다. 항공편 예약도 직접 했고, 공항과 회사를 오갈 때도 주로 택시를 이용했다. 그는 “혼자 부딪쳐봐야 사람도 더 많이 만날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그 이유를 내걸었지만, 반도체사업과 관련해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비밀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게 속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비서실에서도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 호암이 “건희 어디 갔노?” 하고 물으면 비서실에선 그제서야 부회장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법석을 피웠다. 어렵사리 동선을 추적해 보면 부회장은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해외나 지방에 가 있기 일쑤였다.

    기계처럼 규칙적인 일과에 따라 움직였던 호암으로선 낮도깨비 같은 아들의 행태를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호암은 “비서실은 도대체 뭣들 하고 있노?” 하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비서실 임원이 “불러 올릴까요?” 하고 물으면 “뛰어다니게 놔둬봐라. 뭔가 해오긴 할거다”며 아들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 지 며칠 만에 나타나 해외 유수 기업들과의 기술제휴 계약서를 꺼내 보이곤 했다. 그 무렵 삼성물산 도쿄지점장이던 호텔신라 이길현 상담역의 말.

    “명색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도쿄지사에 전화 한 통 안 해주고 일본을 다녀가는 일이 허다했다. 어느날 갑자기 사무실에 불쑥 나타나서 ‘나랑 같이 좀 가볼 데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 보면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자리였다. 혼자서 세이코, 도시바, 미놀타, 세콤 같은 회사를 휘젓고 다니면서 구두계약을 해놓고 정식 계약을 맺는 날이 돼서야 우리를 불렀다. 도시바는 18년 전 그렇게 인연을 맺은 후 지금은 매년 삼성과 연석회의를 갖고 상생을 도모할 만큼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술도 잘 못 마시고, 숫기도 없고, 남들 앞에서 듣기 좋은 소리도 잘 못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재주로 혼자 그런 굵직굵직한 계약을 성사시켰는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이수빈 회장은 “이건희 회장은 앞선 감각으로 멀리 내다보고 한번 목표를 잡으면 조용한 성품과는 딴판으로 놀랄 만한 집중력과 추진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1991년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이회장이 반도체 4, 5라인 증설을 독려했다. 하지만 당시 그룹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고 세계 반도체시장의 불황으로 일본마저 라인 증설을 미루고 있던 차라 투자를 주저하자 이회장은 ‘반도체는 불황일 때 투자해야 한다. 왜들 머뭇거리고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결국 이회장의 계획대로 라인을 늘린 덕분에 93년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0년대 초 계열사간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가족지분을 계열분리를 통해 신속하게 정리했다. 그 무렵 이회장 측근에선 “7남매나 되는 가족지분을 일찌감치 정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문제가 터진다”고 조언했고, 이회장은 이를 적극 수용했다. 상호출자를 통해 각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자신이 욕심을 부렸다면 진통이 클 수도 있었지만, 어지간하면 형제, 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 비교적 무난하게 지분 정리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삼성의 캐시 카우(cash cow) 노릇을 했던 전주제지, 신세계, 제일합섬 등 떼주기엔 아까운 회사들이 삼성에서 떨어져 나갔다. 삼성전자는 이회장 몫으로 남았지만, 그때만 해도 삼성전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아무튼 그때 이회장이 빠른 결단으로 몸집을 줄이지 않았다면 현대그룹 ‘왕자의 난’보다 더한 분란이 초래됐을 것이고, 외환위기 때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회장은 IMF체제 이후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도 ‘집중과 선택’이라는 밑그림만 던져놓고 실무는 구조조정본부에 일임했다. “팔아야 한다고 판단되면 오너 눈치 보지 말고 과감하게 팔아라”고 분명한 방침을 내놨기 때문에 사장단들이 일을 처리하기가 수월했다는 것.

    그래서 당시 삼성과 빅딜 협상을 벌였던 기업의 임원들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오너로부터 전적으로 위임을 받고 자기 판단에 따라 협상조건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고 한다. 이학수 본부장은 이회장이 삼성자동차 차입금 상환을 위해 사재출연을 결심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삼성 재무팀은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빅딜하면 우리 계열사들이 수조 원대의 대우 부채를 떠안게 되므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삼성차가 법정관리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법정관리로 갈 경우 계열사들에겐 별 피해가 없겠지만 회장에게 은행 차입금을 갚으라는 여론이 조성될 우려가 있었다. 회장에게 그런 사정을 털어놨더니 회장은 ‘빅딜 하면 삼성 전체가 흔들린다는 데 고민할 게 뭐 있나, 내가 갚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빚 갚을 돈은 있느냐’고 물었다. ‘내놓을 건 삼성생명 주식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그걸 팔아버려’라고 했다.

    개인 돈 2조8000억 원(삼성은 삼성생명 주식을 1주당 70만 원으로 산정해 이회장이 출연한 400만 주의 가치를 2조8000억 원으로 추산했다)을 내놓는 결정을 내리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사재를 출연하지 않아도 법적으론 문제가 없으니 오너로선 그냥 버텨볼 만도 했던 일 아닌가.”

    삼성측은 “이회장은 우리가 자동차사업에 경험도 없고 수익성도 불투명하다며 사업 진출을 고민했으나, 전자 기계 화학 등 그룹 인력을 풀가동하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차를 만들 수 있다는 경영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진출을 결정했다”고 해명한다. 이회장 자신도 친구들에게 “바깥에선 내가 자동차광이라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리하게 사업을 벌였다고 하는데, 나는 쌍용그룹이 자동차사업에 진출하려 할 때 나와 절친한 김석원 회장에게 ‘자동차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극히 리스키한 사업’이라며 극구 말렸던 사람이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하지만 삼성의 자동차사업 실패는 그간 승승장구해 온 이회장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게 사실이다. 경영진에서 사업진출을 강력히 권유한 게 사실이라 해도 최종 결정은 오너가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회장은 자동차사업 실패로 상처입은 자존심을 다른 부문에서 만회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이회장의 고민

    외환위기 이후 빈부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삼성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삼성의 독주(獨走)에 대한 견제나 시기가 때로는 삼성을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조직화되기도 하고, 한국 대기업의 ‘시범 케이스’로서 엄밀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받다 보니 투명경영과 사회 공헌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삼성은 소액주주운동의 표적이 되면서 경영 외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이건희 회장은 사석에서 “삼성과 부딪쳐 성과를 얻어내면 한국의 재벌문제가 해결된다고 믿고 너나없이 삼성을 타깃으로 삼는 의도를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우리에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삼성이 반도체 부문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삼성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이 가능했던 것은 때마침 찾아온 반도체 경기 상승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최근 반도체 경기가 하락하면서 삼성전자 등의 경영실적이 예전 같지 못하리라는 우려가 나온다. 애널리스트들은 “삼성에는 반도체의 뒤를 이을 마땅한 차세대 수종(樹種)사업이 없다”고 지적한다. 이회장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최근 주재한 전자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이 10년, 20년 후에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회장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신경영이 다시 빛을 발하도록 하기 위해 이제 그 좌표를 재점검해볼 시점에 이르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경영 선언의 상징적 조치로 받아들여진 7-4제(7시 출근, 4시 퇴근)가 흐지부지되면서 이를 퇴색한 신경영의 현주소로 보는 시각도 있고, 신경영 당시 “회장이 잘못하거나 틀렸으면 ‘그게 아니라 이겁니다’ 하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 사장, 비서실장이 회장한테 지적을 안 하는데 어떻게 과장, 부장이 이사, 상무한테 지적하느냐. 이것부터 고쳐라”고 외쳤지만, ‘관리의 삼성’엔 자유로운 하의상달의 언로가 부족하다는 불만도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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