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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한국경제, 불투명하지만 더 나빠지진 않는다”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한국경제, 불투명하지만 더 나빠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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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은 1998년 시행된 한은법에 따라 물가안정을 단일 목표로 통화신용정책만을 책임지는 정책기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약간 주춤해졌습니다만, 올 들어 4월까지 소비자 물가 상승세가 계속됐습니다. 전망과 대책을 말씀해주시죠.

“올해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기준으로 1/4분기에 4.2%, 4월에는 5.3%, 5월에는 5.4% 올랐습니다. 작년 하반기의 고유가, 공공요금 인상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올 들어서도 건강보험 수가 등 일부 공공요금이 추가 인상됐고 원화환율이 크게 올라 수입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앞으로는 경기둔화에 따른 시차효과, 최근 원화환율의 하향 안정 등으로 물가 오름세가 점차 완만해질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상반기 중의 높은 상승세 때문에 연 상승률은 4%를 상회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공공요금과 개인 서비스 가격 안정을 도모하는 미시적 측면의 물가안정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플레이션은 왜 나쁩니까? 교수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한번 강의를 해주시죠.



“가격은 재화와 용역의 합리적 배분을 유도하는 지표기능을 합니다. 어떤 상품의 생산이 수요보다 많으면 생산은 줄이고 소비는 늘려야 합니다. 그런 신호를 보내는 게 바로 가격입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으면 가격이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생산자는 예상 수익성이 떨어질 테니 생산량을 줄일 것이고, 소비자는 소비자 잉여가 높아지니까 더 사게 되어 균형이 맞게 됩니다.

인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호흡, 체온, 맥박, 혈압이 건강상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정상인의 체온은 36.5℃인데, 운동을 하거나 몸이 아프면 체온이 그보다 오르거나 떨어집니다. 그래서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죠. 체온이 40℃를 넘어서면 못 견디게 될 겁니다. 이처럼 체온이 오르는 것은 건강이 나쁘다는 신호입니다. 체온처럼 가격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체온이 40℃를 넘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듯, 물가가 너무 올라가면 자원의 합리적 배분을 유도하는 기능을 못 하게 됩니다.

인플레이션은 부의 왜곡된 분배를 초래합니다. 금융부채가 적은 사람이나 기업은 금융부채가 많은 사람이나 기업보다 손해를 많이 보게 됩니다. 10%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부동산을 샀다고 가정합시다. 인플레이션이 됐다는 건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얘긴데, 빚을 내 부동산을 산 사람은 부동산 가격이 10% 이상 오르면 이득을 보는 반면 빚을 준 사람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한 사람보다 불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한 사람이 이익을 보게 되죠. 이런 것은 막아야죠.

모든 가계와 개인은 금융시장에서 자금 공급자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쪽이에요, 양은 적지만. 개인은 돈을 많이 빌릴 수도 없어요. 그래서 개인은 금융자산 측면에서 보면 채권자입니다. 부채가 많은 쪽은 돈이 많은 사람과 기업이에요.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중의 소득이 자산을 많이 가진 기업이나 개인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나 중앙은행은 민생을 보전하고,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부의 분배를 왜곡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물가를 안정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생활하듯 물가안정이 개인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쉽습니다. 인플레이션 위험을 느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사전에 막지 못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10만 원권 화폐는 시기상조

━한 번 쓰고 마는 10만 원권 자기앞수표의 발행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는 100달러(10만 원), 일본에선 1만 엔(10만 원), 영국에선 50파운드(9만 원), 독일에선 100마르크(5만6000원)짜리 고액권 화폐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10만 원권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1998년 한은 총재에 임명돼 그해 가을 첫 국정감사를 받을 때부터 의원들에게서 10만 원권 발행에 대한 질문을 받고 여러 차례 검토했습니다. 현재의 최고액권인 1만 원권이 도입된 게 1973년인데, 지금은 그때보다 경제규모가 커졌고 소비자 물가도 많이 올라 1만 원권의 상대적 가치가 많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니 화폐체계에 경제여건의 변화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1만 원권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현금을 거래하고 화폐를 휴대하는 불편이 커져 10만 원권 정액 자기앞수표의 수요가 폭증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고액권 화폐를 발행할 경우 과소비 내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소비가 일어나면 소비 증대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빈부격차 갈등을 일으킬 우려도 있어요. 더구나 요즘은 결제수단으로 신용카드가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각종 전자결제 수단이 많이 늘어나 상거래에서 현금결제 비중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고액권은 자칫 불건전 음성 거래수단으로 악용되어 신용사회를 구현하는 데 장애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고액권 화폐 발행 여부는 신용사회 정착과 거래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사회제도적인 보완장치가 정착된 뒤에 다시 검토해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일본의 엔화 약세 기조는 어떤 흐름을 탈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교과서대로라면 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해 11월 초 달러당 106엔 수준에 머물던 엔화 환율이 일본의 경기침체 지속, 대규모 재정적자 누적, 금융시스템 불안정성 등의 복합적인 요인 때문에 빠른 오름세를 보이다가 지난 4월 초엔 달러당 127엔까지 상승했습니다.

당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엔화가 추가적인 약세를 보여 달러당 130엔 수준을 넘어서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만, 엔-달러 환율은 4월 초를 기점으로 하향 안정세로 돌아서서 최근에는 120엔 전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엔 유럽의 경제전망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보다 둔화됐고 물가는 상대적으로 강세이기 때문에 일본의 유럽지역 투자자금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죠.

일본 경제상황이 빠른 시일 안에 개선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엔화 약세요인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급속한 엔화 약세에 대한 아시아지역 국가들의 부정적 반응과 최근 일본으로 유입되는 국제 투자자금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종전과 같이 엔화 가치가 급속히 하락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따라서 특별한 돌발요인이 없다면 원화환율은 안정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수출 주력 상품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엔화가 절하되면 원화도 절하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때문에 원화환율이 절하돼도 수출이 크게 늘지 못하는 것이죠. 더욱이 우리 수출상품의 대부분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동남아, 중남미 시장 경기에 따라 탄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 경제가 하나같이 침체 상태라 환율이 절하됐는데도 불구하고 수출이 늘지 않고 있어요.”

전철환 총재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경제론’ 초판을 집필할 때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김대통령의 대표적인 경제 서적으로 꼽힌다. 어느 정도나 도움을 주었느냐는 질문에 전총재는 “그 얘기는 쓰지 말아 달라”며 답변하지 않았다.

미흡한 새 한은법

━김대통령의 초기 경제정책은 IMF 관리체제 극복에 집중됐고 일단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경제가 나빠지면서 비판적인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김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장기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어요. 소위 ‘DJ노믹스’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국민의 정부는 단기적으로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보유외환을 확충하고 장기적인 경쟁력을 배양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시행했습니다. DJ노믹스는 곧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창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구조조정도 원칙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이뤄져야 옳았지만, 국가적 경제위기를 맞아 신속한 구조조정을 하려다 보니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시장친화적인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민의 정부가 장기 비전 없이 단기적인 정책만 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창달처럼 장기적인 비전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경제를 그것에 맞게 제대로 운용했느냐 하고 비판을 한다면 몰라도…. 경제 제도와 운용체제, 질서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과정에 국민과 기업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한국은행의 독립이 왜 필요하며, 한국은행법에는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아시다시피 중앙은행은 ‘시니어리지(seigniorage·화폐발행이익)’를 갖는 발권은행입니다. 1만 원권 한 장 찍는 원가가 80원입니다. 80원을 들여 1만 원권을 찍어 구매력을 행사하니 9920원이 한국은행의 이득입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발행하면 물가가 오르게 되죠.

경제성장에 관심이 많은 정치권, 이익을 많이 내려는 기업의 처지에서는 돈을 많이 찍어내는 게 좋을 겁니다.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데다, 물가가 오르면 화폐 부채가 많은 기업이 이익을 보니까요. 만일 중앙은행이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면 돈을 많이 찍기를 바라는 정치권과 기업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어요. 이걸 차단해야 합니다. 과거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은행이 화폐가치와 물가안정을 확보하려면 법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1997년 말 마련된 새 한국은행법은 물가안정 목표제도를 도입하고 한은 총재가 금통위의장을 맡는 등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했다는 점에서 많이 개선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통화신용정책을 중립적·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최종 대부자로서 금융시장의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기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예컨대 새 한은법에도 금통위 의결사항에 대한 재정경제부의 재의 요구권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재경부 차관은 금통위에 출석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예산을 재경부가 승인하도록 돼 있습니다. 재경부는 이런 권한을 통해 한국은행의 정책과 조직 운영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은행이 통화신용 정책과 금융시장 안정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독자적인 금융감독 검사, 지급결제시스템 감시기능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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