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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체력’ 바닥난 기초학문

현장보고

  • 송홍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arrot@donga.com

‘기초 체력’ 바닥난 기초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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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제 실시 이후 우선 학문간 서열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 학적과에 따르면 자퇴생 수가 99년 129명에서 지난해 204명, 올해 4월 현재 219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자퇴생 가운데 90% 가량은 서울대나 사립 명문대의 인기학과로 이동했다는 것이 학교 관계자의 귀띔이다.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 사립 명문대도 재학생 이탈로 고민하고 있다.

사립 명문대 97학번 이모 씨(23)의 경우. 그는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전공으로는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문간 서열은 신라(新羅)의 골품제도와 비슷합니다. 6두품 학문을 전공했다고 취업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 진골, 성골 뒷바라지만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씨는 계열을 이과로 바꿔 의대에 진학할 계획이다. “군대 문제도 해결된 만큼 합격할 때까지 계속 공부하겠다”고 한다.

인기학과를 선택하기 위해 스스로 1년 낙제를 하고 원하는 전공에 재도전하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서울대 98학번 H씨는 ‘전공재수’를 해 입학동기들보다 1년 늦게 전공과정에 들어갔다. 2학년을 마치고 인기전공에 지원했다 낙방한 뒤 1년 동안 재수한 것.



학과에서 학부로 모집단위가 광역화되면서부터 ‘전공재수’ ‘전공삼수’란 조어(造語)가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올해 서울대 자연대의 경우 지망한 전공에서 탈락한 학생은 38명. 그중 18명은 2차로 다른 전공을 지원해 3학년이 됐지만 나머지 20명은 전공재수를 시작했다.

1995년 학부제 시행 이후 서울대 자연대의 천문, 해양, 지질학 등 비인기 전공은 지원자가 급감해 30~40명이던 정원이 현재 절반 정도로 줄었다. 학과 단위로 학생을 선발할 때도 비인기 학과였지만 정원 채우기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려대 한문학과 관계자들은 2000학번 전공지원 결과가 발표되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원자 수는 단 3명. 1지망에서 탈락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원은 어느 정도 채웠지만, 모집단위가 학부에서 단과대학으로 광역화되는 내년이 더 걱정이다. 서양어문학부의 경우도 편중 지원은 마찬가지. 영어영문학과는 193명이 지원해 오히려 정원이 늘어났지만 노어노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엔 각각 8명, 15명이 지원했을 뿐이다.

학교 전체 정원까지 고민해야 하는 지방대학은 사정이 더 나쁘다. 충남 호서대학교가 철학과를 폐과하기로 결정한 뒤 지방대 기초학문학과 교수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지원자가 한 명도 없으면 간판을 내려야 하기 때문. 호서대 철학과는 98년 학부제 실시 후 1지망 전공배정자가 99년 2명, 2000년 2명으로 줄어든 뒤 2001년엔 단 한 명도 지원자를 받지 못했다.

열악한 연구환경도 원인

학생들도 “학부제 강행으로 학생의 전공 선택권이 박탈되고 있다”면서 문제를 제기했다.연세대 총학생회는 모집단위 광역화 반대투쟁을 계속해서 전개할 예정이고, 한총련 소속 각 대학 총학생회도 대대적인 반대농성을 계획하고 있다. 연세대 총학생회 이수연씨(21)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또다시 ‘전공 입시’를 겪게 만드는 학부제는 반드시 재고돼야 한다”며 “아무리 좋은 제도도 부작용이 크다면 중단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기초학문 전공자들의 학부제 철회 요구가 거세지자 서울대는 2002학년도 입시부터 ‘전공 예약제’를 도입, 총 417명을 일반 전형과 분리해 따로 선발하기로 했다. 정원의 일부를 학과 단위로 모집하겠다는 것. 지원자가 적은 학과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인 셈이다. 사범대 불어교육과와 독어교육과가 전공 예약제로 10명을 선발하고 인문대 불문과 독문과가 각각 10명씩, 노문과 서문과 언어학과가 8명씩을 전공예약제로 선발할 계획이다.

기초학문 분야는 응용학문 분야와 달리 정부, 학교의 지원 이외에는 연구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정부 지원은 응용학문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정부와 대학들은 심심치 않게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해왔다. 그러나 연구비 지원 결과를 보면 기초학문에 대한 정부와 대학의 인식이 쉽게 드러난다.

국무총리실의 감독을 받는 정부산하 연구기관 중 인문학 연구를 담당하는 인문사회연구회에는 9개 연구소가 속해 있다. 이들 단체의 총예산은 798억5400만원, 이 가운데 정부출연금은 405억3500만원이다. 반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올해 총예산이 1145억9600만원에 이른다. 그중 정부출연금은 501억8100만원. 인문사회연구회 소속 9개 연구기관의 총예산을 다 합쳐도 KIST 한 곳보다 적다는 계산이 나온다.

“공대 대학원생들은 장학금, 연구비 등을 지원받으면서 공부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박사 5학기가 될 때까지 정부 보조금이나 장학금은 구경도 못 했습니다. 인문학연구소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관심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는 이승일씨(32)의 이야기다.

‘10년째 강의 노트가 바뀌지 않는다’ ‘기초학문 분야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등의 비판에 대해 기초학문 전공자들은 “연구 보조금과 연구시간을 충분하게 제공해준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실제로 대학교수만큼 전화통화하기가 어려운 사람들도 없다. 강의, 각종 회의, 논문심사, 회의에 불려다니다 보면 제대로 연구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사실. 진지한 성찰, 끝없는 실험을 해야 하는 기초학문 전공자들에겐 더욱 그렇다.

“기초과학 연구자에겐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서울대처럼 열악한 연구 환경에선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서울대와 비슷한 상황일 거예요.”

1999년 서울대에서 고등과학원(KIAS)으로 자리를 옮긴 황준묵 교수의 말이다.

‘박사(博士)실업’

대학가에서 “광부, 농부에게는 딸을 시집보내도 기초학문 박사과정 학생에겐 절대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로 박사(博士)실업은 심각한 문제다.

벤처기업에서 웹 기획자로 일하는 김희경씨(35)는 99년 가을학기를 마지막으로 시간강사 생활을 접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딴 문학박사 학위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더라고요.”

나이 때문에 지원할 수 있는 곳도 적었지만 서류전형을 통과하기도 힘들었다. ‘너무 많이 배웠다’는 이유로 회사들이 퇴짜를 놓았던 것. 그는 대학부설 사회교육원에서 웹 마스터 교육을 수료하고 나서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김씨는 “힘들게 한 공부가 쓸모없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순수학문 분야의 박사 실업은 ‘수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초학문의 부가가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77학번부터 인문학 전공자의 교수 임용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했더라면 지금 같은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예요.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3년째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황모씨(37)의 하소연이다.

황씨는 “대학원까지 진학하는 사람이 없어져 실업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지만 학문 공백의 후유증은 엄청날 것”이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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