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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위기의 기초학문

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 육영수 < 중앙대학교 교수·사학 >

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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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지난 3~4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 ‘기초학문의 붕괴’, ‘교육의 총체적 부실’ 등과 같은 말을 흔히 들었을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지식인’, ‘세계화와 대학의 경쟁력’,‘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 등과 같은 용어도 낯설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 그 동안 개혁과 변화의 무풍지대(無風地帶)였던 ‘상아탑’에 안주하던 교수와 교육당국도 이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경쟁 논리와 실용주의 원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다그침이다.
학문의 수요-공급시장에서 생산성 없는 학과와 전공교수는 퇴출되거나 좀 더 영양가 있는 학과로 ‘통폐합’ 되고 있다. 수요자가 취업시장을 고려해 기피하는 철학과, 사학과, 인류학과, 독문과, 불문과 수학과 등 ‘자격증이 없는 학과’는 사라지거나 왜소화하는 경향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장이 요구하고 취업이 보증되는 광고홍보학과, 애니메이션학과, 엔터테인먼트 경영학 등이 신설되어 주가를 올리고 있다. 인문학을 포함한 기초학문 분야가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신세가 된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앞장서서 지식인들이 ‘용가리’의 심형래를 본받아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신지식인’이 되기를 독려하고, 최근엔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 한 편도 게재하지 못하는 교수들’의 과감한 퇴출을 공개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신성한 직업’의 하나로 존경 받던 교수가 이제는 (혹시 10년 넘는 강의노트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는지) ‘감시’의 대상이 됐으며, 돈벌이 되는 지식을 얼마큼 생산했는가에 따라 감봉과 재임용탈락이라는 ‘처벌’의 대상이 됐다.

‘멸종위기의 동물’ 기초학문

한마디로 학원의 인기강사와 세일즈맨을 합쳐 놓은 괴물이 될 것을 교수들에게 강요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수는 되도록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A대학의 ‘교수업적평가안’에 따르면 수강 학생수가 일정한 인원에서 10명 단위로 증가할수록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는 업적평가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너스 점수를 받는다), ‘원어(영어)로’ 강의를 진행하고 논문을 ‘외국의 저명한 학술지’에 ‘수출’하며, 외부 ‘바이어’로부터 연구과제와 연구비를 ‘주문’받아 오는 인물이다. 기초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자마저 ‘시장 전체주의’의 충실한 노예가 되라는 주문이다.

왜, 언제부터 이 꼴이 되었을까? 올곧은 선비의 자존심을 이어받은 남산골 딸깍발이의 후예로서 학문 중의 으뜸인 기초학문 공부에 배불러 하던 학자들이 왜 찬밥신세가 되었는가? ‘멸종위기에 처한’ 기초학문과 ‘백면서생들’을 ‘천연기념물 보호법’을 제정해서라도 보존·번식시켜야 할 필요성과 정당성은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을 모색하려는 것이 이 글이 겨냥한 목표다.



필자는 이번 학기에 사학과 1학년 전공과목으로 개설된 ‘현대사회와 역사’ 과정에서 대학의 역사부분을 맡았다. 서양사상사 전공자로서 대학사에 대한 지식이 얕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한국 대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필자가 이런 주제를 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사학과 신입생들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져보기 전에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해 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대화”라는 어려운 화두에 휘둘리면서 인문학과를 선택한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대학은 어떤 배경에서 태동하여, 어떻게 발전·변화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기초학문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한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서양, 동양, 한국의 대학 역사를 비교사적 관점에서 관찰해 봄으로써 한국고등교육의 붕괴 원인과 인문학의 생존전략에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작용했다.

우리 교육계의 현실과 미래상을 비쳐 볼 거울로서 서양 대학역사의 일반적인 성격과 발달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양에서 대학 발전은 행정과 운영의 주체세력이 교회→국가→시장의 순으로 점진적으로 교체되는 패턴으로 나타났다. 1200년을 전후로 수도원과 성당의 주교학교에 기원을 둔 서양대학은 ‘성직자가 중세대학 학자의 대명사였으며 ‘박사(docteur)’는 교회의 교리(doctrine)를 가르치는 사람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 따라서 초창기에는 기본적으로 ‘교회적 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중세 후반부터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대학의 설립과 후원에 점차 세속군주의 간섭과 영향력이 확대된다. 20세기를 전후로 서양에서는 ‘대중 대학’ 시대가 도래했다. 대중 대학의 출현은 대학의 기능과 교육목표에 중요한 변화를 동반했다. 진리탐구나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수단 혹은 전문지식 습득 등을 목표로 했던 대학교육이 이제는 사회적 수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고등의 직업훈련에 그 초점이 맞춰졌다.

시장논리가 국가를 대체하여 대학교육의 방향타를 결정하는 새로운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발해진 대학과 기업체의 ‘산학협동’도 이런 경향을 부추겼다. 미국 명문 코넬대학이 호텔경영학과를 신설하고 캘리포니아 대학이 드라이 클리닝 공학이라는 교과목을 신설한 것에서 엿보이듯이, 현대 서양대학은 진리탐구의 상아탑에서 산업기술자의 주요 공급처로 성격이 변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무쇠갑옷으로 무장한 대학은 이제 국가도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포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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