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텔레비전 방송국마다 경쟁적으로 사극(史劇)을 내보내고 있다.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사들이 저마다 시청자의 눈길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시청자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든, 아니면 이끌어가든, 그들은 정밀하게 시청률 대차대조표를 뽑아보고 사극을 내보내고 있다고 봐도 좋다.
시청자의 반응 역시 상당히 좋은가 보다. 기대치에 못미치면 예정보다 빨리 마치고 다음 연속물을 내보내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릴 텐데,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태조 왕건’의 경우, 궁예가 죽는 날엔 시청률이 급격히 높아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많고 많은 연속극 가운데 하필이면 사극을 좋아하는지, 시청자가 이왕 사극을 좋아하고 봐야 한다면 수동적으로 ‘보는’ 차원에 머무르지 말고 좀더 적극적으로 사극에 담긴 뜻(제작자, 작가, 또는 역사적 사실의 해석 문제 따위)을 ‘읽어내는’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뜻 있는 일이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을 화두로 삼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역사는 집단 기억이다. 그것은 여럿이서 만들고 여럿이 기억하는 것이긴 해도, 모두가 한결같이 만들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흔히 사람들은 역사가를 집단 기억을 정리해 진실을 찾아내는 전문가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나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요즘처럼 누구나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역사가만 집단 기억을 정리한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또 집단 기억을 정리하는 것은 ‘진실 찾기’보다는 ‘진실 만들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극을 쓰고, 만드는 사람들도 역사가가 하는 일을 해내고 있지 않은가.
‘태조 왕건’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궁예가 죽는 장면을 보면서 성우가 읽어주는 설명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실혹은 진실을 깨닫게 됐을까? 궁예는 왕건과 술을 한잔 나누고 할 말을 다 마치더니 은부 장군을 재촉해서 칼을 맞고 쓰러진다. 왕건이 보는 앞에서 궁예가 쓰러지고 성우의 해설이 흘러나온다. 사료에 보면 궁예가 밥을 훔치다가 맞아 죽었지만, ‘이긴 자’가 남긴 사료를 믿을 수 없어 장면을 임의로 구성했다고 해설한다. 이 해설은 진실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만든 것일까? 성우는 왜 극 흐름 곳곳에 등장하지 않고 단 몇 번만 등장해 사료를 언급하면서, 마치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사료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인가.
영상으로 기록한 집단기억
‘태조 왕건’을 만드는 사람(집필자, 연출자 포함)은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양념을 치고 있다. 비록 ‘제작 및 집필과 연출방향’에선 “짧고 단세포적인 인기 위주의 출연진들을 지양하고 연기자 개개인의 노련미와 개성적인 면을 지원, 인물 성격 살리기에 집중한다” “풍부한 남성미와 서정적인 정서를 조화, 남녀노소가 함께 즐겨 볼 수 있는 드라마 제작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했지만, 견훤의 아버지를 ‘푼수’로 묘사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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