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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史劇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 주명철 <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mcjou9@kornet.net

史劇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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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일본식민지의 비극을 경험한 뒤 광복을 맞았으나 분단을 고착시킨 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어 근대화의 급류를 헤쳐 나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데 바빠 집안의 오래된 ‘흔적’을 강냉이나 엿과 바꿔 먹었다. 자개장을 버리고 호마이카장을 사들였던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살게 되었는데 학교에서 배운 반만년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길이 별로 없으니 얼마나 공허한가? 그리고 현대물을 아무리 재미있게 본다 한들, 사극의 줄거리를 훤히 꿰는 것보다는 공허하지 않겠는가?

뿌리를 찾는 차원에서 사극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재미나 지식을 얻으려고 사극을 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수업시간을 이용해 몇몇 학생들에게 왜 사극을 보는지, 사극을 보면서 어떤 기대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줄거리를 대강 알면서도 보게 된다는 대답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사극이 보여주는 내용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한 편씩 본 다음에 책을 찾아서 사실을 확인한다는 학생도 있었다.

모든 시청자를 대변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대답은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준다. 춘향전의 줄거리를 뻔히 알면서도 새로 제작된 이야기를 다시 보는 사람이 많다. 학교에서 배웠던 이야기를 구체적인 인물, 그것도 유명한 배우의 연기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극중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우리는 돈을 쓰면서 외국을 여행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낯섦과 친해지기 위해서다. 사극을 보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이미 사라진 생활 양식을 접하는 낯섦이 뭇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재미있게 보다 보면 비록 터무니없는 허구나 틀린 이야기라 할지라도 앞선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과 접할 수 있고, 역사적 지식도 함께 얻을 수 있어 보는 것은 아닐까?



방송극작가나 연출자도 시청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 여러 문헌을 뒤지고, 권위 있는 연구자에 자문하는 등 고증을 거쳐 건물, 의상 등을 복원하기 때문에, 시청자는 박물관에 가지 않고도 옛 유물을 쓰는 사람들을 안방에서 만나며 과거의 생활사를 배울 수 있다. 여행처럼 사극을 보는 것도 낯섦과 친숙해지는 일이다.

사랑, 증오, 질투, 음모를 가득 담고 있는 방송극 가운데, 이왕이면 사극이 현대물보다 낯설긴 해도 시청자에겐 뭔가 공부거리를 더 많이 제공한다. 연속극에 나오는 재벌 아들이나 서민가정의 딸 이름은 시청자들에게 중요하지 않지만, 사극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은 외워두면 교양이나 지식을 자랑할 기회에 써먹을 수 있는 영양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극을 보되 그냥 봐서는 안 된다.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비판적으로 시청해야 한다. 우리 문화 유산을 소개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했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쉽게 믿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사진을 봐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사진은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보여주는 순간만 보여주고, 보여주는 만큼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방금 웃는 얼굴을 찍힌 아기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릴 수 있으며, 늘 우는 아기가 어쩌다 웃는 장면을 남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어떤 방송국이 특정 정치인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비판적인지 가려낼 수 있는 시청자라면, 텔레비전 사극을 보면서도 비판적으로 보고, 거기에 담긴 뜻을 읽어내야 한다. 사극을 쓰고, 찍는 사람들의 사관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도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누가 역사를 쓰건, 그가 쓴 역사는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 또는 특정 국가나 문화를 위한 것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엔 주로 정치 엘리트, 사회 엘리트, 굵직한 사건을 다루는 정치사 중심의 역사학이 발달했고 20세기 초부터 사회계급이나 집단의 역사를 다루는 사회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회사는 민중, 대중이 등장하는 역사다. 지금은 문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데까지 역사학이 발전했다.

그런데 역사 서술은 사료의 제약을 받는다. 19세기부터 역사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사료를 더 많이 발굴했고, 새로운 눈으로 사료를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극을 만드는 사람이 이러한 발전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태조 왕건’의 제작자는 “역사는 이긴 자의 몫이 아니라 남은 자의 몫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만으로는 그들이 19세기식 엘리트 중심 사관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태조 왕건’에서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궁정 중심, 장군 중심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의식하면서 만드는 사극의 속성상 큰 인물, 큰 사건을 다뤄야 화려하고 더욱 긴장감을 높여서 재미를 더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극의 제작자가 이용하는 사료가 대부분 ‘이긴 자’가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史劇인가

‘태조 왕건’에는 장군만 부각되고, 병사는 언제나 개성이 없는 무리로 등장한다. 그들이 옷을 바꿔 입으면서 다른 나라 병사로 등장해도 우리는 알아볼 길이 없다. 현대물에서는 가난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이 모두 이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지만, 사극에서는 어찌하여 민초는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왕이나 고을 수령이 걱정하는 말 속에서만 존재할 뿐일까? 홀로 장군 될 수 없다(獨不將軍)는 말이 있듯이, 민초가 있어야 황궁도 짓고, 세금도 걷고, 병사도 뽑고, 농사도 지을 것이 아닌가. 사극 제작자들은 그러한 상식도 모른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은 민중의 삶을 그리지 않는 것일까. 우리에게 낯선 옛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하층민 이야기를 개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태조 왕건’에서 삼국의 접경에 사는 민초의 관점에서 지배자가 바뀌는 과정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짚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이긴 자의 몫이 아니라 남는 자의 몫”이라는 말이 어떤 사관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선명해지지 않겠는가.

왜 사극이며, 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낯섦과 친숙해지는 재미, 역사 지식을 확인하고 늘리고 구체화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에 사극을 본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시청자라면 “누구를 위한 사극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사극을 봐야 한다.

어느 시대나 지배자보다 피지배자가 훨씬 더 많으며 따지고 보면, 지배자의 뜻대로만 피지배자가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지배자의 의도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극이야말로 왕건이 궁예를 이기고 고려를 세우는 것 못지않게 재미있을지 모른다.

‘태조 왕건’ 제작자의 말대로 고려사는 조선을 세운 ‘이긴 사람들’의 시각에 의하여 부정적으로 부각되었는지 모른다. 그 점을 인식하는 제작자가 민중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민중의 삶을 요구해야 할 사람은 마땅히 시청자여야 한다. 역사란 ‘집단 기억’이며 ‘진실 만들기’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두루 참여해 만드는 기억과 진실이 진정한 의미의 ‘남은 자의 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동아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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