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만 사는 집이지만 봉사자들이 밑반찬을 만들고, 요리 솜씨를 자랑하는 형제까지 있어 어지간한 가정집 식사에 견줄 만했다. 낯선 공간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식사였지만 신부님과 출소자 형제들이 정감 어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편안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제각기 일터로 간다. 막노동을 비롯해 고물행상, 퀵서비스, 외판원, 미용실 조수로도 나간다. 이때 집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과 몸이 아픈 바오로 아저씨가 남는다. 바오로 아저씨는 ‘평화의 집’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10여 년이 넘게 있으면서 한때는 ‘평화의 집’ 관리자 노릇도 했는데 지금은 다리를 쓰지 못해 하루종일 집에 머물고 있다. 그는 요즘 신부님들이 ‘평화의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고 있다.
‘평화의 집’은 원칙적으로 1개월마다 출소자의 지속적인 거주 여부를 결정한다. 이런 조치는 거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장기화되면, 출소자 개인의 자립의지가 꺾일 수 있다는 취지에서 생겨났다. 이런 점에서 바오로 아저씨의 장기체류는 원칙 위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다른 기관에 무작정 보낼 수는 없는 일. 바오로 아저씨의 경우처럼 ‘평화의 집’ 운영 규정은 융통성이 있다.
자유시간은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7시부터 취침시간인 10시 전까지다. ‘평화의 집’ 구성원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도 보지만, 그날 겪은 일들을 소박하게 이야기하는 시간도 갖는다.
퀵서비스를 하는 형제는 오늘도 무사히 오토바이를 탔고 얼마를 벌었다며 자랑한다. 그는 퀵서비스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두 번이나 사고를 당했다. 사고 전부터 한쪽 발이 불편했던 그가 아침에 어렵사리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보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안드레아 형제가 갖고 있다. 그것은 안드레아 형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전은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 이때 밀린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등산도 가고 연극도 보러 갔다. 연극은 출소자 형제들에게 낯설지 않다. 1년에 한 번씩 청송교도소를 방문하는 연극단이 ‘평화의 집’에 구성돼 있을 뿐만 아니라, 연극을 전공한 형제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가출소녀를 보호하는 ‘나눔터’의 아이들 3명이 와서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나눔터’를 책임지는 자매님이 며칠간 개인적인 용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의 집’ 식구들은 위아래층을 뛰어 다니는 철없는 소녀들을 보고 말로는 귀찮다고 하면서도 같이 놀아주는 모습으로 미루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마도 그들끼리는 아픔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일요일 오후 5시에는 형제들이 모여 미사를 드린다. 신부님을 포함해 형제들은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 지난 세월에 있었던 일들을 반성한다.
이 자리에서 절도죄로 청송에 수감되었다 나온 안드레아 형제는 세상 모든 사람의 돈이 자기 것처럼 보였던 화려한 시절을 회고했다. 서울에서 한탕하고 부산에 내려가 재벌 회장 부럽지 않게 놀다가, 다시 돈 떨어지면 부산에서 한탕해서 인천으로 가고….
이렇게 방탕한 삶을 산 대가는 사회에서의 격리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다. 원래 안드레아 형제의 선친은 동네 유지였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유년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삐뚤어진 삶을 살았다. 그 결과 교도소에서 장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던 형은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형제가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고아로 태어나 기억이라고는 얻어맞은 것밖에 없다는 프란체스코 형제는 한때 죽기로 결심하고 며칠간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굶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호프집에서 오래 일했다. 그런데 호프집 주인은 그가 오갈 데 없다는 것을 알고 헐값에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 형제는 세상이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해 앞뒤 가리지 않고 가게에 불을 질러 전과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과격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유난히 겁도 많고 조금은 모자란 것처럼 느껴진다. 선한 사람의 순박함이 어느 날 세상의 냉혹한 인심에 배신당했음을 알았을 때, 순간적으로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명문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여러 종류의 장사를 하던 바울 형제가 ‘평화의 집’에 오게 된 사연도 기구하다. 신혼부부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사정을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하는데 언뜻 희극인지 비극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사연 많은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나는 지난 세월에 죄 지은 일이 결코 없었던가? 다만 그 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않은가?
출소자의 꿈과 좌절
시간이 지나 형제들과 개별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소망과 좌절도 알게 되었다. 집과 직장 그리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정….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것을 그들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고 살기 때문에 출소자들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소박한 꿈은 출소자들에게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출소자들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전과자’라는 낙인. 그것은 삶의 멍에가 되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안드레아 형제는 막노동을 열심히 나가지만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하는 눈치다. 돈을 달라고 말하면 도리어 책잡힐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출소자라는 낙인이 당연한 권리 행사까지 가로막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출소자의 사회 복귀를 돕지는 못할망정 그들이 지닌 약점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미용을 배워 보겠다고 미용실에 다니던 형제는 며칠 뒤부터 발길을 끊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처럼 편안하게 미용을 배울 수 없는 분위기 탓이 아니었을까?
빡빡이 형제가 주차 문제로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것은 작년 12월28일이었다. 아무런 연락처 없이 집 앞에 차를 세워둔 사람과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는데 경찰서에서 정작 조사를 받은 것은 전과자인 빡빡이 형제였다. “잘못한 것은 저쪽인데 왜 우리 형제만 나무라느냐?”는 항의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카드영업을 하던 형제는 몸이 불편한 바울 아저씨의 부탁으로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그 길로 사라졌다. 퀵서비스를 하는 형제도 예전에 바울 아저씨의 통장에서 돈을 꺼내간 적이 있었다. 빨리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에 훔친 돈으로 동해안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했지만 계속 비가 내리는 바람에 모두 날렸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 여인과 데이트도 하지만, 집 한 칸 없는 처지이기에 결혼은 아직 산 너머의 일이다.
고물 행상을 하는 프란체스코 형제는 구리선을 모아둔 가게에서 네 번인가 물건을 훔치다가 구속되었다. 평소에 자기 돈은 한푼도 쓰지 않는 알뜰한 사람인데 빨리 돈을 모으려고 구리선을 훔쳤다고 한다. 대모인 리디아 자매님이 찾아가자 그는 경찰서 한구석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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