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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자들과의 30일 체험기

한번의 실수 눈물의 재활, 끝없는 차별

  • 차형근 < 변호사 >

한번의 실수 눈물의 재활, 끝없는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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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이 돈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닐 때 단념하는 법을 안다. 하지만 교도소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면서도 돈을 둘러싼 유혹에 유독 약한 이들이 출소자다.

프란체스코 형제는 구속되었다. 하지만 신부님과 리디아 대모님의 정성이 담당 검사를 감동시켜 그는 다시 ‘평화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신부님은 자기가 한 말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다시 나쁜 짓을 하면 ‘평화의 집’에서 내쫓겠다”는 그 말을…. 그들 형제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돌아오면 내보내야 하는 것일까? ‘평화의 집’에서 나가면 갈 길이 뻔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것이 신부님들의 고민이다. 신부님은 쉬지 않고 사고를 저지르는 형제들에게 실망하고,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고심하다가 수일간 가출(?)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두 신부님이 모두 나가셔서 본의 아니게 내가 신부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날따라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한 형제가 걱정되어 여러 차례 안드레아 형제에게 연락을 취하게 했다. 의협심이 강하고 형제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드레아 형제는 걱정하지 말고 주무시라고 했지만 신부님도 안 계시는데 혹시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 늦게까지 그 형제를 기다렸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 안드레아 형제에게 화를 냈는데 평소와는 달리 험상궂은 모습으로 나에게 맞서는 안드레아 형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서야 안드레아 형제가 저녁 때 밖에서 소주를 먹고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장사인 저 친구가 거칠게 나오면….

“신부님이 안 계실 때는 내가 신부님을 대신한다. 빨리 그 형제를 데려와.”

만약 그때 신부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화만 냈다면 어찌되었을까? 내 이야기에 투덜대면서도 집을 나선 안드레아는 그 형제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인가 분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잘 참다가도 욱하는 날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 출소자들이다. 내가 ‘평화의 집’을 나오고 난 뒤 또 한 번 두 신부님이 동시에 집을 비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안드레아 형제가 다른 형제와 다투다가 유리창을 깨고 마침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 일로 결국 안드레아 형제는 ‘평화의 집’을 떠나야 했다.

오랜 기간 수형 시설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장애가 찾아온다.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평화의 집’ 형제 중 평소엔 농담을 잘하고 활발하던 형제도 사회활동 중에는 말을 아낀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서다. 말 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것이 본인은 물론 상대방에까지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수십 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흑인 죄수를 연상케 한다.

그 흑인은 정해진 공간에서 자고 정해진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지만,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 터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소변을 보러가면서도 꼭 주인에게 물어본다. 감옥에서의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친구가 없고, 그렇다고 친구들이 있는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던 그 흑인은 악몽에 시달린다.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는 현장에 갔더니 함께 감옥에 있다가 먼저 가석방되었던 사람이 자살하면서 남긴 서명이 있다. 결국 그 흑인은 먼저 탈출한 백인 죄수가 꾸민 낙원으로 탈출한다.

출소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

사회에 버려지는 오갈 데 없는 출소자들에게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언제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으로 돌아가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범죄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세상’을 별도로 꾸며주면 된다.

17세기 말의 한 법규에는 어떤 도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했을 경우에 취해야 할 조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우선 엄격한 공간적 분할이다. 도시와 지방을 격리하고 외출을 금지한다. 또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고, 부근을 배회하는 동물은 모두 도살한다.

우리는 17세기의 법규를 다시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헌법을 개정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인간’과 ‘인간의 존엄성이 필요없는 인간’을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

육체적인 장애자에게 법은 특별한 호의를 베푼다. 주차공간이나 취업 면에서도 배려한다. 정부도 보조금을 아끼지 않는다.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서적 장애인에 속하는 출소자에게 법은 어떤 배려를 하고 있는가? 과연 육체적 장애인이나 어린아이를 배려하는 만큼 출소자를 배려하고 있는가?

이 글을 쓰는 도중에 어떤 신문기사를 보았다. 모 대학의 간호학부 교수 5명이 공동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다른 의학적인 처방 없이도 간호사나 보호자가 손을 잡아주는 ‘마음의 치료’를 해주면 수술환자의 심리적인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급격히 줄어 환자 회복에 큰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출소자라는 ‘환자’에게 우리가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는 치료를 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의무적으로 한 차례 손을 잡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끌어안는 마음에서 수시로 손을 잡아준다면 많은 출소자들이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미가 모두 부지런한 줄 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어느 개미 집단은 70%만 부지런할 뿐 나머지 30%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개미들을 골라 한 집단을 만들면 또다시 70% 정도만 부지런히 일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한다. 반복하여 수차례 같은 실험을 해도 신기할 만큼 같은 비율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손을 잡아준다고 해서 출소자 형제를 모두 구제할 수는 없다. 개미의 예에서 보듯 일정 비율만 구제할 뿐이다. 그러나 구제되지 못한 형제들에게 다시 꾸준히 손을 내민다면, 그중 일정 비율만큼은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정된 시간이 지나 ‘평화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맞이하던 가족들의 모습. 오랜 기간 함께 살아온 가족인데도 잠시 떠나 있다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 무엇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가족이 없는, 가족이 있어도 함께할 수 없는 평화의 집 식구들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동안 정들었던 모양이다.

‘평화의 집’을 운영하는 신부님들은 민영교도소를 꿈꾸고 있다. 민영교도소를 만들어 출소자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프로그램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신부님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사회적응만이 재범을 줄이는 길임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정부는 현재 이에 관한 법과 시행령을 만들었지만, 사회적 관심은 낮은 상태다.

밤늦게 생맥주집에서 ‘평화의 집’ 운영문제를 놓고 고뇌하던 신부님들에게, 같이 지내면서 편안하게 대해주었던 형제들에게, 그리고 한 달간의 가출을 허락한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신동아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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