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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와 탑비, 장보고와 留學僧 세력의 합작품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부도와 탑비, 장보고와 留學僧 세력의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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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와 탑비, 장보고와 留學僧 세력의 합작품
그가 돌아왔을 때는 교종불교가 신라에서 만개한 상태로 불국사와 석굴암 조성이 한창 진행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전수해온 선종 이념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고, 그는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한 단속사에 머물면서 인연 닿는 대로 이를 전파하다가 혜공왕 15년(779)에 76세로 이곳에서 열반한다. 그러자 삼륜(三輪)선사를 비롯한 제자들이 선종의 법식대로 화장하여 사리를 수습하고 부도를 세워 이를 봉안하려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선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정에서 왕명으로 이를 세워줄 리 없었다. 30여 년을 기다리다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현재의 당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국상(國相)이며 병부령(兵部令) 겸 수성부령(修城府令)인 이간 김헌정(金獻貞)의 도움으로 헌덕왕 5년(813)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도를 해 세우고 탑비를 건립하게 된다. 그 전말을 현존한 몇 종의 비문 탑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단속사 터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부도나 탑비가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어 그 형식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원성왕(785∼798년)의 손자이며 희강왕(836∼837년)의 아버지로 익성(翌成)대왕으로 추존된 김헌정이 직접 지은 비문에서 분명히 ‘부도를 만들어 사리를 두었다(造浮屠存舍利)’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선문조사의 부도와 탑비 건립은 신행선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야 할 듯하다.

그 다음 남종선맥을 최초로 이어온 이가 원적(元寂)선사 도의(道義)다. 오대(五代) 남당(南唐) 원종(元宗) 보대(保大) 10년(952) 천주(泉州) 초경사(招慶寺)의 정(靜)·균(筠) 두 선사가 편찬한 ‘조당집(祖堂集)’ 권17 설악산 진전사(陳田寺) 원적(元寂)선사조에 따르면 본래 도의선사 비문이 있었다 한다. ‘나머지 사실은 비문과 같다(餘如碑文)’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降峴面) 둔전리(屯田里)에 남아 있는 진전사 터에는 비석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비석의 탁본이나 내용 사본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도의선사 부도라고 생각되는 (도판 4)가 남아 있어 보물 제439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비석이 없어져서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이 부도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당집’ 권17 설악산 진전사 원적선사조의 기록으로, 그가 당 덕종 건중(建中) 5년(784), 즉 선덕왕 5년 갑자에 견당사 김양공(金讓恭)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西堂) 지장(智藏, 735∼814년)의 심인(心印)을 얻고 백장(百丈) 회해(懷海, 720∼814년)의 인가를 받아 마조(馬祖) 도일(道一, 709∼788년)의 선맥을 모두 아울러 받아 가진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893년에 ‘문경봉암사지증대사비문’을 지으면서 “장경(長慶, 821∼824년) 초에 이르러 도의라는 승려가 있어서 큰 뜻을 세우고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 서당(西堂)의 속마음을 뵙고 지혜 광명을 지장에게 배우고 돌아왔다(長慶初, 有僧道義(缺落4字) 西泛賭西堂之奧, 智光智藏而還)”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그래서 도의선사가 821년경에 귀국한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기록된 도의선사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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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운허(耘虛)대사가 편찬한 ‘불교사전’에는 이후 도의선사가 설악산에 들어가 40년간 수도하다 돌아갔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인명사전에서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어 필자도 의심 없이 이를 따랐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부도 양식의 변화를 추적하다 보니, 그 설을 인정할 경우 844년에 세워지는 국보 제104호 (도판 5)보다 이 가 20년 가까이 뒤지는 결과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양식 진전이 전도(顚倒)되는 불합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40년 수도설이 근거 있는 얘기인지, 유관 자료를 모두 뒤지면서 확인하였으나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당나라에 있었던 세월이 38년이니 재당 근 40년이란 구절이 사전 편찬 당시에 잘못 끼어들어 이런 결과를 나았던 것 같다.

부도 양식으로 보면 가 보다 적어도 10여 년은 앞선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는 830년대에 세워져야 하니 흥덕왕(826∼835년) 때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서당 지장 문하에서 배출한 3대 동국선문조사 중의 하나로 남원 지리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초조가 되는 홍척(洪陟, 또는 洪直)선사가 흥덕왕대에 뒤따라 들어와서 흥덕왕과 그의 아우이며 민애왕(閔哀王, 838∼839년)의 아버지인 선강(宣康)태자의 귀의를 받아 남원 지리산 기슭에 실상사를 짓고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북산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北山義, 南岳陟)’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는 지증대사 비문 내용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흥덕왕은 그 23년(828)에 바로 장보고에게 1만 군사를 빌려주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한 주인공이다. 그러니 장보고 선단을 통해 신속하게 전달되는 당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장보고 선단을 이용해 귀국한 홍척선사를 왕사로 대우할 만큼 남종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듯하다. 그런데 홍척선사의 사형(師兄)인 도의선사가 고령으로 이 어름에 돌아가니 왕명으로 부도와 탑비 건립을 지시하고 시호도 내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원적선사라는 시호가 그렇게 내려진 것일 터이고 탑호도 있었을 터이나 비석이 파괴되어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부도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설악산 기슭의 진전사 터에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 형식이 특이하여 이후 8각당형(八角堂形) 부도라고 하는 일반적인 부도 형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기단부가 일반 석탑 기단부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 위에 8각 연화대좌가 만개한 연꽃처럼 받쳐지고 그 씨방 위에 8각당집의 몸체가 8모기둥 모양으로 올려져 있다. 그 위로 8모 지붕이 부드러운 물매와 산뜻한 추녀 끝을 자랑하며 덮여 있고, 지붕마루는 뒤집어진 연꽃잎으로 장식되었는데 그 위로 모란꽃 봉오리 모양의 돌구슬 장식이 올려져 마무리되어 있다. 그 돌구슬 장식 밑둘레에는 위로 핀 연꽃잎이 죽 둘러져 있다.

이런 부도 형식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하나뿐이다. 신라 석탑 양식이 통일신라 고유 양식인데 그 석탑의 기단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 위에 목조 8각당집을 상징하는 석조 구조물을 올려 놓았으니 다른 나라에 있을 수 없는 고유 형식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일반 석탑과 비슷하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기단부라 할지라도 용납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844년에 돌아가는 염거화상의 부도에서는 그 스승의 부도에서 보이던 기단 처리를 일신하며 새로운 부도 형식을 창안해 놓는다.

이는 보조선사 체징이 837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18주를 두루 여행하며 선지식을 만나보고 나서 ‘우리 조사께서 말씀하신 것에 더 보탤 것이 없는데 어찌 멀리 가려고 노력하겠는가(我祖師說, 無以爲加, 何勞遠適)’ 하고 840년에 장보고 선단을 따라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 보조선사 체징이 당나라의 여러 조사 탑을 친견하고 와서 창안해 낸 독창적인 형식일 수도 있다.

염거화상탑의 독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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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국보 제104호 의 형식이 어떻게 독창적인가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기단부를 사자좌와 연화좌를 중첩하는 방법으로 일신해 냈다. 하단은 8모로 깎아 각면에 사자를 돋을새김으로 표현해 놓았다. 사자좌임을 표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3단의 층급받침을 통해 간격을 줄여나가다가 그 위에 다시 8모 기둥을 깎아 내었는데, 각면에는 안상(眼象) 안에 보개(寶蓋) 보주(寶珠) 꽃타래 등 7보(七寶) 무늬를 돋을새김해서 장식하였다. 여기까지가 한 돌이다.

그리고 그 위에 상단 연화좌대를 올려 놓았는데 연꽃잎을 두 겹으로 각각 16장씩 둥글게 돌려 새겨 활짝 핀 연꽃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딴 돌로 씨방을 8모로 깎아 다시 올려 놓았다. 8각당집의 몸체를 받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연목과 기와골이 분명한 목조 기와지붕을 석조로 번안하여 그 위에 덮어놓았다.

8각당집의 몸체가 한 돌이고 지붕이 또 한 돌이다. 석조적 결구의 효용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목조적 8각당집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8각당의 몸체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 아래 위로는 평방(平枋) 창방(昌枋) 및 하방(下枋)을 상징하는 가로대를 끼워 목조 건축의 벽면 구성을 재현해 놓았다.

앞뒷면에는 앞문과 뒷문을 새겨 놓았는데 자물쇠와 한 쌍의 문고리가 표시되어 두 쪽 문이 닫혀 있는 모습이다. 두 문의 좌우에 해당하는 각 4면에는 사천왕이 양각으로 새겨져서 사천왕이 사리를 외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탑신석의 받침돌인 8각 씨방돌의 8면에도 안상을 설치하고 그 안에는 주악(奏樂) 천인을 새겨 놓았다. 음악을 연주하여 사리를 즐겁게 하려는 배려인 듯하다.

부도와 탑비, 장보고와 留學僧 세력의 합작품
상단 연화대좌는 의 연화 받침석을 확대한 의장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하단 사자대좌는 뜻밖의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불상의 연화대좌나 사자대좌로부터 차용한 것이니 전혀 엉뚱한 발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는 이렇게 가까이에 널려 있는 수많은 요소를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조선사가 이런 기단부 도입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은 중국 여행중에 장안의 초당사(草堂寺)에서 보았던 (도판 6)에서 그 발상의 단초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양식 기법으로 보아 당 현종 천보(742∼755년) 연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사리탑은 구름에 휩싸인 수미산을 상징하는 수미대좌 위에 목조 8각당집이 올려져 있고 그 위로 4각 기와 지붕이 덮여 있는 모습의 석조 번안물이다. 8각의 몸체에 4각 기와지붕이 덮여서 조화가 깨지고, 몸체에 격자창과 아래위 명창 등을 지나치게 표현하여 조잡한 느낌이 들며, 수미단의 반복된 구름장식이 지루하게 다가오지만, 8각당 부도 형식으로는 자못 참신한 의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조선사는 아마 이를 보고 조사인 도의선사부도 건립 당시 새로운 부도형식 창안에 고심하던 일을 기억하면서, 전광석화(電光石火; 벼락 불빛이나 부싯돌에서 일어난 불빛)처럼 부도형식에 대한 구상이 뇌리에 떠올라서 이를 기억하였다가 귀국한 다음 그 스승이 돌아가자 과 같은 독창적이고 참신한 부도 형식을 창안해냈던 것 같다.

이런 석조 8각당형 부도 형식은 통일신라 초기에 고선사지 3층석탑이나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 이루어낸 신라 석탑 형식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 우리나라 고유 부도 양식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니, 우리는 그런 현상을 보물 제273호인 곡성 (도판 7)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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