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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학 집대성한 ‘한의사들의 대부’ 東原 이정래

文理를 튼 깨달음, 醫道의 경지

  • 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ojong@donga.com

동양의학 집대성한 ‘한의사들의 대부’ 東原 이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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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재림 예수

우리 기자들에게 최 목사를 찾으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하긴 그를 인터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특종 중의 특종이 될 터였다. 치열한 물밑 경쟁이 가열되고 있었지만, 최 목사는 마곡시를 에워싸고 있는 검푸른 바다 밑으로 숨어버렸는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시끌벅적하던 새해 1월이 다 지나가던 어느 날, 사라졌던 최형기 목사가 공식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뜻을 가족을 통해 언론사에 알려왔다. 기자들은 차라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 머리 속에는 곧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왜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의 부활의 비밀을 밝히려는 것일까? 아니면 신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일까?…’

온갖 구구한 억측과 흥분 속에 마침내 기자회견 날이 다가왔다.



최 목사는 초췌하고 긴장한 모습으로 회견장에 나타났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꼭 다문 입술은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더 늙은 듯했다. 나는 회견장 앞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붙여준 이야기처럼,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가 아닙니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 그렇듯 어느 날 죽음의 손에 이끌려 갔다가 저도 모르는 힘에 의해 다시 살아났을 뿐입니다.

죽음은…신의 종복인 제게도 죽음은, 사실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인생의 공과를 모조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려진 것처럼 선한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과거에 저는 사랑하는 여인을 제 인생의 앞날을 위해 배척하기도 했고, 결혼해서는 몇 차례나 아내가 아닌 여인들과 불륜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저의 이기적인 욕심과 명예욕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기만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솔로몬 왕처럼, 하느님에 대한 회의에 빠진 나머지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이방의 신을 흠모하기도 했습니다.

제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도 동원할 태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저지른 죄악까지 생각한다면, 그리고 제가 평범한 신자가 아닌 목회자 신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의 죄는 이 세상의 어떤 죄악보다 크고 무거울 것이며, 이 세상 어떤 악인보다 더 악독한 죄인일 것입니다. 신이 예정한 구원자 명부에 제 이름 석 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죽음이, 죽음 후에 다가올 신의 심판이 두려웠습니다. 가능하다면 생을 연장시킬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신을 믿고 또 목회직에 있었다고 해서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을지, 모든 숨겨진 비밀들조차 꿰뚫어 보시는 정의의 신께서 과연 저를 용서해 주실지 두려웠습니다……제 삶은 그런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제 모든 기도는 심판의 날을 대비한 영악한 대비책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말한 참사랑의 길인 희생과 고난의 길을 걷기보다는, 오로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영생과 복을 구하려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신과 그리스도를 자신의 도구로 삼고 있듯이, 저 역시 죽음에 대한 일종의 대비책으로 신을 제 가슴속에 가두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죽음은……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 그 죽음의 세계에서 제가 본 것은 심판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세계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과학적으로 얘기한다면 사차원의 세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일종의 가상현실의 세계 혹은 환상의 세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무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계는 결국 무의 세계와 다름없으니까요. 여하튼 저는 그 세계에서 평소에 제가 꿈꾸던 모든 상황을 창조해낼 수 있었으며, 원하는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은 마치 동화에서처럼 꿈과 자유로운 환상이 펼쳐지는 세계였습니다. 한마디로, 그 세계는 죽은 자들 저마다의 천국만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불멸하는 세계, 고통이 없는 세계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계…….”

목사는 잠깐 말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기자회견장이 해일의 충격을 맞은 것처럼 출렁거렸다. 그의 고백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목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감고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제가 목사였기 때문에, 천국만을 보고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겪은 일들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날 이후 지금까지 세상의 눈을 피해 은둔한 가운데서 많은 시간을 고뇌와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제 이성과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과, 제 신앙의 확신 속에서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런 번거롭고 구차한 자리까지 마련할 추호의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죽음의 세계에서 소위 현세에서 살인자라고 불리던 자들과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저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했고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만약 죽음 이후에 그런 멋진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범죄는 더 이상 범죄일 수 없고, 범죄를 저지를 만큼 곤궁하다면 스스로 현세를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그 세계에서 저는 처음으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죄악에 대한 자책도 없이 해방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감시하는 법도, 도덕도, 신도 없다는 사실, 아니, 저는 그 세계에서 신이 되어 있었고 저뿐만 아니라 죽은 모든 이들이 신과 마찬가지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제 죽음에 대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활하고 난 후의 순간에 왜 기뻐하기보다는 불쾌하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음 뒤에 지옥 같은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끔찍한 영혼의 심판은 없습니다. 죽음은 죽음 자체일 뿐입니다. 아니, 죽음이야말로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시작하게 되는 출발점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짧은 시간만 있다 왔기 때문에 많은 것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제가 살아 돌아와서 다시 느낀 것은 현세에 산다는 것이 오히려 지옥의 형벌 같다는 생각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이 현세는 ‘비탄의 계곡’인 것입니다. 현세의 고통에 비한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맛보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여러분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지난 한 달여 동안 제가 살아왔던 생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인간의 삶과 죽음과 신에 대해서, 그리고 현세에 살아 있는 여러분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과 번뇌를 거듭했습니다.

저는 괴로웠습니다. 저는 그 동안 저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까지 기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이 따르는 죽음의 그 순간에 대한 우리 인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두려움과 불완전하고 짧디짧은 생을 살다 가야만 하는 우리 인간의 한계, 무엇보다 불멸에 대한 인간의 불가피한 갈망 때문에 수천 년간 우리 인간이란 종족은 종교라는 올가미를 창안했고, 그리고는 그 올가미에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매달아왔다는 사실을 비참한 심정으로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 목사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가에는 회한과 슬픔 때문인지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어느새 기자 회견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정적에 사로잡혔다. 목사는 긴 한숨을 토해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마쳤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이제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영혼의 안식과 평정, 그리고 모든 인간의 궁극적 소망인 행복을 위해,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제가 다녀왔던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갈 생각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제가 드린 모든 말씀의 진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검은 빛이 감도는 어떤 물체를 꺼냈다. 작은 권총이었다. 목사는 그 권총을 관자놀이에 갖다 댔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타앙! 하는 굉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의 머리가 터지면서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최 목사의 몸이 쿠당탕 소리를 내며 탁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기자 회견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비명과 아우성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수백 대의 카메라는 그 소동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고 있었다. 아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채 그 놀라운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운명의 힘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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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에 따르면 신이 내려준 생명은 인간 자신이 멋대로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전적으로 신의 몫이다. 따라서 자살은 어떤 이유에서건 신성모독이자 불경이며 실로 커다란 죄악에 속하는 것이다. 최 목사가 사후 세계를 올바로 보지 못한 것은 사탄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찾아올 하느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행위는 인간을 죄악에 빠뜨려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사탄의 계략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최 목사의 부활은 신의 자비와 은총이 아니라 이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신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적 그리스도, 즉 사탄의 최후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집행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라는 말이 의미하는 그대로 사탄은 악마가 아닌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세상에 출현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사탄의 사악한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더 강고한 믿음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최 목사라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옹호하는 열렬한 신앙의 십자군 대열을 굳건하게 꾸려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성한 과업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최 목사의 자살 사건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문과 불안에 대해 기독교계가 보인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기독교계는 최 목사를 사탄 루시퍼, 혹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몰아붙였다. 기자회견 전날까지만 해도 성스러운 신의 전령, 부활한 예수로 추켜세워지던 그는 하루아침에 사탄으로 낙인찍혀 기독교계로부터 영구파문당했고, 기독교식 장례마저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미 기독교, 아니 모든 종교를 거부해 버린 그에게 그런 파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열렬히 바랐던 것처럼 펄펄 끓는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그가 꿈꾸던 천국에서 지극히 평안한 삶을 보내고 있을 터인데.

신문에 실린 한 목사의 칼럼을 읽던 내 옆자리의 박 기자가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적그리스도, 십자군…참으로 살벌하지 않습니까?”

“그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는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선배님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는 커다란 눈을 굴리며 내게 물었다.

“글쎄…잘 모르겠어. 이젠.”

“기독교인들은 편하겠어요. 자신의 삶을 의탁할 확실한 지주가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같은 무신론자들이야말로 참 모진 인간들이죠? 오로지 자기자신밖에 의탁할 데가 없으니. 최 목사 사건 후에 저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왜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일까, 하구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희망이나 삶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결국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더군요. 죽음의 순간에 찾아오는 고통이라는 것. 그런데 최 목사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모든 게 헷갈리기도 해요. 무엇이 진실인지.”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싱겁게 미소를 지었을 뿐.

나는 사무실 창문 곁으로 가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내 시선은 바깥 풍경을 향해 있었지만 머리 속은 갖가지 상념으로 복잡하기만 했다. 박 기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여론의 심상찮은 흐름은 나도 감지하고 있는 바였다.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도덕론자들도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 최 목사를 격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 목사의 주장이 인간세상에서 선을 추방하고 악을 부추기려는 범죄적 도발이자, 악한과 범죄자들에게 무소불위의 ‘면죄부’를 주기 위한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거짓말이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종교계와 도덕론자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공포, 죽음이 가져다주는 완전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법과 도덕과 종교를 떠받치는 굳건한 심리적 토대가 아닌가? 심판이건 윤회이건 신과 내세 따위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면, 인간 사회는 이제 어떤 기초 위에 윤리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무(無)라는 바닥 모를 늪지 위에 어떤 도덕의 탑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위기의식은 어찌 보면 그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인간 사회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시민들은 벌써부터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양떼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최 목사에 대한 종교계와 도덕론자들의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최 목사 사건은 마곡 시민들의 뇌리에서 새롭게 환기되었고, 그의 주장을 더욱 진실한 것으로 확신케 만들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최 목사는 마치 강력한 환각제처럼, 대중의 영혼 속에 더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어떤 의문이 내 머리를 스쳤다.

“지금 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젊은 시절 나를 격렬하게 사로잡았다가 어느새 세월과 함께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그 원초적인 질문. 나는 놀랍고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 질문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무(無) 앞에 선 인생. 내게 인생이란, 무가치하고 허무한 이 세계에 던져져 이런 저런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은 허무만을 발견한 채 죽어가는 것일 뿐이었다. 영원토록 바위를 산정으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시지푸스의 위대한 긍정이란 것도 실은 얄팍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삶의 허무를 보상하기 위해 스토아주의적 운명애란 것으로 자기자신을 심리적으로 합리화하기. 하긴 의미를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형식이든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내게 삶은 그저 버티며 사는 것, 무덤덤하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일 따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해안 도로를 달리면서 검은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며 그런 생각에 젖어들던 나는 불현듯 아내를 떠올렸다.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의 얼굴.

나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묵직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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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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