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이념논쟁의 부재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민족의 광복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쪽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외세였고, 그 결과는 민족의 분단으로 나타났다. 외세의 개입과 분단으로 인해 광복 후의 정국은 극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고, 좌우익 간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광복 직후의 좌우익 대립과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이 대립이 꼭 이념대립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좌익이나 우익이나 서로 상대방을 공격할 때 최대의 무기는 상대방을 ‘반민족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남북에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좌우익 간의 대결에서 민족문제는 순수한 이념문제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남북이 각각 상대방을 북괴로, 남조선괴뢰도당으로 매도한 것은 그 증거다.
광복 후 좌우익 간 논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벌어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다. 광복 직후의 열기 속에서 정치적 수세에 놓여 있던 우익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신탁통치 결사반대에서 갑자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태도를 바꾼 좌익을 소련의 지령을 따르는 외세의 앞잡이로 몰아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탁통치 논쟁이 한창이던 1946년 1월 박헌영의 외신 기자회견을 둘러 싼 논란은 좌우익의 대결에서 이념보다 민족이 훨씬 더 중요한 변수였음을 잘 보여 준다. 당시 우익신문들은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자신은 소련 한 나라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련 연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박헌영은 이를 부인했고, 또 당시 기자회견에 참가했던 다른 미국기자들도 박헌영은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우익 진영은 매국적징치(賣國賊懲治) 각단체긴급협의회를 구성하고 박헌영의 발언은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영원히 조선 민족의 소련의 노예화를 유치하는 매국, 매족적 행위”라고 규탄했다. 당시 대중들은 신탁통치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주장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소(反蘇)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반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로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꾸어 조선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크게 손상된 마당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박헌영과 좌익은 큰 상처를 입었다.
신탁통치 논쟁 이후 좌우익 간에 다시 한 번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때는 1946년 여름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려 했을 때다. 이때 좌익과 우익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여 좌익은 ‘5원칙’, 우익은 ‘8원칙’을 발표했다. 아마도 우리 현대사에서 좌익과 우익이 공개적으로 논쟁다운 논쟁을 벌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까 한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주먹보다 총알이 먼저 날아가는 와중에 좌우익 진영 내에서 그래도 합리적인 지도자로 평가되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이 차례로 정치적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백범 김구 선생 마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는 1949년 6월. 남로당 프락치사건으로 국회 내의 소장파들이 체포되고,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경찰의 습격을 받아 해산되던 그 뜨거운 여름의 일이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백범 선생마저 남북협상을 다녀오고 난 뒤에는 여순반란 사건의 배후에 있는 불순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다가 끝내 변을 당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극히 최근까지의 시기는 논쟁의 시기라기보다는 약간의 좌파적인 언사도 용납되지 못하던 필화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념 문제와 관련된 1950년대의 대표적인 필화 사건으로는 1957년 서울대 문리대 교지에 실린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라는 글 때문에 학생이 구속된 사건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글의 필자는 현재 ‘조선일보’에서 보수논객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근일 씨였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의 지배 하에 있던 우리 사회에서는 계급이란 말조차 사회과학에서 명백히 다른 개념인 계층이란 말로 대신해야 했다. 제헌 헌법 초안의 ‘인민’이란 용어가 인민은 빨갱이들의 말인데 헌법에 넣고자 하는 것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우익의 호통 때문에 ‘국민’으로 바뀌어야 했던 상황에서 이념논쟁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 대신 빨갱이 사냥과 사상검증만 있을 뿐이었다.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가 결국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조봉암이 결성한 진보당의 좌절, 5·16 군사반란 이후 간첩의 자금을 받았다는 명목으로 처형된 ‘민족일보’의 청년 발행인 조용수 사장의 비극은 우리 사회가 사상의 자유를 기본가치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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