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좌우익 논쟁과 제3의 길

  • 이수훈 < 경남대 교수· 사회학 >

    입력2005-03-22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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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여름, 한국사회는 무더위를 방불케 하는 일대 홍역을 앓고 있다. 다름아닌 좌우 이념논쟁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제반 정책을 두고 집권여당 대 야당, 진보적 개혁세력 대 보수적 안정세력 간의 인식과 해석이 극단으로 갈리면서 급기야 ‘좌우 이념논쟁’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논쟁의 구도는 한층 더 복잡해서 갈피를 잡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정책노선과 실행에 분명한 성격을 보이지 못했고, 일관성 있는 정책의 시행마저 부진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정책노선의 혼맥상은 이념과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제공할 소지를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 좌우 이념논쟁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좌우 이념논쟁을 두고 어떤 사람은 광복 이후 극심했던 이념적 혼란기에 비유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는 한국사회가 언젠가는 앓고 넘어가야 할 통과의례로 보기도 한다. 싸움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적어도 싸움의 과정에 지불한 희생에 값하거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결과를 기대한다면, 필자는 이 논쟁이 후자의 해석에 해당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에 따르자면 그 결과는 한반도 분단과 그 후의 비극적인 사태들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논쟁은 내용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 실패에 관한 논쟁이며, 형식에서는 차기 대권을 앞두고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일환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김대중 정부는 포괄적 의미에서 개혁에 실패했다. 벌집 쑤시듯 온갖 분야를 건드리기만 했지 제대로 수습한 것이 거의 없다. 집권세력과 개혁에 동참한 사람들은 이런 진단 자체를 반개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작금의 분위기인 듯하지만,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바닥인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지적이 그르지 않을 뿐더러 반개혁도 아니다. 진정한 개혁세력이라면 김대중 정부의 개혁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뒤에 왜 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현재 보수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계와 건전한 개혁을 표방하는 시민사회, 그 어디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둘째, 그런데도 집권세력의 정권재창출을 향한 노력은 너무 노골적이고 도를 넘어서고 있다(overaction).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고 정권을 다시 찾아야 할 야당으로서는 이런 움직임에 반동적(reaction)이 될 수밖에 없고, 이 반동을 어떻게든 되받아쳐야 하는 집권당과의 사이에는 극단적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권력세계의 당연한 이치다.

    정치, 특히 대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은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립지대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승자독식의 게임 룰이 지배해온 한국의 대권정치는 편가르기가 분명하고, 어느 한쪽에 서지 않으면 안 되도록 게임규칙이 정립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전쟁에 가깝다. 한국사회는 총칼만 사용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미 전쟁에 돌입했으며, 모든 전쟁에 이념과 정당화 논리 대결이 있듯이 그런 이념 공방을 치르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좌우 이념논쟁을 진정한 의미의 ‘좌우 이념논쟁’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만약 넓게 봐서 그런 규정이 성립한다면, 그 배후에 있는 다양한 축(axis)들과 논쟁을 촉발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이념논쟁은 두 축이 배경을 이루고 하나의 계기가 작동해 촉발됐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축은 영호남 지역 대립구도이고, 둘째 축은 대북정책 관련 대립구도이며, 하나의 결정적 계기는 언론사 세무사찰일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는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사회경제적 혼돈은 대권 권력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선이 1년 반이나 남아 있지만 대권을 향한 정치적 투쟁이 피를 튀긴다. 권력투쟁이 이렇듯 격렬한 것은 일단 대통령만 되면 제왕(帝王)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한국 권력구조를 감안할 때 이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현재 전개되는 권력투쟁 양상은 집권 종반기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이전투구의 형국을 넘어 한국사회의 제반 영역을 파괴하고 있다. 이 과정에 필연적으로 머리를 든 것이 바로 좌우 이념논쟁이다. 이 논쟁이 대권투쟁의 한가운데서 대두한 만큼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띠며,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건설적 기능을 하기보다는 파괴적 기능을 하는 측면이 강한 만큼 소모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이 논쟁을 건설적으로 청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긴요하다. 다분히 소모적인 이 논쟁을 어떤 대안을 통해 해소할 것이며, 그 결과 미래 한국사회가 모색해야 할 공동체는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재 진행되는 좌우 이념논쟁의 일차적 원인이자 배경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영호남 지역대립구도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두 가지 대립의 축 1997년 12월 김대중씨와 호남세력의 예기치 못한 집권과 40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영남에 기반을 둔 근대화 세력의 뜻하지 않은 실권이라는 결과는 한국사회에 일대 혼란을 예고했다. 영남 기반의 근대화 세력은 40년 지배의 종식에 따른 상실감과 좌절감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반대로 지난 40년 동안 정치경제적 차별과 문화적 피해의식에 한이 맺힌 호남세력은 집권과 더불어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한풀이에 나섰다.

    한국정치의 게임 룰인 승자독식에다 누적된 ‘피해’를 단기에 만회하려다 보니 혁명 뒤에나 있음직한 보복과 일대 숙청에 비견될 만한 일들이 일어났다. 실례로김대중 정부 들어 지역편중인사 논란이 끊임없이 일어난 점을 들 수 있다.

    권력행사가 이렇듯 노골적으로 전개되자 지킬 것이 더 많은 근대화 세력은 당연히 반동의 자세를 취해야 했고, 바꿀 것이 태산 정도라고 생각한 집권세력은 개혁 혹은 진보의 외피를 둘러야 했다. 당연히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에 대한 이념적 혼선이 빚어졌다. ‘친DJ=진보’, ‘반DJ=보수’라는 기계적 도식이 공공연해졌다. 민주화운동의 화신이자 개발독재시대의 최대 피해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하는 일은 무조건 절대선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호남 출신 엘리트나 개혁세력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여기에 이런저런 문제제기를 하거나 토를 다는 사람은 필시 수구이거나 반개혁세력이라는 반격이 가해졌다.

    한때 김대중씨와 호남세력이 집권하면 호남사람들이 한을 풀고, 영호남 지역주의를 청산하는 데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호소가 바로 그랬다. 그러나 DJ집권 4년도 되지 않아 결과는 정반대로 가버렸다. 호남인들의 한은 그대로 있는 듯하고, 영남인들의 적대감은 한층 깊고 커졌다.

    아마도 영호남 지역주의는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제 ‘화해와 협력’, ‘공존공영’은 남북관계의 목표를 넘어 영호남 관계의 목표인지도 모르겠다.

    좌우 이념논쟁의 둘째 축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지난해 평양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 분단사에 분명히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이 남한 내 야당이나 대다수 국민의 동의나 지지없이 이루어졌기에 ‘남남갈등’의 또 다른 대립구도를 한국사회에 탄생시켰다.

    사실 ‘남남갈등’이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영호남 지역대립구도와 상당부분 중첩해 있으며, 지역대립구도 혹은 ‘반DJ 대 친DJ’ 대립구도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다 중산층을 위시한 안정희구 세력도 통일이 초래할 수도 있는 대가나 혼란을 사전에 경계하면서 갈등구도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최대 치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한동안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대북정책이 2001년 여름 현재 남한사회 좌우 이념논쟁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분단’이라는 대세에도 냉전적 분위기는 엄존하고 있으며, 권력투쟁이 노골화할수록 그 분위기는 강화될 수 있다. 한반도 분단문제의 해소는 기업간 빅딜식으로 간단하게 처리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기에 좀더 긴 호흡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좌우 이념논쟁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로 여겨지는 언론사 세무사찰 역시 정치적 맥락을 무시하고서는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사안의 복잡성이 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굵직한 ‘사태’들은 예외없이 차기 대권과 연계해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언론사 세무조사 파문도 그런 사안에 속한다.

    相生이 불가능한 사회 좌우 이념논쟁은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체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대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좌파건 우파건 자신의 정체와 실제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열변을 토하듯이 ‘이념과 정책으로 말하는 정치’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조의 자유, 다양한 사회세력들의 정치세력화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한반도의 특수성이 여전하며, 여기에는 한반도의 주요 갈등 축인 지역대립구도와 분단구도가 뒤얽혀 있다.

    인간사회에서 말이 좋아 상생(相生)이지 그것의 실현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대립과 갈등의 구도가 복합적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 ‘윈-윈전략’이니 ‘포지티브섬 게임’이니 하는 것은 십중팔구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기는 측이 있으면 지는 측이 있는 것이 인간사회의 원리인데, 한국은 지나치게 치열한 대결사회로 치닫고 있다. 실제로 이념논쟁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패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으며, 승패에 따른 차이도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가 지혜를 모으고 실천을 통해 공멸이 아닌 상생의 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자는 열망은 어디에서나 소중하다. 한국은 특히 그렇다. 상극을 해소해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열망이 한국만큼 절실하고 소중한 곳도 없을 것이다. 지역대립구도, 분단구도, 외세의 부단한 압박이 중첩적인 무게를 발휘하는 사회인 만큼 그 열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노선의 모색이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타협과 절충의 미덕에 기반한 ‘중도노선’을 대안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정치적 의미, 이념적 의미에서 중도노선일 뿐더러, 다수 대중의 경제생활 양상, 강대국들에 에워싸인 지정학적 위상을 고려한 새로운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등 제반 영역에서 중도노선의 구축을 대안으로 삼자는 생각이다.

    첫째, 정치적으로 중도노선이 다수파이면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보수, 진보가 나름의 목소리와 입지를 갖는 정치지형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한국정치의 부정적 면모들을 청산하지 못하면 한국사회는 절대 살맛 나는 공동체를 꾸릴 수 없다. 선진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 지금과 같은 소모성과 약탈성을 넘어 일대 쇄신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대 수구반동’, ‘친북 대 냉전세력’의 대립구도는 한국의 정치지형을 과거로 되돌리는 불행한 이념논쟁이다. 권력투쟁에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념논쟁이 동원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것도 원색적인 색깔론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에서 건전성을 확보하는 형태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사실 개혁이 가장 아쉬운 영역이 바로 정치다.

    둘째, 다수 대중의 경제생활 목표를 중도적 생활로 정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일류주의와 물질적 성장주의에 집착해 왔으며, 지금도 그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는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여유를 보장할 수 있는 부(富)를 상징한다. 한국사회는 이것을 두 배, 세 배 늘리는 데 골몰해 있지, 그 정도의 규모로 여유롭고 의미있는 생활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은 궁색한 것보다 낫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물질적 풍요가 수단이 아니라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도의 물질적 여유를 바탕으로 얼마만큼 평화롭고 가치있는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가 왔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경제적으로 다수 대중이 중도적 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 급진전되고 있는 양극화를 막고, 중간층을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환란’ 이후 추진한 김대중 정부의 여러 정책 탓으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졌다.

    여기서 인간사회를 볼 때 분배를 중심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의미를 갖는다. 세계적·지역적·일국적 수준에서 분배가 열쇠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생산력이 증가하는 사회체계이기 때문에 인류 전체에 필요한 물질적 가치가 줄어들 수 없다. 그러나 세계는 소수의 선진국과 다수의 후진국으로 나뉘어 있다. 세계의 여러 지역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를 예로 들자면, 일본이 너무 많이 갖고 있으며 다른 다수의 국가들은 궁핍한 상황이다.

    한 국가의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사회를 보자. 소수의 상층과 다수의 하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영호남 대립구도와 남북 대립구도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한쪽으로 너무 쏠렸으니 좀 나누어달라는 분배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반(半)주변, 즉 중간지대를 다시 회복하는 과제이고, 지역적으로도 극단을 최소화하는 일이며, 한 국가적으로는 중간층을 두텁게 하는 과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양극화 현상을 반전시키고 중간층 복원을 실현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며, 정치도 이런 측면에서 전개해야 한다. 모든 수준에서 중간이 두터워지고 건실해져야 하는 것이다. 총론적으로 말해서 개혁의 목표도 여기에 있다.

    사실 한국기업들은 일류를 지향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대학도 일류를 지향하며, 그런 일류주의가 사회 전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하지만 현실은 기업이건 대학이건 세계일류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그런데 턱없는 일류지향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의 팽배가 진짜 일류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내부의 왜곡된 일류의식이 진정한 일류로 발전해가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생존을 위한 중도노선 기업이나 대학, 혹은 여타 행위주체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참여하는 한 현재 수준의 물질적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은 그런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이나 조직, 나아가 국가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현실은 경쟁력 논리만 무성하지 경쟁력 제고의 방법론에서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요란하기만 하지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긴장과 경쟁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구성원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고 인간관계를 전투적 관계로 변질시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셋째, 한국은 분단과 강대국들의 위협에서 오는 중압감이 너무나 크다. 특히 안보비용이 큰 부담이다. 국가 전체 자원의 배분이 이런 요인 때문에 왜곡되어 있다. 한정된 국가자원이 안보비용으로 투입되는 바람에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필요한 교육과 연구가 항상 부진하다. 게다가 한국은 강대국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의 강대국 노선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주변 강대국에 불필요한 위협감을 심어줘 여러 모로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다.

    한국은 대국(大國) 지향의 노선을 일단 포기해야 한다. 한국의 대국지향은 약소국의 피해의식, 그 이상의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강대국 노선은 개발독재시대의 유산으로 시급하게 청산해야 할 망령이다.

    한국은 인구 규모로는 소국이 아니다. 영토가 좁은 것이 문제이긴 하나 반도의 위치를 활용한다면 크게 불리한 입지도 아니다. 우리는 모든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interface)에 자리잡고 있어 과거에는 항상 피해만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접점을 네트워크로 전환해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외교력이 지금보다 한층 높아져야 한다. 국가안보를 위한 전통적 의미의 외교, 나아가 세계시장 세력들과의 절충력과 협상력을 키우는 의미의 외교를 해야 한다. 모두 허장성세가 아니라 진정한 실력에 기초해서 도약해야 한다.

    한국과 같은 반(半)주변국은 중심 국가들과의 관계 맺기가 곧 국가의 사활이 걸린 과제이다. 한국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주권도 약하고 그래서 외교도 시원찮은 것이 현실이다. 워싱턴의 입김이 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김대중 정부 들어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남북관계가 특히 그런 사안에 해당한다. 경제 분야의 협상이나 무기구입 등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으며, 실제 그런 방향으로 흘러왔다. 주권이 약한 데 관계 맺기를 잘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이기도 하다.

    지금 국제정치 무대는 비록 미국이 패권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러시아가 나름의 입지를 가다듬고 있고 중국이 일대 도약을 하고 있으며,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남아 있어 실로 불투명하고 진로가 분명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이 엄청난 역동성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은 지리적으로 그 중심에 있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미국은 부시 행정부 들어 세계전략의 중심을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전환하고, ‘미사일방어’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구상은 일본을 동맹관계에 묶어두고, 러시아는 경제관계를 통해 통제하면서 중국을 ‘봉쇄(contain)’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군사화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 의회에 제출한 2002년 국방예산 규모가 3290억달러(약 427조원)에 이른다는 점은 이런 노선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전세계 군사비 총액이 대략 8000억달러인 것과 비하면 미국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전략은 한반도를 언제든지 제물로 삼을 수 있는 무서운 것이며, ‘미사일방어체제’로의 편입이나 미래 무기구입 가능성을 고려할 때 한국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외교에 모든 지혜와 식견을 발휘해 난국을 돌파해야 한다. 북한도 현명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부시 행정부 안보팀에게 크게 당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워싱턴 안보팀은 ‘걸프전 동문회(Gulf War reunion)’로 불릴 만큼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집단이다.

    필자는 국제관계에서 한국의 중립노선을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6자회담을 통해 동북아시아 안정에 필요한 다자주의 협정을 탐색하고, 한반도를 영원히 특정 강대국이 자신의 지렛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한국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일체의 팽창적 관심을 버리면서 평화주의 노선을 걷는다는 점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빨리 통일해서 시베리아와 중국으로 뻗어나간다는 관념은 참으로 허망하고 백해무익한 견해이기에 빨리 버려야 한다. 한국은 오로지 평화를 강조하고, 갈등의 조정자 노릇을 모색하는 데 머리를 써야 할 것이다.

    정치·이념·경제·국제관계 등에서 중도노선을 확보할 때만 한국의 미래가 보인다. 우리의 선택은 지나친 우파도, 현실성 없는 좌파도 아닌 중도의 길이다. 그것만이 야만으로 얼룩진 20세기를 청산하고, 문화와 신도덕주의 시대인 21세기로 전진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을 자꾸 20세기에 묶어두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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