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예산의 이회창家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5-03-22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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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이 가까워지면 정치권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것이 후보자들의 고향을 둘러싼 논쟁이다. ‘고향사람한테 표 좀 달라’는 호소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동서남북으로 나라를 가르는 병폐가 끝없이 이어진다. 정책대결보다 지역대결로, 합리가 아닌 연고나 정실(情實)로 승부를 내려는 한국 정치의 한심한 부분이다.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논쟁에 정치권은 사활을 걸기라도 한듯 열을 올린다. 민심을 자극하고 끌어들여 표를 만드는 데 이보다 더 간단하고 편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고향을 둘러싼 여야의 입씨름도 이런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8월8일 대전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이총재는 충남도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도 충청도 사람”이라며 연고를 강조했다. 그러자 이 지역을 텃밭으로 여기는 자민련이 “이회창 총재는 충청도가 아니라 황해도 태생”이라며 발끈했다.

    이총재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예산은 이총재의 고향이라기보다 그의 부친의 고향이다. 이총재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서흥이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전남 담양이다. 그후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광주와 청주, 서울을 전전하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성인이 돼서는 서울에서 살았다. 한마디로 입때껏 예산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충청권 공략의 교두보

    그렇다고 이총재의 주장이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조상이 살던 곳도 고향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총재의 아버지는 예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예산엔 이총재의 조상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친척이 많이 살고 있다.



    이총재는 틈나는 대로 예산을 찾아 충청도 사람들에게 그곳이 자신의 고향임을 인식시키려 애쓰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그의 예산행은 매번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정대 스님 발언 파동’ 직후인 1월20일 이총재는 불쑥 예산에 내려가 선영(先塋)을 둘러본 후 인근 수덕사를 방문해 주지 법장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총재는 5박6일의 여름휴가도 예산에서 보냈다. 휴가 첫날인 7월28일 선영을 참배하고 개축 중인 부친 생가를 둘러봤다. 또 한나라당 예산지구당을 찾아 당직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대전·충남 지역 지구당위원장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휴가를 보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총재의 예산행에 정치적 의도가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8월6일자 한 일간지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핵심당직자는 “지난 대선에 이어 내년 대선에서도 충청권이 캐스팅보트를 쥘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 총재가 충청권에서 선전한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충청권에 전력투구하는 것”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말하자면 예산을 충청권 공략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이총재가 8월8일과 10일 대전과 청주에서 잇따라 시국강연회를 가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에 따라 자민련과 민주당의 경계태세도 강화되고 있다.

    자민련은 이총재가 충청도 땅에 발디딜 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담은 성명을 쏴대고 있다. 민주당에선 충남 논산이 고향인 이인제 최고위원의 견제구가 눈에 띈다. 충청권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우는 이최고위원은 최근 ‘적의 심장부’에 뛰어드는 저돌성을 과시했다.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의 아성인 부여와 공주를 8월7일 찾아가 자민련을 격분시키더니 8월16일엔 예산을 방문해 한나라당을 자극했다.

    그에 앞서 민주당은 7월말 민주당보를 통해 이총재 부친의 친일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이총재 부친의 예산 생가 복원을 비난하고 나섰다. 친일의혹은 이총재 부친이 일제 때 검찰 서기를 지낸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민주당 김희선 의원은 “일제 말기에 검찰 서기를 했다면 독립투사를 탄압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이총재 부친의 생가는 이총재 집안의 종가(宗家)이기도 하다. 일반인이면 아무 문제가 안 될 종가 복원 공사가 구설수에 오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그것을 정략적 행위, 곧 이총재의 충청권 민심 잡기의 일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둘째는 문화재 지정 시비다. 소문에 따르면 종친회 측이 예산군에 그 집을 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총재 부친의 생가 복원 공사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이총재 부친에 대한 친일의혹 제기는 타당한가. 또 예산 사람들은 이총재를 고향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총재가(家) 사람들은 예산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예산에 사는 이총재의 친척들은 이총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저런 의문을 품고 예산의 ‘이회창 민심’ 탐방길에 올랐다.

    동으로는 아산, 서로는 서산, 남으로는 공주, 북으로는 당진에 닿아 있는 예산군은 인구 10만의 작은 고장으로 2개의 읍(예산, 삽교)과 10개 면으로 구성돼 있다. 예산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버스 정류장 표지판의 사과 그림이다. 능금축제, 능금아가씨선발대회, 능금아파트, 애플타운 등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사과로 유명하다. 아울러 국보 49호인 수덕사 대웅전과 덕산온천도 이 고장 사람들이 손꼽는 자랑거리다.

    예산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로는 추사 김정희, 윤봉길 의사, 이태규 박사 등이 있다. 국내 최초의 이학박사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박사는 이회창 총재의 중부(仲父)로 1992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총재 부친의 생가는 바로 이박사의 생가이기도 하다.

    취재 첫날인 8월6일 예산의 날씨는 잠시만 걸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후텁지근했다. 장마 중간에 찾아드는 무더위였다. 이총재는 부친 생가 복원이 논란에 휩싸이자 “예산문화원측이 문화재 지정을 제안했다”(중앙일보 7월28일자)고 말한 바 있다.

    예산문화원은 예산군청에서 걸어 5분 거리였다. 예상과 달리 문화원측은 이총재 종가의 문화재 지정 시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뿐더러 별 관심이 없었다. 이지호 문화원장은 “(이총재) 집안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다고 들었다”며 이총재와 다르게 얘기했다.

    “그 집을 복원하면 문화재로 지정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군에 전달한 모양이다. 명가의 종가이니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집의 원형이 거의 사라져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겠느냐는 반론이 있어 더 이상 얘기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는 군에서 지정하는 것이 아니다. 군에서는 자료만 제공할 뿐 결정은 도에서 한다.”

    이문화원장은 “예산에서 이총재 집안은 명가”라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태규 박사를 배출했고 그 동생인 이홍규씨가 대검 검사를 지냈고 홍규씨 아들인 회창씨가 총리까지 지냈으니 명가라 할 만하지 않은가.”

    이총재는 전주 이씨 주부공파(主簿公派)에 속한다. 주부공파의 파조는 시조 사공공(司空公) 한(翰)의 18세손인 이영습(李英襲)이다. 주부공파라는 이름은 영습이 고려말 위위주부동정(尉主簿同正)이라는 벼슬을 한 데서 비롯됐다. 이총재는 시조로부터 41세, 파조로부터는 23대손이다.

    주부공의 증손자인 세분(世芬)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냈다. 주부공의 6대손이자 이총재의 17대조인 우계당(牛溪堂) 소생(紹生)은 단종 때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예산군 대흥면 우정촌(현 교촌리)에 은거했다. 이것이 이총재 가문이 예산에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주부공파 종친회장을 지낸 이회준씨에 따르면 이소생이 예산으로 내려온 것은 성종 때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처남 서거정(徐居正)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전주 이씨에는 120여 개 파가 있는데,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만 86개에 이른다. 대동종약원에 따르면 주부공파는 전주 이씨의 주류는 아니다. 큰 파엔 종재(宗財 : 종중의 재산)가 있기 마련인데 주부공파에는 없다는 것이다.

    1987년 발행된 예산군지에는 이총재(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중부인 이태규 박사, 부친 이홍규 변호사, 형 이회정 박사(삼성의료원 과장), 동생 이회성 박사(KDI수석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장 역임), 숙부 이완규씨(삽교고교 교장 정년퇴임), 이태규 박사의 아들 회인씨(당시 미 버클리대 연구원) 등 이총재 일가의 인사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그러나 지난해 개정된 예산군지에서는 그 비중이 크게 줄었다. 특히 1987년판과 달리 이총재를 비롯한 이홍규씨 자식들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기(誤記)도 있다. 이태규씨의 장남은 이회인인데 이회정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태규씨에 대해서는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이학박사가 된 세계적인 석학’ ‘예산이 자랑하는 큰 인물 중의 한 사람’ 등의 표현을 쓰며 4줄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반면 이홍규씨 소개는 간단하다.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파헤쳐 척결검사라는 별명을 얻은 이홍규 공증인 겸 변호사는 이박사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이태규·홍규 형제는 둘 다 예산초등학교를 나왔다. 각각 1회, 6회 졸업생이다. 이홍규씨는 몇 해 전 모교에 학교발전기금으로 100만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지호 문화원장은 이홍규씨에 대해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검사 시절 청렴하고 강직하고 고지식하다는 평을 들었다. 청탁을 일절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이홍규한테 가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그 탓에 집안사람들한테도 인심을 잃었다고 한다. 광주지검장을 지낼 때 조카가 어떤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는데 전화 한 통 해달라는 부탁도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꼬장꼬장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을 아들(이회창 총재)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문화원장에 따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예산에서 이총재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아버지 홍규씨와 달리 예산에 산 적도 없고 학연도 없기 때문이다. 그 탓에 이총재가 예산을 고향으로 내세우자 처음엔 주민들이 ‘언제부터 고향이었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예산 사람 누구나 이총재의 선영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총재를 고향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라고 한다.

    문화원에서 나와 예산신문(주간)을 찾아갔다. 최근 이 신문을 인수한 정낙규 사장은 “자민련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으며 이총재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정사장에 따르면 예산은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곳이어서 민주당 지지세력은 미미하다. 지난해 총선 당시 각 당 후보의 득표율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당선자인 자민련 오장섭 의원(3선·건설교통부장관)은 55.5%의 득표율을 보였으며 한나라당 최승우 후보는 31.3%를 얻었다. 반면 민주당 윤병승 후보는 10.4%에 그쳤다.

    정사장에 따르면 최근 민주당이 이총재 부친의 생가 복원을 비난한 것이 예산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이총재를 예산과 관련지어 공격하면 할수록 예산사람이라는 인식만 굳혀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총재 부친에 대한 친일의혹 제기도 반감만 산다고 한다.

    “노인네들이 이렇게 말한다. 해방 후 친일파를 많이 처단했는데, (이홍규씨가) 일제 때 친일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냐고.”

    이진수 예산신문 편집국장 겸 주필은 예산읍에서 토목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총재의 대쪽 이미지를 높게 평가했다.

    “동해 선거 때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았나. 국무총리 그만둘 때도 인상적이었고.”(1989년 4월 당시 이회창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동해시 보궐선거에 출마한 각 당 후보와 사무장 전원을 선거법위반으로 고발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씨는 “이총재 고향이 이곳이 아니라고 하면 예산 사람들은 역정 낸다”며 “내년 대선에서 이총재에게 몰표가 쏟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자민련이 승리한 것에 대해선 “한나라당 후보가 워낙 인기가 없었던 탓”이라며 “이총재가 지원했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표가 나왔다”고 분석했다.

    이씨는 또 이총재 부친의 친일의혹에 대해 “예산 주민 정서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주장했다.

    “여기선 다 욕한다. 일제 때 관직에 있었다고 친일이라면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냐. 오히려 일제 때 검찰에 있으면서 조선 사람에게 유리하게 일 처리한 것이 문제가 돼 좌천성 발령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총재의 10촌뻘인 이회운씨가 연락을 받고 나타났다. 예산군의원 출신의 사업가인 이씨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예산군분원장이다. 이총재 부친의 생가 복원 공사도 그가 책임지고 진행하고 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이총재나 아저씨(이홍규)나 근검절약이 몸에 뱄다. 서울 명륜동 집(이홍규씨의 집)에 가 봐라. 남부끄러울 정도다. 이총재는 예산에 내려올 때 관공서 기관장들이 일절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집안 사람들이 죄 짓는 경우 절대 안 봐준다. 도움을 요청하면 ‘법질서가 무너진다’며 거절한다.”

    쇠말뚝 미스터리

    이회운씨 말로는 예산에 사는 전주 이씨 주부공파는 약 60가구에 이른다. 군지에 기록된 성씨 현황자료(2000년 7월 기준)에 따르면 예산군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로 전체 성씨의 20.5%를 차지한다. 둘째로 많은 성씨가 이씨(18%)다. 이씨 중에선 전주 이씨가 가장 많다. 3203가구로 예산군 총가구수(3만2946)의 10%를 차지한다. 그 중 1175가구가 예산읍에 거주하고 있다.

    이진수씨와 이회운씨의 안내로 예산읍 예산리 55번지에 위치한 이총재 부친의 생가 복원 공사현장을 둘러봤다. 집터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건평 40평의 ㄷ자형 전통한옥이다. 지난 5월 이총재 부인 한인옥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상량식 행사를 가졌다. 당시 예산신문 보도에 따르면 예상 건축비는 평당 700만∼800만원.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8월 중 완공될 예정이다.

    회운씨에 따르면 이 집에서 7대가 살아왔다. 회운씨는 문화재 지정 논란에 대해 “얘깃거리가 없으니 억지로 만들어 낸다”며 “이태규 박사를 기리기 위해 문화재로 삼자는 것인데 그것을 왜 이총재와 관련시키느냐”고 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이박사의 제자들이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총재의 조상묘는 이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엔 이총재의 7대조 무덤까지 있다. 묘소는 검소한 편이다. 비석도 없고 상석도 눈에 띄지 않는다. 각 무덤 앞에는 이름만 달랑 적힌 작은 돌팻말이 있을 뿐이다. 2년 전 이곳에 있는 무덤 13기 중 7기에서 금속성 물체가 탐지된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는데, 당시 발굴작업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이회운씨였다. 이씨에 따르면 발굴 결과 1m50㎝ 크기의 쇠말뚝 4개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총재 집안에서는 이를 이총재의 대선 출마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했다. 누구의 짓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묘지를 둘러본 후 이홍규씨와 동세대를 살아온 이기봉씨 집을 찾아갔다. 1906년생. 이홍규씨의 예산초등학교 3년 후배지만 나이는 한 살 적다. 전국시조인협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금도 법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홍규씨는 예산초등학교를 다닐 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이홍규씨의 전력에 대해 “왜정 때 검찰청 서기를 했다”며 “당시엔 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면 무조건 검찰이나 법원 직원이 됐다”고 말했다. 이홍규씨는 1929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검찰 사무직원으로 취직했다.

    이기봉씨는 이홍규씨의 친일시비에 대해 “고위직을 지냈다면 몰라도 검찰 서기 했다고 친일파라면 왜정 때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했다. 일제 때 공주지법 예산출장소의 고원(雇員: 관리 보조원) 노릇을 했다는 그는 1967년 법무사시험에 합격했다.

    다음은 그가 들려주는 이회창 총재 집안 얘기.

    “근래 최고로 잘 된 집안이다. 일제 때 부호였는데, 천석꾼은 안 되고 500석꾼은 됐다. 예산의 명산인 금오산이 다 그 집 산이었다. 이회창네 집은 금오산 정기를 받았다. 금오산 자락에 금오탁시로 불리는 명당이 있는데 이회창 조상이 거기에 누웠다. (이총재의) 할아버지(이용균)는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이름 있는 한학자로 이 동네에서 왕 노릇을 했다. 밤 12시면 늘 목욕재계한 후 청수 떠놓고 자손 잘 되길 기원하던 분이다. 자손들이 잘된 건 다 그 분 덕이다. 다들 착하게 살았다. 성격들은 하나같이 대쪽이다. 집안사람들 모두 고집불통이라고 소문나 있다. 이회창 사촌인가 서울에서 중학교 교장을 지낸 이가 있는데, 학교 땅 일부를 내놓으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해 섬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저녁을 먹은 후 ‘민심 탐방’에 나섰다. ㅎ식당에서 일하는 40대 아주머니는 “(예산에서) 이총재의 인기가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전에는 이총재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런데 (부친) 생가를 복원하고 선영을 손질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지금은 다들 이총재를 예산사람으로 인정한다. 생가 복원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사진관을 하는 백아무개씨(30). 예산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그는 이총재에 대해 비판적인 편이었다.

    “여기가 자기 텃밭이라 하는데, 할아버지 고향이지 자기 고향이냐. 젊은 사람들은 이회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생가 복원에도 거부감을 갖고 있다. 친구들끼리 술 먹는 자리에선 이회창 욕을 많이 한다. 할아버지를 내세워 예산 표를 먹으려는 것 아니냐,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이 예산 사람들을 이용만 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물론 한나라당 정책이나 이념이 싫은 탓도 있다.”

    백씨는 이총재 부친의 친일시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경제다.

    “대선 때 찍을 마땅한 인물이 없다. 젊은 사람들은 다 ‘그놈이 그놈 아니냐’고 말한다. 박정희는 욕을 먹긴 했지만 국민을 잘 살게 해준 공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경기부양과 물가안정, 그리고 서민생활 안정이다.”

    답변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40대 중반의 ㄷ서점 주인은 “관심 없다” “그런 것 모른다”며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예산에서 민주당은 야당”

    잡화상을 하는 강아무개씨(50)는 ㅎ식당 아주머니와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강씨는 “어디서 태어났든 조상이 살아온 곳이 고향 아니냐”며 “97년 대선 때 예산에서 이총재 표가 많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총재 부친의 친일시비에 대해 “들은 바 없다”고 대답한 그는 이총재 조상묘를 새로 단장한다는 항간의 소문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묘지가 너무 좁다. 묘 단장을 할 만도 하다. 서민들도 그 정도는 한다. 그 흔한 비석이나 상석 하나 없지 않나.”

    둘째 날 오전, 언론관계자 A씨와 통화했다. 신분을 밝히지 말 것을 부탁한 그는 “자민련과 한나라당 지지 비율이 비슷비슷하다”고 말했다.

    “초창기엔 이총재에 대한 반감이 꽤 있었다.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 지지표가 예상 밖으로 덜 나온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민련 지지층인 나이든 사람들 중에도 이총재 쪽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늘고 있다.”

    2층 건물의 옥상에 가건물처럼 붙어 있는 민주당 예산지구당 사무실은 허름한 느낌을 줬다. 1층엔 지구당 위원장인 윤병승씨가 경영하는 ‘동아약국’이, 2층엔 ‘동아다방’이 자리잡고 있다. 예산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김영춘 사무국장과 마주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총재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이총재가 예산을 고향으로 내세우는 것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총재는 지난 대선 때 광주에 가선 광주가 고향이라 하고 청주에 가선 청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예산은 이총재 고향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총재 고향이 황해도라는 것을.”

    이총재 부친 생가 복원에 대해선 “이총재 부친이 조카가 판 땅을 다시 사들였다”며 “이총재가 예산에 내려올 때마다 그곳에서 먹고 자기 위해 새로 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산이 민주당 취약지역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여당이지만 야당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독립운동’ 한다고 말해왔다. 평민당·국민회의 시절부터 워낙 지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평민당을 하면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자민련 텃밭인데다 최근엔 이총재 지지여론까지 형성돼 쉽지 않은 상황이다. 충청도 민심이 JP로부터 떠나는 양상이다. JP가 ‘지는 해’가 되다보니 이총재에 대한 기대심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우리가 정권을 재창출하면 달라질 것이다.”

    김사무국장 분석에 따르면 예산에 사는 전주 이씨들이 다 이총재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같은 전주 이씨이면서 ‘정통파’인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최고위원은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에 속한다. 파조인 익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이다. 반면 이총재가 속한 주부공파의 파조 이영습은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의 형이다. ‘정통파’ 시비는 말하자면 ‘왕족 혈통’을 따지는 것이다.

    김사무국장과 대화도중 예산에서 40년 이상 살았다는 민주당 지구당 상무위원회의장 백대현씨가 나타났다. 백씨 또한 이총재의 ‘예산 고향론’을 비판했다.

    “이총재는 국무총리 할 때 예산군에서 지역발전 지원을 요청하자 ‘나, 예산 사람 아니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지금 와선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대꼬창이가 이랬다 저랬다 하면 되냐.”

    백씨는 이총재 부친의 친일시비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는 한 함부로 말할 수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종가 복원 문제는 강하게 비판했다. “예산 주민이 다들 어렵게 사는데 사람이 살지도 않는 집을 거액을 들여 인간문화재까지 동원해 짓는 건 지역 민심과 동떨어진 행위”라는 것이다.

    백씨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산군 응봉면에 사는 박창식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86세인 박씨는 도의원 출신으로 지구당 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이홍규씨가 일제 때 검사를 지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폈다. 그러나 딱히 증거는 없었다. “서기가 어떻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냐”는 것과 “예산에서는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1935년 부친 이홍규씨의 첫 근무지인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난 이총재는 부친이 임지를 자주 옮긴 탓에 유년기를 외가인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서 보냈다. 부친의 근무지 이동은 이총재의 학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홍규씨는 1940년대 초 광주지검으로 발령이 났다. 그에 따라 이총재는 1941년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광주서중에 진학했으나 부친의 발령 탓에 청주중학교로 전학했으며, 1948년 9월엔 경기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홍규씨는 일제 때 검찰서기였다가 광복 직후 검사가 됐다. 박씨는 기자가 갖고 있는 관련 자료를 훑어보더니 “일제 때는 검사가 아니라 서기를 했을 수도 있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서기라면 친일로 보기에 애매하다. 검사라면 모를까. 서기야 공무원이고 직장인에 지나지 않지. 물론 사상범을 잡아들여 조사할 때 서기가 관여했겠지만, 심문 당한 사람이 나타나 증언하기 전에는 친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박씨는 이총재 집안에 대해 자신이 아는 얘기를 들려줬다.

    “지주 집안으로 상당히 잘 사는 편이었다. 지금 새로 짓고 있는 집은 일제 때도 고급스러운 축에 속했다. 이상규씨(이홍규씨의 맏형)는 예산에서 인심을 못 얻었다. 너무 도도했기 때문이다. 이태규 박사는 시골 여자와 결혼했다가 일본 유학을 하면서 이혼하고 새로 결혼했다. 당시 첫 부인이 울면서 나갔는데 ‘사직동’(이총재 종가 및 조상묘가 있는 마을의 일제 때 명칭)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이홍규씨에 대해선 초등학교 졸업 후 줄곧 외지에 나가 있어 별 얘기가 없다.”

    “이총재 종가, 문화재 기준에 미달”

    군청 공보실을 찾았다. 공보실 관계자는 이총재 종가 문화재 지정 논란과 관련, “종친회에서 도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문화재로 지정되면 사업비 일부를 지원 받을 수 있으나 승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비용은 전적으로 당사자가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그 집은 문화재 지정 대상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선 객관적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형태가 보존돼 있어 역사적 보호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집은 원형이 다 사라졌다. 보수는 몰라도 개축해서 문화재로 지정된 예가 없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 집안이 예산에서 유명한 것은 이태규 박사 때문”이라며 “이회창씨는 감사원장을 지낼 때만 해도 예산 사람들이 잘 몰랐다”고 말했다.

    군청에서 나오자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시장 민심을 살피기 위해 예산상설시장으로 향했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아스팔트를 두들기는 비는 쉽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산을 쓰고 아무 가게나 눈에 보이는 대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5년째 쌀가게를 하고 있다는 연아무개씨(61)는 “그분 평이 나쁘지 않다”며 이총재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우리 같은 서민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내 고장에서 대선후보를 낸다는 데는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조상이 여기서 살았으니 후손도 여기가 고향 아니냐. 이태규 박사는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예산의 자랑거리였다. 나도 어제 그분 생가에 가봤다. 생가 복원이 지탄받을 일인가. 대단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왜들 시끄럽게 구는지 모르겠다.”

    한 약국에 들어섰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약사는 이총재에 대해 “전혀 관심 없다”고 말해 질문자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이총재가 얼마 전 여름휴가를 이곳에서 보낸 데 대해서도, 지난 6월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부모 묘를 예산으로 옮긴 일에 대해서도 “다들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이총재의 영향력에 대해 묻자 “매스컴에서 자꾸 떠들어 그렇지 실제로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며 “예산이 고향이라는 점과 지지도는 별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 이곳에서 인기가 없다는 얘기에 동의했다. 자민련과 한나라당 세가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민들은 먹고살기 바쁘다. 대선후보에 관심을 갖기엔 예산 경제상황이 너무 안 좋다”는 말로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

    약국 건너편에 있는 페인트가게 주인도 퉁명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총재를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에 관심 없다. 이총재가 고향사람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대선 때 이총재를 찍을 것인가.

    “그때 가 봐야지. 당장 먹고살기 바쁜데 누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

    -예산 사람들은 이총재를 찍지 않을까.

    “호감이 안 가니, 누구를 찍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지.”

    -민주당을 지지하느냐.

    “여당이 인기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기자의 질문이 성가신지, “3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만 가줬으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근처 이발소로 발길을 옮겼다.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이발사는 기자가 제시한 신분증을 한참 들여다보며 상당한 경계심을 드러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정치인들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만, 이총재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다수 국민이 민주당을 싫어하지 않느냐. 예산에서 이총재 인기가 좋은 데는 동향인이라는 호감도 작용하겠지만 현 정부의 실책 덕분이기도 하다. 내년 대선 때는 97년 대선 때보다 더 많은 표가 나올 것이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이회창씨가 융통성이 없고 독단적이라는 평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나라당 지구당을 방문할 무렵 비가 그쳤다. 김종윤 사무국장은 이총재 부친 생가 복원에 대해 “예산의 정신적 지주인 이태규 박사를 기리자는 것”이라며 이총재와 관련 없는 일임을 애써 강조했다.

    “지난 대선 때는 예산 사람들이 갈팡질팡했다. 그 탓에 역시 ‘충청도’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90% 이상의 주민이 지지하고 있다. 이번엔 확실히 밀어주자는 분위기다. 지난해 총선 때 자민련이 ‘국회의원은 오장섭, 대통령은 이회창’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건 것은 이총재의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마침 자리에 있던 최승우 지구당 위원장은 “민심 탐방하러 왔다”는 기자의 인사말에 “답은 다 나와 있는데…”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총재 고향 지역구라고 특별한 지원이 있냐”고 묻자 김사무국장이 “자주 와주는 것이 배려”라고 받았다.

    예산에 사는 이총재 친척 중 촌수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이경원씨(65)다. 이총재의 7촌 당숙인 그는 예산읍 주교리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위암수술을 받고 예산중앙병원에 입원했다. 8월7일 밤 9시쯤 병원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이총재 집안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이씨에 따르면 이총재의 종가는 한때 그 터(167평)와 건물(40평)이 경매로 남의 손에 넘어갔다. 종가에 살던 이총재 사촌 내외가 집을 담보로 여기저기서 많은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탓이다. 그것을 최근 몇 년 사이에 이홍규씨가 사들였다.

    “가요, 가!”

    이홍규씨 명의로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 이전이 완료된 데는 이경원씨의 공이 컸다. 매매교섭을 이씨가 했던 것이다. “수고비 좀 받았냐”고 묻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없다. (내가) 입원했다니까 명륜동(이홍규씨 집)에서 10만원 주더라.” 이씨에 따르면 원래 ‘사직동’에 있는 생가와 산소 주변 땅이 다 종가 소유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규씨(이총재의 백부)의 맏아들이 특허권 관련 사업을 하며 재산을 날려 지금의 규모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경원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총재 집안사람들은 근검, 강직, 청렴이 몸에 뱄다. 이총재의 할아버지 이용균씨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밖에서 오줌이 마려우면 꾹 참았다가 집에 돌아와 밭에 거름으로 줄 정도였다. 한학자였던 용균씨는 아들 홍규씨를 매우 엄하게 키웠다고 한다. 홍규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공부를 안 하자 “너 나무꾼 할래, 학교 갈래?” 하면서 모질게 매질을 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경원씨는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이홍규씨 부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도움을 청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1978년 그가 변호사법위반으로 구속됐을 때 당시 부장판사였던 이회창씨는 “현직에 있는 한 못 도와준다”며 ‘구조 요청’을 매정하게 거절했다. ‘겨우’ 해준 것이라고는 변호사 선임 알선이었다. 당시 경원씨는 금보석으로 석방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원에서 버스운전을 하던 경원씨의 조카 신아무개씨가 교통사고를 냈다. 사촌누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경원씨는 사고를 낸 조카의 형, 곧 장조카를 데리고 서울 홍규씨 집에 찾아갔다. 당시 수원지법에는 이총재의 큰처남인 한대현씨(대법관 역임)가 판사로 재직중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갔는데도 홍규씨는 “(수원지법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절벽을 느낀’ 조카 신씨가 경원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나직이 말했다. “가요, 가!”

    경원씨는 “그 후 누가 무슨 부탁을 해도 일절 나서지 않는다”며 “하여튼 청탁이라는 건 일절 통하지 않는 집안”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에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 이홍규씨 집에 찾아간 친척들은 눈치가 보여 10분 이상 앉아 있지 못했다. 홍규씨가 필요한 얘기만 딱 하게 하고 “다 끝났으면 그만 가라”고 내쳤기 때문이다.

    예산에 있는 이총재 친척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한둘을 빼곤 다들 형편이 좋지 않다. 친척들간에 교류도 거의 없다. 그들은 이총재에 대해 한편으로는 원망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대도 하는 애증의 감정을 가진 듯싶다. 경원씨의 얘기다.

    “한번은 사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총재를 원망하는 얘기가 나와 내가 야단친 적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 나가려면 우리 같은 사람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었다. 내 생각엔 이총재가 대통령이 되면 덕을 보기는커녕 감시대상이 돼 더 피곤해질지 모른다.”

    셋째 날 오전엔 예산군 신양면 녹문리로 차를 몰았다. 예산읍내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인 이 마을에는 박봉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이총재의 17대조인 이소생을 비롯해 8대조 이상 조상들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종친회에 따르면 묘지 터는 성종이 소생에게 하사한 것이다. 길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이 마을 사람 모두 이총재 조상묘를 잘 알고 있다”며 “여기선 이총재 인기가 좋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사는 전주 이씨는 10여 가구다.

    “너무 꼬장꼬장해 부탁도 못해”

    묘를 관리하는 사람은 소생의 직계 종손인 이세연씨다. 이씨는 집에 없고 그의 모친(70)이 있었다. 그녀는 “이총재의 조상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온다”고 말했다. 이총재는 지난 설에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이세연씨 집에서 3분 정도 산길을 올라가자 소생의 묘가 보였다. 보통 산소보다 5배쯤은 커 보였다.

    예산읍 발연리 이장을 지낸 이치원씨(50)는 이총재와 8촌간이다. 지금은 이회운씨가 맡고 있지만, 오랫동안 ‘사직동’에 있는 이총재 조상묘를 관리해온 사람이 바로 그의 아버지 이석하씨다. 이총재가 7월말 휴가차 예산에 와 산소에 들렀을 때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했다고 한다. 그의 이총재 평도 예외는 아니다.

    “인심이 야박해 친척들이 섭섭해하는 편이다. 너무 꼬장꼬장해 부탁도 못하고…. 그 집안 사람들 성격이 다 그렇다.”

    이총재 집안을 두고 이런저런 잡음이 있긴 하지만 3일간의 예산 현지 취재에서 얻은 결론은 예산의 민심이 이총재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거부감과 반감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총재에게 유리한 듯싶었다. 이는 자민련 예산지구당의 이승구 사무국장의 얘기에서도 확인됐다. 그는 “어차피 충청도는 JP를 중심으로 뭉쳐야 하는 것 아니냐” 하면서도 뜻밖이다 싶을 정도로 이총재에 대해 우호적으로 얘기했다.

    “예산 사람들 대부분은 이총재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 생가 복원을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집안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 아니냐는 반응이다. 친일논쟁도 별 것 아니다. 호감도가 점차 높아지기 때문에 내년 대선 때 지지율이 괜찮게 나타날 것이다. 대체로 고향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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