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박대통령의 권력행위에 적극 협력하며 ‘방탄막’ 노릇을 하는 ‘전국구’들이 수없이 탄생했다. 그 대표적 인사가 백두진 전국회의장이다. 그는 7,8대 공화당 전국구를 거쳐 9,10대에는 유정회 의원을 지내는 등 박정권의 ‘임명직 전국구’로서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1971년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직후 8대 국회의장에 선출됐으며, 유정회의장(9대)을 거쳐 1979년 10대 때는 “지명된 전국구 국회의원은 의장으로 선출될 수 없다”는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는, 이른바 ‘백두진 파동’의 소용돌이에서 끝내 국회의장에 다시 선출되기도 한다.
그는 결국 1979년 9월 제1야당 총재인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하는 악역을 맡아, 박정권을 위한 ‘전국구 방탄막’으로서 정치 인생에 피날레를 장식한다.
당시 야당 출신의 원로 정치인 Y씨는 백씨의 정치 족적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박정희씨에 의해 전국구의원에 거듭 발탁된 백씨는 유신 이후 정치적 자유 허용이 혼란을 초래하고, 이는 곧 적화(赤化)를 의미한다는 논리로 무장해 야당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독선을 보여 ‘유신학교 교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씨처럼 전국구의원으로서 박정권의 정권안보에 헌신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국회의장 때 민주국가의 의회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키는 일을 했다.”
이 밖에도 유정회 창출에 핵심 브레인 이었던 인사로는 한태연(韓泰淵) 갈봉근(葛奉根)씨 등 전직 유정회 의원이 꼽힌다. 건국 이후 헌법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을 듣는 한태연씨는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서울대와 한양대 법대 교수를 지내다 1963년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들어섰다. 그는 유신헌법을 기초해 후학들로부터 지금도 “헌법학계에 역사적 과오를 남겼다”는 말을 듣는다.
유신헌법은 ‘항가리 헌법’
또 독일 본대 법학박사 출신인 갈봉근 전 중앙대 법대 교수도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헌법교과서를 저술했으며 그 후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때문에 당시 세간에서는 유신헌법을 한태연 갈봉근 교수와 당시 권력실세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합작한 작품이라 하여 ‘항가리(韓葛李) 헌법’이란 비어(卑語)로 지칭했다.
동국대 법대 한상범(韓相範) 교수는 이 법학 교수들의 당시 행위에 대해 “그들이 배운 법학의 뿌리가 일본 제국주의 법학이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식민지 법학인 탓이 크다”고 분석했다. 한 중견 변호사는 “유명 법학자들의 이런 행위로 인해 박정희 시대 전국구제도의 삐뚤어진 모습은 법이 현실정치 발전의 필수품이 아니라 권력의 기능적 장식품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박대통령은 유신헌법과 유정회라는 ‘새 전국구제도’를 통해 국회의석의 3분의 1을 무조건 자신이 지명한 사람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한 다음, 이를 통해 새로운 친위세력을 발굴 구축해 권력의 철옹성을 다져나간다. 유정회 발족 전후 박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金正濂)씨의 회고.
“유정회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탄생한 새로운 전국구제도다.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대통령이 정국운영을 주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내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8대, 1973년 9대, 1978년 10대 등 세 차례 총선에서 공천을 지휘했다. 유정회 의원은 여러 분야에서 발탁되는 만큼 박대통령은 분야별로 추천 창구를 정했다.
군 현역은 국방장관, 검사·판사는 법무장관·검찰총장, 경찰은 내무장관, 교육계는 문교장관, 학계는 정무수석, 언론계는 공보수석, 여성계는 정무·공보수석 등에게 추천을 맡겼다. 비서실은 인재를 고르기 위해 학계·언론계 등 5개 분야별로 인사파일을 만들어 참고했으며 여기에 수록된 인사는 약 3000명이었다.
박대통령은 유정회 정원(77명)의 3배 정도가 되는 200명 내외를 추천받았고 자신이 직접 낙점했다. 그렇지만 이들 중 특히 (실질적 권력기반이 될) 혁명주체 인사나 퇴역장성 등 군 계통과 전직 장관 등은 추천창구 없이 직접 고르고, 명단을 내려보냈다. 박대통령은 낙점받은 인사에게 통보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내가 통보해주고 당선자들이 나중에 ‘사전에 비서실장이 알려주더라’고 소문을 내면 괜한 잡음이 생길 것 같아 담당수석들로 하여금 통보작업을 맡도록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거나 잘 아는 몇몇 사람에게만 직접 통보했다. 예를 들면 이웃에 사는 김신(金信) 장군이나 이승윤(李承潤) 서강대교수 등이다. 박대통령과 참모들은 유정회에 인재를 많이 집어넣으려 했으며, 고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1973년 첫 유정회를 구성할 때 당시 홍성철 정무수석은 박대통령으로부터 ‘여성계 인사 중에는 이범준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를 꼭 넣으라’는 분부를 받기도 했다.”
‘전국구 최고실세’ 차지철
박대통령은 이처럼 독재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전국구제도에 집착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박정권에서 전국구제도가 얼마나 악용되었는지 다음의 일화가 잘 보여준다. 관계인사가 전하는 ‘박정희 권력의 핵’ 차지철(車智澈)의 제도정치권 등용에 얽힌 증언기록.
“5·16 쿠데타 과정에 차지철 대위는 물불 가리지 않는 혁명의 전위대였다. 거사 당일 새벽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시로 공수단 지휘부가 주춤거리자 차대위는 무기고·탄약고를 부수고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진격해 들어와 박정희 소장을 놀라게 했다. 박소장은 혁명 성공 후 박종규 소령과 차대위를 최고회의 경호대에 배속시켜 반혁명인사를 잡아들이는 특명활동을 시켰다. 그리고 1963년 11월 민정이양과 동시에 처음 도입된 전국구제도에서 차대위는 집권 공화당 전국구후보 24명 중 22번으로 지명돼 금배지를 달게 된다. 박대통령의 각별한 총애 속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국회의원이 된 차대위는 국회에서 박대통령을 보위하고 방어하는 친위대의 선봉에 나섰다.”
차의원의 의정활동을 옆에서 지켜본 동료의원 K씨의 증언은 더욱 구체적이다.
“박대통령은 가히 용병의 귀신이었다. 청와대에는 꾀 많고 치밀한 모사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과 저돌적 완력대장 박종규를 앉혔다. 국회도 전국구제도를 활용해 묘하게 구성, 구정치인을 대거 포진시키면서 요소요소에 친위 행동대원을 심었다. 차의원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박대통령은 차의원의 저돌성과 충직성을 높이 평가했고, 차의원은 이에 부응하려 최선을 다했다. 입심 좋은 야당의원들이 박대통령에게 가시돋친 공격이라도 하면 차의원은 그냥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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