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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비사·全國區 39년

  • 이병도 < 시사평론가 >

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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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실제 내면에 대한 분석은 다르다. 당시 관계자의 분석.

“13대 민정당 공천내용은 전국구 공천이 최고통수권자의 ‘친위부대’ 강화에 어느 정도로 이용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당선자 38명 중 13대 대통령선거 때 노태우 대통령후보의 사조직인 월계수회에 깊숙이 관여했던 박철언(朴哲彦) 의원 등 월계수회 관계자 10여 명이 ‘당선 확실권’인 앞순위를 모두 차지한 것이 그 명백한 사례다. 이들은 그후 무난히 금배지를 달았고, 6공 최강의 권력핵심 집단이자 노태우 권력의 안전판인 월계수회 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 이때 여당의 전국구 공천이 직능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반증은 의정활동 과정에 잘 드러난다. 5·6공 시절에도 노동·농민·학계 대표로 등원했다는 이 전국구의원들이 각 상임위에서 자신들이 속한 직능단체를 대변하기는커녕 행정부를 두둔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몸싸움과 날치기의 ‘전위부대’ 노릇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박정희 정권을 시작으로 전두환·노태우 군인정권기의 권력안전판으로서의 낙점식 전국구 운용행태는 이른바 ‘3김시대’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3김시대에 접어들어 전국구제도는 한국정치의 폐단을 더욱 깊게 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대정치 30여 년을 나름의 위력으로 재단해온 ‘3김’은 박정희식 정국운영을 비판하면서도, 그들 특유의 카리스마를 이용, 내막적으로는 박정권식의 전국구 운용폐습을 답습해 왔다는 지적이다.

정권 바뀌어도 전국구 놓치지 않은 이만섭

박정희시대와 3김시대에 걸친 ‘기형적 전국구 운용’의 증거로 정치학자들은 이만섭(李萬燮) 현 국회의장의 사례를 거론하기도 한다. 유권자의 뜻과 관계없이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당적을 바꿔도 전국구 공천을 받기만 하면 국회의원이 되고 경력이 쌓이면 국회의장도 되는 현실이 전국구제도가 왜곡된 대표적 예라는 것이다. 이의장의 40년 정치생애와 전국구 의원생활에 대한 K대 정치학과 S교수의 심층 분석.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명에 따라 공화당 전국구의원에 발탁된 이만섭 의원의 정치생명은 살벌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한때 혁명주체인 차지철보다 전국구 앞순위에 배정해주었다고 감읍했던 공화당을 떠나 집권 민정당의 ‘제3중대’로 불린 한국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겨 국회의원직을 이어갔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정권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전국구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했다. 정권이 바뀌면 인적 청산이 뒤따르는 게 관례 아닌가. 그런데 이를 뛰어넘어 민자당 신한국당 새천년민주당 등 3대에 걸쳐 집권당의 전국구의원이 되고,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지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명예가 될지 모르나,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에 등돌린 대가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이의장이 국회가 벼랑 끝 대치에 부딪힐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40년 정치인생의 명예와 양심을 들먹이는 것을 보면 오히려 측은해 보인다.”

김대중·김영삼 진영에 정통한 정치권 유력 소식통 K씨. 그는 지난 30여 년 가까이 양김씨 진영의 핵심에 접근해 있던 직업 정치인으로, 지금도 현역 지구당위원장으로 뛰고 있는 인물이다. 다음은 그의 실토.

“전국구제도의 활용에 불공정성과 독재성을 보여온 것은 3김씨도 비슷하다. 이른바 동교동·상도동계의 집사 노릇을 한 권노갑·홍인길 두 전의원이 한때 한보사건과 같은 정경유착 사건에 함께 휩쓸린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양대 정치 인맥의 관리를 맡은 이들이 돈을 ‘독식’했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금과 돈을 한손에 장악하고 인맥을 관리해온 ‘오너정당’에서 이들은 양김 보스정치의 ‘희생양’일 뿐이다.

전국구 공천장사는 그들이 오랫동안 답습해온 보스정치의 대표적 단면이다. 총선 때마다 공천헌금은 선거자금의 젖줄 구실을 했다. 1992년 실시된 14대 총선만 보더라도 당시 김영삼·김대중 진영은 자파의 전국구 후보를 공천하면서 낙점과정에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 1인당 평균 20억∼30억원의 ‘헌금’을 이른바 정치자금으로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김종필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천헌금을 내지 않은 전국구 후보는, 자파 세력확충을 위한 선전용 또는 간판급 인물들이다. 우리나라 보스정치는 일본을 빼닮았다. 일본에서 록히드, 사가와규빈, 리쿠르트사건 등 대형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는 것도 보스정치, 계파정치 탓이다. 그러나 3김 시대의 실제 상황은 일본보다 더 노골적이고 음성적이며 독단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박대통령이나 3김 모두 전국구제도를 잘못 뿌리내리게 한 원인 제공자들이다.”

이어지는 세도정치의 악습

양상은 이른바 3김이 현실 권력의 명실상부한 축으로 부상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는 것이 일반적 진단이다. 앞서의 소식통 K위원장의 계속되는 전언.

“공천신청 공고를 내고, 신청을 받고 심사위를 구성해 심사를 벌이지만 이것은 요식절차에 불과했다. 최종 낙점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당 수뇌부에서 행사하는 것이 3김시대의 정치 현실이었다.

때문에 선거철이 되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은 사람은 당원이나 지역주민들에게 잘 보이기에 앞서 유력정치인의 집을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총선 때만 되면 연초부터 유력 정치인의 집이 어느 때보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도 이런 비민주적 공천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양김씨가 이른바 민주화의 화신처럼 국민 앞에 나섰지만, 실제 내부 정치행태는 이율배반적이었다.

낙점받기 위해서는 명성이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막대한 헌금을 내거나,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3김씨 중심으로 치러진 각종 선거 때도 공천은 일반당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부 힘있는 측근 실세들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3김시대에도 금권 타락의 한국적 공천제도의 폐해가 가장 짙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국구제도라 할 수 있다. 지역구의원은 당 지도부가 불합리한 공천을 하더라도 지역구민의 최종심판을 받는 보완장치가 마련돼 있지만, 전국구의원은 일정범위 안에만 들면 ‘공천이 곧 당선’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파행이 심했다. 원래의 취지는 퇴색한 채 3김시대 역시 대한민국 세도정치의 악습이 더욱 지능적 형태로 지속되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김과 계파 보스들 간의 물밑 ‘전국구’확보 쟁투는 매우 치열했다. 자파 세력과 권력 교두보를 확충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전국구 확보 접전을 벌였는지, 그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전 민자당 의원 C씨는 3당 통합에 따른 민자당 내분과정에서 있었던 사례를 소개했다.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 간의 3당 통합 후 박태준(朴泰俊) 최고위원과 허화평(許和平)씨 사이에는 ‘악연’이 있었다. 허화평씨는 5공화국 초 허삼수·허문도씨와 함께 소위 ‘스리허’로 불리던 실세였다. 잘 나가던 전두환 정권시절 허씨는 박최고위원을 12대 전국구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당시 신군부에게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허씨가 박씨의 전국구 공천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으로 안다.

그러나 6공이 들어서자 두 사람의 처지는 바뀌었다. 박태준씨는 집권당의 최고위원이었다. 허씨는 14대에서 민자당 공천을 받기 위해 박최고위원에게 접근했다. 물론 박최고위원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측근인 이진우 의원을 이 지역에 공천했다. 이번에는 허씨의 감정이 상했다. 허씨는 무소속으로 출마, 이진우씨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총선과정에 허씨가 박최고위원을 비난한 것은 물론이었다. 허씨는 ‘박최고위원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엄청난 축재를 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9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민자당에 허씨가 입당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이진우 지구당위원장이 김윤환(金潤煥) 의원을 찾아가 ‘허씨는 그 동안 민자당과 박최고위원을 엄청나게 씹은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입당시킬 수 있느냐’며 따졌다고 한다.

이에 김의원은 ‘잘 알았다. 허의원이 박최고위원을 찾아가 사과하기 전에는 절대로 입당시키지 않을 것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민자당 대표로 민정계와의 당내 투쟁에 골몰하던 YS가 당시 계파갈등 과정에 탈당의사까지 보였던 박최고위원을 만류하기는커녕, 허의원의 입당을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리자 박최고위원의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최고위원은 다음날 허의원의 입당식에 불참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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