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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21세기 제품, 19세기 유통

용산전자상가

  • 정철영 < 자유기고가 >

21세기 제품, 19세기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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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자상가의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 중 하나가 이른바 ‘그레이(gray)’ 제품이다. 그레이 제품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상인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대규모 PC 완제품 업체에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공급된 것이 일반 유통망으로 흘러 들어온 제품을, 넓은 의미에서는 제조사의 ‘공식’ 대리점을 통해서 유통되지 않는 제품을 가리킨다.

그레이 제품은 CPU와 하드디스크가 주종을 이루지만, 이외에 메인보드, 그래픽카드, 사운드카드, CD롬 등도 단골 품목이다. 업자마다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품목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매 시점마다 가장 수익 전망이 좋은 아이템으로 수시로 이동할 뿐이다. 맥스터 하드디스크의 한국총판을 담당하고 있는 조인인포텍의 조일행 대표는 “하드디스크의 경우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작년에 30곳에 달했던 그레이 수입상들이 현재는 한군데만 영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레이 마켓에서 가장 선호되는 품목은 CPU와 하드디스크이다. 환금성이 보장되는 데다 제품 불량률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총 유통 물량 중 그레이 제품이 CPU는 80%, 하드디스크는 50%까지 차지하던 시기도 있었다.

제조회사들은 원래 OEM으로 납품하는 물품의 일반 시장 유통을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PC 완제품 제조업체들이 종종 예상 물량을 잘못 예측해 남게 된 재고품이나 구입단가를 낮추기 위해 고의로 많은 물량을 주문해 생긴 여유분을 시장에 풀고 있는 것. 미국의 컴팩, 델, 휴렛패커드 같은 초대형 PC업체들도 재고가 쌓이면 그레이 시장에 덤핑 처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OEM 유출형 그레이 제품들의 조달처는 주로 해외다. 국내 회사에서 유출된 물건들은 금방 추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중 화교 유통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 등지의 중국인들끼리 단합해 현금으로 대량구매한 후 이를 나눠 흘려 보내는 전략적 시장의 하나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용산 상인들은 그레이 제품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우선, 그레이 제품은 밀수품이 아니라 정상 수입품이라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컴퓨터 부품에는 관세가 붙지 않기 때문에 밀수를 해봐야 부가세가 10% 절감되는 정도인데, 그 정도 마진을 먹겠다고 누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밀수를 하겠냐고 반문한다. 또 그레이 제품을 제조과정에서 사소한 불량이 발생해 정상 경로로 출고하기 어려운 제품으로 알거나 제품 사이클이 정점을 지나서 덤핑 처리된 묵은 제품으로 생각하는 것도 완전한 오해라고 주장한다.

경력 7년째라는 한 딜러는 아예 ‘정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내 정식 총판에서 나온 것이면 ‘정품’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레이’라고 부르는데, 물건은 다 같은 거다. 정식 총판 계약했던 회사 중에서도 사업을 접는 곳이 수시로 생기는 현실을 감안할 때, 총판이 제조사와 정식 계약을 체결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애프터서비스 등 사후처리가 확실하면 정품이고, 불확실하면 ‘그레이’인 것이다.”

또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그레이 제품은 꼭 필요하다며 옹호론을 펴는 업자도 있다. “그레이 제품은 국내 총판 유통망과 경쟁·보완하면서 필요한 제품을 탄력적으로 공급해 소비자에게 유리하게 시장 가격을 만들어준다”는 주장이다.

그레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주는 매력은 정상 유통품보다 가격이 약간 저렴하다는 데 있다. 대신 소비자는 다소 불리한 애프터서비스 조건과 미흡한 사용자 지원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레이와 정품간의 애프터서비스의 차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딜러들도 적지 않다.

“하드나 CPU는 처음 사용 때 문제가 없었다면 기계적인 결함은 없는 것이다. 어떤 그레이 물건이라도 최소 몇 달 동안은 불량이 생겼을 때 1대1 교환이나 사후 관리를 해준다. 몇 달 잘 쓰다가 고장이 나는 것은 사용자 과실인 경우가 태반이고, 이런 경우에는 정상 유통품이라도 무상 애프터서비스를 받기가 쉽지 않다.”

그레이 유통업자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조인인포텍의 조일행 대표조차 이런 주장에 일면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무상 애프터서비스 기간이 2년이냐 1년이냐는 소비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한 제스처에 가깝다. 어차피 불량품이 아니고 사용자 과실이 아닌 한 하드디스크는 1, 2 년 안에 고장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악성 그레이 제품의 존재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용산에서는 정품으로 ‘위장한’ 그레이 제품도 다수 유통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공식대리점의 전화번호가 적힌 스티커까지 부착한 후지쯔 하드디스크 그레이 제품이 유통되기도 했다. 이런 제품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명백한 사기 행위다.

정품인 줄 알고 구입한 후 문제가 생겨 공식 애프터센터에 의뢰했다가 시리얼번호가 정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애프터서비스를 거부당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또 그레이 제품 취급 업소에 따라서는 물건을 판 후 애프터서비스의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고의로 폐업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용산 사정에 밝은 사람이 아니고선 그레이 제품을 선택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위험이 따른다.

레이저로 하드웨어까지 ‘위조’

용산에서는 한술 더 떠 ‘리마킹(re-marking)’ CPU처럼 ‘위조된’ 하드웨어를 유통하기도 한다. 리마킹이란 낮은 등급의 부품 표면에 표기된 제품정보를 레이저로 지우고 높은 등급 제품인 것처럼 허위 기재하는 방법이다. 인텔 등 CPU 제조업체에서는 일정 클럭의 CPU를 같은 공정에서 만든 다음 테스트를 통해 가장 안정적인 작동상태를 제품에 표기한다. 때문에 CPU에는 보통 표시된 성능보다 10% 이상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리마킹 CPU를 “사용자가 성능을 높일 수 있는 권리를 업자가 가로챈 CPU”라고 부르는 것이다.

리마킹은 성능 향상이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CPU간의 가격 차이가 심할 때 등장한다. 486 시대와 펜티엄 초기 시절 기승을 부리다가 요즘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용산에서 지난 4월까지 유통된 인텔 펜티엄Ⅲ 866㎒ 박스포장 제품 중에 리마킹 제품이 대량으로 섞여 있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아무 포장 없이 ‘누드’ 상태로 판매되었던 과거의 리마킹 CPU와는 달리 정품과 동일한 박스에 부착된 홀로그램까지 똑같아 전문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위장을 했다고 한다. 이번에 적발된 제품은 리마킹을 통해 10만원 가까운 시세 차익을 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리마킹 기술이 워낙 세련되어 진품과 구별하기 어려워지자 어떤 업자들은 리마킹 제품이 돈다는 소문이 나면 아예 그 모델을 취급하지 않는 식으로 위험을 피해가고 있다. 또 어떤 점포들은 아예 소비자에게 리마킹된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오버클러킹을 미리 해 놓은 기술료’의 개념으로 리마킹 이전의 원래 CPU 가격에 약간 더 붙여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래 성능보다 과도하게 리마킹된 CPU는 상당한 문제를 초래한다. 제조사에서 안정적인 동작을 보장하는 권장 기준을 넘는 조건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시스템 불안정, 과열, 주변 부품의 손상, 수명 단축 등 부작용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물건들은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 제품이기 때문에 공급자는 곧바로 잠적해 버려 애프터서비스 보장이 안 된다. 용산에서 제품을 구매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대목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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