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대상을 따라 여행하던 중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두 달 전 객사하였다.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아랍어로 ‘찬양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뜻도 뜻이려니와 워낙 교조의 상서로운 이름이라서 무슬림 가정에서나 이 이름을 남자에게 붙이곤 한다. 그의 수태(受胎)에 관해서는 한두 가지 오가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명한 것은 자연인인 아버지 압둘라와 어머니 아미나의 정상적인 교합(交合)에 의해 자연인으로 수태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자이자 유복자인 그는 조부의 부양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아이들은 베드윈(사막 유목민)의 기질을 키우기 위해 사막에 보내지는 관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어린 무함마드는 사막에 사는 바누 싸이드 부족의 여인 할리마가 유모를 겸해서 그를 데려다 키웠다. 그러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을 보여주려고 친정이 있는 메디나로 갔는데, 뜻밖에도 도착하자마자 급서했다. 졸지에 무함마드는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된 것이다. 2년 후에는 양육자인 조부마저 사망해, 그는 하쉼가의 족장인 삼촌 아부리브의 슬하로 들어갔다.
삼촌의 도움을 받아 무함마드는 대상을 따라 먼 시리아까지 자주 여행하면서 세파에 부대꼈다. 어린 무함마드는 비록 조부나 숙부의 보호를 받았으나 넘겨받은 유산이 없어 어릴 적부터 방목을 하고 대상교역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변변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고독하고 힘겨운 삶이 무함마드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전부다.
15년 연상녀와 결혼, 15년간의 명상
이슬람사(史)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삶이 훗날 그를 성인으로, 위인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며, 그의 처지를 한낱 알라의 보우(保佑)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착하고 예의 발라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가 하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부족간의 전투에 자주 참가하여 담력과 투지를 키웠다.
이처럼 남다른 풍모를 간직한 채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무함마드는 청년기인 25세 때 40세의 돈 많은 과부 하디자의 대상무역에 대리인으로 참가했다. 천성대로 성실히 일한 무함마드는 하디자의 환심을 얻어 결국 15년 연상인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디자는 무함마드의 충실한 내조자이자 추종자로서 이슬람의 첫 신봉자가 되었다. 부부는 많은 연령 차이를 극복하고 다복하게 산 것으로 전해진다. 무함마드는 하디자가 병으로 죽을 때까지 25년을 함께 살았다. 그들 사이에는 2남4녀가 태어났는데, 다 요절하고 딸 파튀마만 남았다. 후일 그녀는 무함마드의 사촌아우이자 제4대 정통 할리파가 된 알리와 결혼하였다.
부유한 가정의 주인이 되자 무함마드의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속세간(俗世間)의 난맥상에 고민해 오던 그는 자주 메카 근교에 있는 히라 동굴을 찾아가 하염없이 명상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부질없는 부족간의 상잔, 무지몽매한 우상숭배, 끔찍한 여아의 생매장 등 그가 체험한 각종 사회 부조리와 비리, 갈등을 반추하며 ‘절대적인 힘’에 기구하였다. 그는 이러한 명상과 기원을 15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보통인간 무함마드였다.
이 기나긴 세월은 인간 무함마드에게는 수행기간이었고, 성인(聖人) 무함마드에게는 예비기간이었다. 그가 명상을 계속하던 35세 때인 605년, 카아바 신전 재건을 놓고 이해가 충돌해 꾸라이쉬 부족 사이에서 극심한 분쟁이 일어났다. 다들 속수무책 방관하고 있을 때 무함마드가 설득과 중재에 나서 공평정대하게 해결하였다. 그가 발휘한 발군의 지혜와 충실성에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를 ‘아민(충실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민’은 인간 무함마드의 유일한 아호다.
‘말하라’로 시작된 꾸란
15년간 명상과 수행을 거듭하던 그는 40세 때 드디어 대오각성하여 하나님(알라)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여 년간 성사(聖使)로서 이슬람을 뿌리내리게 하고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위정자로서 첫 이슬람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예수의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이 부동의 신념으로 굳은 기독교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양성론 대신 자신은 ‘인간뿐’이라는 단성론(單性論)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증좌(證左)는 이슬람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전 ‘꾸란’에는 “말하라. 나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나에게는 너희의 신이 유일신이라는 계시가 내렸을 뿐이니라”(18장 110절)고 하였다. 이를테면 경전으로 무함마드의 단성(인간성)을 단정한 셈이다. 그는 시종 인간으로, 그러나 평범한 인간이 아닌 ‘사건 창조적 인간’으로 종교나 정치·경제·문화·사회·군사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변혁을 지휘하였다. 그는 어느 한 분야의 문패가 붙은 ‘칸막이 방’에 국한하지 않고 이 방 저 방을 넘나드는 ‘통방’을 하며 살아왔다. 여느 위인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통방살이’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인간으로 자부했기 때문이다. 위인 무함마드가 이름의 뜻 그대로 만민으로부터 찬양받는 첫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무함마드의 면모는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금욕주의자라고 할 정도로 절제하고 근면하고 소박했다.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입고 살면서 구차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사회의 평등과 정의를 강조했다. 예언자로 존대를 받으면서도 자기 옷을 손수 꿰매 입었다. 가구래야 고작 나무침대와 물동이 하나뿐인 오막살이 흙집에 사는 평범한 인간상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복(家僕)을 비롯한 숱한 노예를 해방시켰다.
‘알라만이 아는 일이다’
무함마드는 남다른 관용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메카에 무혈 입성한 후에는 이슬람 출현 초기부터 그토록 그를 비방하고 냉대하던 메카사람들마저 모두 용서하고 관대히 대해 주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메카인들은 무리를 지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선교 초기 그는 메카사람들의 박해에 못 견딘 추종자들을 에티오피아로 피신시켰으나 정작 그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메카에 홀로 남아 이슬람의 싹을 지켰다. 이러한 비범한 인간성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사람들은 그를 받들었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오로지 ‘완전한 인간’으로 숭앙했을 뿐, 결코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무슬림들은 말이나 글에서 무함마드를 거명할 때면 꼭 “알라께 기도하나니 그에게 평화를!”이라는 기도사를 덧붙이는데, 이는 인간 무함마드에 대한 숭앙을 표명한다.
흔히 성인이나 예언자를 기적의 화신으로 부상시키는 경우가 많다. 어떤 성인의 전기는 신묘한 기적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기적다운 기적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것도 주로 신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기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야행승천(夜行昇天, 이쓰라와 미아라즈) 기적이다. 어느 날 밤 그는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날개 돋친 천마(부라끄)를 타고 메카의 금사(禁寺)에서 예루살렘의 원사(遠寺)까지 일순간에 날아가 그곳에서부터는 빛에 실려 승천한다. 그리고 가까스로 7단계를 거쳐 알라의 어좌(御座)를 참배하고 돌아온다.
이때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아 메디나의 성천(聖遷)에서 출로를 찾고 있던 때로 이슬람력(曆)으로 621년 7월27일 밤이었다. 그는 이러한 기적으로 알라가 보낸 사람이라는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무슬림은 인간의 상식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오직 ‘알라만이 아는 일이다’(알라 아알람!)며 더 이상 사족을 달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이 ‘승천’을 영혼 고양(高揚)의 상징으로 해석하며, 훗날 이것이 이슬람 신비주의를 형성하거나 이탈리아의 시성(詩聖) 단테가 ‘신곡(神曲)’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에게 기적을 행한 행적이 적은 것은 메디나 유대인들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기적 없는 예언자가 어디 있느냐고 그를 조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적은 것은 신이나 기인이 아닌 인간 무함마드의 ‘인성’을 증언해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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