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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특집|무서운 중국

포스트 장쩌민시대 4대 시나리오

  • 금희연 <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중국정치) > hykeum@uos.ac.kr

포스트 장쩌민시대 4대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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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2기 3중전회에서는 ‘경제개혁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2단계로 도시 부문에서 전면적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국가와 당이 기업에 대한 간섭과 지배를 최소화하는 ‘당정(黨政)분리, 정기(政企)분리, 당기(黨企)분리’를 명시함으로써 당은 사상 및 정치분야 활동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업 경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는 대신 공장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소유제 형태도 국유기업, 집체기업, 사영기업, 향진기업 등과 같이 다양해졌고, 일정한 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남은 이윤은 기업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도 획기적인 조치였다.

제3단계는 대외개방조치였다. 자급자족적 경제에서 탈피해 적극적인 대외개방경제를 추진하고, 세계경제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동남부해안에 5개 경제특구(深, 珠海, 汕頭, 厦門, 海南島)를 설치하고 14개 도시를 개방도시로 지정했다. 중국 지도부가 경제 낙후의 원인이 폐쇄와 고립에 있다고 인식한 결과였다.

이렇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지 20여 년. 그 짧은 동안 중국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성장했다.

중국의 GNP는 구매력 수준으로 계산할 경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고, 세계은행은 구매력 수준으로 볼 때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이미 3000달러를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유엔 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과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회원국으로서 지역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사건, 하이난다오에 불시착한 미국 첩보기 송환문제 등을 해결하는 과정에 중국이 보인 태도는 이제는 과거의 중국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구소련 해체 후 미국에 대해 ‘노’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중국이 가공할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시장과 계획의 결합이라는 혼합경제를 추진하는 중국은 과연 ‘중국위협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려처럼 문제투성이일까. 중국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 와중에 급격한 체제개혁과 변동을 경험한 동아시아국가들과는 달리 ‘과감한 경제개혁, 조심스러운 정치개혁’의 틀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최초로 개혁·개방을 추진한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과 부작용을 살펴보자.

새장 속의 새

중국에서는 ‘삼하(三下·싼샤)’가 중국인을 병들게 했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싼샤’란 ‘샤팡(下放·마오쩌둥 시대에 지식인, 간부, 학생들을 지방으로 축출한 것)’ ‘샤하이(下海·덩샤오핑 시대 관리들의 이직과 개인사업 열기)’ ‘샤깡(下岡·장쩌민 시대의 정리해고)’을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마오쩌둥뿐만 아니라 덩샤오핑과 장쩌민도 인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개혁·개방에 대한 인민의 시선과 평가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1980년대 중반, 개혁·개방에 대해 비판적이던 당내 보수세력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핵심인물은 덩의 오랜 친구이자 당내 경제 이데올로그였던 천윈(陳雲)이었다. 그는 덩의 개혁·개방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사회주의 계획경제 기반을 위협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른바 ‘새장(鳥籠) 경제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국가의 통제와 계획의 틀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새장 문을 너무 많이 열면(지나치게 개방되면) 새가 날아가고 말 것이라는 논리였다. 시장경제가 주가 되고 계획경제는 보조적인 수단(市場爲主 計劃爲補)이 돼야 한다는 덩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천윈을 위시한 보수세력은 지나친 개혁·개방은 서구의 정치체제와 의식, 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을 유입시켜 중국 공산당의 권위와 합법성을 뒤흔들고, 나아가서는 중국의 체제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도시지역에서 개혁·개방이 추진된 1984년 이후 중국 도시에는 그 전까지 금지됐던 서양 음악과 영화, 소설 같은 예술작품뿐 아니라 혼전관계, 귀고리, 짧은 머리와 화려한 의상 등이 급속하게 유행을 탔다.

일부 지식인들과 당·정의 관료들 사이에도 서구의 정치체제와 민주주의에 관한 관심과 요구가 증폭됐고,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서 적절성과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보수세력의 비판과 반격에 대해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폐해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방 안이 더워 창문을 열면(개방), 시원한 바람(경제성장)이 해충(부작용)과 함께 들어온다”고 비유했다. 하지만 덩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이 직면한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개혁·개방의 속도와 범위에 대해 여전히 당과 지도층 내부에 갈등과 분열이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은 1984년부터 심각한 이데올로기 혼란을 겪어왔다. 마르크스주의의 효용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지식인들과 당내 급진 개혁파를 중심으로 서구 민주주의가 중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럽게 싹텄다.

1986년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에서 시작된 유산계급 자유화운동은 순식간에 상하이와 베이징을 위시한 대도시로 파급됐고, 당중앙은 급기야 그 책임을 물어 덩의 후계자였던 후야오방 당 총서기를 해임하고 자오쯔양 당시 국무원 총리를 당 총서기에 임명했다. 후야오방은 덩의 정치개혁을 미온적·제한적인 것으로 보고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해왔고, 이는 반체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이러한 이데올로기 갈등은 개혁·개방에 대한 저항과 비판세력을 등장시켰다. 당중앙은 학생시위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정치원칙상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후야오방을 실각시키고,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했던 팡리즈(方勵之) 당시 허페이공대 부총장, 언론인 류빈옌(劉賓雁) 등 당내 진보적 지식인들을 제명했다. 하지만 급진세력을 제거한 것이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당과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강화시켰다.

공룡으로 변한 ‘해충’

새로이 당 총서기로 임명된 자오쯔양은 개혁·개방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고 생산력 발전이 최대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개혁의 가속화만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을 추도하기 위해 톈안먼광장에 모인 시민과 학생들은 당과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인민의 자유와 인권보장을 촉구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6월4일,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고, 결국 자오쯔양도 그의 전임자 후야오방처럼 ‘난동’의 책임을 지고 당 총서기에서 물러나면서 장쩌민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인민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든 다시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다.

둘째 문제는 극심한 경제적 격차. 연안지역을 먼저 부강하게 만든 다음 내륙지역을 발전시키려 했던 ‘선부론(先富論)’은 중국인들을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했다. ‘미래를 바라보자(向前看)’는 개혁·개방의 대원칙은 ‘돈을 바라보자(向錢看)’로 바뀌었고, ‘인민을 위해 일하자(爲人民服務)’는 구호는 ‘인민폐를 위해 일하자(爲人民幣服務)’로 전락했다.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 주민들은 1년에 평균 3만805위안과 1만9803위안을 벌지만(1999년 기준), 낙후지역인 구이저우(貴州), 간쑤(甘肅), 산시(陝西)성 주민들의 연수입은 각각 2463위안, 3595위안, 4101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도농간의 수입격차도 크다. 1984년까지는 농민 수입이 연간 14.5%씩 증가, 도시 주민의 8.5%를 앞질러 농촌과 도시주민 1인당 소득비율이 1978년의 1:2.4에서 1984년에는 1:1.7로 축소됐다. 그러나 1999년 통계에 따르면 도시 주민의 연평균 소비액은 6651원인 데 비해 농촌 주민들의 소비수준은 그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지는 추세다.

셋째 문제는 당과 정부 관료들 사이에 만연한 부패. 공무원과 당료들의 불법행위는 중앙정부의 단호한 부패척결 의지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부패와 금권유착은 중국인의 전통적 인간관계인 ‘시(關係·연줄)’와 ‘미엔즈(面子·체면)’에 기인한다. 혈연 지연 학연뿐 아니라 직장동료, 군대 동기, 상사와 부하로 맺어진 인연, 연수교육 동기생 등 수직적·수평적으로 연결된 관계망에 따라 ‘서로 돌봐주기(互相照顧)’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서로 체면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사고, 법치가 아닌 인치에 따라 움직이는 법률경시 현상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넷째 문제는 급속한 사회변화다. 덩샤오핑이 경시한 ‘해충’들이 실제로는 공룡이 되어 중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퇴폐적인 행위와 문화의 유입이 중국의 문화와 가치관을 변모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체제를 위협하게 되리라고 믿었던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를 정신오염으로 보고 경계해왔다.

특히 톈안먼사태 이후에는 체제옹호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의지와 정책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들이 흔히 쓰는 ‘화평연변(和平演變)’이라는 말은 서방 국가들이 문화와 같은 비군사적 요소를 앞세워 중국사회에 침투, 중국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기도라는 의미다.

“메스를 쥔 의사보다 식도를 든 주방장이 더 많이 번다”든가 “원자탄 만드는 과학자보다 자전거 수리공이 더 낫다”는 황금만능주의, 법률경시 풍조, 국유기업의 비효율, 티베트와 신장(新疆)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 등도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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