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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3>

박정희, 윤보선에게 대장계급장 요구하다

  • 김준하

박정희, 윤보선에게 대장계급장 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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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차관은 윤대통령에게 먼저 “지금 우리나라는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우리와 국교가 있는 50여 개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상으로는 무정부 상태가 오늘의 현실이다”고 외교부의 견해를 설명했다.

내각을 발족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던 군사정부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닌가? 그리고 대통령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대목은 “대통령이 사임하면 현재의 혁명정부가 국가로서 승인을 못 받은 상태이므로 만일 북괴군이 남침해 올 경우 우리는 속수무책이고 유엔이나 자유우방국에 침략을 호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차관은 “우리의 최대 우방인 미국은 군사혁명의 성격과 주동 인물의 정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 혁명정부의 승인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조차 않고 있다”고 미국의 미온적 태도를 설명했다.

김차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는 대통령의 하야로 유일한 대한민국의 헌법기관이 소멸됨으로써 혁명정권은 국제적 승인을 다시 받아야 하고 그때 소요되는 시간은 예측할 수 없으며, 둘째는 무정부 상태가 현실인 만큼 유엔군이 군사원조를 할 법적 근거가 없어지고, 셋째는 정부 수립 후 54개국과 맺은 조약 등 외교문서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김차관은 대통령을 참으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바로 13시간 전에 국민을 향해 하야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를 번의하면 국민은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군사혁명의 압력에 못 이겨서, 아니 대통령 자리에 연연해 생각을 바꿨다는 얘기가 나올 것 아닌가. 또 외국에서는 한국 대통령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대통령에게는 이보다 더 괴로운 순간은 평생 없었을 것이다.



윤대통령은 하야 후 비서들에게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하야의 뜻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음이 약해서도 아니요, 군인이나 김차관의 간청이 절실해서도 아니요, 나아가 군정이나 내 개인을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국가원수로서 혁명정부가 들어선 데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사람인데 그 혁명정부가 국가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면 나는 더 큰 책임을 면할 길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5·16을 겪은 국가원수로서 번민과 고뇌가 한데 뭉친 고백이 아니겠는가!

20일 오후 2시 대통령과 최고회의 정·부의장 그리고 김용식 외무부차관 등 역사적인 4자 회담이 청와대에서 열렸다. 대통령도 박정희 부의장도 김차관에게 자세한 브리핑을 들었던 만큼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고 김차관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김차관은 아침에 자기가 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장도영 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박정희 부의장이 말문을 열었다.

“김차관의 건의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번의를 해주신다면 후세의 사가들이 바른 일을 하신 것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알겠소이다”라는 한마디로 회의는 끝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만둔다면 그만두라지. 빠를수록 좋아”라고 하던 박정희 부의장의 변신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 외교관의 간절한 충언이 대통령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던 것이다.

하야 번복

오후 6시 전후해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하야 기자회견을 준비하던 나는 ‘하야 번의 회견’은 미처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장도영, 박정희 최고회의 정·부의장과 김용식 차관도 회견에 참여했다. 아무래도 쑥스러웠던 대통령은 “이거 하야 기자회견이 하야 번의 기자회견이 됐구먼” 하는 우스갯소리로 굳은 분위기를 풀었다.

“나는 정치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의 사태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하야 결심을 하게 됐다”고 서두를 연 다음 “그러나 나의 하야가 국·내외적으로 영향이 막대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다는 결론이 나서 하야를 번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만일 앞으로 일이 잘못 진행된다든지 기대와 예측에 어긋나는 일이 생길 때에는 나는 단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을 맺었다.

장·박 두 정·부의장은 대통령의 마지막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자회견을 계기로 군사정권의 대통령인 윤보선씨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됐다.

윤대통령이 청와대에 주저앉은 것은 완전히 타의였으나 그때부터 청와대 사람들은 무기력한 적막에 잠겨 석간이나 조간신문을 기다리는 조촐한 생활을 하게 됐다. 신문에 대한 혁명정부의 사전검열 탓도 있으나 신문논조나 대학교수들이 발표하는 시론은 점차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기성 정치인의 부패, 무능, 비능률, 무괴도한 정권욕과 이조 사색당파를 능가하는 사투로 말미암아 이번의 군사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지적, 장면 정권의 신·구파 파벌 싸움이 5·16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근본 이념으로 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옳게 실천하지 못했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반공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불명예를 면할 길이 없다”고 장면 정권의 무능을 나무랐다.

혁명정부가 5·16 발생 일주일 후 언론정비에 관한 포고 11호를 발표한 이후 혁명에 대한 비판은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신문은 혁명을 지지·찬양하는 데 경쟁적으로 열을 올렸다. 그러나 군정 종식을 바라는 국민의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숨을 죽여가면서 사발통문식으로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게 형성돼갔다. 하루는 통신사 간부 한 사람이 UPI 통신 원문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UPI 통신문엔 미국의회가 한국의 군사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하고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촉구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미국의 여론은 한국 헌정을 중단시킨 군사혁명에 매우 비판적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UPI 통신 내용을 보고했다. 당시 보도 금지된 외신을 외부에 흘리면 그야말로 중죄 중의 중죄로 처벌될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뉴스나 여론이 완전통제된 전형적 독재국가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매일같이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을 드나들면서 한국에 대한 외신을 수집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어느새 일과가 돼버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차츰 국내에서도 외국여론 못지않게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듯했다.

그 무렵 대통령을 찾아온 정치인이나 언론계 중진들 입에서 “이럴 때 대통령이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마땅히 국민의 여론을 대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리 발언’을 시키려는 정치계나 학계, 언론계의 압력이 날이 갈수록 가열돼 갔다. 대통령은 가끔 나를 보고는 “허 참,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하며 한숨 섞인 독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요한 외신이 입수됐다. 9월에 소집되는 유엔총회에서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논의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문제가 큰 논란거리가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마침내 최고회의 출입기자단 간사가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이 하야를 번의한 이후 처음으로 정식 기자회견을 요청해왔다. 국가적인 중대한 시기에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기자들의 주장이었다.

“조속히 민간에 정권 이양해야”

그들은 6개항의 질문 요지를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 가운데에는 “9월 유엔 총회를 앞두고 민정이양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오”가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6월3일 최고회의 기자단과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갖기로 결정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민정이양 시기가 초점이 됐다. 군사정부로서는 가장 아픈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5·16 나흘 후 하야성명을 발표했을 때 장도영 당시 혁명위원장으로부터 민정이양 시기가 “빠르면 3개월, 늦어도 6개월”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고, 혁명공약 6개항에도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민정이양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고 기자들이 민정이양에 대해 질문하게 됐는데 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나나 군인이나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특히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서 민정이양 문제가 결정돼야 한다”고 못박았다.

대통령이 9월 유엔총회를 시한으로 제시한 것은 결과적으로 3, 4개월 안에 군정을 끝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군사정부측에서는 기자회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며 한 사람도 입회하지 않았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처음으로 군정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발언 내용이 그대로 보도됐다.

특히 문제가 된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은 ‘조속한 정권이양 필요’, 부제목은 ‘반공 체제 확립 강조’였다. 신문이 나오자마자 군정당국은 동아일보의 김영상 편집국장을 비롯해 최고회의 출입기자인 이만섭(현재 국회의장) 기자를 연행했고, 6일에는 이진희 기자(1980년 당시 공보부장관), 그리고 7일에는 정치부 데스크인 조용중 차장(뒷날 연통사장 역임)과 정치부의 박경석 기자(뒷날 국회의원 역임)를 연행했다. 군정당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속한 정권이양’이라는 큰 활자의 제목이었다.

군정당국은 대통령이든 누구든 앞으로 다시는 ‘정권이양’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동아일보뿐 아니라 청와대의 유동준 비서관도 최고회의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정권을 빨리 이양하라는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박정희 소장은 직접 청와대 비서를 불러놓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한 혁명인데 누구에게 함부로 정권을 내주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최고회의가 청와대 비서를 잡아간 것은 실은 대통령을 잡아간 것과 다름없었다. 동아일보가 고초를 겪는 동안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자회견을 준비한 장본인인데다 동아일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만섭 기자는 7·29 선거 전까지 나와 함께 국회를 출입하던 기자였고 이진희 기자도 내가 동아일보에 있을 때 수습기자로 같이 일하던 사이였다.

동아 사태에 대해 청와대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장도영 의장을 불러 선처(?)를 부탁하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장도영 의장을 불러 “당신이 짧으면 3개월, 길어도 6개월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한 말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야단쳤다. 장도영 의장은 도리어 엉뚱한 말을 했다. 사실 자기가 박부의장에게 “군정 기간을 6개월 정도로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물었더니 박부의장이 “어림도 없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혁명과업은 절대 완수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한 불만을 보였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말해 3개월이니 6개월이니 하는 소리는 장도영 의장의 개인 생각이었고 혁명 주체인 박정희 부의장은 그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 의장의 말을 믿은 대통령의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아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 소장의 야심은 차츰 본색을 드러냈다. 연행된 동아의 김영상 국장, 조용중 차장, 박경석 이진희 기자는 석방됐으나 이만섭 기자는 ‘유언비어죄’로 끝내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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