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영웅을 사랑하는 건 행복한 일, 더 많은 이에게 이소룡 알리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12-22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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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무문’ 속 진짜 액션의 충격
    • “잔은 비어 있어야 쓸모 있다”
    • 32년 인생 동안 100년을 산 분
    • 바비킴, 황인식, 이준구 사범과의 인연
    • 우리나라에 이소룡 기념관과 동상 짓겠다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당신은 이소룡(李小龍·리샤오룽) 팬인가. 그렇다면 안태근(56) EBS PD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슬며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동류를 발견한 기쁨,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군’ 하는 안도감. 웃음의 속뜻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안 PD 집 거실에는 이소룡 초상화가 놓여 있다. TV 바로 위, 소파에 앉으면 시선이 닿는 곳, ‘일반인’의 집이라면 가족사진이 걸려 있을 그곳에서 이소룡이 당신을 내려다본다. 거실장도 이소룡 차지다. 무술 동작을 형상화한 작은 조각상부터 사진과 책자까지, 3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영웅’을 기리는 물건이 빼곡하다. 옆방으로 들어가보자. 안 PD가 서재로 사용하는 이 공간은 숫제 이소룡 박물관이다. 세계 각국 언어로 출간된 이소룡 평전, 화보집, DVD와 이소룡에 관한 기사 스크랩북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안 PD가 이소룡과 더불어 살기 시작한 건 1973년부터. 그해 여름, 한국에 영화 ‘정무문’이 수입됐다. 난생 처음 본 이글거리는 눈빛의 사내는 스크린 안에서 거침없이 뛰어오르고 발길질을 날리더니, 마침내 총알이 쏟아지는 허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영화가 끝났을 때 그는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원래 장철 영화를 좋아했어요. 홍콩 배우 강대위의 열렬한 팬이었죠. 그런데 정무문은 그런 영화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니, 아예 영화 같지가 않았어요. 맞고 때리고 쓰러뜨리는 장면이 중단 없이 이어지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의 그 비장함이란…. 아, 내가 지금 ‘진짜’를 보고 있구나. 저 사람은 배우가 아니라 무술가구나. 그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관객들도 그랬는지 극장 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누군가 큰 숨을 내쉬었고, 현실로 돌아온 안 PD는 바로 태권도장으로 달려갔다. 그때 알았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결코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걸. 영화감독 지망생이던 열여덟 살 소년은 그날부터 이소룡 영화를 보고, 이소룡 책을 읽고, 이소룡 삶의 흔적을 쫓는, 명실상부한 이소룡 마니아가 됐다.

    이소룡 세대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이소룡 신봉자들이었으므로 서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공통된 코드를 갖고 있었다. 한 아이가 괴조음을 지르며 코를 문지르면 다른 아이는 곧바로 일본인 무사의 포즈를 취해주었다. 심지어 쌍절곤을 허리춤에 차고 등교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 서투른 쌍절곤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줬다.’

    1963년생 유하 감독이 펴낸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의 한 부분이다. 유 감독보다 여덟 살 많은 안 PD의 학창시절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돌아보면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 중 이소룡에 미치지 않았던 이가 얼마나 될까.

    이소룡은 1973년 세상을 떠났다. 서른두 해 사는 동안 고작 다섯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복근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몸놀림, 그리고 특유의 포효 소리는 그의 사후에도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한국에 ‘정무문’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소룡이 세상을 떠난 뒤였어요. 그래도 우리는 모두 이소룡 팬이 됐습니다. ‘정무문’ 상영 뒤 태권도장에 사람이 얼마나 몰렸는지, 관장이 강습료를 세 배나 올립디다. 18기 도장은 이미 정원이 차고 넘쳐서 아예 갈 엄두도 못 낼 정도였지요. 제 친구 중 한 놈은 이소룡한테 영혼을 다 빼앗겨서 허구한날 웃통 벗어젖히고 절권도 흉내만 내고 다녔어요.”

    유하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현수(권상우)는 이소룡이 쓴 ‘절권도의 길’을 탐독하고, 쌍절곤을 돌리며 괴조음(怪鳥音)을 토해낸다. 안 PD와 친구들 모습이 바로 그랬다. 안 PD는 그 무렵의 열광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이소룡 영화가 나올 때마다 극장 앞에 가면 서울시내 모든 학교 교복을 다 볼 수 있었어요. 저는 ‘정무문’ 다음 영화부터는 늘 첫날 첫 회에 혼자 갔지요.”

    영화에 진지하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극장은 늘 콘서트장처럼 떠들썩했다. 특히 1973년 10월28일 스카라 극장에서 ‘당산대형’을 볼 때는, 이소룡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괴성을 질러대는 탓에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오빠부대’랑 견줘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개봉 첫날 첫 회가 그 정도였으니, 이소룡이 우리나라에서 순식간에 얼마나 인기를 모았는지 알 만하죠. 관객 중에 화교도 꽤 많았던 기억이 나요. 당시 화교들은 우리나라에서 대접을 잘 못 받았거든요. 이소룡 같은 불세출의 스타가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1974년 새해 첫날 본 ‘용쟁호투’는 차원이 다른 액션 때문에 기억이 난다. 온갖 종류의 무예를 익힌 무술의 달인들이 섬 하나에 모여 무규칙 이종 격투 대회를 벌인다는 설정부터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이소룡이 절권도의 힘으로 실력자들을 꺾을 때마다 극장 안에서는 얼마나 환호성이 터졌던지.

    “그는 진짜였다”

    “‘맹룡과강’은 1974년 10월11일 피카디리극장에서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일 멋있는 건 이소룡의 몸이었어요. 이 영화 찍을 때가 무술가로서 최고의 컨디션이 아니었나 싶은데, 특히 활배근이 끝내줬어요. 그전까지는 어느 남자 배우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육체미를 과시한 적이 없습니다. ‘맹룡과강’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배우고, 무술가면서, 동시에 아티스트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안 PD는 신바람 나서 옛 추억을 얘기하다 몇 번이나 “그 영화 봤지요? 그 장면 기억나지요?” 하며 확인을 했다. ‘그때 그 표정’ 같은 디테일까지, 얘기하다 보니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소룡 영화는 재개봉관, 삼개봉관을 거쳐 동네 극장에 걸릴 때까지 수십 번을 보고보고 또 봤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모든 작품을 달달 외우고 있는 지금도 문득 그가 그리울 때면 DVD를 걸고 스크린 앞에 앉는다. 그러면 피카디리극장에서 처음 이소룡을 만나던 순간의 충격과 스카라극장을 가득 메웠던 열광적인 함성, 아세아극장에서 느낀 벅찬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짜릿하다.

    안 PD는 당시 극장에 붙어 있던 영화 소개용 팸플릿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흑백 인쇄된 ‘정무문’의 전단지에는 ‘光行記錄(광행기록)이 保證(보증)하는 無條件(무조건) 재미있는 娛樂大作(오락대작) 精武門(정무문)’이라는 글씨와 함께 발을 하늘로 쭉 뻗은 이소룡의 사진이 실려 있다. ‘맹룡과강’팸플릿에는 ‘全世界(전세계) 팬의 가슴속을 뒤흔든 李小龍(이소룡)의 마지막 巨彈(거탄)’이라는 소개 문구 아래 웃통을 벗어던진 이소룡의 그림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이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보물들이다.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이 팸플릿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더군요. 이소룡 흉내로 장안을 휘젓던 친구는 지금 건실한 사업가예요. 윗옷 잘 챙겨 입고 동대문에서 꽤 큰 회사를 운영합니다.”

    이소룡으로 둘러싸인 서재에 마주 앉아 안 PD는 씨익 웃어 보였다. 순간, 뜨거운 피가 돌던 1970년대에서 2010년으로 시간이 재빠르게 흘렀다.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초로의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다. 자못 놀라운 집 분위기와 비교할 때 사실 그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다. 탄탄한 배도, 날렵한 턱선도 없는 그에게서 ‘이소룡 마니아’의 냄새를 맡는 건 쉽지 않다.

    “젊을 때는 이래봬도 쌍절곤 좀 돌리고 운동도 제법 했어요.”

    -노란색 트레이닝복도 입으셨고요?

    “갖고는 있었죠. 그런데 다른 친구들만큼 열광적으로 흉내를 내고 다닌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돌아보면 그때는 이소룡보다 이소룡 영화를 더 좋아했거든요.”

    그는 자칭 ‘충무로 키드’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극장에 다녔다. 이소룡을 만났을 때는 한국에 매년 수입되는 외화 40편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었다. 영화를 조목조목 분석할 줄 알았고, ‘저 장면은 이렇게 찍으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전문가스러운’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소룡 영화는 모든 판단을 마비시켰다. 관객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게 바로 이소룡의 마력이었다는 걸, 한참 더 지난 뒤에야 알았다.

    절권도의 길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미국 시애틀에 있는 이소룡의 묘에 헌화하고 있는 안태근 PD.

    홍콩 무술영화 붐은 갑자기 찾아온 만큼이나 순식간에 끝이 났다. 양소룡, 여소룡, 거룡, 당룡…. ‘룡’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배우들이 화려한 액션을 바탕으로 숱한 아류작을 쏟아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제2의 이소룡이 되지 못했다. 안 PD에 따르면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까지 열광시킨 이소룡 영화의 ‘무엇’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소룡의 마력, 정신, ‘진짜’ 같은 것들이다.

    “이소룡은 ‘동양인은 게으르고 무식하고 허세가 심하다’ 같은 편견을 일거에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화에는 화려한 발차기와 손동작뿐 아니라 동양의 정신까지 담겨 있죠. 이소룡은 ‘정무문’에서 일제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맹룡과강’에서는 서양 문화의 정수 콜로세움 앞에서 백인을 물리칩니다. 그 힘은 지금껏 세상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무술에서 나오죠.”

    이소룡은 자신의 이 무술에 ‘절권도(截拳道·주먹을 저지하는 방법)’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 PD는 절권도를 “이소룡이 평생에 걸쳐 수련한 모든 무술의 결정체이자, 무술을 넘어서는 하나의 개념이며 철학”이라고 말한다.

    “이소룡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태극권을 배웠습니다. 펜싱 연방 챔피언이던 형 피터에게 펜싱도 배웠지요. 열세 살 때부터는 영춘권 전승자인 엽문 사부 아래서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홍콩 복싱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할 만큼 복싱도 수준급 실력을 쌓았어요. 미국으로 건너간 뒤엔 유도와 필리핀 전통 무술, 주짓수, 가라테, 무에타이, 태권도 같은 다른 유파의 유단자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절권도’가 만들어졌다. 절권도의 탄생 과정에는 재미있는 뒷얘기가 있다. 이소룡은 미국에서 현지인들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걸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소룡이 신체조건 좋은 서양인들에게 전통 무술의 비밀을 가르치는 걸 싫어했다. 196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쿵푸를 가르치던 중국인 사범 왕작만이 이소룡에게 공개 도전장을 내밀었다. 싸움에서 지면 더 이상 외국인에게 쿵푸를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 대결에서 이소룡은 승리를 거뒀지만, 몇 초안에 끝냈어야 할 승부를 3분 넘게 질질 끈 점에 스스로 좌절했다.

    무술인, 철학자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1973년 국내 개봉한 ‘정무문’(왼쪽)과 74년 개봉작 ‘맹룡과강’ 팸플릿. 안 PD 개인 소장품이다.

    어린 시절 홍콩에 있을 때 이소룡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들과 싸웠다. 그런데 미국에서 만나는 상대는 자신보다 30㎏은 무겁고 15㎝는 큰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싸워 이기려면 맞지 않고,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했다. 왕작만과의 싸움을 통해 이소룡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동안 익힌 여러 무술의 우성인자만을 모으기로 했다. 불필요한 동작은 걸러냈다. 품새나 형식에 구애하지 않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실전무술. 그게 바로 절권도다. 이소룡은 “나의 절권도는 껍데기를 싫어한다. 모든 복잡을 뚫고 문제의 핵심에 돌진한다”고 했다. “절권도에는 고정된 형식이 없다.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도 움직이지 않으며 적이 움직이려 할 때 내가 먼저 친다는 것, 오직 이 목적을 추구할 뿐”이라고도 했다. 안 PD는 이 ‘무형식의 형식’‘비어 있음의 힘’이 바로 절권도의 정신이자 이소룡의 철학이라고 했다.

    “‘The usefulness of the cup is in it′s emptiness’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컵은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이소룡이 한 말입니다. ‘물이 돼라’는 충고도 기가 막히죠. TV 시리즈 ‘롱스트리트’에서 무술 교사역으로 출연해 학생에게 한 얘깁니다. ‘당신의 마음을 물처럼 형체 없이 비우세요. 물을 컵에 부으면 컵이 됩니다. 병에 부으면 병이 되고, 주전자에 부으면 주전자가 됩니다. 물은 흐를 수도 있고 강력하게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물이 되세요(empty your mind, be formless, shapeless, like water. now you put water into a cup, it becomes the cup. you put water into a bottle, it becomes the bottle. you put it in a teapot, it becomes the teapot. water can flow or it can crash. be water my friend.)’ 이런 말은 무술가도 철학자도 하지 못해요. 무술을 하면서 끝없이 자신을 연마한 사람, 무술에 자신의 철학을 입힌 사람만 할 수 있는 금언입니다.”

    안 PD는 자신의 무술 유파와 철학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숙한 이소룡이었기에 영화 속에서 ‘진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소룡은 자신이 주연을 한 모든 영화에서 무술 감독 역할을 했고, ‘맹룡과강’과 ‘용쟁호투’의 경우 대본 작업과 연출에도 참여했다. 작품 속에서 무술가가 드러내는 눈빛과 철학은 이소룡 고유의 것이다. ‘진짜’다.

    이소룡의 사람들

    이소룡에 반하면서 안 PD는 자연스레 이소룡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꿈꾸게 됐다. 쌍절곤을 돌리고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는 게 아니라, ‘진짜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뒤 1976년 교내에 ‘무술영화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안 PD가 대학 졸업작품으로 만든 무술실험영화의 제목은 ‘공(空)’. 한 무술 대가가 달을 따기 위해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밤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마침내 달을 따 들고 착지한 뒤 손을 펴보니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공(空)을 표현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무술영화는 이류 오락 영화 취급을 받았어요. 평론가들도 외면했죠. 졸업 작품으로 무술 영화를 만든 학생은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졸업 논문도 ‘한국 활극 영화 계보와 그 연구 비평’으로 썼다.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졸업 후 EBS PD가 된 안 PD는 청소년 드라마와 교양 다큐멘터리 연출을 주로 맡았다. 하지만 이소룡은 늘 그의 삶 속에 있었다. 무술 영화를 보고, 이소룡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면서 동시에 그를 생전에 만난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시작은 우연히 찾아왔다. 한국 영화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이소룡과 친분이 있던 정창화 감독을 만나게 된 것. 정 감독은 1978년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영화로 미국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던 인물로, 이소룡 사망 당시 그와 같은 홍콩 영화사에 소속돼 있었다.

    “이소룡이 사망하기 일주일 전 정 감독을 찾아와 ‘다음 영화는 감독님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당시 이소룡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홍콩 영화 사상 최고’ 흥행 수입을 올리는 대스타였죠. ‘당산대형’부터 줄곧 자신의 최고 기록을 깨며 또 다른 기록을 세웠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해요. 정 감독에게 그런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다음 영화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거죠.”

    정 감독은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이소룡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공개하기도 했다. 책이나 잡지에서 얻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정 감독을 만난 뒤부터 안 PD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소룡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준 뒤 오랫동안 교류한 태권도 대사범 이준구씨, ‘맹룡과강’에 함께 출연한 무술인 겸 배우 황인식씨, 미국에서 함께 무술대회에 참가해 시범하며 친분을 쌓은 무술인 겸 배우 바비킴씨 등 미국, 홍콩, 캐나다 등에 살고 있는 이소룡의 지인들이 기꺼이 안 PD와 만났다.

    그들이 가까이서 지켜본 이소룡의 모습은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당황스러웠지만, 모든 것이 소중했다. 그 과정에서 안 PD는 처음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한 만남이 점점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변해갔다고 털어놓았다. 많은 이에게 무술 영화배우로만 알려진 이소룡, ‘아뵤~’라는 괴조음과 노란색 트레이닝복의 틀 안에 갇힌 그의 진면목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이다. 안 PD는 이소룡의 삶을 얘기할 때면 ‘그분’ 혹은 ‘생각하신’ 과 같은 극존칭을 썼다.

    “그분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건 유명한 얘기죠. 워싱턴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공자 노자 같은 중국 현자들뿐 아니라 크리슈나무르티, 스피노자 같은 서양 사상가들 책도 두루 읽으셨다고 해요. 서재에는 철학책뿐 아니라 격투기, 궁술, 발레, 검술에 대한 책도 많았죠. 그렇게 만들어낸 무술 철학을 글로 써서 잡지에 기고하곤 했습니다.”

    -이소룡이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 감독님 연배에서 보면 자식뻘 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이라고 부를 만큼 그를 존경하나요.

    “그분은 다른 사람이 100년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걸 32년 동안 하셨어요. 그 나이에 모든 걸 이룬 겁니다. 그분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넓고 깊어요. 나는 그분처럼 사는 걸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분 같은 삶”

    안 PD는 2005년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의 경계 도시에 이소룡 동상이 세워진 이야기를 꺼냈다. 민족 간 분쟁을 종식시키고 화해와 연대를 모색하던 두 나라 시민들은 이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때 선택된 인물이 이소룡이다. 인종차별과 불의에 맞선 상징적인 인물, 선한 것이 결국 승리한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인물로 이소룡이 꼽힌 것이다.

    “이소룡은 독일인 외할머니를 둔 미국 국적의 중국인이었습니다. 홍콩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는 그 이유 때문에 쿵푸 수업 등에서 배제당했고, 미국에 간 뒤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인이 됐습니다.”

    안 PD는 자신을 ‘이소룡 전도사’라고 했다. 알면 알수록 매력 있는 이소룡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뜻이다. 그 첫걸음으로 이소룡 다큐멘터리 제작을 추진 중이다.

    “몇 년 전 미국 시애틀에 있는 이소룡의 묘에도 찾아갔어요. 그동안 화보집과 잡지 등에서만 보던 묘 앞에 서니 그가 뭔가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이제 이소룡을 직접 만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요. 더 늦기 전에, 그와 교류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소룡의 흔적을 더 열심히 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그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요.”

    동시에 안 PD는 새로운 일도 시작했다. 이소룡을 사랑하는 한국 팬들의 공식 모임을 만드는 것. 그래서 팬들만 알고 있는 이소룡의 매력을 더 널리 알리는 것이다. 네이버, 다음 등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이소룡을 검색하면 수많은 동호회가 나온다. 안 PD는 이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2010년 7월27일, 이소룡 영화 ‘정무문’이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된 날을 ‘브루스 리(Bruce Lee·이소룡의 영어 이름) 데이’로 선포하고 오프라인 공개 모임을 마련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우리나라의 이소룡 마니아들이 한자리에 모인 행사였다.

    “이소룡 영화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보다, 책이나 DVD로 이소룡을 접한 20~30대 젊은이가 훨씬 많더군요. 그들에게는 ‘정무문’ 팸플릿, 이소룡과 함께 찍은 옛 영화인들의 사진 같은 자료가 보물처럼 귀하게 느껴진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세대가 더 나이 들면 이런 소중한 자료들이 다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더 늦기 전에 이 사람들과 함께 이소룡의 자료를 모으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2010년 12월9일 비영리 사단법인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Korea Bruce Lee Foundation) 설립 신고서를 냈다. 매달 한 번씩 이소룡의 영화나 삶에 대한 학술 세미나를 열고, 해마다 ‘브루스리 데이’와 이소룡 생일 기념 행사를 마련하면서 ‘이소룡’이라는 존재를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나아가 우리나라에 이소룡 기념관과 동상을 세우고 싶다는 꿈도 밝혔다. 현재 이소룡의 동상은 보스니아 외에도 중국 순더(順德) 쥔안(均安)과 홍콩 등 세계 곳곳에 있다. 안 PD는 “왜 중국인 동상이 우리나라에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소룡은 ‘중국인’이라는 틀에 갇힐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인물”이라며 “이소룡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지면 우리나라 팬뿐 아니라 한국을 찾는 중화권 이소룡 팬들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소룡 기념관

    “이소룡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랑방 같은 카페도 만들고 싶어요. 하루 종일 이소룡 영화 주제 음악만 흘러나오는 곳, 매일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메뉴도 이소룡이 ‘정무문’에서 먹던 조류튀김, ‘당산대형’에서 마시던 술 같은 걸로 하고 종업원들은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게 하는 거예요. 인테리어는 ‘용쟁호투’의 방 분위기로 하면 좋겠네요. 동양적이면서도 신비롭겠죠. 무대를 만들어놓고 하루에 몇 번씩 절권도 시범을 하는 것도 좋겠어요. 단골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1년에 한 번씩은 홍콩, 중국, 미국에 남아 있는 이소룡의 흔적을 찾아 단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겠군요.”

    실현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다. 뜻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날이 오면 자신이 30여 년간 모아온 이소룡 자료를 기꺼이 기증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와 함께 나눌 생각이다. 그날이 올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안 PD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왜 이소룡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동시대 수많은 청년을 한눈에 사로잡을 만큼 열정과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서양 사람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을 뒤집고, 무술과 철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 팬덤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소룡 같은 스타를 알고, 사랑하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 아닙니까. 내가 60이 되든, 70이 되든 그는 내 인생의 영웅입니다. 그를 더 많이 알리는 건 변함없는 내 삶의 목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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