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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17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영웅을 사랑하는 건 행복한 일, 더 많은 이에게 이소룡 알리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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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짜였다”

“‘맹룡과강’은 1974년 10월11일 피카디리극장에서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일 멋있는 건 이소룡의 몸이었어요. 이 영화 찍을 때가 무술가로서 최고의 컨디션이 아니었나 싶은데, 특히 활배근이 끝내줬어요. 그전까지는 어느 남자 배우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육체미를 과시한 적이 없습니다. ‘맹룡과강’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배우고, 무술가면서, 동시에 아티스트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안 PD는 신바람 나서 옛 추억을 얘기하다 몇 번이나 “그 영화 봤지요? 그 장면 기억나지요?” 하며 확인을 했다. ‘그때 그 표정’ 같은 디테일까지, 얘기하다 보니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소룡 영화는 재개봉관, 삼개봉관을 거쳐 동네 극장에 걸릴 때까지 수십 번을 보고보고 또 봤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모든 작품을 달달 외우고 있는 지금도 문득 그가 그리울 때면 DVD를 걸고 스크린 앞에 앉는다. 그러면 피카디리극장에서 처음 이소룡을 만나던 순간의 충격과 스카라극장을 가득 메웠던 열광적인 함성, 아세아극장에서 느낀 벅찬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짜릿하다.

안 PD는 당시 극장에 붙어 있던 영화 소개용 팸플릿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흑백 인쇄된 ‘정무문’의 전단지에는 ‘光行記錄(광행기록)이 保證(보증)하는 無條件(무조건) 재미있는 娛樂大作(오락대작) 精武門(정무문)’이라는 글씨와 함께 발을 하늘로 쭉 뻗은 이소룡의 사진이 실려 있다. ‘맹룡과강’팸플릿에는 ‘全世界(전세계) 팬의 가슴속을 뒤흔든 李小龍(이소룡)의 마지막 巨彈(거탄)’이라는 소개 문구 아래 웃통을 벗어던진 이소룡의 그림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이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보물들이다.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이 팸플릿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더군요. 이소룡 흉내로 장안을 휘젓던 친구는 지금 건실한 사업가예요. 윗옷 잘 챙겨 입고 동대문에서 꽤 큰 회사를 운영합니다.”



이소룡으로 둘러싸인 서재에 마주 앉아 안 PD는 씨익 웃어 보였다. 순간, 뜨거운 피가 돌던 1970년대에서 2010년으로 시간이 재빠르게 흘렀다.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초로의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다. 자못 놀라운 집 분위기와 비교할 때 사실 그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다. 탄탄한 배도, 날렵한 턱선도 없는 그에게서 ‘이소룡 마니아’의 냄새를 맡는 건 쉽지 않다.

“젊을 때는 이래봬도 쌍절곤 좀 돌리고 운동도 제법 했어요.”

-노란색 트레이닝복도 입으셨고요?

“갖고는 있었죠. 그런데 다른 친구들만큼 열광적으로 흉내를 내고 다닌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돌아보면 그때는 이소룡보다 이소룡 영화를 더 좋아했거든요.”

그는 자칭 ‘충무로 키드’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극장에 다녔다. 이소룡을 만났을 때는 한국에 매년 수입되는 외화 40편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었다. 영화를 조목조목 분석할 줄 알았고, ‘저 장면은 이렇게 찍으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전문가스러운’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소룡 영화는 모든 판단을 마비시켰다. 관객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게 바로 이소룡의 마력이었다는 걸, 한참 더 지난 뒤에야 알았다.

절권도의 길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미국 시애틀에 있는 이소룡의 묘에 헌화하고 있는 안태근 PD.

홍콩 무술영화 붐은 갑자기 찾아온 만큼이나 순식간에 끝이 났다. 양소룡, 여소룡, 거룡, 당룡…. ‘룡’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배우들이 화려한 액션을 바탕으로 숱한 아류작을 쏟아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제2의 이소룡이 되지 못했다. 안 PD에 따르면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까지 열광시킨 이소룡 영화의 ‘무엇’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소룡의 마력, 정신, ‘진짜’ 같은 것들이다.

“이소룡은 ‘동양인은 게으르고 무식하고 허세가 심하다’ 같은 편견을 일거에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화에는 화려한 발차기와 손동작뿐 아니라 동양의 정신까지 담겨 있죠. 이소룡은 ‘정무문’에서 일제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맹룡과강’에서는 서양 문화의 정수 콜로세움 앞에서 백인을 물리칩니다. 그 힘은 지금껏 세상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무술에서 나오죠.”

이소룡은 자신의 이 무술에 ‘절권도(截拳道·주먹을 저지하는 방법)’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 PD는 절권도를 “이소룡이 평생에 걸쳐 수련한 모든 무술의 결정체이자, 무술을 넘어서는 하나의 개념이며 철학”이라고 말한다.

“이소룡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태극권을 배웠습니다. 펜싱 연방 챔피언이던 형 피터에게 펜싱도 배웠지요. 열세 살 때부터는 영춘권 전승자인 엽문 사부 아래서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홍콩 복싱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할 만큼 복싱도 수준급 실력을 쌓았어요. 미국으로 건너간 뒤엔 유도와 필리핀 전통 무술, 주짓수, 가라테, 무에타이, 태권도 같은 다른 유파의 유단자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절권도’가 만들어졌다. 절권도의 탄생 과정에는 재미있는 뒷얘기가 있다. 이소룡은 미국에서 현지인들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걸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소룡이 신체조건 좋은 서양인들에게 전통 무술의 비밀을 가르치는 걸 싫어했다. 196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쿵푸를 가르치던 중국인 사범 왕작만이 이소룡에게 공개 도전장을 내밀었다. 싸움에서 지면 더 이상 외국인에게 쿵푸를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 대결에서 이소룡은 승리를 거뒀지만, 몇 초안에 끝냈어야 할 승부를 3분 넘게 질질 끈 점에 스스로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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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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