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만’ 가능성 합병증, 수천 번 수술하면 반드시 겪어
수술 결과 나쁘면 ‘모호한 잣대’로 배상 명하는 법원
韓 의료 운명 바꾼 세 가지 판결…‘응급실 뺑뺑이’ 초래
의사들 ‘언젠가 나도 재판받는 게 아닐까’ 공포
빠르게 고령화되는 의료진…한국 사회보다 먼저 사라질 판

의사 수는 2005년 8만8383명에서 2024년 16만6197명으로 20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응급실 뺑뺑이와 필수 진료과 붕괴는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뉴스1
필자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산부인과 파견 당시 수십 건의 자궁적출술 집도를 보조한 경험이 있다. 비교적 흔하고 안전한 수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을 찾는 대신 근처 종합병원에서 수술받도록 했다.
韓 의료 운명 바꾼 세 가지 판결…‘응급실 뺑뺑이’ 초래
산부인과 의사는 A4 용지 여러 장에 위험 사항을 빼곡히 적어 어머니께 설명했다. 복강경 삽입 시 대동맥 손상 가능성부터 장·방광·요관 손상, 유착, 개복 전환, 심지어 인공항문 가능성까지. 어머니 얼굴은 금세 굳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표정은 창백해졌고, 결국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나는 수술 안 받을란다. 무서워서 못 받겠다.”어머니가 들은 합병증 대부분은 발생 확률이 1% 미만이다. 그렇다면 왜 의사는 ‘극히 드문 일’까지 빠짐없이 모두 설명했을까. 평생 한 번 수술받는 환자에게 ‘1% 미만’은 큰 의미가 없지만, 평생 수천 건 수술하는 의사에게 ‘1% 미만’은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겪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고, 과실 없이 수술을 마쳤음에도 결과가 나쁘면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000만 원의 배상 판결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타이레놀조차 부작용 경고가 빽빽하다. 칼과 바늘이 들어가는 수술에 대해 ‘전부’ ‘충분히’ 설명하라는 요구는 현실적으로 충족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법원이 말하는 ‘충분한 설명’에 대한 기준이 언제나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사후 규정된다는 점이다. 같은 설명을 해도 결과가 좋으면 ‘충분했다’가 되고, 나쁘면 ‘불충분했다’가 된다. 심지어 어떤 판결은 설명은 충분했으나, 환자에게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며 의료진에게 배상을 명했다. 수술 결과가 나쁘면 법원은 ‘충분한 주의’ ‘충분한 설명’ ‘충분한 시간’ 같은 모호한 잣대를 근거로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셈이다.
판결은 과거를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규정하기도 한다. 어떤 행동이 ‘유죄’로 규정되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결의 진짜 힘은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꾸는 데 있다. 의료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 의료는 세 가지 판결로 인해 운명이 바뀌었다.
첫 번째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다. 당시에는 환자가 생존 가능성이 낮거나 임종을 앞두고 있으면, 병원에서 ‘자의퇴원각서’를 받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흔했다. 환자와 보호자도 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客死)라고 여겼고, 어떻게든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려고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가 한창이었던 1997년 12월 4일 오후 2시 30분. 58세 이모 씨가 뇌출혈로 119에 실려 병원에 실려왔다. 검사 결과 심각한 외상성 뇌출혈이었고, 의료진은 보호자의 동의조차 받지 못한 채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9시간이 넘긴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과도한 출혈로 인한 쇼크와 각종 장기 손상으로 사망 가능성이 90%를 넘긴 상태였다.
뒤늦게 병원으로 온 아내는 남편의 치료를 거부하며 퇴원을 요구했다. 담당 주치의였던 신경외과 전공의는 “돈이 문제라면 좀 더 지켜보다 몰래 도망가라”고까지 했지만 아내는 완강했다. 결국 병원은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귀가서약서를 받고 퇴원을 허용했다. 그러나 환자가 사망하자 법원은 의료진에게 살인 방조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했다.
이 판결은 의료뿐 아니라 죽음의 양상도 바꿨다. 병원과 의사들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했고, 일단 병원에 들어오면 사실상 죽어야 나갈 수 있게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보라매병원 사건 이전인 1991년 4명 중 3명(74.8%)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나, 25년이 지나자 4명 중 3명인 74.9%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변화는 단순히 사망 장소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중환자실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로 마비가 됐고,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일상화됐다. 임종 문화까지 해당 판결로 뒤틀리게 된 것이다.

고려대의료원을 비롯한 대학병원 소속 전공의들이 2018년 3월11일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열린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 원인 규명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의사들 ‘언젠가 나도 재판받는 게 아닐까’ 공포
두 번째는 2015년 ‘응급 소아외과 환자 사건’이다. 당시 생후 5일 된 신생아가 소장이 막혀 병원에 내원했다. 병원에는 외과 중 소아외과 전문의가 휴가로 부재중이었다. 당직이던 외과의사는 수술을 지체할 경우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응급수술을 진행했고, 이틀 뒤 다시 장이 꼬여 재수술을 해야 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큰 후유증이 남았다. 1심은 “소아외과 세부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수술에는 결격이 없고 다른 병원에 보내 시간을 지체했으면 더 나빠졌을 것”이라며 의료진 측 손을 들어줬다.하지만 2·3심에서 판결이 바뀌었다. 법원은 수술했던 외과의사가 장이상회전 질환을 가진 아기는 맹장이 엉뚱한 곳에 붙어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을 과실로 삼아 병원과 의사에게 총 10억 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응급 상황에서 외과전문의에게 소아외과전문의 수준의 치료와 수술을 요구한 것이다. 판결이 던진 메시지는 명백했다. “소아외과 세부전문의가 없다면 소아외과 응급환자를 받지 말라.”
판례를 중시하는 우리 법 체계에서 이 원칙은 소아외과를 넘어 다른 모든 진료 분야로 확산했다. 그 결과 발생한 사건이 2025년 10월 일어난 이른바 ‘경련 고등학생 응급실 뺑뺑이 사건’이다. 고등학생이 경련을 일으켜 119구급대가 출동했지만, 10곳 가까운 병원이 모두 진료를 거부했다. 경련 치료는 응급의학과·내과·소아과·신경과 전문의 등 대부분이 가능하다. 다만 고등학생이 경련을 하면 소아 때부터 뇌전증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기에, 소아과의 세부 파트인 소아신경과 전문의가 없으면 받지 못하는 환자가 돼버렸다. 법이 100%를 요구하자, 90%를 할 수 있는 의사들이 모두 물러나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이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던 아기 네 명이 병원 내 감염으로 잇따라 사망했다.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신생아 중환자의 주요 사망 원인이 감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발생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담당 의료진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고, 검찰은 기소했으며, 법원은 유방암 3기로 항암 치료 중이던 교수에게까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결국 5년의 재판 끝에 1·2·3심 모두 무죄로 결론 났다. 하지만 무죄가 의료진에게 가해졌던 고통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은 곧 언제든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해 1만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입장에선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사망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앞선 사건과 판결은 생명의 최전선에 있는 의료진에게 ‘언젠가 나도 저렇게 재판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를 심어줬다. 가장 먼저 전공의가 사라졌다. 소아과 전공의 지원율은 2018년 113.6%에서 2023년 25.5%로 급락했다. 이는 소아과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전체 의사에게로 번져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사 수는 2005년 8만8383명에서 2024년 16만6197명으로 20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응급실 뺑뺑이와 필수 진료과 붕괴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20년 전 절반의 수로도 가능했던 진료가 지금은 불가능해졌다. 의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위험 분야를 담당하는 의사가 사라진 것이다.
영국은 한국의 건강보험에 해당하는 ‘국민 보건 서비스(NHS)’와 사설 클리닉(private clinic)을 운영하고 있다. NHS는 진료비가 무료이고, 사설 클리닉은 개인이 100% 부담한다. 사설 클리닉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의사 본인이 100% 책임을 지지만, NHS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100% 책임을 진다. 미국은 의사-환자의 직접 계약관계로 65세 이상 고령자(메디케어)와 저소득층(메디케이드)이 아닐 경우 국가가 의료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의사나 병원이 의료비를 결정하고, 높은 소송비용을 진료비에 반영한다. 그 결과 미국의 의료비는 천문학적 수준이 됐다.
빠르게 고령화하는 의료진…한국 사회보다 먼저 사라질 판
한국은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로 인해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를 반드시 진료해야 한다. 이름은 ‘당연’지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지정이다. 그럼에도 이 강제지정 환자를 돌보다 문제가 생기면 영국처럼 국가가 책임을 대신 지는 구조가 아니다. 배상은 온전히 의사 개인의 몫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의료비는 국가가 세계 최저 수준으로 일방 책정하고 있어 미국처럼 위험부담을 진료비에 반영할 여지도 없다. 결국 한국의 의사들은 고위험·저수가에 더해 법적 리스크까지 떠안는 삼중고 속에서 진료하는 처지가 됐다.정리하자면 ①고위험은 환자와 질병에 따라 결정된다. ②저수가는 국가가 정한다. ③법적 소송은 환자가 제기하고 법원이 판단한다. 셋 중 어느 것도 의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한국 의료는 예전에도 고위험·저수가 구조였지만, 최근 민형사 소송 문화가 확산됐고, 배상액이 폭증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밖에 없다. 신규 의사는 고위험과를 피하게 됐다. 의사들이 하나둘 의료 현장을 떠나면서 남아 있는 의사들만 점점 늙어가고 있다. 한국 사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는 것이 한국 의료다.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한국 사회보다 한국 의료가 먼저 사라질 것이다.
요즘 의료계에서는 자조 섞인 말이 떠돈다. 과거에도 의료는 ‘high risk, low return’이었다. 위험은 크고, 보상은 적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의료는 ‘high risk, law return’이 됐다. 위험은 여전히 높은데, 이제는 보상이 아니라 소송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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