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치하고 저열하며 엽기적인 피의 향연. 그러나 작열하는 태양, 소름끼치는 난도질에 넋을 잃는 사람들. 왜 여름이면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원하는가. 잠든 악령을 흔들어 깨우는 공포영화의 심리학, 모반의 사회학. 》
공포영화는 이렇듯 우리 사회에 미만한 공포를 담아내는 일종의 핏물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다. 공포영화 자체는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과 너무나 닮아서 그 쌍둥이 같은 형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잉여 생산으로 인한 소비의 극한까지 밀고 올라가는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에서 그러하다.
공포영화는 죽음의 욕망을 극대화함으로써 살인이라는 표현양식에 영화 장르 스스로가 질식사하는 형상을 띠기도 한다. 따라서 살인에 대한 잔혹한 묘사 외에 어떤 이성의 고삐도 마다하는 공포영화는 가장 유치하고 쓰레기 같은 장르로 고상한 엘리트주의 문화의 대극에 숨겨진 ‘지하동굴’로 취급받기도 한다.
흔히 공포영화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무표정한 검은 안경테의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자폐아의 그것인데, 그러나 실은 우리들, 선량한 우리들이 좋아하는 서민적인 드라마─호러인 전설의 고향이야말로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거의 의도적으로 한국 사회와 한국 호러영화의 발전을 가로막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전설의 고향의 이데올로기는 분명하다. 여기─지금의 공포를 무한대로 지연시키는 과거 어떤 곳의 공포에 시청자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의 공포야말로 사회적인 모순을 가장 극대화하는 시간이자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무덤에서 나오는 흰 소복의 여자를 안방에서 접견하는 경험을 치르고야 선생을 죽이는 학생 귀신의 이야기인 여고괴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일까?
이 글은 ‘왜 여름에는 공포영화가 유행하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공포와 사회적 억압의 서식지라 할 타락한 에일리언의 우주까지 그 공간적 시간적 논의를 확장시킬 것이다. 아마도 공포영화와 우리 사회가 자행하는 교묘한 사회적 억압이며 약자들에 대한 횡포를 마주 대하는 일 자체가 썩 반갑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공포영화를 바라보는 것만큼은 가장 깊은 무의식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언젠가는 또 무성하게 자라게 될 우리 자신의 ‘잠자는 푸른 수염’을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공포인가 스릴인가
호러영화는 여러 영화 중 가장 자극이 강한 장르다. 요컨대, 맵고 짜서 건강에 나쁜 줄 알면서도 일단 맛을 들이면 계속 먹지 않을 수 없는 음식과도 같은 것이다. 호러영화에는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와 비명,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잔인한 비주얼, 그리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음산함이 있다.
호러영화는 넓게 보아 판타지영화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판타지영화란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사실과 영상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으로 호러, 공상과학, 그리고 공포를 배제한 판타지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등이 있다. 가령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영화는 우주인의 침략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종의 상상력이 가미된 판타지영화지만 그것이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공상과학영화다. 반면 ‘드래곤 하트’나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각각 상상의 동물인 용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사후세계를 담고 있으며 영화의 주된 목적이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는데 있지 않다는 점에서 판타지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면 ‘링’이나 ‘나이트 메어’는 악령과 귀신이라는 상상의 존재를 통해 철저하게 관객에게 공포를 주려는 전형적인 호러영화다. 한편 호러영화와 비슷한 장르로 스릴러 영화가 있는데, 호러와 스릴러는 구분하기가 어렵기는 하다. 원론적으로 말해 호러가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공포(fear)’요, 스릴러가 주려 하는 것은 ‘조마조마함(thirlling)’이다. 공포와 긴장감 또한 서로 긴밀히 연관되는 감성이라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공포와 긴장감을 주는 ‘원천’이 어디인가에 따라 호러와 스릴러를 구분할 수도 있겠다.
가령 주인공이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장면을 생각해보자. 관객들은 이미 주인공에 충분히 감정이입된 상태이므로 주인공의 처지를 동정하여 긴장하게 된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누가 위에서 나타나 그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리려 한다고 치자. 만일 이게 전쟁영화라서 그 상대방이 적군이거나 아니면 주인공을 음모에 빠뜨린 악당일 경우 영화는 ‘스릴링’한 느낌을 주게 된다. 한편 그 상대방이 ‘나이트메어’의 칼날 손톱을 휘두르는 프레디 크루거 같은 괴물일 경우, 관객들은 그것이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공포감을 덧붙여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공포영화란 관객을 ‘무섭게 하는’ 공포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는 큰 범주로 정의하겠다.
고어, 슬래시, 스플래터, 오컬트
이러한 공포영화와 비슷한 개념으로 공포영화의 범주 안에서 사용되지만 약간씩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른 영화용어들이 몇 개 있다. 일단은 고어영화라는 것인데, 고어는 ‘선지피, 응고되어 끈적끈적한 피’라는 뜻에 그 기원이 있다. 고어영화를 처음 만든 사람은 흔히 미국 감독 허셸 고든 루이스라고 하는데, 그의 영화 ‘2000 마니악’을 본 제작자인 데이비드 프리드만이 1963년 잡지 편집장인 장 클로드 로메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최초의 선지피 영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부터다. 목이 뎅겅 잘리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고어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낭자한 피와 내장을 클로즈업 시켜 보여주는 처참한 살육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흔히 말하는 슬래시 무비는 말 그대로 칼 도끼 등 끔찍한 살인도구가 즐비한 공포영화다. 이들은 유령이나 귀신처럼 초자연적인 힘에 신들린 것이 아니라 현실적일 인물이 살인자라는 것,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마스크를 쓴다는 것 등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악령 들린 소녀의 으스스한 주술담 같은 ‘엑소시스트’는 공포영화일지언정 슬래시 무비가 될 수 없다. 또한 슬래시 무비는 범인과 그 살인 동기에 대해 끝까지 진땀을 빼는 아슬아슬한 서스펜스 스릴을 맛본다는 점에서 공포 외에 또다른 알파의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최근 가장 인기를 끈 공포영화 ‘스크림’은 마스크로 위장하고 목소리마저 변조한 살인마가 부엌칼을 들고 등장하는 가장 전형적인 슬래시 무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대집단학살극이라는 의미의 스플래터 영화도 공포영화의 한 갈래를 이룬다. 스플래터 영화는 일단은 수많은 사람이 단번에 살해당한다는 점에서 여타 공포영화와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포함하여 좀비로 변한 인간들을 수없이 잔디깎는 기계로 갈아 죽이는(?) ‘데드 얼라이브’ 같은 영화가 스플래터 무비다. 스플래터 무비는 무자비한 집단학살극을 다루지만, 사람들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마냥 속도감각을 가지고 살해된다는 측면에서 살인 그 자체에 어떤 흥겨움과 코믹함을 지니게 된다. 흔히 공포의 숲 한가운데 저주받은 집에서 나타난 좀비가 그곳에 캠핑하러 온 대학생들을 연쇄적으로 학살한다는 샘 레이미 감독의 ‘이블 데드’가 그 효시로 알려져 있다.
끝으로 흑마술이나 마녀, 귀신, 악마, 뱀파이어 등의 초자연적인 요소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영화가 있다. 흔히 오컬트 무비라는 이 영화들은 으스스하고 조마조마한 성당, 공동묘지, 납골당 등을 무대로 사람들을 놀래키는 공포영화의 아주 오래 된 유형이다.
그렇다면 공포영화는 어디에서 시작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일까? 이들 영화의 원작이라 할 만한 공포를 다룬 문학이나 동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1818년 여류작가 메리 셸리는 신의 영역에 침범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흉측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광기 어린 과학의 세계를 비판했다. 비슷한 연도에 쓰여진 ‘뱀파이어’도 드라큐라 영화의 원형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빅토리아 고딕 문학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문학을 넘어서 공포 자체의 문학적 전통은 더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어서, 예를 들어 할머니를 먹은 늑대 이야기인 ‘빨간 모자’나 아내를 살해하는 ‘푸른 수염’ 등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금기를 깨는 공포, 즉 어린아이들이나 처녀의 성욕(빨간 모자의 붉은 색이나 붉은 꽃은 아동이 경험하는 월경이나 성의 세계를, 푸른 수염이 아내들에게 열지 말라고 경고하는 방문은 순결을 깨는 성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어떤 금기로 성을 담고 있다)에 대한 어떤 징벌을(흔히 초자아의 위협이라고 하는) 포함하고 있는 동화들이기도 하다.
최초의 무성영화들에서부터 이미 우리는 공포영화의 어떤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방화자’에서 범죄자가 처형되는 순간 떨어지는 머리와 흥건한 피는 거의 최초로 사지 절단 드라마를 선보인다. 이후 루이 브누엘은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젊은 여자의 눈을 면도날로 도려내고, 길거리에서 잘린 손을 줍는 엽기적인 장면을 추가하여 당시 유행하던 정신분석학과 영화를 결합하는, 즉 무의식의 시각화를 통해 오히려 육체 자체의 파편화를 시도했다.
이미 1915년경에도 공포영화의 요소를 섞은 수준을 넘어 공포영화 자체의 싹을 보이는 작품들이 있어왔다. 뮤직홀 출신인 여배우 무시도라는 ‘으르마 뱁’이라는 여자 뱀파이어로 출연, 여성 흡혈귀에 관한 최초의 영화를 선보였다. 흡혈귀영화는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영화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공포의 심포니’의 영향으로 긴 그림자와 어두컴컴하고 사람을 압도하는 건물의 디자인 등을 빌려와 시각적인 면을 강조하는 풍부한 뱀파이어 영화들이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적 하위문화로서의 공포와 유럽의 표현주의를 결합시킨 사람이 바로 전설적인 감독 토드 브라우닝이다. 서커스단 출신인 그는 영화의 아버지라는 D. W 그리피스 밑에서 영화를 배운 후, 유니버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호러들을 내놓았다. 그중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1931)와 서커스에서 알게 된 신체장애인들을 출연시킨 ‘프릭스’(1932) 등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호러영화의 초석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공포영화는 불처럼 일어나는 애국심, 이에 따른 전쟁과 멜로영화의 홍수에 밀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흡혈귀의 이빨만으로는 관객을 불러모을 수 없던 호러 진영은 늑대, 사자, 음침한 은둔 남작, 프랑켄슈타인 같은 좀 다른 종류의 괴물들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테렌스 휘셔 감독이 활약했던 1950년대 영국의 해머 프로덕션은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었던 거의 최초의 영화제작사였다.
해머 프로덕션이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저주’(1957)나 ‘프랑켄슈타인의 복수’(1958) 등은 시체들에서 떼어낸 눈, 손 등을 보여줌으로써 조각조각난 시체에 관한 어떤 불쾌한 연상을 이끄는 데 성공한 작품들이다. 해머 프로덕션의 성공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도 본격적인 호러영화가 등장하도록 자극했다. 미국의 호러영화들 역시 이 시기 신체 절단과 훼손·파괴·해체 등을 통해 호러영화의 사라지지 않는 핵심을 만들게 된다.
‘고깃덩어리’로 격하된 몸
1960년은 호러영화사에 빛나는 한 해였다. 마침내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가 개봉돼, 슬래시 무비의 효시로 여겨지는 샤워장에서 죽어가는 여주인공 재닛 리를 선보이게 된다. 8개의 카메라가 동시에 찍어낸 이 샤워실 장면은 공포영화 특유의 ‘악명 높은’ 관음증과 여성 신체에 과다한 가치를 부여하는 페티시 전통의 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은 관음증에 관한 으스스한 보고서인 마이클 포웰 감독의 ‘피핑 탐’이 선보인 해이기도 하다. 이어 전설적인 고어영화 ‘피의 향연’(1962년)이, 1964년에는 ‘2000 마니악’이 등장하게 된다. ‘2000 마니악’은 남북전쟁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 미치광이 소읍의 학살극을 통해 완벽한 집단적 광기와 미국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함의를 담고 있는 영화다.
이후의 미국은 정치적 측면을 지닌 저예산 B급 호러영화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냉전시대 이후 도덕적 붕괴가 극도에 달한 미국의 1970년대는 명실상부한 미국 호러의 황금기였다. 1969년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새벽’을 필두로 인간의 신체는 좀비의 먹이인 ‘고깃덩어리’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며, 1983년에 발표된 ‘비디오 드롬’ 등은 기계와 결합하는 육체에 관한 영화적 상상을 극단까지 몰아붙인다(그 유명한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 발표된 것이 1974년이었다).
90년대 호러의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타락한 자궁이라 할 우주를 배경 삼고 있다. 남극에 떨어진 우주 생명체와 벌인 사투를 그린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이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에일리언 3’ 등은 이제 우주조차 안전하지 못한 지옥으로, 장차 도래할 암과 에이즈 같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다.
공포영화는 한마디로 관객을 무섭게 해야 한다. 무섭지 않으면 공포영화가 아니다. 예컨대 근자에 개봉된 ‘여고괴담2-죽음을 기억하라’는 잘 만든 영화지만 관객들이 기대했던 공포가 함량미달이었던 탓에 흥행성적은 전편보다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단 알아둘 것은 무서움은 끔찍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비록 공포영화가 귀신의 흉측함이나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 등을 자주 보여주지만 그 ‘끔찍함’이 곧 공포의 근원은 될 수 없다. 이를테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의 참혹함을 너무 생생하고 끔찍하게 보여주고 있으나 무섭지는 않다. 다만 그 비참함에 몸서리 쳐질 뿐이다.
쾌락을 탐한 자, 죽임을 당하리라
오히려 공포영화의 공포심은 악몽을 꿀 때의 그것과 닮았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공포물이 악몽처럼 우리들 무의식의 욕망을 변장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심리적 기제를 ‘투사’라 한다. 그렇다면 공포물과 이 투사 심리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우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망, 그리고 사회적으로 매우 위협적인 소망을 무의식의 한켠에 지니고 있다. 사실 마음 깊숙이 우리 모두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고 사회의 질서에 어긋나고 싶은 소망이 숨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마치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의 것인양 투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내가 아닌 타자에게 투사된 공격 욕망’이 호러영화 속의 괴물이나 살인자로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호러영화에서 희생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의식의 껍질을 쓴 우리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경험한다. 따라서 나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놓는 괴물을 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 그를 통해 관객들은 엄청난 공포를 경험한다는 뜻이다.
공포영화는 욕망의 미장센이다. 따라서 공포영화를 거꾸로 읽으면 그 시대나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링’은 한국의 공포영화가 오랫동안 유교적 가부장제도에 억눌려 살아 온 여성의 심리적 억압을 담보로 만들어졌음을 재입증한다. 이때의 공포란 ‘스크림’ 같은 영화에서 보듯 살점 떨어지고 피가 솟아나는 식의 즉각적이고 반사적인 공포라기보다, 한겹 한겹 차곡차곡 쌓여가는 ‘으스스한 공포’인 것이다.
한국 공포영화는 여자귀신류의 주술적인 면이 강조되는 반면 서구의 공포영화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잔혹하다. ‘스크림2’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서구 공포영화는 대개 칼, 가위, 도끼 같은 도구로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 뱀파이어류 영화에서도 피는 주요한 살인 모티브가 되는데 젊은 미녀의 하얀 목덜미 깊숙이 이빨을 꽂는 드라큘라는 다분히 피·가학적 모양새와 성적인 함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중세와 빅토리아시대에 철저히 억눌린 성적 억압이 의식의 표면으로 분출되는 행위인 셈이다. 성적 쾌락을 맛본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피를 빨고 또 제공하는 형태로 서구인들의 무의식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공포 영화에 깃들인 반역의 기운
따라서 당연히 공포영화의 괴물은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혹은 문명체제의 유지를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누가 괴물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가 억압하고 있는 본원적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공포영화가 단골로 삼는 괴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족살해자, 근친상간 성향의 정신질환자, 동물, 흑인, 인디언 등이며 때로는 아동(‘오멘’류의 공포영화)의 모양새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 근친상간, 동성애, 사람을 죽이는 것(이것이 상징화되면 ‘식인’이 된다), 미쳐버리고 싶은 것(즉 ‘정상’이라는 체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 마귀와 손잡고 싶은 것(잔혹해지고 무자비해지고 싶은 것), 어른이 되는 것을 버리고 아이로 돌아가고 싶은 것 등등은 모두 사회가 금기시하는 일종의 터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욕망들은 개인에게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사회, 즉 문명체제의 유지에도 위협이 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억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영화는 일종의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항거이자 변장한 무의식의 원맨쇼다. 공포영화는 억압의 마음이 의식으로 귀환하는 과정이다. 괴물들이 득세하고 판치는,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공포영화는 다분히 체제반역적이고 반동적인 기운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도가 가장 약해질 때, 다시 말해 사회의 도덕성이 실추되는 시기에 공포영화는 가장 성행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깊었던 70년대의 미국이 그러했다.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게이운동이 힘을 얻은 그 시기에 B급 호러가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 ‘힘있는 미국’을 외치자 호러는 힘을 잃고 유아적인 동화, 한마디로 환상 심어주기인 ‘ET’ ‘레이더스’ ‘인디아나 존스’ ‘스타 워즈’ 같은 모험활극·SF영화들이 득세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학교체제의 억압에 시달리고 진학문제나 교사─학생 간 갈등이 심해지자 ‘여고괴담’이라는 학교 배경의 귀신영화가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호러영화, 특히 B급 영화들은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할리우드 정통파 영화들이 보여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공포영화광들의 겉모양이 어떻든 그들 마음 한쪽에는 권위에 대한 반항과 나름의 삶에 대한 희구, 체제전복의 염이 숨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순수해 보이나 반면,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데 머물 만큼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 왜 공포영화는 여름에 기승을 부리는 걸까? 그것은 여름이야말로 심리적 억압이 가장 약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노출심리가 극대화되듯, 바로 무의식이 의식으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자리, 조금은 마음을 풀어헤칠 수 있는 계절, 여름이야말로 괴물들이 기승을 부리기에 안성맞춤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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