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린튼은 “비록 외로울지라도 남이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선교사 아들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서교빌딩 605호. 사무실 벽면에는 북한에서 만든 ‘조선 지도’가 걸려있고, 그 지도엔 유진벨 재단이 북한에서 운영하는 결핵요양소와 병원이 위치한 도시가 표시돼 있다. 언뜻 50~60군데는 넘어 보인다.
전라도 촌놈
그는 “미국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스스로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린 미아”라고도 했다. 전라도 억양이 강한 말투, 예의 바른 행동은 토종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인 냄새를 풍긴다.
“아내는 미국인이 돼있고 저는 한국인이 됐습니다. 그것도 도시에 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촌구석에 사는 촌스러운 한국인이에요.”
린튼이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아버지 고향인 미국 남부 사투리를 썼는데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린튼도 뉴요커가 내뱉는 말에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전라도에서 선교사로 일한 아버지는 남부출신인 할아버지의 말투를 배웠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저도 남부사투리를 썼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쓴 말이 1900년대 초의 남부 말이란 거예요. 본토와 단절된 곳에서 3대가 격리돼 살아왔으니, 옛 말씨를 그대로 쓸 수밖에요. 별 우스운 시골뜨기가 다 있다 했을 겁니다.”
린튼은 미국에선 ‘남부 촌놈’이고 한국에서는 ‘전라도 촌놈’이다. 그는 “미국인의 정체성도 한국인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영원한 촌놈인 것은 분명하다”며 씩 웃었다.
-김일성 주석을 세 번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김주석의 인상은 어떻던가요. 우리 세대는 그가 ‘최고의 악인’이라고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1992년 빌 그레함 목사와 함께 방북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1993년 그레함 목사의 아들과 함께 북한을 찾았을 때도 봤고, 마지막으로 1994년 카터 대통령의 방북 2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세번째 만남에선 카터 대통령의 방북 관련 구두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지요.
통역한다는 구실로 김주석을 세 번이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입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김주석이 그레함 목사의 부인에게 많은 관심을 표명하더군요. 부인은 선교사의 딸로 어린 시절 평양에서 자랐다고 해요. 그레함 목사도 아내의 소녀시절 얘기를 하며 평양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더군요. 미북, 남북 사이에 긴장이 고조돼 서로를 경계하던 때였는데 덕분에 딱딱한 분위기가 금세 녹아버렸습니다.”
-김주석이 무섭지 않던가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원용하면 원조 ‘악의 축’인 셈인데요.
“목소리가 우렁차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에요. 나이 든 사람들도 김주석이 질문하면 벌떡 일어나 대답하더군요. 그를 무서워하기보다는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해 드릴게요.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통역하면서 실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머뭇거리면 곧바로 ‘조선말을 잘하는군요’ 하고 칭찬을 해줘요. 당황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통역이 마땅찮다고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거꾸로 ‘조선말 수준이 조선사람보다 낫다’고 치켜세워주는 거예요.”
-김주석과의 만남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대화가 있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 밤나무 얘길 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밤나무를 유독 좋아했는데 당시 평양에서는 이유없이 밤나무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다고 해요. 관리들이 모두 밤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는데 김주석이 그걸 말렸답니다. 병 걸린 것도 안타까운데 쉽게 베어내면 되겠냐고 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나무들이 결국 병을 이기고 살아났다는 겁니다. 자랑 삼아 그런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김주석은 전문지식보다는 경험에 비춰 이론과 정책을 세워가는 스타일로 보였어요.”
-김주석에게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말씀했는데 카리스마에도 여러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강압적 카리스마, 권의주의적 카리스마, 민주주의적 카리스마, 전문가적 카리스마… 김주석의 카리스마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강압적 카리스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주면서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상에 올라온 노란수박(참외)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숙소로 보내줄 정도로 자상했습니다. 특히 손님에 대한 예의가 깍듯했습니다. 김주석을 인자하고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향 순천(그는 전남 순천을 고향으로 말한다)에도 그런 할아버지 많아요. 말수가 별로 없으면서도 권위가 있는.”
“참상을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가 있어요. 동정심을 유발하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욕을 먹을 수 있고, 또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측면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1997년의 일입니다. 북한에서 기아가 가장 심각할 때였습니다. 2, 3호 결핵검진차를 갖고 원산에 갔는데 마식령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지요. 고개의 커브를 돌아가는데 한 여자아이가 길바닥에 길게 누워있어요. 우리는 차에 치인 줄 알고 병원으로 급히 보내자고 했는데 북한측 안내원이 말 없이 차에서 먹을 것을 꺼내더니 아이에게 먹이더군요. 그러니까 소녀가 살아나요. 아이가 산을 넘다가 굶주린 끝에 쓰러졌던 모양이에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고 해요.”
-결핵퇴치 사업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북한 의사가 있습니까.
“2000년 평북요양소에 김혜란이라는 할머니 의사가 계셨습니다. 서울이 고향인 분인데, 이화대학을 나오셨지요. 그분이 결핵환자의 흉부수술을 하면서 방사선에 노출돼 고생했습니다. 장비가 형편없어 그런 일이 발생한 거예요. 시설은 좋지 않고, 환자는 살려야 되니 자신의 건강은 뒷전이었습니다. 할머니 의사의 손을 보았더니 온통 피가 엉겨있어요. 할머니는 결국 지난해 5월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살신성인의 전형인 셈이죠.”
린튼 박사는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타계한 김할머니의 사진이었다.
“그분은 미국에도 친척이 있었어요. 작년 겨울 캐나다에 볼일이 있어서 갔는데 어느 한국사람이 다가와서 어떤 분을 찾는다고 하는 거예요. 바로 김할머니였어요. 그래서 그해 봄에 돌아가셨다고 비보를 전해드렸지요.”
-다시 모금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미국에서의 모금활동은 반응이 어떻습니까.
“인상적인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몇 달러씩 손에 쥐어주시는 겁니다. 여생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고향의 친척들을 만나면 정표로 전해달라는 거예요. 대개 1달러 5달러 10달러짜리 지폐인데, 25센트짜리 동전을 주는 분도 가끔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본래 이렇게 정이 많아요. 정이 많은 한민족을 미국사람들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아직도 한국인들이 북한을 돕는 방식을 잘 모르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교포들은 미국정부에 압력을 넣을 권리가 있어요. 유태인은 비행기삯까지 받아가며 이산가족을 데려왔잖아요. 미국 이민법이 바뀌어 소수민족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나 교포들이 소극적이에요. 미국 정부가 북한에 있는 미군 유골의 송환문제에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교민들은 백인의 유골이 신음하는 자신들의 가족보다 더 중요하냐고 따지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조용한데 외국인이 떠들 수는 없잖아요. 제 손이 미치는 것이 있고,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어느 정도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습니까.
“서구의 시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야지요. 10년 전이나 5년 전에 비하면 아주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결핵요양소의 참담한 실태가 국내 TV에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과거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제한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제가 하는 일에서는 자유롭습니다. 저처럼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에선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술 한잔 하면서 노래 한곡 부를 여유는 있습니까. 회포도 풀어야겠고….
“노래방이나 가라오케가 있지만 내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생긴 시설입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장난 삼아 ‘남자로서의 재미’를 물어 본 것인데 예상대로 그는 청교도 전통을 지닌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골프나 수영 등 여가 스포츠도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린튼은 1979년 아내 김원숙씨를 만났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학우로서 만났다고 한다.
“장인이 경향신문 간부로 계셨어요. 김원숙씨를 통해서 원고 청탁이 왔는데, 정부에서 그 원고가 실리는 것을 막았습니다. 원고가 신문에 나가지 못해 미안하게 됐다는 명함카드가 왔는데 이 사건 덕택에 김원숙씨를 사귀게 되어 1980년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일에 아내는 소극적이에요. 처음에는 많이 도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인 어른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인데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아내는 미국식이 되고 저는 고루한 한국식이 돼버렸어요. 아내는 거의 완전한 미국사람이에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입양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모두 혼혈이라고 한다. 그는 “대를 이어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자신의 대에서 끊어질 것 같다”면서 아쉬워했다.
-남북문제에서 남한 당국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얘긴 다음에 하기로 하고 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정체성 얘깁니다. 미국인들은 저를 외국인으로 봅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까요. 20여 년 전 노스캐롤라이나를 가는데 차에 휘발유가 떨어졌어요. 주유소에 가서 ‘Give me some gasoline’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주유소 주인이 ‘너 어디서 왔냐’고 그래요. 미국에서는 가솔린이라고 하지 않고 ‘가스(gas)’라고 하잖아요. 단편적인 것이지만 그때 충격을 받았죠. 그렇다고 한국에서도 한국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영원한 손님’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손님 노릇만 하게 된 겁니다. 창문을 통해 한국을 들여다보고 제가 해야 할 몫이 있다면 선조들이 했던 그대로 사역을 하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제 막내동생은 완전히 한국인이 됐습니다. 저는 아직도 방황하는데 동생은 단단히 자리를 잡아서 부럽기도 합니다. 미국사람들과 서클활동을 함께 해보기도 했지만 이질감을 너무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자주 서클에 나가게 되지 않더라고요. 한국에서도 손님, 미국에서도 손님인 거지요. 이런 저를 지탱해주는 힘,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바로 기독교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린튼은 “비록 외로울지라도 남이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선교사 아들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인생관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예수가 나타나기 전의 세례 요한을 자주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가 등장하자 물러날 때라는 걸 알고 스스로 물러섰습니다. 북한에 들어가 활동하면서도 그런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 대신 일을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물려주고 나올 수 있습니다. 유진벨이 필요없다고 느껴지면 바로 해체할 겁니다.
끝으로 한마디 보태면 북한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폐쇄적인 북한은 상대방에게 쉽게 마음을 열기가 힘듭니다.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 잘산다고 자존심을 건드리면 절대로 안돼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똑같은 촌놈이었는데 지금 조금 잘산다고 동족을 비하하면 되겠습니까.”
그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워싱턴과 서울에 사무실이 있다. 한국에 체류할 때는 세를 낸 연희동 아파트를 이용한다.
-북의 선전구호나 방송을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 ‘민족의 태양’ 운운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거슬리지 않습니까.
“그런 문구를 진실로 믿는 것이냐 아니면 억지로 이미지 조작을 하는 것이냐로 판단해야겠지요. 억지라고 해도 국민이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면 비판할 수 없지 않을까요. 어느 지역에선 부모가 죽으면 산에 버립니다. 그러면 까마귀나 독수리가 와서 살을 쪼아먹습니다. 그래야만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우리 시각에서 보면 분명히 까마귀 독수리 밥으로 부모를 내버리는 게 잘못이지만 장례문화가 그러하다고 비난할 순 없습니다. 정치적 목적이나 편견을 갖고 사물을 보면 끝없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같은 말을 듣고, 그가 북한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까봐 ‘사교적 언어’로 좋은 점만 부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필자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얘기를 계속 풀어나갔다.
“29세 때인 1979년 4월 북한에 처음 들어간 이후 올해 봄까지 50여 차례 방문했습니다. 북한에서 세계탁구선수권 대회가 열린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어떤 나라일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평양관광단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길래 호기심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는 수속이 늦어져 일행과 함께 출발하지 못했다. 일행보다 며칠 늦게 중국에 들어가 주중 북한대사관을 찾았다. 남한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을 감춰야 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미국인 행세를 했다.
“수속을 밟는 중에 들통이 났어요. 어디에 가냐고 묻길래 ‘평양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말 하시지요?” 하고 묻는 거예요. 내가 ‘평양’이란 발음을 너무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식으로 평양이라고 말했는데 그들이 단번에 알아차린 겁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다그치는데 이리저리 둘러대기 바빴습니다.”
간신히 ‘평양행 비자’를 얻었지만 북한으로 들어갈 비행기 편이 없었다. 그래서 육로를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북경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거쳐 신의주, 평양으로 들어가는 데 23시간, 그러니까 꼬박 하루가 걸리더군요. 그런데 신의주에서 또 문제가 생겼어요. 출입국 관리요원이 미국여권을 처음 본 모양이에요. 여권을 보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저보다도 그들이 더 두려워하더군요.”
미국인 관광단은 북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문화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관광단의 통역을 맡게 됐다.
“여관비가 몹시 비쌌어요. 바가지를 씌운다고 주먹다짐이 오갈 정도였습니다. 한국말을 하는 제가 나서서 중재를 했지요. 그때 ‘화해의 전도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당시에 사귄 북한 안내원 3명과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류하고 있다. 안내원 노릇은 그만둔 지 오래됐지만, 그들과 린튼 사이의 우정은 매우 깊다고 한다.
“성격이 강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매사에 낙천적인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재미있어요. 놀기 좋아하고, 정직하고 진실하지요. 고향 친구들처럼 착해요.”
린튼은 첫번째 북한방문에서 돌아온 뒤 ‘한국문제’를 전공하겠다고 결심한다. 같은 민족이지만 너무 다른 남북한 양측을 보면서 받은 충격을 학문으로 체계화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한국 연구를 시작했다.
-어떤 주제를 연구과제로 삼았습니까.
“남북한 윤리를 비교 분석한 거였어요. 남북한 초중등학교의 윤리교과서를 보고 연구했습니다. 윤리과목엔 국가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남북한을 오가며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어떤 연구결과가 나왔습니까.
“양측의 정체성이 다르니 차이가 클 수밖에요. 북한 교과서는 늘 그대로인데 한국 교과서는 자주 바뀝디다. 정권이 바뀌면 교과서도 바뀌는 식이죠. 남북한이 외국인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 연구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개화기엔 친외국적 시각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엔 친일 성향이 강했지만 다른 외국인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8·15 이후부터 세계화 경향이 나타나는데 유신 이후 남한은 국수주의적 성향이 나타나면서 문을 굳게 잠가버립니다.”
-단순히 윤리교과서 연구를 하려고 북한에 그렇게 많이 들어갔습니까.
“학술교류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간 것입니다. 경력부터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린튼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순천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네 살 때 한국에 들어와 순천에서 ‘전라도 촌놈’으로 자라게 된다. 한국명 인세반이란 이름으로 순천 남초등학교에 다니다 결핵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혼자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이 매우 그립다고 했다. 검정고무신에 한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는데, 아이들과 싸움을 해 코피가 터지는 일도 잦았지만 ‘미국산 한국인’으로 거듭나게 된 초등학교 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피부색과 이목구비가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죠. 하교길마다 상급생들이 길을 가로막고 ‘양놈 새끼야’라면서 패는 거예요. 한국아저씨들이 저를 구멍가게로 데리고 가서 코피를 닦아주던 기억도 납니다. 그래도 그때는 참 즐거웠습니다. 결국 아이들과 친해졌습니다. 산으로 들로 몰려다니고, 냇가에서 까지(가재)를 잡아 구워먹기도 하고 별별짓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면 그 친구들이 없습니다. 모두 외지로 나가서 살기 때문이에요. 서울에서 1년에 몇 번씩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외국인 학교도 있었을 텐데 굳이 한국인 학교에 다닌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겁니다.”
린튼의 부친 휴 린튼(한국명 인휴, 1926~84)은 한국에 온 선교사의 손자로 군산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2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각국의 선교사들이 풍토병에 걸려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아 선교사의 자녀들은 태어나서 3년 이내에 사망하는 비율이 80%에 달했다. 자녀가 풍토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대개 한적한 교외에 집을 마련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선교사 자녀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해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밟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2차대전 이후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선교사들은 내국인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린튼의 아버지도 아들이 외롭게 자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형 데이비드, 동생 제임스와 함께 한국인 학교에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결핵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북한에서 결핵퇴치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제가 결핵을 앓아봤기 때문입니다.”
린튼은 어려서부터 한국말을 배워 중학교에 진학해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1962년부터 1968년까지 대전외국인학교에서 중고교 과정을 이수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군인이나 외교관, 비즈니스일을 하는 미국인의 자녀들이었는데, 그들은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깡통’이나 다름없었다.
“외국인 학교 애들은 고무신도 모르고, 새총이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나는 사과 따먹기, 삐비 뽑아먹기 놀이를 하면서 팽나무 열매, 장미 새순, 옥수수 대를 먹고 자랐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벅수(그물의 일종인 듯)로 까지잡기를 하고 싶어도 함께할 친구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이국인 대접을 받게 됐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대전 유학시절엔 숙식을 어떻게 했습니까.
“기숙사에서 생활했지요. 6주에 한번씩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기차로 집과 학교를 오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한국사람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한국적 정서를 익힐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죠.”
친구들과 시내구경을 나갈 때마다 그는 통역 노릇을 했다. 한국 아이들이 구름처럼 뒤를 쫓으며 구경하기가 일쑤였고, 그들을 피해 구멍가게로 들어가면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변종’ 보듯이 쳐다봤다.
“주말엔 친구들을 설득해서 뱀 사냥, 새 사냥을 다녔습니다. 한번은 새총으로 새를 잡아와서 기숙사 식당 아주머니에게 국을 끓여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몰래 애들에게 먹였는데 나중에 새새끼 국이라고 말해주니 모두가 기겁을 했어요. 여자 아이들은 토하기도 하고….”
1968년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군에 입대하면서 휴학했는데 플로리다대와는 인연이 없는지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월남전에 참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용산 미8군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한국에 오니 미국에 되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으로 봐주지도 않는 게 불편했습니다.”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한다. 1975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들어갔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고려신학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학교만 다니다 인생이 끝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떤 공부를 해야할지 결심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북한에 가게 됐죠.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한국학 박사과정을 밟았고, 동 대학 동아시아연구소 한국학연구센터 부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학연구센터에 근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겁니까.
“1989년 컬럼비아대학 학술교류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다녀오면서부터라고 해야 정확할 겁니다. 1995년 유진벨 100주년 기념재단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요. 빌 그레함 목사나 요한 바오로 교황, 카터 전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통역 겸 자문을 하면서 북한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할 수 있었고요.
1989년은 동유럽이 붕괴되던 때 아닙니까. 북한은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79년에는 북한이 잘살았습니다. 중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죠. 미국의 북한 고립화 정책으로 북한의 무역망이 무너지면서 경제가 어려워졌죠. 그런데 북한사람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똘똘 뭉칩디다. 북한사회가 동유럽처럼 무너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은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어요. 그러나 미국에서 받아주지 않았지요. 한국 정부가 미국에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에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원치 않는 것을 강행하진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경제적 군사적 투자를 많이 했는데 한국 정부가 돌아서면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한국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북한에서도 남북미 관계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합니까.
“물론이죠. 북한 친구들은 남조선이 줄을 잘 섰다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구소련에 줄을 댔는데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기회만 오면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여요. 미국이 ‘봉쇄’해서 어려울 뿐 ‘강단’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가계에 대해 묻지 않았네요. 유진 벨 목사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외증조부예요. 유진 벨 목사는 1895년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북선교회의 앨런 목사가 증조할아버지보다 10년 먼저 들어와 목회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게 됐다고 합니다.”
벨 목사는 나주에서 처음 선교활동에 나섰지만 토착민들의 보수적 성향에다 유림의 텃세가 심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목포로 내려갔다. 목포는 항구 특유의 역동성 때문인지 배타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인 유진 벨의 발음을 따 ‘배유지’란 한국 이름을 짓고 교육·의료 교회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했고 기독병원을 세웠다. 벨 목사의 둘째딸인 샤롯 벨은 군산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21세의 젊은 목사 윌리엄 린튼(1891~1960, 한국명 인돈)을 만나 결혼한다. 린튼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전주에 기전여고를 세우고 교장을 맡는 등 교육선교사로 활동했다.
“남장로교 목사들은 사회참여보다는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중점을 뒀습니다. 정치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피했지만, 신사참배는 신앙과 배치된다고 철저히 반대했어요.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흥학교가 폐교되고 할아버지는 강제 출국을 당했습니다. 8·15 해방이 되고 나서야 할아버지는 한국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1956년에 대전대학을 세우셨는데 한남대학교의 전신이지요. 할아버지는 건축기사이기도 했는데 학교를 지을 때 시멘트부터 마감재까지 일일이 간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남대 건물은 지금도 튼튼하기로 유명해요.”
-대학을 세우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요.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해 기부금을 받아 세운 겁니다.”
-지금 한남대와 연고가 있습니까.
“전혀 없어요. 할아버지가 세운 학교는 모두 한국인들의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학재단 이사장의 ‘독재권력’ 운운하는 우리네 문화와는 거리가 있어 신선하게 들린다. 그의 가계를 좀더 살펴보자.
윌리엄 린튼의 셋째아들, 그러니까 린튼 박사의 아버지인 휴 린튼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윌리엄 린튼의 군산 목회시절에 태어났다. 휴 린튼은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대한 뒤 그는 전라도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휴 린튼의 3남2녀 중 둘째아들이 바로 스티브 린튼 박사.
린튼과 형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동생 2명은 한국에서 출생했다. 막내동생 존 린튼(1959년생)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 토종’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듣는 막내동생은 린튼 박사의 대북사업을 돕고 있다.
-대북사업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해봅시다.
“북한에 자주 드나들다보니 남한의 각 기업체나 단체에서 강의해달라고 자주 초청해요. 남한사람들은 북한을 도와주면서 꼭 아프리카 사람을 돕는 일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단순한 자선사업식으로 접근해서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조직화한 사회고 이론적인 무장도 강합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있는 나라가 아닙니까. 배 고프니까 줘야 한다는 단순논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反)자선, 반외교로 접근해야 돼요.”
린튼은 재미동포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남북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사람들은 투철한 반공교육 탓인지 북한을 부정적인 집단으로만 인식합니다. 1990년대 중반엔 긴장이 첨예화 돼 보수적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북한을 돕는 것 자체를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재미동포를 상대로 모금을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특히 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이죠. 고향 사람들을 돕자는 향토애도 있었겠지만, ‘이런 것을 계기로 흩어진 가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원물품에 기부자 이름을 적어서 보냈어요. 북측의 반대가 심했는데 그들을 설득해서 관철시켰죠.”
린튼은 북한 당국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구절을 읽어주면서 “식량과 담요를 보낸 사람들이 생색 내고자 북한을 돕는 것이 아니다. ‘나귀(짐꾼)’ 노릇을 하는 내가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기탁자 이름을 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쉽게 동의하더군요. 포터 역할 하는 사람이 중간에서 떼먹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보내는 사람이 안심해야 기부가 많이 들어온다는 논리였죠. 좋은 선례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의 아무개가 누구에게 보낸다는 지정 기탁도 가능해졌고, 북한의 병원이나 탁아소에 전달되는 물품도 한국의 누가 보냈다고 명시할 수 있게 된 거예요.”
-한국에서 보낸 지원품을 받을 때 북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물질적 도움을 받고 싫어할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반갑고 고마워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북한주민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재미동포나 남한사람들이 보낸 지원품을 받고 그들은 고립된 우리 사회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뻐합니다. 남한사람처럼 뺀질대면서 고맙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유진벨 재단에서 북한에 컨테이너를 보내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말씀 드린 것처럼 재미동포들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자는 게 유진벨 재단의 설립 동기였습니다. 북한을 돕는 활동이 재단활동의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중점을 두고 진행하는 게 대북지원 사업이에요. 대북지원 첫 사업이 ‘컨테이너 보내기’였습니다.미국 한인교회 등에 20t짜리 컨테이너를 세워두고 기부를 요청했죠.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빨랐습니다. 며칠 안가서 20t 컨테이너가 물건으로 가득 찼습니다.
쌀, 보리에서부터 의복, 신발, 어린아이 장난감까지 교포들이 성심껏 물건을 채워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95년 60개의 컨테이너를 북한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1996년에는 지원물품과 함께 지원금도 접수했습니다. 지원금으로 옥수수를 구입해 북한에 지원했습니다. 하루 저녁 술값 10만원으로 북한주민 10가구의 한 달 식량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1996~97년 100개의 컨테이너를 북한에 전했고, 1997년 이후엔 유진벨재단의 중개 없이 기증자가 직접 현지 방문해 지원품을 전달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대북사업의 중심을 결핵퇴치 쪽으로 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유진벨 사업의 전부나 다름없는 게 결핵퇴치 사업입니다. 제가 결핵을 세 번이나 앓았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어요. 기아가 계속돼 결핵환자가 날로 늘고 있고,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북한의 결핵환자 수는 한국의 1950년대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선 현재 100만명 이상이 결핵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환자의 50% 정도는 저절로 병이 낫지만 25% 정도는 결핵으로 사망한다. 요양소에 수용된 중환자들은 신약을 공급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약만 공급되면 90% 이상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약값은 한국 돈 7만원 정도로 생명의 가치와 비교하면 매우 싸다. 유진벨 재단은 지금까지 5만명 분의 결핵치료제를 북한에 지원했지만 급증하는 환자수를 따라잡기엔 어림도 없다고 한다. 약이 부족해 흉부수술을 통해 환부에 직접 처치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처음 북한 당국은 자신들의 나쁜 부분이랄까, 감추고 싶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먼저 도와달라고 했지만 실태를 보여주지 않고 도와달라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말했지요. 어떻게 보면 ‘안방’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한국적 정서가 아니겠습니까.”
린튼은 “실태조사 없이는 도와줄 수 없다”면서 북한 당국을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교통이 불편해 요양소를 방문하는 일이 수월치 않았다. 검진차는 1960년대 초반의 구소련제 차량이 전부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검진차를 3대 보내기로 약속하고 돌아왔죠. 검진차 1대 값이 1억5000만원에 달해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가 1대를 기증했어요. 최일도 목사는 가난한 교회의 목사 아닙니까. 어려우면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돈을 내주니까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진벨 재단은 이후 X-레이 검진차 50대와 경운기 40대를 지원했고, 북한에 결핵병원과 요양소를 세웠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경제난은 어떻습니까.